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2002-08-20 11:30:25 read : 4079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8:31-36 2002/08/11
우리는 그냥 매일 매일을 사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이 세상이 그냥 아무렇
게나 굴러가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준엄하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것 같고, 아무렇게나 날이 지나가는 것 같지만 역사는 준엄하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어떻게 준엄한가? 없앨 것은 없애고 남아야할 것은 남겨둔 다 이렇게 말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천 년 수만 년 역사가 흘러오면서 그냥 지나간 것 같지만
없어 져야 할 것은 없어져버렸으면 남아야 할 것은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있어서 없어져야 할 것은 무엇이고, 남겨져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보통 잘 사
는 것, 풍요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남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풍요롭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풍요는 없어집니다. 풍요롭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는 자유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해보면은 자유로운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너무 사치스러운 생각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빵이 없는 자유를 택하겠는가? 아니면 빵은 있는데 자유
없는 것을 택하겠는가? 이렇게 얘기를 하면 그냥 겉으로,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자유가 좀
없더라도 빵이 있는 게 더 낫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빵은
없어도 자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풍요롭기보다는 자유로워야 됩니다.
독일이 나치 정권을 잡고서 국회를 해산하고 나라가 여러 가지로 어려워졌습니다. 독재를
했습니다.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습니다. 그때에 아무 일도 하지 못했던 어떤 목사님 이 전쟁이 끝난 다음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나치가 정권을 잡고, 국회를 해산시키고, 나라를 독재로 몰아가고, 이
렇게 할 때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정치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
는 혁명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대로 풍요로웠기 때문에
그런 대로 괜찮았기 때문에 안정되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자 가
만히 있는 목사를 때려잡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은 기독교 국가인데, 나치 정권 때에 많은 목
사님들과 성도들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과연 남겨진 것은 무엇인가?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의 일에 대해서 혹은 정치적인 일들
에 대해서 나는 정치가가 아니니까, 혁명가가 아니니까, 투사가 아니니까, 학생이 아니니까.
더군다나 교회가, 목사가, 뭐 세상얘기 정치얘기를 이렇게 하나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데 이상한 것은 세월이 지나면서 이 세상의 권력과 힘은 가만히 있는 사람들을 압제하고 더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광복 57년입니다. 우리에게 없어진 것은 무엇이고 남아있는 것
은 무엇입니까? 57년 전 우리들에게 해방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정
치적인 자유에 약간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통일을 향한 자유는 갖지 못하게 되었습
니다. 그래서 이렇게 어지럽고 힘든 것입니다. 여러분, 자유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좋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의 자유를 위해서 도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
기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눈물이 있습니다. 아픔도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내게 자유가
있는가?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자유가 있는가? 우리는 자유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자유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유가 있다 하더라도 참으로 내게 자유
가 있는가? 또 자유가 있다하더라도 이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유가 아니라는 것
입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의 작가 찰스 디킨스가 쓴 소설 두 도시 이야기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
어져 있습니다. 한 영국인 죄수가 프랑스에서 범죄를 해서 감옥에서 수형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죄수생활이 계속됨으로 말미암아 그는 점점 그 생활에 익숙해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좁은 공간이지만은 그래도 누워서 잘 수도 있고 약간의 안락함을 느낄 수 있
었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삶의 질은 아무 책임이 없는 삶이라 편안하기도 했고 그리고
돈 벌 걱정, 부양가족의 걱정도 없이 잔소리하는 마누라 없는 생활이라 매우 편하다고 생각
되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마루바닥이 삐걱삐걱 할 때마다 음악소리라고 생각하고 약간 운동
도 하면서 매우 행복해 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출소를 하게 됩니다. 고향 영
국으로 돌아가서 자기가 살던 넓은 집에서 잠을 청합니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습니다. 왠지
불안하고 허전하기만 합니다. 안락한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해 보지만 잠이 오지 않고 왠지
그 마음에 불안함만 찾아오게 됩니다. 그는 원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발견을 했습니다. 그
래서 자기 방에다가 벽돌로 이제까지 감옥 생활했던 것과 똑같은 공간을 쌓았습니다. 그리
고 그 안에 들어가서 잠을 청했습니다. 얼마나 편안히 잠이 오는지 그는 이미 감옥생활에
길들여져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유에 길들여져 있습니까? 아니면 부자유에 길들여져 있습니까? 사람들은 길
들여지면 그것이 부자유도 자유인양 생각하고 또한 그렇게 살아서는 안됨에도 불구하고 그
삶에 안주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사회학에서는 문화화 되어간다고 말합니다.
