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삶 2002-07-29 19:26:29 read : 3180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 : 골1:19-25 성찬식 02.6.30
초대 교부 크리소스톰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하라는 로마 황
제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는 황제의 령을 듣지 않아 체포되었습니
다. “그놈을 독방에 처넣어라”“아니 되옵니다. 기도교인들은 독방
을 더 좋아합니다”“왜 그런고?”“조용한 기도실로 여기기 때문입니
다”
“그러면 잔인무도한 악당들이 있는 곳에 집어넣어라”“그것은 더욱
더 아니 되옵니다. 악당들을 전도하여 기독교인으로 만들 것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끌어내어 목을 쳐라”“폐하! 그건 더 아니 되옵니
다”
“왜 그것도 안된단 말이냐?”“기독교인들은 순교를 최상의 영광으
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도 헛일이옵니다. 그들은 순교할 때 울지도
않사옵니다. 오히려 얼굴에서 광채가 납니다”
“그러면 그놈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냐!”
순교란 "그리스도를 위하여 피를 쏟으면서까지 그리스도를 증거하
는 것"이고 이와 같은 행위를 하는 자를 '순교자'라고 합니다. 헬라
어 마르투스는 '증거'라는 뜻입니다. 행22:20에 보면 "주의 증인 스데
반의 피를 흘릴적에"라고 했는데, 여기 "증인"이란 말을 "순교"라고
번역해도 무방합니다. 스데반은 초대교회 집사로서 자신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구세주이심을 증거 하다가 유대교
에 철저했던 유대인들에게 끌려가 예루살렘 밖에서 돌에 맞아 죽었습
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를 순교자라 부릅니다.
그러면 왜 순교하는가? 계6:9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
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죽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순교의 이유를 말
합니다. 순교자는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다가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말
씀이 인생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사로잡히면 그 말씀을 떠나
는 어떤 행위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붙잡게 되고 그
말씀을 지키려고 순교하기까지 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얻은 구원의 은
혜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죽음과 바꾸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이럴 때
에 우리는 그들을 향하여 순교자라고 부릅니다.
스데반은 자기 동족으로부터 돌에 맞아 죽었고, 초대교회의 교부
들의 순교는 로마 황제 예배를 거부했다가 당했습니다. 그리고 게르만
족의 침입으로 300년 동안 엄청난 기독교 순교자가 발생했고, 종교개
혁 당시에는 재세례파와 개혁자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초대교회에서는 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순교자
는 정확한 통계를 낼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전남 영광에 가면 염
산교회가 있는데 6.25때 공산군들에게 77명이 순교를 했고, 야월교회
는 영수를 비롯한 65명이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순교했습니다. 제암
리 교회는 21명이 순교를 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성도들이 순교하는 가운데 흘린 피로 말미암아 오늘
의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교회가 세워진 것은 반드시
거기에는 순교자적인 믿음생활을 한 분들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과 같이 물질의 풍요로움과 생활의 편리함과 끝없이
펼쳐지는 향락과 지상낙원이라는 이상적인 가치관들이 지배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과연 순교자적인 삶이 있는가? 물어보
지 않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나라 같이 교회를 세우기
에 어려움이 없는, 아파트 단지가 계발되면 으레껏 종교부지가 따로
마련되어 분양이 되어 교회가 먼저 세워지고, 종교 부지가 아니라 하
더라도 교회가 어느 곳이든지 쉽게 세워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렇다 보니 예수를 믿는데 별로 어려움을 겪지 못할 뿐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경우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오늘날은 성경책이 많이 출판되고 기독교 신앙서적이 서점에 즐비
하고 설교는 마음만 먹으면 들을 수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들을
수 있고, 잠을 자다가도 들을 수 있고, 인터넷을 통해서 유명하다고
하는 분들의 설교를 마음껏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에
게 그리스도의 정신, 말씀이 자리잡고 있는가 하는 것을 깊이 새겨보
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성도들에게 전한 내용의 말씀
입니다. 이 내용을 간추려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예수님 안에 살면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과 화평케 되기를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육체
의 죽으심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게 하심으로 책망할 것이 없는 의로
운 자로 부르시어 하나님 앞에 서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
기 위해 우리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심을 기념하기
위해 미리 유월절 만찬 시간에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즙을 준비하여 나
누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 날 만찬의 떡과 포도즙은 다른 날의 것과
는 달리 그것은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찢기신 살이었고, 옆구리와
두 손과 양발에 찔리신 창과 못 자국으로부터 흐른 피를 상징했습니
다. 이것은 곧 예수님의 인간을 위한 고귀한 희생이요, 영생의 나눔이
요, 평화의 자리입니다.
