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설교가 등장 / 김양재 목사 "반일 감정 내세울 때 아냐 2019-08-17 02:18:45 read : 2984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로봇 설교가 ‘BlessU-2’. ⓒ유튜브 캡처
4차 산업혁명 시대, 설교도 설교자에서 성도 중심으로
콘텐츠가 왕이라면 컨텍스트는 신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
박창규 | 클라우드나인 | 468쪽 | 23,000원
세계경제포럼은 2016년 1월 열린 다보스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을 화두로 제시했다. 4차 산업혁명은 이제 피해 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 더 많은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4차 산업혁명에 대해 많은 책들이 나오고 이야기는 난무하지만, 정작 4차 산업혁명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4차 산업혁명이라고 하면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빅테이터, 로봇, 가상현실 정도를 떠올린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컨텍스트’가 지배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기술일 뿐,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주장하고 있는 책이 바로 《‘4차 산업혁명 시대: 콘텐츠가 왕이라면 컨텍스트는 신이다》라는 책이다.
책의 저자인 박창규 교수는 서울대 섬유고분자학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에서 ‘의류 공정에서의 CAD/CAM 시스템’과 ‘3D 화상분석 및 인공지능’분야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2년과 2017년 세계 3대 인생사전 중 하나인 국제인명센터 IBC에서 ‘세계 100대 공학자’에 선정됐다. 현재 건국대 유기나노시스템공학과 교수이자 건국대 유비쿼터스정보기술연구원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옷’으로 쉽게 설명해
산업 발전에 따라 옷 제작 주체 변화 4차 산업혁명은 ‘엄마 기계’ 시대로
2016년 세계경제포럼에서는 4차 산업혁명을 이렇게 정의했다. “디지털 혁명에 기반하여 물리적 공간, 디지털적 공간 및 생물학적 공간의 경계가 희석되는 기술융합의 시대”.
전문가들에게는 이해가 될지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이해가 어려운 정의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 책에서 산업혁명에 대해 ‘옷’을 예로 들어,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하고 있다.
산업혁명 이전은 ‘엄마(Umma)’의 시대이다. 엄마가 수작업으로 만들어주는 시대였다. 엄마는 아들의 체형이 어떤지, 무슨 옷을 좋아하는지, 무슨 원단을 좋아하는지, 피부에 알레르기는 없는지, 무슨 색상을 좋아하는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어디를 주로 다니고 누구를 만나는지 안다. 그런 엄마가 자녀만을 위한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옷을 만들어주었다.
1차 산업혁명은 ‘기계(Machine)’의 시대이다. 옷을 기계가 만들어 주었다. 18세기 중엽 영국을 중심으로 증기기관이 기폭제가 되어 동력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졌다. 이는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다. 이때 면직물의 대량생산 제조업이 등장했다. 다만 이때부터 엄마가 만들어주던 ‘나만의 옷’이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똑같은 옷들을 찍어내는 개념이 만들어졌다.
2차 산업혁명은 전기 에너지가 공급되는 ‘전기 기계(Electric Machine)’의 시대이다. 옷을 전기 기계가 만들어주었다. 주로 석유에서 추출된 화학물질을 사용해 전기 에너지를 생산하는 동력의 기술 혁신으로, 증기기관이 전기 에너지에 의한 모터기관으로 대체되었다. 이때부터 똑같은 옷의 대량생산이 본격화되었다.
3차 산업혁명은 컴퓨터나 인터넷이 장착된 ‘자동화 기계(Automatic Machine)’의 시대이다. 옷을 자동화 기계가 만들어주었다. 소위 디지털 혁명이 일어나는 시점이다. 마이크로프로세서, 전자회로, 정밀제어 등 컴퓨터와 인터넷 기술 혁신으로 모든 산업에서 정보화 생산이 일어난 온라인을 통한 문화, 서비스, 네트워크, 커뮤니케이션 등 IT 산업이 급속히 발전한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4차 혁명은 ‘엄마 기계(Umma Machine)’의 시대이다. 여기서 ‘엄마 기계’란 엄마의 특성을 가진 각종 시스템, 장치, 소프트웨어 등을 총칭한다.
‘엄마’의 특성은 무엇인가? ‘엄마’는 아들의 옷을 만들 때 아들의 성향, 선호도, 주변 상황 등을 고려해 최적화된 옷을 만든다. 이 때 엄마가 고려하는 것이 바로 아들의 컨텍스트(context), 즉 의도, 맥락, 환경 등이다. 아들이 무슨 옷을 좋아하는지, 옷을 입고 누구를 만나는지, 어디를 가는지를 고려해 최적화된 옷을 만든다.
그냥 막연히 보편적으로 좋은 옷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의 컨텍스트에 따라 가장 좋은 옷을 만든다. 산업혁명 이전 시대 인간인 ‘엄마’가, ‘엄마 기계’로 진화하는 것이다. 결국 ‘엄마 기계’가 가져올 혁명적 변화의 시대, 이것이 바로 4차 산업혁명이다.
그래서 저자는 4차 산업혁명을 맞이하는 키워드가 되는 단어는 ‘근면, 성실’을 넘어, ‘혁신, 개척, 과감, 도전 확신, 개방’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는 4차 산업혁명과 도전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 장에서 저자는 4차 산업혁명의 배경과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변화들 설명한다. 또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벌어질 일들과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잠재적 리더들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1-3차 산업혁명을 겪으면서 관객에 불과했는데, 적어도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장에서는 패션산업이 4차 산업혁명의 롤모델이라는 것을 이야기 한다.
저자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패션 산업이 가장 앞장서서 4차 산업혁명을 추진 중이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가 공학도지만 패션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업혁명을 설명할 때도 옷을 예로 들어 쉽게 설명해준 것이다. 3장에서는 4차 산업혁명 가운데 우리가 할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았다.