가난하면 우리는 돈 때문에 돈의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돈, 돈 합니다. 그런데 돈
을 벌고 나면 그 다음엔 이 돈 없어지면 어떡하나 이 돈을 붙잡느라고 우리는 또 자유롭지
못합니다. 돈은 없기 때문에 돈의 노예가 되고, 돈은 있어도 그 돈을 쓰지 못하기 때문에
돈의 노예가 됩니다. 자유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내가 누리지 못한다면 자유가 되기 어렵다
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건강해도 엉뚱한데 자기의 건강을 쓰면 뭐라고 말합니까? 육신
의 노예가 되었다. 향락과 재물의 노예가 되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풍요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돈이 없어지고, 재산이 없어지
고, 권력 과 명예가 사라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잿더미 위에서 노래를 부른다 할지라도 우리
는 거기서 자유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유대인과 예수님이 자유에 대해서 논쟁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논쟁을 쭉 해 오다가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
리라.' 그랬더니 유대 지도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종 된 적이
없는데, 우리는 자유가 있습니다. 왜 우리가 종입니까? 사실 이들이 자유가 있다는 말은 상
당히 수준이 있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로마의 속국입니다. 로마의 지배하에 있
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가 있다고, 우리는 남의 종이 아니라고,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이렇게 상당히 고상한 자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수준이 높은 자유를 말하고 있습
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흔히 인텔리가 갖는 자유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지적인 자유요,
양심의 자유요, 행동의 자유요, 언론의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도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상
당한 수준을 가지고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 자유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
나 한편으로 생각을 해보면 우리가 또 상당한 수준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그
런 경우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모자라는 자유, 자유롭지 못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청소년 때가 되면 아이들이 자꾸만 집을 나가려고 합니다. 부모들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나가냐? 옷이 없냐? 밥이 없냐? 돈도 주지" 공부시켜 주지? 재워주지, 키워주지, 아니
왜 집을 뛰쳐나가려고 그러느냐? 그런데 그들은 나가려고 애를 씁니다. 뭔가 자유를 갈구하
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가 무엇입니
까? 우리는 늘 진리를 말합니다. 진리에 굳게 서도, 진리의 말씀, 불변하는 말씀, 만고의 진
리, 최고의 가치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진리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빌라도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진행해나갑니다. 그런데 빌라도
가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너를 잡을 권세도 있다. 그러니까 예수
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런 건 위에서 허락하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위에서 허락하는
것은 뭐냐?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습니다. 뚱딴지같은 소리만 자꾸만 하고 있습니다.
빌라 도가 말을 잘 못 알아들으니까 예수 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 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진리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소리를 들을 수 없습
니다. 맞습니다. 진리에 속한 자는 하늘의 소리를 듣습니다. 복음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진리가 뭐냐? 진리가 뭐냐? 빌라도와 예수님을 비교해
봅시다. 인간적으로 생각 해 보면 예수님은 30대의 젊은 청년입니다. 그리고 지금 정복당한
나라 의 청년입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요즘으로 말한다면 그에게는 변호인단도 없습
니다.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빌라도는 총독입니다.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칼을 가지고
있습니다.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묻는 것입니다. 진 리가 뭐냐? 이 말은
예수님에게 아주 가슴아픈 질문이었습니다. 질책이었습니다. 왜냐구요? 너는 진리를 말하지
않았느냐, 지금까지 진리를 말했는데, 진리를 가르쳤는데, 그리고 지금까지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 이 있었는데, 그 진리가 너를 구한 다냐? 진리가 너 밥먹여주냐? 네가 말한 진리
어디있냐? 너를 따르는 사람들은 다 어디 있느냐? 도망가고, 배반하고, 진리 좋아하네. 아
주 치명적인 이야기입니다. 진리가 뭐 말라 빠진거냐? 이 말속에서 빌라도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나한테 있다. 나의 힘이 곧 진리다. 내 힘이 너를 놓을 수도 있고, 너를 붙
잡을 수도 있다. 힘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칼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로마의 법이 진
리라는 것입니다. 그럴듯해 보이는 진리이지요. 빌라도 뿐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힘을
진리로 착각을 합니다. 돈을 진리로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돈이 최고라고 생각을 합니다.
