고난 속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신앙인의 고민 2002-09-04 16:29:18 read : 3258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7.21
로마서7:22-25
로마의 시인‘호라 타우스’의 시를 소개합니다.
“이런 자는 행복하리라.
이런 자만이 행복하리라.
오늘을 자기의 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만이 행복하리라.
마음에 자신을 가지고
‘내일이야 될대로 되려므나.
하여간 나는 오늘을 살았노라’고
말하는 자가 행복히라.
자신있게 말하는 자가 행복하리라.”
내일의 일에 대하여 고민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야기기 입니다.
이 세상에는 고민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민이 없는 개인, 고민이 없는 가정, 고민이 없는 회사.고민이 없는 교회, 고민이 없는 사회도 없을 것입니다.
저마다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의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못살던 시대에 살았던 우리의 부모님들도 고민 속에서 살아왔었고, 잘 살고 있다는 지금도 우리는 고민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풍족해도 고민이요, 가난하여 못살아도 고민이요. 권세가 있고 자리가 높아져도 고민이요, 지위가 낮아져도 고민임
많아도 고민이요, 적어도 고민이요, 살이쪄도 고민이요, 야워도 고민입니다. 때로는 배부른 것도 고민이요, 배고픈 것도 고민입니다.
엣날에는 살이 찌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았지만 요즈음에는 살이 너무쪄서 고민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식생활이 변화다 보니 요즈음 아이들은 신장도 크고 성장이 빨라 좋아지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풍족한 생활 때문에 또 다른 고민이 생겨났습니다. 어린이 비만입니다.
심장병, 고혈압, 암 등의 불치 병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아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문명 사회속에서 좋은 것들을 누리며 먹고 살지만 고민은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옛날에는 몸집이 좋고 체중이 많이 나가면 사장폼이 난다고 하여 모두가 부러워 하였지만, 그러나 지금에는 지방분과 당분을 많이 섭취하다 보니 비만증과 당뇨병으로 고생하며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식생활의 개선으로 잘 먹고 많이 먹습니다.
그런데 생활이 편리해 지다보니 체력의 소모가 옛날 보다 훨씬 적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행동이 둔하고 숨이차고 심장병과 고혈압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여자분들은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하여 무리하게 다이어트를 하다가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들도 많습니다.
아름다워지고 싶어하는 마음은 동서양 가릴 것 없이 누구나 가지는 마음이 입니다.
이렇듯 잘먹고 잘살게 되다보니 뜻하지 않은 고민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못먹는 것도 고민이지만, 잘먹는 것도 고민입니다.
미국 역사 속에 내노라하는 큰 부자 셋을 꼽는다면 록펠러, 모간, 카네기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큰 돈을 모아 부자가 된 이 세사람을 큰 복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받은 물질의 복으로 해결하지 못한 고민을 안고 살았다고 합니다.
록펠러는 재물이 많아지자 사람들이 혹시 자기가 이 재물을 부정한 방법으로 모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거기다가 대머리가 되어 보기에 흉했지만 어떤 약으로도 대머리를 고칠 수 없게 되자 거울을 보면서 늘 고민했다고 합니다.
모간은 자신의 용모가 워낙 볼품이 없어서 생긴 것은 고사하고라도 코가 너무 주책없이 크고 눈은 항상 붉게 충혈되어 있어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주눅이 든 상태로 지내야 하는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카네기는 많은 재물은 얻었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는 것이 고민이었는데 늦게 딸을 얻기는 했으나 그 딸이 반신불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들여 치료를 했지만 어떤 의사도 딸의 병을 고치지 못했으며 오히려 집안에 우환이 더 컸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해야할 고민이 있고, 해서는 안 될 고민이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좋아 온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요일2:15-16).
성도는 세상의 것들 때문에 고민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것들은 일시적인 것이요, 무가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시간 고난 속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신앙인의 고민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바울 사도처럼 해야 할 고민이 있습니다.
이 고민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고민이요, 축복의 밑거름이 되는 고민이며 신령한 고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 사람들 보다 가진 것이 훨씬 적지만 그들이 가진 고민이 나의 고민이 아닌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없는 것을 바라보는 신기루 같은 들뜬 감정보다는 있는 것을 보고 감사하는 그 마음밭에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복의 맛을 느끼는 복나무가 심어지는 법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민은 누구나 다 있습니다.
다만 이 고민들을 어떻게 대처하느 냐에 따라 유익하게도 되고 손해도 되며, 행복도 되고, 불행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이런 고민을 저급한 감정으로 불평과 불만 그리고 조급한 마음으로 발악하면 불행하게 될 것이고, 모든 일을 합동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신앙으로 대처하면 그 고민이 도리어 우리를 유익하게 하며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고민을 소개합니다.
1.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고민이었습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치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너 자신을 알아라’는 말이 있는데,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였으면 그런 말을 하였겠습니까?.