교회, 시대 맞게 변하지 못하고 있어 교회의 본질이야 변해선 안 되겠지만
시대 따라 콘텐츠와 컨텍스트 변해야
저자는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소비자가 중심이 되는 사회이며, 각자에게 맞춤형 서비스가 제공되는 시대라고 말한다. 개인화 생산 시스템처럼 이제는 소비자가 직접 내가 원하는 것을 디자인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시대는 너무나 빨리 변하고 있다. 하지만 시대에 맞게 변하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교회다.
예전에는 교회가 시대를 이끌어 나갔다. 지금은 시대와 세상에 끌려가고 있다. 교회는 시대를 잘 읽을 줄 알아야 한다. 특히 교회 리더들은 시대의 변화에 민감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소비자가 중심이 되는 시대이기에, 설교는 설교자 중심이 아니라 성도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설교는 글쓰기다》에서 김도인 목사는 목회자들이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함을 지적한다. 그리고 설교자들이 그동안 청중들을 무시했다고 하면서, 시대의 흐름에 맞게끔 이제 설교자 중심의 설교가 아니라 청중 중심의 설교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교회가 가져야 한 본질은 변하면 안 된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콘텐츠와 컨텍스트는 변해야 한다. 시대를 읽지 못하면, 교회는 뒤처질 수밖에 없다.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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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승중 목사에게 듣는 '할아버지 주기철 목사'
[파워인터뷰] 주안장로교회 주승중 목사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요즘 한국교회, 맘모니즘이란 우상숭배 하는 것 아닌지 씁쓸"
내일은 36년 동안의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된 광복절입니다.
일제의 폭압에 항거한 항일운동가들의 피흘림이 있었기에 광복을 맞을 수 있었지요.
오늘 파워인터뷰에서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끝까지 거부하며 모진 고문을 감내해낸 분, 故 주기철 목사님을 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주 목사님의 손자이자 주안장로교회 담임목사인 주승중 목사를 만나봅니다.
◇조혜진> 해마다 이맘때면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온 몸으로 막아내셨던 분, 故 주기철 목사님이 떠오르는데요. 그런데 목사님은 이맘때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또 손자이기도 하시잖아요. 궁금하더라고요.
◆주승중> 요새 당연히 광복절이기도 하고, 요즘 일본과의 경제 전쟁이 또 벌어지고 있고, 그래서 이제 요즘 자연히 저는 할아버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우상숭배했던 한국 교회의 아픔 이런 것들이 많이 생각이 나고요.
그러면서 또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일제 때 그렇게 신사참배를 강요당하면서 한국 교회가 참 어려움을 많이 겪었는데, 아쉬운 것은 요즘 특히 이제 맘모니즘이 또 다른 형태의 우상숭배로 지금 한국 교회를 어렵게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신사참배 생각하면서 우상숭배로 자연히 연결 되고, 그러면서 한국 교회의 오늘날의 모습이 보여지는 게 참 그래서, 마음이 여러 가지로 착잡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있습니다.
◇조혜진> 정말 목사님이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쓰셨는데, 그 후손인 지금의 한국 교회의 우리 성도들은, 또 목회자들은 잘하고 있나 이런 생각을 하신다는 말씀이시죠?
◆주승중> 그렇죠.
◇조혜진> 주기철 목사님은 우리에게 신사참배를 반대하셨던 분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이외에도 '여성 인권 향상'이라든가 또 우리의 '경제 자주 독립'을 위해서 굉장히 애쓰셨던 분이시더라고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주 목사님의 모습이 있다면 어떤 걸까요?
◆주승중> 목사님이 원래는 신학을 하려고 그랬던 분이 아니었어요. 오산학교를 다닐 때에 남강 이승훈 선생님하고 고당 조만식 장로님의 영향을 참 많이 받아서 ‘경제를 살려야 된다, 우리나라가 다시 회복되는 것은 경제를 살리는 것밖에 없다’라고 아마 그분들 통해서 많이 교육을 받으신 것 같아요.
그래서 연희전문학교 상과(商科)에 입학 하셨어요.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의 경제를 살리는 것을 통해서 말하자면 일종의 민족을 구원하겠다'라고 하는 그런 의식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상과를 가셨다가 나중에 이제 신학을 하게 되셨고요.
또 한 가지는 나중에 이제 목회를 하실 때 보면, 목사님이 다음세대 교육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을 많이 갖고 거기에 집중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처음에 초량교회에 담임목회로 갔을 때에도 교회학교를 다시 재건하고, 그리고 심지어는 선생들만을 위해서 연초에 일주일 동안 새벽기도회를 하는 식으로 해서 다음세대 교육을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셨어요.
◇조혜진> 주기철 목사님께서 그렇게 7년 정도 옥고를 치르시고 감옥에서 나오셨을 때, 사실 한국 교회 전체가 그렇게 환영을 하거나 인정해드리는 분위기가 아니었었단 말이죠. 그 부분이 참 안타까운데요. 돌아보면 사회뿐만이 아니라 기독교 내에서도 친일 청산이 잘 안 돼 있는 부분의 갈등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있다고도 볼 수 있는데요.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주승중> 그 문제는 정말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 때 이제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하시고, 또 많은 분들이 감옥에 있다가 출옥하셨어요. 소위 이제 ‘출옥 성도들’이죠. 그분들이 나와서 "이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이니까 이 문제는 반드시 짚고 회개하고 넘어가야 된다" 그래서 그분들이 주장했던 것이 무엇이냐면, 옥중 성도들이 주장한 것이 "3개월 동안 신사참배한 목회자들은 강단에 서지 마라" 그랬어요.
