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집 행복 배달부 박권용 집사
성경책을 꽉 짜 한마디로 표현하면 ‘사랑’이란다.예수님의 말씀처럼 그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는 박권용 집사(50·대구 중앙로교회 안수집사)는 헐벗고 굶주린 이웃을 위해 사랑으로 만든 자장면을 ‘쓱쓱’ 비벼주는 평범한 중국집 아저씨다.
대구시 남구 봉덕동에 위치한 ‘동해반점’.그곳에는 간판 하나가 더 걸려있다.‘실직자를 위한 무료 급식소’.IMF 외환위기 이후 직장을 잃고 절망에 빠져 사는 실직자와 노숙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삶의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다.매일 오후 1시면 어김없이 이곳을 찾는 단골들.주인장 박집사는 “많게는 하루 40여명의 노숙자들이 와서 자장면 한그릇을 싹 비우고 간다”고 말했다.
“니 어제는 어데서 잤노?”“대구역이라예”“가서 좀 씻그라이”
선뜻 5000원짜리 지폐를 건네주는 박집사는 노숙자들의 큰형님같다.
찢어지게 가난해 봤기에 그들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박집사.그는 경남 합천의 ‘깡촌’에서 태어났다.세살 때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새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손버릇이 나쁜 아이로 자랐다.결국 초등학교를 중퇴한 박집사는 자식을 버린 어머니를 찾기 위해 열한살 때 집을 나와 대구로 도망왔다.돈 한푼 없어 쓰레기통을 뒤져가며 허기를 채웠던 그는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서글픔보다 추위와 배고픔을 더 견디기 어려웠다.
박집사가 자장면을 처음 맛본 것은 철공소에서 일하며 야식을 먹을 때였다.자장을 엄지손가락으로 찍어 ‘쪽쪽’ 빨아먹는데 다른 사람들은 나무 젓가락으로 비벼 먹고 있었다.눈치껏 먹어본 그날의 자장면은 입안에서 짝 달라붙어 살살 녹았다.그 달콤한 맛을 잊을 수 없었던 박집사는 당장 철공소를 그만 두고 당시 화교가 경영하던 중국집에 취직했다.
그러나 박집사는 이때도 소매치기 습관을 버리지 못해 여러 번 쫓겨날 뻔했다.손님에게 가져가야 하는 만두를 하나 집어먹고 시치미를 떼다 주인에게 얻어맞는 일은 예사였다.쌈박질도 잘해 하루에도 몇번씩 사고를 쳤다.그런 그가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17세 때였다.
배달부 시절 달동네를 오르는데 한 여자아이가 실수로 사가지고 가던 연탄을 깨뜨리고 울고 있었다.연탄을 한장씩 사다가 때는 가난한 동네에 사는 그 소녀는 연탄 한장 때문에 목놓아 울었고 그 모습을 보던 박집사의 마음이 울렁거렸다.그는 주인에게 맡겨뒀던 두달치 월급을 몽땅 털어 소녀집에 연탄 50장을 사서 들여놓았다.그후 소녀와 그 어머니는 박집사를 보면 깍듯이 인사했다.“매일 욕만 먹고 맞기나 하던 내가 ‘고맙다’는 인사를 받다니…”
그는 생전 처음으로 사람대접을 받았다는 생각에 뛸듯이 기뻤다.그리고 그 날 박집사는 거울을 보며 다짐했다.“이제 내는 이 손으로 남을 도우며 살란다”
이후 박집사는 직접 만든 자장면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걸인과 장애인,깡촌의 할아버지 할머니,가출 청소년,전과자와 술주정뱅이.그는 “내가 만든 자장면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했심니더.부자나 거지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자장면을 똑같이 좋아했지예.나보다 좀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장면으로 인정을 나눌 수 있게 돼 참 즐거웠심니더”며 박집사는 자장면에 담긴 그의 철학을 이야기했다.