바울의 고민은 자기 자신이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분명히 원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지나고 보면 그 결과는 정 반대의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시험을 치르면서 결심합니다. 다음부터는 미리 공부하여 떨지 않고 당당하게 답안지를 써야겠다고, 그러나 그다음치르는 시험때에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후회와 결심을 되풀이 하게 됩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잘해야되겠다 다짐합니다.
남편이나, 아내에게 다정다감하게 대해주어야 되겠다 다짐합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남편 얼굴, 아내 얼굴만 보고 말소리 만 들어도 부아부터 생깁니다. 그래서 또 말대꾸하고 잔소리부터 늘어놓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행하는 일에 대하여 자신도 왜 그런지 알지 못합니다. 내가 원하는 이것을 행치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자신도 모르게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바로 우리의 고민입니다.
2. 죄악에서 벗어나 선해지려는 고민이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세상을 선하게 지으셨고 또 사람을 선한 세상에 살 수 있도록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악한 마귀가 에덴 동산에 침입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게 하였습니다.
그 죄가 우리로 하여금 골수까지 깍아내듯 아프게 합니다. 죄는 중압감이 있어서 인간 심령에 압력을 주어 질식하게 만들어서 그것이 중압감으로, 고민으로 심음하게 만듭니다.
이와같이 죄는 무수한 고민을 낳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죄에서 벗어나려는 고민과 노력 끝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체험을 얻고 기쁨의 삶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선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악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사랑하고 싶고, 도와주고 싶고, 악한 사람을 보면 욕하고, 모진 사람을 보면 손가락질 합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고, 함께 울며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들입니다. 기쁜 일에는 축하해 주고 싶고, 답답한 일을 보면 함께 걱정해 주고 싶은게 인지상정입니다.
고아를 보면 어쩐지 마음이 찡해지고, 어렵고 고단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래 마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의 인간의 마음입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에게도 이 양심은 있는 법입니다. 아무리 모질고 무서운 사람에게도 눈물은 있는 법이요, 그 마음을 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선을 행치 못하고 악의 소굴 속에 깊이 빠지는 고민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고민과 갈등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내가 원치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고하는 죄니라”(20절).
3. 바울에게는 무력함에서 벗어나려는 고민이 있었다.
인간은 때때로 무소 불능한 것 같이 자기를 과시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육체적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죄의 세균에 감염된 약자이며, 정신적으로는 환경과 이해의 관계에 따라 수시로 변질되는 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24절에서 인간의 죄에 대한 무력함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죄는 그처럼 연약한 인간의 몸을 통해서 세상에 악이 성행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불의와 죄악을 정복하는 데 무력하여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 찼고, 인류는 실패와 비극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문의 바울 역시 예외는 아니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노력으로 악을 물리치려고 하되 자기의 무력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으로 인하여 고민하였으나, 악을 정복하여 죄를 대속하여 주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음으로서 비로서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공자도 사미능(四未能)즉, 사부(事父), 사군(事君), 사형(事兄), 선시우(先施友)의 무능을 고민한 바가 있습니다.
즉, 부친을 섬기고 왕을 섬기고 형을 섬기고 친구에게 먼저 베푸는 일에 미치지 못함이 있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수다한 성현들이 이 문제로 고민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실에도 날로 악이 성하여 지옥을 이루어가며, 선이 쇠하여 어두워가는데 누구하나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모두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력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음을 고민하는 가운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받아 감사하였습니다. 그 감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죄함이 사라졌다는 확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자는 실패의 쓴잔을 마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무력함과 무능을 깨닫고 전능자를 의지하는 자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믿습니까?.
4.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 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 양선과 충성,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고자 원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원하는 바 성령의 열매는 없고, 원치 않는 악의 열매만 주렁주렁 맺혀 있습니다.
개는 매화꽃을, 그리고 닭은 대나무 잎을 떨어뜨려놓고 지난다는데,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랑하는 인간들이 남기고간 것은 고작 죄의 열매 뿐입니다. 우리의 발길이 지나간 자리에는 음행과 호색과 욕심, 투기와 분쟁과 미움 시기 술취함으로 더러워진 흔적으로 얼룩져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책망하기를“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3)고 탄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사람들입니다. 갈보리의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나쁜 열매를 맺어야 합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고민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고민은 차원이 달라야 합니다.
