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하기 쉬운 죄 2002-08-13 15:32:08 read : 3346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눅11:42-52 02.7.28
헨리 나우웬은 "사역자들에게 가장 위험한 두 가지 태도는 죄의식
과 구원열망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나친 죄의식을 키워주는 것은 사
역자들에게 위험합니다. 그리고 지나친 종말에 대한 의식을 심어주는
것도 위험합니다. 그러나 요즘의 그리스도인들은 죄의식이 너무 희박
한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됩니다. 종말에 대한 의식이 너무 없습니다.
죄를 죄로 알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에 자신의 삶을 맡기고 살 때가 너
무 많습니다. 역사적 종말에 대한 의식이 약하므로 인해 구원에 대한
확신도 약한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오늘 우리들의 삶은 무심
코 저지른 죄가 많습니다. 죄인 줄도 모르고 죄를 범하는 경우가 많습
니다. 죄인 줄 알고 짓는 죄는 회개할 수 있지만 무심코 짓는 죄, 죄
인 줄도 모르고 짓는 죄는 회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인 줄 알고
있는 것은 쉽게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짓더라도 회개하게 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짓는 죄, 알지 못한 죄는 회개할 수 없습니다. 그
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해 민감해야 합니다. 특히 휴가철을 맞이한 여
름은 마음이 붕 떠 있습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방심하게 됩니다. 그
래서 죄를 많이 범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도는 계절에 관게없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범하는 죄들이 있습니다.
롬1:21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
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
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
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우리의 생각이 허망하여질거나 마음이 미련하고 어두어지면 쉽게
죄를 범합니다. 사람이 생각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면 하나님의 말씀
인 성경도 이상한 방향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왜곡시킵니
다. 전에도 죄가 되던 것도 이제는 죄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서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죄라고 생각
하지 않는 것인데도 죄가 되는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우리가 범하기 쉬운 죄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여섯 가지 화
가 있을 것이라고 한 예수님의 책망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범하기
쉬운 죄가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정신적 가치를 소홀히 함으로 짓는 죄가 있습니다.
사람은 완전할 수 없습니다. 하나를 잘하면 다른 하나는 잘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부분
은 형식은 잘 지키려고 하는데 본질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의무는 잘 감당하면서 근본 정신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십일조는 철저히 하면서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잃어버
렸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교회에서 십일조
생활, 기도생활, 주일성수 등은 잘하는데 가난한 사람들과 불의에 억
압당하는 사람들을 제대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
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일상적으로 행하는 일, 주일성수, 십일조생
활, 기도생활, 봉사생활을 철저히 하면 할수록 더욱 조심해야 할 것
은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도는 사랑하는데 이웃을 외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가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외치면서도 교회내
적인 일에만 치중하고 외적인 부분에서, 즉 직장에서, 이웃에서, 학교
에서, 시장에서 하는 행동이 공의를 나타내지 않고 사랑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을 때 결국 하나님께 영광이 가리워 지게 되고, 이는 결
국 하나님께 죄를 짓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일반적인 의무
도 성실히 수행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근본 정신인 공의와 사랑
을 함께 나타내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마가복음10:17절 이하에 보면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엇
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대답하시기
를 계명을 다 아는데 그 계명을 지켰느냐고 물었을 때 그 사람은 대답
하기를 "이 계명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고 했습니다. 예수
님은 다시 그를 보시고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게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결국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의
를 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실천이 부족했습니다. 반드시 우리가
챙겨야 할 것은 사랑과 공의의 삶입니다. 이것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
라 인간관계에서 나타납니다.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
을 제일 잘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십일조를 철저히 했습니다. 어느
정도 철저히 했는가 하면 농사지어 산출되는 모든 식용 식물에 대해서
는 십일조를 다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부면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
소의 십일조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하고 있는 일만 생각했지 하지 못
하고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자기들만큼 의로
운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의와 사랑
을 버리고 의무만 감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잘 못하면 이런
죄를 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조심해야 할 내용입니다. 하나님으로부
터 "화있을진저"라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의무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
의 정신을 살려 공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영적 교만의 죄를 짓기 쉽습니다.