권세로 자 기의 진리를 삼습니다. 이런 진리라 면 사람들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 진
리는 사라지게 됩니다. 힘이 사라지면 그 진리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이때 빌라도의 질문은 꽤 날카로운 것이었지만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진리가 무엇일까요? 화려한 것이 아니었습
니다. 미사여구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
인이니라. 이게 진리다. 이것만 알아도 우리는 죄를 안 짓게 됩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
인이니라. 너희들이 남의 종이 아니라는 데 죄를 범하는 자는 죄인이니라. 죄를 범하는 자는
종이요, 종은 자유가 없다. 죄의 행실을 갖은자, 죄의 마음을 갖은자, 죄의 생각을 하는 사람
은 그에게는 자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의 생각에 사로 잡혀있고, 소유와 명예와 향
락에 취 해있다면, 출세와 지위, 명예에 지배당한다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는 자유를
일어버린 것입니다. 자유를 잃으면 종이 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과연 내 자아 속에, 내
양심 속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
이다. 이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한다. 이것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집에 거하지 못한다
는 것이 무엇입니까? 집이 없다. 평안이 없다. 목적이 없다. 방황뿐이라는 것입니다. 죄를 지
은 사람은 죄의 종이요, 집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발붙일 곳이 없다는 것입
니다. 이게 진리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나라에 과연 참다운 자유를 얼마나 가지고 있으며,
얼마나 자유롭겠습니까? 정치인들이 얼마나 자유롭겠습니까? 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
다.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말합니다. 논리를 말합니다. 그러나 다 궤변 같은
말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말하지 못 하고, 고백하지 못하는 족쇄에 걸려 있는 사람
들이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참 자유를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도 참
자유를 갖지 못하고, 남에게도 참 자유를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어떤 사람이 쓴 소설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사회 저명인사들에게 전보를
보냈습니다. 모든 것이 탄로 났음. 빨리 피하기 바람.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전보를 보냈다
구요. 그랬더니 그 다음날 아침, 새벽 첫 비행기를 타러 나오는 저명인사들이 많았다 것입니
다.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는데, 그냥 모든 것이 탄로 났음. 피하기 바람. 그 말 한 마디에
많은 저명인사들이 가방을 꾸려들고 몰려 나왔다는 것이지요. 아마 지금 우리 나라에도 이
렇게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
다. 이것으로 끝난다면 비참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너희를 자유
케 하면 참으로 자유케 하리라.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아들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
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용서하시는 속죄가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죄의 은총으
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이게 보다 큰 진리입니다. 기본
적인 진리입니다. 우선적인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속죄의 진리, 용서의 은총으
로 자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속죄, 용서 없이 자유가 없습니다. 아들이 되지 않고서는 평안
이 집에 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오늘 우리들이 우리의 삶 속에 왜 자유가 없는
가, 무언가 껄끄러운가,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용서받지 못
했기에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유로우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
은 자유하십니다. 그 예수님께 나는 용서를 받았습니다. 나도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자유하
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참 자유하리라는 속죄의 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
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의 은총을 가질 때에 그 속죄의 진리를 받아들일 때에, 그 진
리를 깨달아 믿음을 가질 때에 우리는 자아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전통으로부
터 자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자유롭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
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아버지께서 영접하셨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입니다.