신령한 고민을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의 속사람을 이같이 말했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법 아래로, 나를 사로 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22-23). 하나님의 법대로 살기 위한 고민,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한 고민은 우리를 복되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5. 죽음의 길에서 크나큰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24절에서“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말합니다. 그는 너무나도 애처럽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곤고한 사람이란 말은 무수한 고난을 체험한 사람의 모습을 말합니다. 사망의 몸이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처량하고 가련한 모습을 말합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참 해방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빠져 나올 수 없는 절망적인 그런 상황을 말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절망의 깊은 곳에서 우러 나오는 가슴을 찢는 부르짖음입니다. 온갖 고민을 가슴에 안고 가슴이 터질듯한 상황에서 부르짖는 울부짖음입니다. 도움을 간절하게 요청하는 절규입니다. 바울은 죽음의 길에서 이와같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떤 초급장교가 나쁜 동료장교의 꼬임에 빠져 노름을 하다가 많은 빚까지 지게 되었습니다.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가고 갚은 길은 없었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길이 없게 되자 고민을 하게 됩니다. 고민 고민 하다가가 얻은 결론은“차라리 죽어 버리자” 그러면 돈 갚으라고 하는 소리도 듣지 않을 것이고 차라리 편안할 것이다.
그는 죽기 위하여 권총에 탄환을 장진하였습니다. 방아쇠만 당기면 인생도 끝나고 고민도 끝납니다. 막상 죽자니 한없이 슬펐습니다. 그는 자기가 진 빚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 계산이나 해 보고 싶었습니다. 전부다 적어보니 너무나 많은 금액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기에다 썼습니다.“이 많은 나의 빚을 누가 갚아 준단말인가?
그리고는 고민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렸다.
마침 알렉산더 장군이 밤중이라 병사들의 막사를 순회하는 중에, 불이 켜져 있는 초급장교의 막사로 가게 됩니다. 가서 들여다 보니 장교 하나가 잠들어 있고 그 곁에는 빚진 명세서와 권총을 보고 무슨일인지 직감횄습니다.
그는 권총을 숨겨 버렸고, 그 많은 빚을 적어놓고“이 많은 빚을 누가 갚아 준단 말인가? 라는 글밑에. 알렉산더라고 서명했습니다. 부대장인 알렉산더가 갚아준다는 이야기입니다.
장교가 잠을 깨어보니, 권총은 없고 자신의 빚 명세서 밑에‘알렉산더’라고 서명되어 있었습니다. 뒷날 알렉산더는 그의 빚을 다갚아 주었고 그는 죽을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이야기는 우리 자신의 고민거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우리도 괴로운 세상 살이 때문에 죽기로 작정합니다.
그러나 죽기 전에 무엇이 문제인지 한번 적어나 봅시다.
가난도 좋습니다. 빚진 것도 좋습니다. 질병도 좋습니다.
남편의 핍박도 좋고, 아내의 낭비도 좋습니다. 죄도 좋습니다. 미워하는 마음도 좋습니다. 큰 죄든지 작은 죄든지.
나만이 아는 죄든지. 용서받은 죄. 아직도 사함을 받지 못한 죄. 나쁜 성격, 못된 성품과 습관 모두 적어 봅시다.
누가 나를 건져줄까? 아무리 소리쳐봐야 도울자 없습니다. 아무도 건져 줄자가 없습니다. 그 누구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면 누가 해결해 줍니까?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 마지막 25절에 보면“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고민과 갈등의 문제를 속 시원하게 해결하는 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이가 적음이라”(마7:13-14).
생명의 길은 좁습니다. 찾는이도 많지 않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에 고난이 많습니다. 이 생명의 길은 십자가의 사람, 하늘의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고는 못가는 길입니다(엡4;22).
바울의 고민은 이 길을 어떻게 하든지 잘가기 위한 고민이었습니다. 이 고민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고민입니다
이 세상 잡초는 뽑고, 천국의 상급과 축복의 씨앗을 심는 고민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6. 보다 나은 삶을 앙망하는 고민이었습니다.
이대로 살다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냥 죽으렵니까?. 언제나 걱정하며 괴로워 하다가 귀한 일생을 다 보내시렵니까?. 남을 미워하며 시기하고, 불평하며 온갖 거짓과 탐욕으로 살다가 그냥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시렵니까?.
오늘 보다 더 나은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려는 고민과 노력이 없는 사람은 마치 예수의 죽음으로 낙담하며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처럼.
의심과 불신, 낙심으로 날마다 고민하다가 그 인생이 끝나버립니다. 반면에 현실의 쾌락과 권세에 만족하여 보다 의롭고 선한 삶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려는 마음이 없는 자는 장망성과 같은 세상에서 머뭇거리다가 망한 롯의 처와 같이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지위나 부귀, 권세에 만족하지 않고, 도리어 영원한 세계를 향하여 전진하고자 전심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는 독수리가 날개치며 하늘로 올라가듯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는 신앙을 소유했습니다.
바울의 고민은 참으로 고상한 신앙인의 고민이었습니다.
영원한 삶을 위한 고민이었습니다. 썩어 문드러질 육을 위한 고민과 노력은 결국 육과 함께 썩어 없어질 것들이지만 영원한 삶을 위한 고민과 노력은 가치 있는 것이며 영원한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행복한 고민, 신앙의 고민, 아름다운 고민은 필요합니다. 한 주간도 바울과 같이“고난 속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신앙인의 고민”을 통하여 복되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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