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리 홀트 여사 / 사랑의 반찬 나누기 운동 /빵 나누어 주기/ 2002-07-27 09:20:05 read : 2909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말리 홀트 여사
"말리 언니 만나러 오셨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어눌한 말투지만 붙임성 있게 말을 건네는 그 사람은 거동이 불편한 어린아이를 돕느라 부산하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낯선 방문객에서 관심을 보였다. 그가 가리킨 작은 건물이 '말리의 집'이었다. 그 집까지 길지 않은 길을 걷는 동안 이렇게 웃으며 말을 붙이는 사람을 여러 명 만날 수 있었는데 그들 모두는 '말리 언니'를 꼭 닮아 있었다.
홀트아동복지회(회장:김근조)에서 말리 홀트 이사장은 '말리 언니'로 통한다. 그는 지난 45년간 이곳에서 장애인, 고아들과 함께 살아온 미국인. 홀트아동복지회의 설립자인 홀트 부부의 큰 딸로 지난해 버다 홀트 여사가 세상을 떠난 이후 홀트를 지키고 있다.
지난 56년 간호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간호사로 한국에 온 말리 홀트 이사장, 그는 이제 68세를 맞았다. 우리 자신도 잊고 지내는 50년대의 모습을 기억하는 파란눈의 할머니에게 있어서 한국은 '제2의 고향'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각별한 곳이다.
말리 홀트 이사장의 부모인 해리 홀트 버다 홀트 부부가 한국을 찾은 것은 55년, 전쟁의 흔적이 이 땅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있을 때였다. 미국에서 평온하게 살던 그들로 하여금 한국행을 결심하도록 한 것은 배고픔에 시달리는 한국 전쟁 고아의 모습. 밥 피얼스 박사의 강연회에서 우연히 접한 다큐멘터리 필름에 담긴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가 홀트 가족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말리 홀트 이사장은 한국을 도울 사람을 찾는 밥 피얼스 박사의 간곡한 목소리에서 "주님의 뜻"을 발견했다. 그는 이후 직접 한국에와 살면서 부모의 일을 도왔을 뿐 아니라 여러 지역의 고아원에서 일했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위생적이지 못한 환경 속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애썼다.
지쳐서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 적은 없었을까. 그는 "그런 경우가 몇 번 있었다"면서 그야말로 "번 아웃(burn out)되었을 때 한 일은 공부"라고 덧붙인다. 그리고 그는 미국에서 특수교육 등을 공부하며 '재충전'을 한 후엔 어김없이 한국에 돌아와 다시 일을 시작했다.
이제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입양기관으로 성장한 홀트에 더 이상 전쟁고아는 없지만 미혼모의 버려진 아이들, 특히 가족들조차 돌보기를 포기한 중증장애인과 고아들이 많다. 이들은 그러나 홀트를 통해 새 부모를 만나고 가족처럼 돌봐주는 사람들을 만난다. 장애인들은 이곳에서 재활치료를 받고 교육을 받는다. 또 이중에는 기술을 배워 직업을 갖고 배우자를 만나 독립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말리 홀트 이사장은 그러나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장애가 있는 사람에 대한 편견이 심한 우리나라에서 이들을 돌보기가 쉽지 않았다고. 게다가 시설에 있는 사람들 중에도 "장애인들을 불쌍히 여기고 돌봐주면 됐지 그 많은 돈을 들여교육시키고 독립하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아 "설득하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말리 홀트 이사장이 무엇보다 "섭섭한"것은 기독교인조차도 이런 편견에 사로잡혀있다는 것. 그는 기독교인이 장애를 갖고 태어난 것을 부모나 장애인 자신의 죄와 연관짓고,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한다. "요한복음 9장을 보세요, 예수님은 우리와는 생각이 다르시다는 걸 알 수 있어요".
말리 홀트 이사장은 아울러 입양에 대한 편견 역시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우리는 하나님이 낳은 자녀가 아니라 입양된 자녀"라며 '입양(adopt)'이라는 단어가 나온 영어성경(NIV) 구절을 일일이 찾아준다. "로마서 8장 14절과 에베소서 1장 5절을 보면 사도바울도 입양이라는 말을 했다"면서.