뉴욕에 브르클린에 플림마우스 (Plymouth)라고 하는 교회가 있는데 여기에 1928년에 있
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떤 할머니가 예배 끝났을 때쯤 되어서 손을 들고
"목사님 죄송하지만 딱 한번 마지막으로 부탁하는데 저 강단에 나가서 간증 좀 하게 해
주세요" 그 너무 간절해서 허락을 했어요. 이 할머니가 이 강대상에 올라와서 조심스럽게
이야기합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68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래요. 68년 전 날짜까지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1860년 9월 19일, 그 날은 주일날이었습니다. 저는 이 교회당 바로 마당에서 거기서 노예
시장이 열렸는데 저는 노예로 팔려 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경매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딴 곳으로 노예로 팔려 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로, 어떤 집으로 팔려가게 되나, 내 운명은 어떻게 되나, 초조하고 벌벌 떨고 있을
때, 방금 이 예배를 마치고 이 교회에서 나오는 목사님이 나를 붙들고 800불을 주고 나를
사서 그 시간에 나를 자유하게 해 주었습니다. 듣자하니 그날 우리가 어찌할 수가 없지만은
우리가 오늘 헌금을 해서 노예 한 사람이라도 자유를 줍시다, 해서 헌금한 돈을 가지고 저
를 사서 풀어주어서 내가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저는 그런고로 이 교회를 떠날 수가 없었
습니다. 68년 동안 이 교회에 출석하며 이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이렇게 한 평생을 살았는
데 이제 내가 나이 많아서 죽을 때가 가까왔기에 이 말을 꼭 하고 가야겠기에 말씀을 드리
는 겁니다. 여러분 노예가 스스로 자유 할 수 있습니까? 팔려 가는 노예가 자유 할 수 있습
니까? 정욕과 죄와 시기, 질투, 저주로 지금 완전히 노예된 인간이 스스로 자유 할 수 있습
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러서 대신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리고 그를 믿음으로 해서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오늘 말씀대로 아들에게
만 자유 함이 있어요. 노예는 자유가 없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에 그로부터 자유하
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십자가의 진리를 알고 비로소 그 지불된 값을 할 때, 나 자신이 하나 님의
자녀로 소중한 존재로 발견됩니다. 나는 진리의 노예가 되고 진리는 나를 자유케 할 것입니
다.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요, 영원한 노예로, 영원한 사랑의 노예가 될 때 비로소 여러분은
자유인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자유인만이 건강합니다. 이 자유인만이 행복합니다.
여러분 진정한 사랑의 고백을 들어보셨습니까? 만약 예수를 믿게 되었다면 하나님의 사
랑의 고백을 들어야 하고 그 사랑의 고백이 나로 하여금 사랑의 화신으로 변화시키는 능력
이라는 소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서를 다시 펼쳐보세요.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고 저 사막에서 그들에게 모든 것
을 공급하시며 보호하시던 역사, 그들을 육신적으로 보호하시는데 목적이 있었습니까? 아닙
니다. 하나님 사랑을 받아다오라는 것입니다. 저 미스바에서 사무엘이 이스라엘백성을 모아
놓고 하나님께 성회를 삼았을 때 블레셋이 기회를 잡고 공격 해 왔지만 모두 하나님은 섬멸
해 주었습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이 건강하고 평강하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너
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아라 하는 것입니다. 욥의 시련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기 위함
이요, 다윗의 역경과 생애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기 위한 모두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적
인 행동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 정녕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치 아니하면 어디에도 진정
한 광복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화신이 되어서 살아가는 삶의 자리가 하나님의 나라
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외에는 어디든지 광복의 기쁨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가 이
루어져야 거기에 진정한 광복의 기쁨이 찾아오게 됩니다. 지금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말
씀하십니다.
"너가 사랑의 화신이 되라. 내가 너를 자유케 하겠다"
말씀해 주십니다. 여러분은 모두 하나 님의 자녀들입니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내가 너의 종
노릇하는 것, 사랑의 종이 되는 그 길만이 정녕 우리에게 참 기쁨이 찾아오는 낙원적인 삶
의 질을 누리게 되는 은총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나라에, 이 구석구석, 누구의 마음에든지, 정치하는 사람의 마음에든지, 공
무원에든지, 기업가에든지, 노동자든지, 누구에게든지,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에 게 충만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땅에 양식을 많이 달라고, 돈을 많이 달라고, 경제를 회복해 달라고,
이것을 기도하지 맙시다. 우리는 국민들의 마음속에 용서를 구하는 이 용기가 충만하게 해
주소서 기도해 야 합니다. 이 진리가 적용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말씀하십
니다. 축복하십니다. 참으로 자유하리라. 그게 축복입니다. 참으로 자유하리라. 우리의 믿음
의 용기 속에, 용서의 용기 속에 참으로 자유하라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풍성하게 임할
것을 확신하면서 이 광복절에 이 용기로 살 것을 다짐하며 은혜가운데 승리할 수 있기를 주
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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