그런데 이제 바깥에 있던 분들은 "무슨 소리냐, 다 감옥가고 다 순교하고 그러면 교회는 누가 지키냐, 우리가 바깥에서 비록 신사참배는 했지만 교회를 지켰다" 그러면서 그걸 거부했어요. 그래서 결국 교단이 쪼개지는 아픔이 있었지만, 그런 과정에서 우리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정말 신앙적이 회개. 사회적으로 얘기하면 어떤 역사 청산이라든지 그런 교훈을 우리가 남기지 못했어요.
지금 이제 사회에서는 친일파 명단도 작성하고, 그것이 꼭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 교훈을 우리가 받자는 건데, 앞으로 다음 세대를 위해서,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는 한국교회에도 그런 작업들이 좀 있어야 되지 않을까.
◇조혜진> 네, 정말 꼭 필요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특히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여서 항일운동이라든지 그런 정신을 기념하는 행사가 3월달에 굉장히 많이 열렸죠. 목사님 그런 행사들과 움직임 보시면서 어떤 생각 드셨어요?
◆주승중> 사실 3.1운동은 한국 교회가 없었으면 제대로 이루어지긴 참 어려웠던 상황이었거든요. 그 당시에 전국적인 조직망은 교회가 유일한 단체였기 때문에 그래서 전국에 동시다발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는데, 교회가 했던 역할에 대해서 좀 너무 간과하는 게 아닌가. 그게 참 아쉬웠어요.
우리 다음세대에게 나라와 민족이 어려웠을 때에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교회가 어떤 일을 했는가 하는 것을 교육하고 이어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몇몇 목사님들이 모여서 교재도 만들고, 교회에서 가르칠 수 있는, 3.1운동 때 교회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정리한 것을, 그 당시 역사적인 많은 자료들을 발굴하고, 그래서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어갈 건가 교재를 만들고, 미션스쿨에도 그걸 다 보내고 그런 작업을 했었습니다.
◇조혜진> 의미 있는 일을 하셨네요. 지금 한국 교회가 참 많이 어지러운 상황이고요. 사회적 신뢰도도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만약에 주기철 목사님께서 보신다면, 무척 저희들이 꾸지람을 들을 것 같다..이런 생각이 드는데요.
◆주승중> 그 당시에는 그러니까 적과 아군이 분명한 시대였고, 그런데 지금은 이게 다 뒤섞여 가지고, 이게 정말 구분하기가 힘든 그런 시대여서 참 신앙생활하기가 사실은 더 어려운 것 같아요. 교회가 세상을 걱정해야 되는데,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그런 시대가 됐으니까 참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그런 면에서 삶 속에서 어떻게든지 말씀을 살아내려고 노력하고, 그러려면 자기를 죽이는 연습을 부단히 해야 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조혜진> 네, 저도 늘 저를 매일매일 돌아보는 그런 연습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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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전함’ 작은 교회에 전도지 무상 지원
100개 교회 한정, 1000부씩 제공
광고로 하나님을 전하는 ㈔복음의전함(이사장 고정민 장로)이 ‘하반기 미자립교회 전도지 무상지원사업’을 전개한다. 전도지엔 ‘대한민국을 전도하다’ 3차 제주캠페인 편 복음광고 모델로 활동한 배우 겸 가수 엄정화, 개그맨 김지선, 가수 박지헌 김신의(밴드 몽니), 배우 주아름이 재능기부로 참여했다. ‘괜찮아! 예수님과 함께라면(It's Okay! with Jesus)’이라는 위로의 메시지도 담았다.
복음의전함 관계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메시지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가독성을 높인 디자인과 문구로 제작했다”며 “전도지 뒷면에는 각 교회 정보와 연락처를 기입할 수 있다”고 밝혔다.
전도지는 복음의전함 홈페이지에서 신청할 수 있으며 100개 교회 한정으로 선착순 종료된다. 지원 대상은 50인 이하의 작은 교회이고 전도지는 각 1000부씩 제공된다. 선정된 교회는 다음 달 3일 복음의전함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되고 16일 일괄 발송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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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억 빚더미 성령교회 예배당, 다락방 교회가 매입 추진
"스승 조용기 가르침 따르니 교회 커져"…엄기호 목사 "빚 갚아야 주님 앞에 설 때 부끄러움 없어"
경기도 광주에 있는 성령교회 예배당. 무리한 건축으로 부채에 허덕이고 있다. 다음 로드뷰 갈무리
[뉴스앤조이-이용필 기자] 무리한 건축으로 수백억 빚더미에 오른 성령교회(엄기호 목사)가 예배당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이영훈 대표총회장) 소속 성령교회는 교단에서 떠오르는 교회였으나, 수년 전부터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출신인 엄기호 목사는 조용기 원로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지시로 1983년 경기도 성남에 교회를 개척했다. 조 목사 가르침에 따라 오중 복음, 삼중 축복 중심으로 목회했다. 교회는 계속 부흥했고, 2000년 초반 경기도 광주로 예배당을 이전했다.
교회를 이전하면서 예배당도 새로 지었다. 성령교회는 지하 3층 지상 6층으로, 연건평이 7300평이나 됐다. 예배당 좌석은 5000석에 달했다.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2006년 1월경 엄기호 목사는 <순복음가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스승인 조용기 목사님의 가르침 따라 꿈과 비전을 넓게 갖다 보니 (예배당이) 이렇게 커져 버렸다"고 말했다.
공사를 완료한 성령교회는 2007년 11월 8일 새 성전 입당 예배를 드렸다. 조용기 목사는 당시 설교에서 "나의 제자이자 영적인 아들 엄기호 목사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교회를 세운 것을 기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축하했다.