그런데 홀트는 오랫동안 "우리 나라 아이들을 외국에 판다"는 비난에 시달려온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이런저런 이유로 버려지는 아이들은 여전히 많음에도 국내에는 입양을 원하는 부모들이 없는 상황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는 것. 또한 좀 더 근본적으로는 미혼모, 이혼, 남아선호사상 등 고아를 양산하는 잘못된 구조가 뿌리깊이 박혀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말리 홀트 이사장은 그러나, "한국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지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예전에 비해 국내 입양도 늘어나고 있고, 입양 사실을 감추지 않는 부모들도 조금씩이나마 늘어나고 있기 때문. 그에 따르면 지난 한 해 홀트를 통해 국내에 입양된 아이만도 6백명, 전체 입양의 약 30퍼센트에 이른다.
말리 홀트 이사장은 아이들에게는 '가족적인 분위기', 그리고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어떤 시설도 헌신적인 자원봉사자도 부모를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 실제로 입양아들은 대개 어느 정도 시간이 나면 생모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기 마련인데, 홀트는 이들을 최대한 돕는다.
지난 45년간 홀트를 통해 사랑의 보금자리를 찾은 아이들은 26개국, 20여 만 명에 달한다. 말리 홀트 이사장은 "앞으로도 불쌍한 아이들을 돕는 일을 계속할 것"이라면서 홀트를 종합복지센터로 발전시키겠다는 "큰 꿈"을 소개한다. 그래서 우는 아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다양한 차원의 일들을 해나가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홀트로 인해 살아갈 이유를 찾은 사람들, 홀트가 있어서 외롭지 않은 사람들은 앞으로도 점점 많아질 것이 분명하다.
임원진 wjlim@kidokongbo.com
◈ 전문 사회 복지 기관 홀트아동복지회
홀트아동복지회(회장:김근조, 이사장:말리 홀트)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 홀트 부부가 12명을 입양 알선하면서 활동을 시작, 45년간 서울 본부와 11개 지방아동상담소, 일산복지타운, 홀트학교, 영아원, 종합사회복지관, 어린이집 등을 운영하며 입양프로그램, 장애인복지, 가족 및 지역사회 복지 등 다양한 복지프로그램을 운영해온 전문적인 사회복지 기관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고아가 된 혼혈아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담은 기록영화를 보고 입양사업을 결심한 홀트 부부는 이미 6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지만 한 가정에 2명까지만 입양을 허용했던 미 난민구호법의 전례를 깨고 식구 수대로 8명의 한국고아들을 입양했다. 그들은 이를 위해 의회 앞에서 캠페인을 벌였고 미국의회에 '홀트법안'이라고 이름붙여진 ‘특정 전쟁고아들의 구제를 위한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줎
1955년부터 약 45년간에 걸친 홀트아동복지회 제1세대의 사명은 사회적으로 전쟁, 빈곤, 질병 및 이로 인한 가족해체에 따른 아동보호가 중심이었다. 이 시기는 시대적으로도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긴급구호, 치료적 방법이 강조되던 때였다. 그러나 버다 홀트 여사의 별세 이후 시작된 제2세대의 사명은 아동보호와 치료적 사회사업에 더불어 정보화 사회, 지식기반의 무한경쟁사회에서 당면할 수 있는 다양하고 새로운 사회문제에 대한 사회복지적 접근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홀트는 복지대상에 대한 시각 또한 아동을 중심으로 하되 장애인, 청소년, 노인 등에까지 확대하며 활동영역도 국내는 물론 세계화, 남북화해의 노력에 부응하여 북한지역을 포함한 나라 밖에도 관심을 기울이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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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반찬 나누기 운동
성북구하월곡동에 홀로 사는 박금자 할머니(76세). 약 50여 년을 홀로 살아온 험난한 세월은 그녀의 얼굴에 깊은 주름을 만들어 놓고 건강하던 육신은 어느덧 홀로 밥상을 차리는 것조차 힘겨운 노구(老軀)가 돼 버렸다.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고행(苦行)이던 일상.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생면부지의 청년들이 찾아와 일주일치 반찬을 가져다 주기 시작했다. 반찬을 가지고 오는 청년들은 할머니 방에 앉아 말벗이 되기도 하고 몸져 누워있을 때는 병원에 데려가기도 했다.
박금자 할머니에게 반찬을 전해주는 이들은 생명의전화종합사회복지관(이사장:신익호, 관장:하상훈)의 사회복지사 김태웅(32), 김주희(24)씨.
지난 13일 사회복지사들이 문밖에서 "할머니"하고 부르자 할머니는 다짜고짜 덮석 손부터 잡는다. 그러면 이들은 방에 들어가 할머니가 준비한 요구르트를 먹고 가야 한다. 고마움에 대한 보답으로 할머니가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요구르트 한병이 고작이지만 김태웅, 김주희씨에게는 이보다 맛있는 음료수가 없다.