교만은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합니다. 교만은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낮아져
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만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낮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죄를 범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
금 봉사하고 남보다 좀 더 기도생활을 하고 남보다 전도를 좀더 많이
하고, 남보다 좀 더 성결하게 산다고 하는 성도가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영적 교만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영적 교만입니다. 자신들은
할례받은 자들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아는 자요, 하나님의 선택받
은 자들로서 의로운 자라는 교만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지 못하게 만
들었습니다. 영적 교만은 죄인 줄을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히려
그것을 의로 여깁니다. 내가 예수를 제일 잘 믿는 것으로 착각합니
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기도할 때도 거리에 나가 서서 두 손을 높이
들고 기도했습니다. "주여 우리는 저들과 같이 죄를 범하지 않게 하심
을 감사합니다" 그런데 세리들은 오히려 한쪽에 가서 어쩔줄 몰라하면
서 "주여, 저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43절에 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
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한다"고 지적했습니다. 회당에서 으뜸 되는 좌
석은 청중들을 마주 보고 앉게끔 특별히 마련된 좌석이었습니다. 회중
들 사이에도 좌석의 구별이 있어서 앞좌석에 앉을수록 명예로웠고 명
예가 없는 자리일수록 뒷자리였습니다. 우리 사회도 비슷합니다. 앞자
리일수록 높은 자리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길거리에서 인사 받
는 것을 존경의 표시로 보았기 때문에 자기에게 인사를 많이 하도록
하기 위한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인사를 받으니 내가 마치 무엇이
된 줄로 착각하여 당연히 그렇게 받아야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
다. 오히려 인사를 받고 상석에 앉았으면 겸손한 자세로 더욱 낮아져
야 하는데 의례 껏 그 자리는 자신들의 자리인양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실제적인 신앙생활은 인사를 받을만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고, 상석에 앉을 만큼 신앙인격이 갖추어져 있지 못한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자리에 앉았는가가 중요합니
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자리에 앉았을 때는 그만한 인격과 아름다운
자세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보세요. 지금 국무총리로 내정된 장상 총
리서리가 누군지도 사람들이 제대로 몰랐지만 국무총리 자리에 오르
니 별의 별 내용이 다 공개되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총리임명 국회
동의를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까지 발생했습니다. 장상 총
리서리가 이화여대 총장으로 있을 때는 다른 것은 다 감추어져 있었
고 오직 잘한 일만 드러났기 때문에 위대한 여성으로 부각이 되었습니
다. 그런데 어느 날 국무총리로 내정되자 곧바로 그 자리에 오를만한
인물이 되느냐를 놓고 다양한 각도에서 검증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중요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옛날에 어떤 일을 했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하더라도 오늘 내가 앉은자리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
다. 그리고 그 자리에 걸맞는 인격과 행동이 수반되어질 때 영예로운
것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그 영예로운 직분이 나를 죄짓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죄인 줄도 모르고 죄를 짓게 됩니다. 특
히 교회에서의 직분과 일자리는 섬김의 자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
른 사람들이 높여줄 때 우리가 마땅히 높임을 받아야 한다고 착각해서
는 안됩니다. 만약 그런 생각을 갖고 높임을 받고 싶어하고 인사를 받
고 싶어한다면 예수님은 "화있을진저"라고 책망할 것입니다.
3. 위선자가 될 위험이 많습니다.