엄기호 목사는 "새 성전 입당 예배를 드리기까지 스승 조용기 목사님의 가르침과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앞으로도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교회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화답했다. 실내 스포츠센터, 문화 공간 등도 마련한 성령교회는 지역사회와 함께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장밋빛 꿈은 오래가지 않았다. 성령교회 위치는 도심에서 떨어져 있었고, 교인들이 오가는 데 불편함을 겪었다. 대형 버스를 운영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성령교회 출신 A 목사는 "기도원이 있을 자리에 교회가 있으니, 교인들이 찾아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자금 문제로 차량 운행을 못 하게 되면서 사람들이 줄기 시작했다. 2000~3000명이 출석하던 교회가 1000명대로 떨어졌다"고 말했다.
엄기호 목사는 매각 자금으로 500억 원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갚아야 할 빚이 많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성령교회는 예배당을 지으면서 거액의 빚을 냈다. 원금에 이자까지 합쳐 300억 원이 넘었다. 엄기호 목사는 8월 13일 기자와 통화에서 "원금은 200억 원이 넘고, 갚아야 할 이자도 100억 원이 넘는다"고 말했다. 여기에 아직 갚아야 할 공사 대금이 있고, 담보를 섰다가 피해를 입은 장로들도 구제해야 하며, 교역자·직원의 밀린 월급도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성령교회 재산은 (재단)순복음선교회에 편입해 있다. 엄 목사는 "재단 측과 합의를 통해 매각 절차를 밟고 있다. 500억 원에 넘기겠다고 제시한 상황이다. 교회 빚을 갚아야 주님 앞에 설 때 부끄러움이 없을 것 같다. 빚을 지고 목회하다 보니 힘이 자꾸 빠진다"고 말했다.
빚을 갚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라는 엄 목사는 조용기 목사 이야기도 꺼냈다. 그는 "어른(조용기 목사)이 건강하셨을 때는 우리를 딱 잡고 도와주셨다. 지금은 그게 안 된다"며 아쉬워했다.
현재 '다락방' 임마누엘서울교회(류광수 목사)가 성령교회 예배당 매입에 적극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확인됐다. 임마누엘서울교회 한 목사는 "당회에서 매입을 진행하고 있는데, 가계약을 맺었다. 우리 교회는 서울 송파에서 광주로 본당을 이전하려고 한다. 본당이 작아서 사용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인수할 여력이 되느냐고 묻자, 그는 "예배당 매입을 위해 펀딩을 따로 진행할 계획이다. (구입 자금을) 커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답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통합·고신 등 주요 교단은 다락방 류광수 목사를 이단 및 사이비 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엄기호 목사는 "다락방 측이 재단에 의향서를 제출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가계약을 맺었는지는 모르겠다. 여러 곳 중 하나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재단 실무 관계자는 8월 11일 기자와 통화에서 "할 말이 없다"며 전화를 끊었다. 기자는 "임마누엘서울교회와 재단이 가계약을 맺었다고 들었다. 사실 확인 차 연락했다"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는 응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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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전도목표 세우고 기도하면 한계를 넘는 역사 일어나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의 전도, 너무 쉽습니다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가 지난 4월 교회에서 개최된 ‘150배 성장세미나’에서 목회자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원대한 비전, 실천적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진실로 믿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기적을 베풀어 주신다. 1993년 대부분이 노인인 24명이 출석하는 작은 교회에 부임해 100명이 모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이 크게 입을 열라고 하셨으니 최소 100명은 정해놓자 생각하고 선포했다. ‘안 돼도 30명은 되고 50명은 되겠지.’
그런데 그 기도가 3개월 만에 이뤄졌다.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나니 진짜 큰 꿈을 갖게 됐다. “하나님, 300명이 모이게 해주십시오.” 집에 놀러 온 친구 목사에게 이 비전을 말했더니 웃었다. “이 촌구석 어디에서 300명이 올 낀데.” “야야, 교회당 다 헐고 땅바닥에 앉는다고 해도 300명 못 앉는다.”
하지만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이 하시면 됩니다.” 교회 주변엔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아서 부산이나 진해에 가서 전도했다. 그런데 먼 곳에 사는 성도들이 차를 타고 오면 주차할 공간이 없었다. “하나님, 대지 3000평을 주십시오.”
교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지 3000평을 주시고, 교회에 300명이 모이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교인들의 반응이 차가웠다. “우리 교회가 인자 100명 모이니까 강도사님 눈에 뵈는 게 없는갑다. 완전히 허풍선이가 다 됐다.”
감사했다. 만일 인간적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라면 정말 부흥이 돼도 사람이 한 일이라고 수긍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들 안된다고 했으니 이 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시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몇몇 집사님들을 승합차에 태워 낙동강 하구에 개발 중이던 섬으로 갔다. 그곳엔 건물을 지으려고 3000평씩 구획을 지어 길을 닦아 놨었다. 한 줄로 세워놓고 말했다. “제가 지금 ‘주여’하고 외치면 여러분은 손을 들고 ‘삼천평’을 외치세요.” “주여!” 내가 먼저 외쳤다. 그랬더니 모기 목소리가 나왔다. “사암천….” 다시 큰소리로 외쳤다. “주여!” “삼천평.” 그래서 농담으로 이야기했다. “따라 하지 않으면 갈 때 차 태워주지 않고 놔두고 가겠습니다.”
사실 그때만 해도 그 일이 정말 이뤄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정말 그것만 이뤄주셨다면 어떻게 됐겠는가?’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하다.
시간이 흘러 하나님은 우리에게 1만6528㎡(5000평)를 주셨다. 주차장만 6611㎡(2000평)이다. 500대의 차가 와도 한 번에 주차할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목표를 낮추지 말고 네 입을 넓게 열고 구하라.” 목표를 높게 세우고 먼저 하나님께 물어보라.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큰 목표를 갖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신다.