"얼마나 잘해주는 지 몰러. 생면부지 남인데 누가 이렇게 해줘. 고마울 따름이지." 새파랗게 젊던 26살에 남편과 사별하고 시댁에서 '겨나 근 50여 년을 파출부, 막노동 등으로 겨우 연명해 온 박 할머니에게 이들이 가져다 주는 것은 도시락, 그 이상이다.
서울 하월곡동 생명의전화종합사회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사랑의 반찬 나누기'는 지난 1994년부터 국제기아대책기구의 후원을 받아 성북구 10개동에 거주하는 독거노인, 소년·소녀 가장 등을 위해 일주일치의 반찬을 만들어 전달하는 사업.
그러나 이 일도 지난 1998년 IMF사태가 터지면서 국제기아대책기구의 지원이 끊기게 돼 사역이 중단될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 결식 노인과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힘겹게 나마 도시락을 지원해주는 일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또한 지난 1998년 하월곡동 지역의 배달봉사를 맡아주던 봉사단체에서 사정상 봉사를 중단하게 돼 또 한번의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곧 한 후원자가 오토바이를 기증해 산동네 골목골목 누비며 반찬을 배달할 수 있게 됐다. 지금 타고 다니는 오토바이는 코미디언 이홍렬씨가 김태웅 사회복지사와 둘만 알자며 익명으로 기증한 것. 이 오토바이 배달로 김태웅씨는 이미 하월곡동의 명물이 됐다.
김태웅 사회복지사는 "반찬을 받으시면서 고마워 하시는 어르신들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미안할 수 없다"며 "후원금 모금이 어려워 약소한 반찬마저도 못드릴까봐 걱정된다"고 말한다.
이 '사랑의 반찬 나누기'는 현재 매주 10가정과 결식아동 20가정을 돕고 있으며 특별히 당뇨가 있는 환자들에게는 '사랑의 영양식'이라고 해서 당뇨환자를 위한 특별식을 배달해주고 있다.
이날오전 생명의전화종합사회복지관 지하에는 어르신들에게 전달할 음식 준비로 분주했다. 자원봉사자들은 오늘도 반찬이 오기를 기다리는 무의탁 노인들의 얼굴을 생각하면 정성을 쏟을 수밖에 없다.
자원봉사자인 백미옥(41)씨는 3년째 반찬 만들기를 해오고 있다. 그녀는 "일주일에 한번, 취미 생활을 하기보다는 봉사를 함으로써 인생이 더욱 풍성해지고 있다"며 반찬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러한 사역을 펼치고 있는 한국 생명의전화는 1973년 이영민목사에 의해 '아가페의 집'으로 시작됐다. 1976년 전화상담을 시작하면서 명실공히 우리나라 전화상담기관의 효시로서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 이후 꾸준한 성장으로 포괄적인 사역을 해오고 있다.
작은 자들이 힘을 합해 큰 봉사를 이뤄가고 있는 생명의전화종합사회복지관. 이들이 나누는 반찬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처럼 나누면 나눌수록 많아지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만들어가길 기대해본다. hmpyo@kidokongbo.com
◈ 2년째 '정성 가득한 사랑식' 만들어 온 종암교회 여전도회
생명의전화종합사회복지관에는 이웃에게 나눔과 섬김의 정을 전하려는 자원봉사의 손길이 많다. 정서적인 돌봄은 물론, 의식주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앓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돌보고 있다. 그 중 식(食)에 해당하는 사랑의 반찬나누기와 노인무료급식 봉사에서 종암교회(류종상목사 시무) 여전도회원들의 희생정신은 더욱 빛을 발한다.
종암교회 여전도회는 매달 첫째주 노인무료 급식을 담당, 결식 노인들이 맛있는 식사를 하도록 정성스럽게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결식노인들은 2년간 매달 첫째주 종암교회 여집사들의 손맛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종암교회의 봉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당뇨환자들을 위한 영양식을 준비하기 위해 3명의 여집사들이 자원을 한 것. 신순이(46) 김미정(41) 최원선(41)집사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지난 2월부터 매주 수요일 까다로운 당뇨병 환자의 식탁을 책임진다. 오늘의 반찬은 오이 소박이, 건파래무침, 두유, 잡곡밥 등 당뇨에 좋은 채소, 해조류, 곡물류로 이루어진 식단이다.
모두 가정을 가진 이들이 이렇게 헌신적으로 봉사하기는 쉽지 않은 일. 왜냐하면 당뇨식은 개인 식단에 따라 그램 수까지 정확하게 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기도 중에 낮고 천한 자를 위해 오신 예수의 마음을 확인하고 예수의 삶을 조금이나마 몸으로 실천하고자 이 일을 시작했다.