44절에 보면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
하느니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율법에 보면 무덤에 닿으
면 7일간 부정하게 되는데 무덤표시가 없이 평평하게 한 무덤이라서
잘 모르고 그 무덤에 닿았다 할지라도 일단 무덤에 닿기만 하면 부정
합니다. 본절에서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은 마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
이 부패하고 썩은 무덤이라는 사실을 은폐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부지중에 부정한 죄를 범하게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비판하고 있습니
다. 이를 두고 마태복음에는 회칠한 무덤 같다고 했습니다. 속에는 썩
은 시체를 두었지만 겉은 회칠을 하여 아름답게 단장을 한 위장을 지
적하는데 누가복음에서는 평토장한 무덤같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고 만났다 하더라도
그들의 영향이란 좋은 것은 없고 모두가 나쁜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
입니다. 전혀 알지 못하고 그들과 접촉한 사람은 모두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악에 물들어 갑니다. 부패는 누구도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잘못된 생각
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바로 위선자의 모습일 뿐입니
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위험한 요소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겉으
로 보기에는 신앙의 모습이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만나면 왠지 모르
게 좋은 영향을 받지 못하고 나쁜 영향을 받게 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
이에 이미 부정한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
제가 없어 보입니다. 속에는 다 썩었습니다. 냄새가 납니다. 생활은
엉망입니다. 어제 뉴스에도 보니까 한 동네에 패기물을 깊이 묻었는
데 그 침출수가 지하수에 섞여 나와 그 물을 마시는 아이들에게 피부
병이 발생한 것을 보았습니다. 겉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흙
으로 덮어놓았습니다. 풀이 나서 쓰레기가 묻혔다는 것을 볼 수 없었
습니다. 그러나 포크레인으로 깊이 파들어 가니 썩은 쓰레기들이 나오
고 그 아래로 물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물은 식용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판정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그 물을 마셔도
되는 것처럼 생각했으나 이미 그 물은 오염된 물로서 질병을 유발했습
니다. 바리새인들이 이와 같듯이 오늘 우리들도 이런 위선의 죄를 범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4.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죄를 범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눅11:46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또 너희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
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앞
에 37절에 보면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점심식사에 초대를 했습니
다. 아마도 예수님의 잘못된 모습을 꼬집어 내기위한 것인지도 모릅니
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아마도 서기관이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
다. 46절에서는 율법사라고 했는데 율법사는 서기관이라 볼 수 있습니
다. 지금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화있을진저"라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책망하고 있는 데 함께 자리하고 있는 율법사가 가만히 들어보니 자기
들도 싸잡아 함께 욕을 하는 것 같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한 율법사
가 45절에서 하는 말이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
는 것 같이 들립니다" 사실은 이 본문의 말씀과 비슷한 말씀이 마태복
음 23장에서는 일곱 가지 화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마23:13 "화 있을
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
게 하는도다" 이렇듯 마태복음에서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싸잡아 비난
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바리새인이든 서
기관이든 하는 기능은 다를지 몰라도 그들의 사고방식은 같은 사람들
입니다. 그들은 똑 같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율법사는 바리새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부각시키
면서 자신들이 함께 예수님의 비난의 말씀을 듣는 것은 기분 나쁘다
는 식으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율법사에게 한 말씀
이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말은 바로 율법사를 두고 한 말
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사 너희들도 똑 같은 사람이라 하지 않았습니
다. 그런데도 이들은 마치 예수님의 비난의 소리가 자신들에게도 하
는 것처럼 들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들렸다는 것은 결국 그들이 그런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시인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바리새인들이 들어야 하지 율법사가 들어야
할 말은 아니라고 변명합니다.
오늘 날 우리 사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항상 문제가 발생하고 나
면 그것에 대한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일이 있
으면 전부가 자신들이 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상 받을 일이 발생하면
모든 공은 자신이 다 한 것으로 치적을 높이 세웁니다. 우리의 신앙생
활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발생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는 일에
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하면서도 숨어서 알아주지 않는 일에는 관심
이 없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또한 자신이 책임 질 일은 책임을 져야
하는데도 자신들은 미꾸라지처럼 쏘옥 빠져나갑니다.
다른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놓고 자신은 의인으로 빠져나가
는 이런 사람에게 "화있을진저"라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무심코 남에게 책임을 돌리는 죄를 범치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내 탓
입니다' 이것이 어른의 신앙을 가진 자의 자세입니다. 자신이 책임을
지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결국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됩니다. 그
러므로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변명, 책임전가는 죄가 됩니다.