100평도 되지 않던 작은 교회. 그때 사람들은 도저히 이뤄질 수 없는 일이라고, 허풍선이라고 말했지만, 지금은 이렇게 말한다. “목사님, 우리는 정말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25㎞ 안에 네 개의 도시가 들어선다. 그래서 더 큰 목표가 생겼다. “하나님, 우리의 목표는 더 큽니다. 이 정도 갖고는 안됩니다.” 그래서 장로님들을 모았다. “장로님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일을 이뤄봅시다.”
그 꿈은 이렇다. 대한민국을 세로로 길게 반으로 나누면 동쪽에 해당하는 강원도, 경상남·북도, 대구, 부산은 크리스천 비율이 10%가 되지 않는다. 반면 인천 군산 순천과 같은 서쪽 지역은 복음화율이 30~40%가 된다.
“하나님, 우리 교회를 통해 오른쪽에 있는 지역, 특히 부산 경남이 20년 안에 그리스도인 비율이 30%가 되게 해주십시오.” 이후 어떻게 해야 이런 꿈들이 단순 구호에 그치지 않고 현실이 될 것인가를 놓고 기도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복음화율이 30%가 될 수 있습니까. 순천도 되고 군산도 되고 인천도 되는데 왜 우리는 안됩니까. 같은 민족인데 왜 안 되겠습니까.”
불신자들이 왜 예수를 믿지 않는가. 왜 교회에 나오지 않는가.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싫어하는가. 사실 믿지 않는 자들은 교회, 크리스천에 대해 좋지 않은 선입견이 있다. 그래서 그 오해와 편견을 없애기 위해 매년 50명씩 개안수술을 해드렸다. 그다음에는 매년 500명씩, 몇 년 전부턴 매년 1000명씩 해드렸다.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가리지 않고 부산 김해 창원 마산 진해 등 5개 지역 병원 가운데 한군데를 정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수술해주기로 했다.
극동방송에 이런 취지로 광고했다. 그랬더니 이 소식을 듣고 부산일보를 비롯한 지역 언론사에서 정말 그렇게 하느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지금까지 해온 자료를 보여줬더니 우리 교회의 사역을 특집으로 다뤘다.
‘기독교인들은 자기들끼리 잘 먹고 잘살려고 해.’ 몇몇 교회가 힘을 합해 사역을 감당하면 세상이 놀랄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장애인들에게 휠체어를 사주고 노인들에게 보청기를 해준다. 이렇게 몇 년만 하면 전도의 문은 저절로 열리지 않겠는가.
지금은 지역 복음화율 30%를 놓고 기도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이렇게 고백할 날이 분명 올 것이다. “하나님, 진짜 복음화율이 30%만 됐다면 어떻게 될 뻔했습니까.”
시시한 꿈 말고 위대한 꿈을 꾸라. 우주를 품고도 남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 앞에 위대한 꿈을 갖고 기도하라.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넓게 입을 열고 기도할 때, 우리의 한계 상황을 뛰어넘어 놀랍게 역사하실 것이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 이루어지는 기도를 하려면
‘왜 안 될까’ ‘어떻게 하면 될까’로 방향을 잡아라
중요한 시험을 하루 앞두고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시험문제와 정답을 미리 알려준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지금부터 알려주는 문제는 내일 시험에 꼭 나오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이튿날 정말 그 문제가 고스란히 출제됐는데 맞추지 못한다면 선생님을 무시하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이 땅에서 복된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는 비밀을 자세히 알려주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쉬운데, 어떤 사람에게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어렵다.
첫 번째 비밀은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기도는 무작정 하는 게 아니라 목표를 세우고 하는 것이다. 스티븐 코비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시계를 몇 개 차고 다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나침반입니다.” 현대인은 바쁘게 살아간다. 여기저기 시간을 맞춰놓는다. 그러나 아무리 바쁘게 살아도 목표가 정해져 있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배가 방향을 정해놓지 않고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간다면 아무리 바쁘게 움직여도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바쁘게 살아온 것도 헛된 일이 될 것이다.
선생님이 학생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저 팔공산에 보물 1억원어치를 숨겨놓았다. 찾는 사람이 그 보물의 임자다.” 선생님의 말씀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무리의 학생들이 정신없이 산을 향해 달려간다. 많은 학생이 가고 난 다음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팔공산 중에서도 갓바위에 올라가는 길에 보물을 숨겨놓았다.” 남아있던 네 학생 가운데 세 명이 황급히 달려간다.
아직도 한 학생이 남아 끝까지 선생님께 주목하며 말씀을 듣는다.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 보물은 팔공산 갓바위 올라가는 길, 정상에서 20m 떨어진 소나무 밑에 숨겨 놓았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한 학생은 휘파람을 불면서 천천히 올라간다.
정신없이 달려간 한 무리의 학생들, 두 번째로 출발한 세 학생, 마지막으로 출발한 한 학생 가운데 누가 보물을 찾았겠는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온 산을 헤매는 학생들은 수천 명이라 해도 보물을 찾기 힘들다. 하지만 마지막에 정확한 목적지를 알고 출발한 학생은 쉽게 보물을 찾을 수 있다.
우리의 기도도 이와 같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목표를 세우고 소망을 갖고 계획에 따라 기도해야 한다. 목표는 어느 정도로 세워야 할까. 내가 최선을 다하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나를 도와준다고 가정했을 때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의 10배로 목표를 세워야 한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두 가지 질문을 던져보라. “왜 안 될까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 두 가지 질문 앞에 모든 해답이 있다. 내가 왜 사랑받지 못할까, 왜 왕따를 당할까, 왜 우리 남편은 저럴까, 왜 우리 식당은 안될까, 왜 우리 아이들은 말을 잘 듣지 않을까. 분명 이유가 있다. 만약 식당을 두고 질문했다면 이런 이유가 나왔을 것이다. ‘맛이 없다, 불친절하다, 파리가 많다.’ 그다음엔 이렇게 물으면서 기도하라. “하나님 어떻게 해볼까요.”