이들 중 맏언니 신순이집사는 "연약하고 작은 분들을 도울 수 있다는 기쁨에 힘든 줄 모른다"며 "결국 이들을 돕는 일로 나에게 변화가 일어나는 기적을 확인하곤 한다"고 겸손해 한다.
무료급식소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김복희(78) 할머니는 "우리는 여기를 노인들의 하늘나라라고 부른다"며 "이렇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닌 힘든 일을 해주는 봉사자들에게 감사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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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속 가득 '하나남 나라' 담아 전하는 김만철 목사
여주읍에는 아직도 5일마다 장이 선다. 5일장이 서면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 묘사된 장터의 풍경이 펼쳐진다. 인근 이천, 장원, 양평 등지에서 집에서 다듬은 고사리며 취나물을 벌여 놓은 노인들, 자판에 인형들을 벌여놓고 어린이들을 모으고 있는 장사치, '뻥이요' 소리와 함께 터지는 폭발음과 귀를 막고 선 아이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정겨운 모습들이 여주읍에는 아직 남아 있다.
손님이 없어 지루한 오전 시간이 지나고 오후가 되면 장터에는 어느새 물건을 사러온 손님들로 북적거린다. 정신없이 물건 값을 부르고 손님들과 실갱이를 벌이다보면 장터에 나온 장사치들은 점심 끼니를 잊는 때가 허다하다. 이들 중 더러는 돈을 아끼려고 굶는 이들도 있다.
매월 5일장이 설 때마다 한우리교회(김만철목사 시무)의 교인들도 아침부터 덩달아 바쁘다. 장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외로운 노인들에게 '사랑의 빵'을 나눠줘야 하기 때문이다.
오후 12시가 다가오면서 김만철목사는 교회에 모인 여집사들을 태우고 농협건물로 향한다. 오늘의 멤버는 김만철목사와 부인 최연희씨, 김해분집사, 홍병순집사, 한기호집사 등 모두 5명. 도착하자마자 준비해 간 빵과 두유를 책상 위에 벌여놓고 기도를 시작한다.
"주여, 오늘도 늙고 외로운 모습으로 오시는 당신을 섬기게 하시고 나눔으로 인해 더 풍성해지는 기적을 체험하게 하소서"
'아멘'과 동시에 '사랑의 빵' 나누기가 시작된다. 선뜻 빵을 받기가 쑥쓰러운 노인들은 주변에서 쭈뼛거리고 눈치만 본다. 그러면 여집사들이 재빠르게 다가가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하면서 빵과 두유를 쥐어준다. 이런 일이 한 두번 있고 나서는 이제 모여드는 노인들로 김만철목사와 교인들은 눈코뜰 새 없이 바쁘다.
한우리교회 교인들이 여주읍 농협건물 앞에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사랑의 빵'을 나누기 시작한 것은 1997년 5월부터.
그 당시 김만철목사와 함께 성경공부를 하던 성도들이 말씀을 읽고 배우는 데 그치기 보다는 실천을 해보자는 의도로 시작됐다. 봉사를 위해 준비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시험삼아 재정이 떨어질 때까지만 하자던 이 일이 성도들의 후원으로 5년째 이어져 오고 있다. 그렇게 근근이 이어져온 '사랑의 빵' 나누기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계속됐다.
김 목사는 "IMF가 시작되던 때라 나누는 것에 인색한 시기였지요. 그래서 기독교인들마저 세상을 따라가서는 안될 것 같은 생각에 무작정 시작한 겁니다"라고 '사랑의 빵' 나누기가 시작된 이유를 설명한다.
'사랑의 빵'을 나누는 5년 간 고작 빵 한개와 두유 하나를 받고 연신 고맙다며 장터에서 팔려고 가져나온 옥수수를 내미는 할머니, 비가 오는 날 고생한다며 우산을 가져다 주시는 어른들을 만나면서 김만철목사와 성도들은 봉사자만이 느낄 수 있는 뿌듯함과 새로운 힘을 얻는다.
반면에 웃지 못할 해프닝도 많았다. 몇 해전 선거철에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어떤 후보측에서 나왔냐"며 빵 나누기를 제지하기도 했다. 또 빵을 나누다 보면 "저 사람은 부자인데 빵을 나눠주느냐", "저 사람은 두번 받았갔다"는 등의 항의를 자주 받는다. 행여 젊어보인다는 이유로 빵을 주지 않을 때는 토라져서 흉을 보는 경우도 있다.