이웃들에게는 늘 푸짐했던 박집사는 그러나 유독 가족에게는 냉랭했다.27년전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아내 구영숙 집사(47)를 만나 결혼하고 ‘명월반점’이란 이름으로 개업한 박집사는 매주일 부부싸움을 했다.한창 바쁜 점심시간을 앞두고 교회에 간 아내가 밤 늦도록 오지 않았다.당시 신앙이 없었던 박집사는 그런 아내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내와 살면서 20여년동안 영적싸움이 치열했심니더.저는 교회에 가지 말라고 다그쳤고 그럴 때면 아내는 죽기살기로 대들었지예.절대 교회는 빠질 수 없다고 말입니더.그러다 제가 꿈을 꿨지요.꿈속에서 제게 누군가 말했심니더.‘교회에 가라.너의 착한 행실을 통해 너를 크게 쓸 것이다’라고예.그때가 바로 1990년이었심니더”
아내와 함께 교회에 처음 나간 날 목사님은 “도둑질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을 전했다.박집사는 문득 지나간 과거를 더듬으며 남의 물건을 훔쳤던 두 손을 내놓고 하나님께 매달렸다.“저의 이 더러운 손을 깨끗하게 씻어주소서”
이때부터 그의 삶은 전도에 초점이 맞춰졌다.그는 자장면을 먹기 위해 오는 걸인들에게 매주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1만원을 손에 쥐어주고 “목욕하고 내일 교회에 온나”고 말했다.또 역전 등을 돌아다니며 노숙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헌금하라며 지폐를 건네기도 했다.
그는 또 어려운 교회 목회자들이나 개척교회,농어촌교회를 돕는데 앞장섰다.선교후원금을 꼬박 보내고 있으며 특히 보육원이나 양로원 등지를 돌면서 직접 자장면을 만들어주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다.
박집사는 특히 아내가 모르는 비밀통장을 만들어 어려운 신학생이나 수술비가 모자라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다.신문 등을 통해 이같은 사연을 접하면 그는 바로 비밀통장에서 150만∼200만원에 달하는 큰 돈들을 꺼내 얼굴도 모르는 이들에게 송금했다.그가 이렇게 지난 2년간 무통장 송금으로 남을 도와준 금액이 무려 7400여만원에 달한다.
“자장면 팔아 남는 것 하나 없데예.마누라는 매주일 십일조 내고 음식 재료 사고,월급 주고나면 살림 꾸리기도 빠듯하다고 심통이라예.제 비밀통장 돈은 강사비를 모은 것이라예”
초등학교 중퇴란 최종학력에도 불구하고 박집사는 전국주부대학,공무원연수원 정신교육,육군안보교육,경찰관 정신교육,교도소 정신교육,전국중·고등학교 정신교육,대학 인생교육 전문 강사로 뛰고 있다.1주일의 3∼4일은 강의 다니느라 정신없다는 게 박집사의 설명.이렇게 바쁘게 돌아다니면서도 그는 그 흔한 자동차 한대 굴리지 않고 있다.
“하나님이 주신 건강한 두 다리가 있는데 차가 무에 필요합니꺼.차라리 그 돈 갖고 급식소 하나 더 운영하는 게 낫지예.내가 책가방은 짧아도 청와대도 가봤고 자랑스런 시민상도 받았지예.더 이상 바랄게 없심니더”
지난 30년동안 노숙자와 장애인들,소외된 이웃들에게 사랑을 배달하는 철가방 자장면 박사로 살아온 박집사.그는 요즘 하나님이 내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셨다며 즐거워했다.대학생인 두 아들이 목회자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나선 것.10세를 갓 넘긴 어린 자식들을 앉혀놓고 “느그들은 배부른 목회자보다 검소하고 이웃들을 보살피는 따뜻한 목회자가 되그라이”하며 누누이 ‘잔소리’를 해왔다.박집사는 “내 뜻을 아들들이 이해해줬으니 내도 더 열심히 봉사하며 살란다”고 다짐한다.
그는 “이제 내 마지막 목표는 천국 가서 하나님에게 칭찬듣는 것 뿐”이라며 “내가 못 배웠으니 배움의 기회를 가지려고 애쓰는 젊은이들을 더 많이 도와주고 싶다”며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