불친절했다면 친절하면 되고 위생이 불결했다면 청결하게 하면 된다. 파리가 많으면 잡으면 된다. 방법을 찾아서 실천하고 기도할 때 실제적인 기도가 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가 부흥할 수 있을까.’ 기도하다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온 성도들이 하나 돼 집중해서 실천한다. 그렇게 하면 배로 부흥하는 것도 6개월 만에 가능하다.
초대교회에 12명, 70명, 120명의 성도가 모여 기도했는데 50일도 되지 않아 3000명씩, 5000명씩 들어왔다. 오늘날이라고 불가능하겠는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마음을 하나로 모으면 하나님의 역사는 지금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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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꿈 “신생 한국, ‘아시아의 모범적 예수교 국가’로”
유영익 박사,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 출간
“해방 후 귀국한 이승만은 그가 청·장년기에 보여줬던 왕성한 기독교 선교 열정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마음 속 깊이 한국을 ‘예수교 국가’로 만들겠다는 처음의 뜻을 여전히 품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역사학회 회장과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원로 학자 유영익 박사가, 8·15 광복절 74주년을 앞두고 24년의 연구 결과를 집대성한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을 출간했다.
저자의 이승만 관련 첫 저작인 《이승만의 삶과 꿈(2002)》이 3·1운동 이전의 이승만 생애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 책은 3·1운동 이후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해방, 집권 과정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두 권의 책은 모두 풍부한 사진 자료들을 함께 제시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번 책에서도 거의 매 장마다 사진자료가 등장해 그 시절과 이승만을 한층 가깝게 만날 수 있다.
이승만의 ‘건국 비전’에 대해 저자는 “그가 품었던 건국의 비전은 신생 한국을 ‘아시아의 모범적 예수교 국가’, ‘동양의 모범적 자유민주주의 국가’, ‘반공의 보루’, ‘평등한 사회’, ‘교육 수준이 높고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것이었다”며 “그의 건국 비전은 한반도에 자유와 평등이 최대한 보장되는, 미국·영국·프랑스 등 서양의 일등 국가와 동등한, 개명·부강한 기독교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고 정리했다.
더불어 “이승만은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착실한 건국의 비전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의 건국 비전은 대체로 그가 청년기에 주창했던 개혁 사상의 연장선상에서 형성된 것이었다”며 “즉 그는 1890년대 후반에 독립협회의 급진적 개혁 지도자로서 대한제국의 정치 제도를 혁신하려 시도했을 때 품었던 꿈을 초지일관 소중히 간직했다, 이를 해방 후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실현하려 했다”고 전했다.
‘친미 외교 노선을 고수했던 독립운동가’라는 인식에 대해선 “맹목적 친미주의자는 아니었다”며 “해방 후 그가 미국의 정책에 반대한 나머지 미 군정의 최고 책임자 하지 중장과 사사건건 충돌했던 일이나, 6·25 전쟁 때 미국 정부가 휴전을 성립시키려 하자 유엔군 총사령관의 동의 없이 반공포로 27,000여명을 석방한 사실은 너무 유명하다”고 반박했다.
▲맥아더 장군의 ‘절친’이었던 이승만. ⓒ피스코리아 제공
그에 대한 종합적 평가로는 “이승만은 동서양 학문에 두루 통달했던 천재”라며 “배재학당을 졸업한 1897년부터 호놀룰루에서 서거한 1965년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조국의 독립, 오로지 나라 사랑의 위대한 애국자였다”고 했다.
또 해방 당시 해외 한인 교포들 사이에 전폭적 지지를 받는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던 이승만이 여러 약점에도 초대 대통령으로 집권할 수 있었던 비결로 △대면하는 사람을 첫눈에 압도하는 개인적 카리스마 △비상한 기억력을 비롯한 탁월한 학문적 실력 △능수능란한 마키아벨리적 정치 수완 △비상한 정치자금 모금 능력 △언론 및 저술 활동을 통한 세계적 명성 확보 △동지회를 통한 미국 내 한인 교포들의 지지 확보 △흥업구락부를 통한 국내 지지 세력 확보 △1932년 이후 상하이·충칭 임시정부와의 협력 관계 유지 △선교사부터 군부까지 미국인 지지 세력 확보 등을 꼽았다.
그러면서 “당시 한반도 38선 이남에 있던 ①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자 한국독립당 당수인 김구 ②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 겸 조선민족혁명당 주석 김규식 ③건국준비위원장이자 인민당 당수 여운형 ④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 등 쟁쟁한 라이벌들을 제치고 신생 공화국의 최고 집권자가 됐다”며 “그는 당시 남한에서 그와 경쟁했던 다른 여러 독립운동가들에 비해 ‘일당백’, ‘족탈불급’의 능력과 실력을 갖춘 탁월한 정치가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기독교’ 관련 내용도 더러 보인다. 저자는 이승만이 1912년부터 자의반타의반 해외 생활을 시작한 것에 대해 ‘종교적 망명’이라 규정하고 있다. 유학 생활을 마치고 서울YMCA에 몸담은 이승만 학감이 맡은 일을 너무 열심히 추진했기 때문에, 105인 사건에 연루됐다는 것이다.
해방 후 혼란한 정국, 기독교 토대 위에 바로 서다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이승만 박사가 연설하고 있다.