최연희씨는 "어른들이 그거 먹어서 배부르겠어요. 그저 늙어서 외로운 인생에 우리 같은 사람이 관심을 가져준다는 것에 더 의미가 있겠지요"라며 "어떤 일이 일어나도 섬기는 자세에 서면 미소를 지을 수 있다"고 전했다.
여주는 불교가 융성한 곳이라 실륵사 등 유명한 사찰이 위치해 있으며 대순진리회의 본부가 위치해 있는 곳이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과 같은 단순한 구령만으로는 전도가 힘든 곳이다. 그래서 이들이 하는 봉사 사역은 더욱 귀중하다.
김만철목사는 '사랑의 빵' 나누기 이외에도 소외된 이웃을 향한 관심이 다방면으로 뻗어있다. 자신이 소아마비 3급 장애인이기에 소외된 이웃의 어려움에 누구보다 민감하다.
부모를 사고로 잃은 세자매를 집으로 데려와 한가족처럼 살기도 하고 여주 내 도자기 공장에서 임금을 받지 못한 외국인 노동자를 돕고 있기도 하다. 한편 여주 기독교사회복지센터의 복지원장으로 봉사하고 있기도 하다.
5년간이나 지속되고 있는 '사랑의 빵' 나누기. 아직까지도 가시적이거나 획기적인 결과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만족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고 묵묵히 예수의 뜻을 따라 소외된 이웃들을 돌아보고 있는 그들의 사역은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라듯 하루하루 여주읍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열매를 맺어가고 있다.
hmpyo@kidokongbo.com
◈ 좋은이웃선교회 박홍원 목사
젊은이들이 대부분 도시로 떠나버린 여주 장터에는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는 촌노(村老)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대부분의 노인들이 그렇듯 이들은 한두가지씩 노인성 질환을 앓고 있다.
재산이 넉넉하지 못하거나 의지할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더 심한 질병이라도 앓게 되면 이들이 겪게 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질병을 앓고 있는 노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자리에 누워 지내야 하기 때문에 생활 중 빼놓을 수 없는 목욕의 기회를 얻기가 매우 힘든 실정.
좋은이웃선교회의 박홍원목사(49세·금당제일교회)는 이러한 지체부자유자들을 위해 생명보험협회의 지원을 받아 이동목욕차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현재 저소득 중증장애인과 고령 노인들을 주대상으로 10개 읍면 1백14명의 환자들에게 목욕차의 목욕시설을 제공하고 있다.
중증장애인이나 고령 노인들을 목욕시키는 것은 각기 다른 가정환경, 신체 상황, 생활능력, 성격 등을 고려해 알맞은 서비스를 해야 하기 때문에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봉사이다.
먼저 사전 방문으로 환자를 살펴 의사의 목욕방문 허가를 받아야 하고 목욕에 따른 온도 자극, 육체적·정신적 부담 등을 고려해야 하며 아울러 체온, 맥박, 호흡, 혈압 등도 체크해야 한다.
번거롭고 힘든 일임에도 불구하고 박 목사는 "어려운 이웃에게 조금이나마 기쁨을 줄 수 있어 행복하다"며 "목욕이 끝난 후 말끔해진 노인들의 얼굴을 보면 단번에 모든 피로가 가신다"고 말한다.
그가 담임하고 있는 금당제일교회는 10평도 안되는 조립식 건물에 성도 수가 채 10명이 안되는 영세한 교회이다. 넉넉치 못한 생활로 가끔 기름값조차 없는 경우가 있다.
그래도 박 목사는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통해 엘리야에게 음식을 공급해 주셨던 것처럼 꼭 필요할 때는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며 걱정하지 않는다.
소속 교단이 합동측인 박 목사는 "얼마 전에도 교단을 초월한 도움의 손길이 있어 어려움을 면했다"며 "이러한 사건들로 나 혼자만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전한다. 본교단 작은교회(이용혁목사 시무) 제자훈련 5기생들이 타월 1백장을 기증한 것을 비롯, 사랑의교회(신상현목사 시무)에서도 얼마 전 도움의 손길을 보내왔다.
좋은이웃선교회에서는 목욕봉사뿐 아니라 홀로 외롭게 생일을 맞는 무의탁 노인들을 방문해 생일을 축하해 주기도 하고 이발과 민원서류대행, 반찬 제공 등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서로 아껴주고 이해하는 이웃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는 박홍원목사와 좋은이웃선교회의 봉사자들. 이들은 진정한 섬김을 통해 환자의 몸뿐 아니라 성공지상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 물든 우리들의 마음을 씻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