5. 선지자를 거역하는 죄를 범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눅11:47)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저희
를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이들은 선지자들이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하여 묻힌 무덤을
다시 쌓고 비석을 세워 선지자들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것처럼 선전하
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악함을 은폐하려는 위선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
습니다. 그들은 예언자들에게 입으로는 친절과 찬사를 보내었으나 그
들이 찬양하는 예언자들은 모두가 죽은 선지자들 뿐이었습니다. 이들
은 죽은 선지자들을 기념하면서 살아있는 선지자를 죽이려는 모순된
자들이며, 앞으로 그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다 합
한 것보다도 더 위대한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자들이었습니
다. 본문 48-49절 "이와 같이 저희는 죽이고 너희는 쌓으니 너희가 너
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이러므로 하나님
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그 중
에 더러는 죽이며 또 핍박하리라 하였으니"
오늘의 선지자는 누구입니까? 적어도 우리가 목회자를 하나님이 세
우신 것으로 믿는다면,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목회자들의 목
회를 어렵게 만들거나 목회자들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죄가 됩니
다. 선지자들을 죽인 사람들은 살았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죽었습
니다. 예수님을 죽인 자는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
려 죽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천둥 벼락에 맞아 죽지 않았습
니다. 그들이 급사하지 않았습니다. 눈이 시퍼렇게 살았습니다. 그러
나 예수님은 죽었습니다. 살았다고 해서 아무런 죄가 없는 것이 아닙
니다. 죽었다고 해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선지자라도 죽을
수 있습니다. 가인은 살았으나 아벨은 죽었습니다. 가인은 죄인이었습
니다. 아벨은 아름다운 신앙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아벨은 죽
었고 가인은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살았느냐 죽었느냐를 가지고 이야
기 할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을 살고 있는냐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
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것은 곧 나를 보내신 것을 믿는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보낸 제자들을 영접지 않는 것은 곧 예수
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
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세우신 목회자들을 어렵게 만들거나 목회자
들을 대적하는 것은 그를 세우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
니다. 우리는 다만 사람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무심코 선지자를 거역
하는 죄를 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진리를 핍박할 때, 목회자를 대적
할 때 예수님은 "화있을진저"라고 책망하십니다.
6. 나도 못먹는 밥에 재를 뿌려 자신도 못 먹고 남도 못 먹게 하는 것
은 죄입니다.
52절에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
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
라"
선지자들을 죽이는 것도 악한 일이지만 그 보다 더 악한 것은 사람
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것을 차단시켜 버리는 행위임을 밝히고 있
습니다. 율법사들은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천국 문의 열쇠를 가진 자와 같습니다. 그들은 그 열쇠를 가지
고 백성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어야 함에도 율법사
들은 형식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정신을 사장시켜 버림으로써 결국 올
바른 신앙을 갖게 하지 못함으로 그들도 천국을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
고 말았습니다. 이 죄를 어떻합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
이 실족케 아니할 수는 없지만 실족케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고 했
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자신도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은
고사하고 남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내
가 못먹는 것에 재나 뿌리는 식의 삶은 절대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
리는 천국가는 길을 안내하는 안내자들입니다. 그런데 길을 잘 못 안
내하거나 그 길로 안내하지 않고 엉뚱한 길로 안내하면 이것은 큰 일
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고 다른 사람들까지 하지 못하게 막거나 다른 사람들까지 참석
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일은 아주 무모한 짓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아차 하는 순간에 죄를 범할 가능성
이 있는 내용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짓을 우리가 하고 있으면서도 우
리가 의인인 채 한다면 이것 떠한 오늘의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렇다
면 우리도 "화있을진저"라는 주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무심코 하
는 것이 책망 받을 죄를 범하게 되는 경우도 없도록 세심한 주의를 가
지고 죄짓지 않고 성결한 여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