하와이 망명 시절 미국 감리교 선교부의 보호망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민족 교회를 출범시킨 것도 그였다. 이승만은 하와이 한인 기독교인들이 외국 선교부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교회를 세워 운영하며 재정권을 행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독립 정신’을 갖고 있었고, 이는 1918년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탄생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 교회는 3·1운동 이후 이승만의 정치적 위상이 높아지자, 그의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끈질긴 독립운동으로 되찾은 나라에서, 그가 추구했던 것은 ‘기독교 국가’였다. 저자는 “이승만은 1948년 5월 총선거를 기해 ‘방구명신(邦舊命新)’, 즉 ‘나라는 오래지만 명은 새롭다’는 휘호를 남겼다. 이 ‘새로운 명’이란 기독교 하나님의 명을 의미한다”며 “이승만은 기독교라는 새로운 정신적 토대 위에 새 나라를 건설할 것을 염원했다. 이 점이 이승만의 건국 비전 중 가장 돋보인다”고 평가했다.
또 “이승만은 1903년 옥중에서 발표한 ‘예수교가 대한 장래의 기초’라는 글에서 유교를 ‘사람의 도’, 기독교를 ‘하나님의 도’라고 칭하면서, ‘옛적에는 사람의 도로 다스리던 것을 지금은 하나님의 도로 감화시켜야 한다’는 명제를 내걸었다”며 “그는 장차 한국인이 소생하고 번영할 수 있는 희망의 원천을 ‘예수교(기독교)’에서 찾았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3·1운동 발발 후 임시정부 수반으로 추대된 그는 한 미국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장차 한국을 ‘완전한 예수교 나라’로 만들 예정”이라고 발언했다고 한다.
이후 1946년 3·1절 행사에서 “한민족이 하나님의 인도 하에 영원히 자유독립의 위대한 민족으로서 정의와 평화와 협조의 복을 누리도록 합시다”라고 축사했다. 그리고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에 앞서 목사인 이윤영 의원에게 감사 기도를 부탁했으며, 7월 24일 대통령 취임식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취임 선서를 했다.
그는 “이상의 자료로써 우리는 이승만이 기독교의 섭리를 믿었으며,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 했음을 확인하게 된다”며 “더구나 그는 제헌국회 개원식이나 대통령 취임식을, 식순에 감사 기도와 하나님 이름으로 하는 취임 선서를 넣는 방식으로 거행했다”고 강조했다.
저자 유영익 박사는 1960년 한국 근현대사 연구를 위해 미국 하버드 대학교로 유학을 떠나기까지, 이승만을 ‘부패하고 무능한 통치자’로 여기고 그에 관해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1964년 하버드대 동양학 도서관에서 우연히 이승만의 첫 작품인 《독립정신(1910)》을 발견해 읽은 후부터 그를 새롭게 평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그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집필할 생각까지 했으나, 하버드대와 프린스턴대에는 이승만 관련 자료들이 많지 않아 포기해야 했다.
그 10년 후인 1994년, 저자는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 박사에게서 ‘이화장에 비장(秘藏)돼 있던 ‘이승만 문서’들의 정리를 부탁받았다. 대한민국 탄생 역사를 이승만 중심으로 연구해 볼 생각을 했던 터라, 우남사료연구소를 차리고 본격 정리와 연구에 돌입해 책과 논문들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저자는 “되돌아보면 4반세기 동안 이승만 연구에 몰두해 있었다. 이 기간은 저자가 대학 졸업 후 한국 역사를 연구하는데 할애한 시간의 약 절반에 해당한다”며 “이렇게 오랜 동안 오로지 이승만 연구에만 골몰해 있으면서 이따금 학문적 고독감에 쓸쓸해질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가장 보람 있는 연구 기간이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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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재 목사 "반일 감정 내세울 때 아냐…일본 배상금으로 잘살게 돼"
8월 4일 주일예배 설교 "당시 5억 불이면 일본 예산 절반"…가짜 뉴스 여과 없이 전달
박요셉 기자 (josef@newsnjoy.or.kr)
[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김양재 목사(우리들교회)가 8월 4일 주일예배 설교에서 한일 갈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회문제를 설교에서 언급하는 것이야 문제 되지 않지만, 김 목사가 말한 내용은 대부분 사실이 아니었다. 보수 언론과 유튜버가 전하는 한일 청구권 협정에 대한 가짜 뉴스와 같은 내용이었다.
김양재 목사는 이날 '전쟁 없이 삼 년을 지냈더라'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본문은 열왕기상 22장 1-12절이었다. 그는 북이스라엘 아합왕을 예로 들며 기독교인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과 독선, 아집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목사는 설교 도중 한국이 위기에 처했다며 한일 갈등 상황을 언급했다. "진보·보수를 떠나 한국이 위기이기 때문에 한 말씀 드리고자 한다"며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회복하게 하기 위해 이번 한일 무역 전쟁을 허락했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반일 감정을 내세울 때가 아니라고 했다. "아무리 반일 감정이 국민감정이라 해도 명분이 없으면 질 수밖에 없다. (중략) '일본 놈은 영원히 나쁜 놈이다'는 고정관념은 너무나 무서운 것이다. 팩트를 좀 짚어 보려 한다"고 말을 이었다.
첫 번째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이다. 김양재 목사는 한국이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받은 배상금 덕분에 지금처럼 잘살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은 1965년 한일 협정을 맺을 때 유·무상으로 현금 3억 불과 차관 2억 불을 줘서 모든 청구 소송을 종료했다. 5억 불이 지금은 적어 보여도 전쟁 이후 일본에는 국가 예산의 절반이었다"며 "그 돈으로 박정희 대통령 때 경제개발 5개년 유명하지 않았나. 그래서 이렇게 몇십 년 만에 세계 최빈국에서 10위권으로 진입한 것"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는 미국 캘리포니아연방법원 재판이다. 김 목사는 한일 갈등 발생 원인이 대법원 판결에 있다고 했다. 대법원이 지난해 10월 개인 청구권을 인정하고 일본 기업에 강제징용 배상을 선고했기 때문에 일본과 무역 갈등이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연방법원이 일본군 포로였던 미국 시민의 손해배상 소송을 기각한 사례를 소개하며 "우리나라도 이렇게 같은 시각을 가지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목사가 언급한 재판은 태평양전쟁 당시 포로였던 제임스 킹이라는 사람이 종전 이후 일본 기업을 상대로 미국 캘리포니아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다. 김 목사는 "캘리포니아연방법원은 이렇게 판결했다. '일본과의 평화 협정으로 원고가 받아야 할 충분한 보상은 평화와 충분히 교환됐다. 후손들이 평화로운 세계에서 얻게 될 무한한 포상은 그 빚을 갚을 만한 것이다. 원고들의 희생에 무한한 감사를 표하면서도 그들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참여정부가 개인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입장을 취했다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 문제에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 국익과 연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아무리 억울해도 한 번 결정된 것은 일사부재리 원칙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양재 목사는 반일 감정을 내세울 때가 아니라고 했다. 우리들교회 설교 영상 갈무리
김양재 목사의 설교 내용에는 사실과 다른 부분이 적지 않다. 첫 번째로 일본이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한국에 제공한 현금 3억 불과 차관 2억 불이 '일본 예산의 절반'에 달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1965년 당시 세계은행 기준으로 일본 국내총생산(GDP)은 909억 5028만 달러였다. 일본 GDP 대비 정부 예산 비율이 평균 40%인 것을 감안하면, 5억 달러가 국가 예산의 절반이었다는 말은 터무니없다.
김 목사 말과 같은 내용은, 배상금 5억 달러가 당시 일본 외화보유액의 절반이었다는 말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콜마 윤동한 회장이 월례 조회 시간 전 직원에게 보여 줬다가 논란이 된 극우 성향 유튜버 '리섭TV' 영상조차 "우리나라는 이미 1965년 한일 청구권으로 당시 일본 외환 보유액의 절반가량을 배상받고, 한국과 일본은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조약을 맺었다. 그래서 그 돈을 기반으로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 유례없는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배상금 5억 달러가 당시 일본 외화 보유액 절반이라는 말도 사실이 아니다. 당시 일본 외화 보유액은 약 16억 달러였다. 게다가 일본은 이를 1966년부터 1975년까지 10년에 걸쳐 분할 지급했다. 당시 배상금이 오늘날과 비교하면 높은 금액인 것은 맞지만, 배상을 위해 일본이 재정을 무리하게 투입하지는 않았다.
시민들은 지금도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미국 캘리포니아연방법원 판결을 한국 대법원 판결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미국 연방법원 사례는 김태규 부산지법 부장판사가 7월 31일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을 통해 최근 널리 퍼졌다. 그는 대법원이 한일 청구권 협정을 뒤흔드는 판결을 내렸다며, 미국 연방법원 사례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어 보수 매체와 유튜버들이 김 판사 글을 인용하며 정부를 비판했다.
실제로 미국 캘리포니아연방법원은 2000년,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가 일본군 포로가 되어 강제 노역을 당한 제임스 킹의 소송을 기각했다. 그러나 미국 연방법원 판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 48개국이 1951년 9월 8일 일본과 체결한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국을 포함한 대다수 나라는 이 체결에서 전쟁 피해 배상 청구권을 포기했다(14조). 미국 연방법원이 제임스 킹의 소송을 기각한 것도 이 조약 때문이다. 한국은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체결 당시 전승국으로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는 무관하다.
일본은 지금도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참여정부가 개인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한 것도 사실이 아니다. <조선일보>는 7월 17일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는 2005년 8월 노무현 정부 당시 민관공동위원회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반영됐다고 발표했던 사안이다"고 보도했다. 리섭TV도 8월 3일 영상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민관공동위원회라는 걸 열어서 7개월간 조사했다. '일본으로부터 받은 3억 달러에 강제징용에 대한 보상금이 포함되었다'라는 게 결론이다. 돈 받은 걸로 다 끝났다고 결론을 내렸다는 거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는 실제로 2005년 일제 강제 동원 피해자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한일회담문서공개후속대책관련민관공동위원회'를 구성했다. 이해찬 대표(더불어민주당)가 당시 위원장을 맡았고, 문재인 대통령도 위원회에 참여했다.
그러나 민간공동위원회가 개인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결론지은 건 아니다. 이들이 당시 발표한 보도 자료에는 "청구권 협정을 통하여 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 3억 불은 (중략) 한국 정부가 국가로서 갖는 청구권, 강제 동원 피해 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감안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고 나와 있다. 배상금에는 정부의 청구권만 반영됐고 개인의 청구권은 유효하다는 것이다.
청와대도 7월 17일 "당시 민관공동위원회는 강제징용 피해자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했다고 발표한 바 없다"고 했다. 또 "당시 민관공동위원회는 '한일 청구권 협정이 양국 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 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 협정에 의해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보도 자료를 통해 분명히 밝혔다"고 했다.
한일 청구권 협정 내용을 살펴보면, 애초에 일본의 배상금에 개인 청구권이 포함돼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일본이 강제 동원 피해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법원도 이 부분을 착안했다.
"청구권 협정 협상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 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했고, 이에 따라 한일 양국의 정부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관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제 동원 위자료 청구권(개인 청구권 - 기자 주)이 청구권 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청구권 협정의 일방 당사자인 일본 정부가 불법행위의 존재 및 그에 대한 배상 책임의 존재를 부인하는 마당에, 피해자 측인 대한민국 정부가 스스로 강제 동원 위자료 청구권까지도 포함된 내용으로 청구권 협정을 체결했다고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2018년 10월 대법원 판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