바로 이 복음이 천하 만민들에게 전파되었고, 그것이 사도 바울에
게까지 전파되어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렇게 전파된 복음의 일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일꾼인 바울
에 의해 전파된 복음이 유럽과 미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파되었고,
그 복음이 98년 전에 칠곡 지역에 전파되어 오늘의 우리 교회가 세워
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 복음을 믿어 구원을 얻었습니다.
할렐루야!
지금까지 이 복음을 위하여 피를 흘린 자들의 수가 얼마인지는 모
르지만 그 모두의 피값으로 오늘 나에게 구원이 있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새삼스럽게 생각하지 않
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유월을 마지막 보내면서 혹시라도 우리가
잠시 월드컵에 도취되어 나의 신앙을 있게 한 거룩한 피를 흘리며 순
교한 분들을 잊어버렸다면 오늘 다시 한번 기억할 뿐 아니라 주님이
허락하신 예전을 통하여 선교자적인 삶을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대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순교자가 될 수는 없
는가? 있다면 순교자로서의 삶은 어떤 삶인가?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복음의 일꾼 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받는 괴로움은 오히려 기뻐하
고,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
우는 심정으로 감당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고난을 싫어합니다. 조금만 어려워도 일을 하지 않으
려고 합니다. 몸이 힘들면 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면 그것
을 싫어합니다. 헌신하는 시간이 많아지거나 헌물하는 액수가 많아지
면 시험이 먼저 찾아옵니다. 어렵고 힘든 봉사는 하지 않으려고 합니
다. 사도 바울처럼 구원받을 사람들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다면 오히
려 그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성도가 나로 하여금 신앙에 성장이 있고
보다 나은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면 내가 좀 희생하더라도 그것을 기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은 목회를 하면서 혼자 갈등할 때가 많습니
다. 토요일에 갈등을 합니다. 오늘은 토요일이니까 말씀 준비한다고
모든 일을 뒤로 제쳐두어도 될 것인가? 즉 심방은 다음 주간으로 미루
고 말씀만 준비할까? 아니면 심방을 하고서 할까? 그러나 한 주간 세
미나를 다녀오는 사이에 어린 동욱이가 세상을 떠났고, 이경미 집사님
의 친정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수술받고 입원해 있는 성도, 어려
운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입원해 계시는 분들도 있기에 오전부터 심방
을 했습니다. 물론 다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직접 심방하지 못
한 가정에는 전화로 심방을 했습니다. 힘들지만 그래도 심방을 하고
나니 훨씬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내가 좀 힘들어도, 잠이 좀 부족해
도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삶이 순교자적
인 삶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 사회에서는 복음 때문에 생명을 죽는데 내어주는 경우
는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순교자적인 삶이란 그리스도의 정신
으로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순교자의 삶은 자신 중심의 삶이 아닙
니다. 오직 주님 중심의 삶이요, 주님 중심의 삶이란 바로 복음을 전
하기 위해 자신이 고통을 받는 삶입니다. 자신이 희생하는 것입니다.
나의 작은 이웃을 위해 하는 일, 나의 작은 지체인 어린 생명을 위해
서 하는 일, 나와 함께 지체가 된 교회성도를 위해서 하는 모든 일은
곧 주님의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 있습니다. 십자가는 결코 인간
의 일반적인 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우리
가 병들어 고생을 하든가, 혹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 하든가, 아니
면 살아가면서 당하는 이런저런 고난을 가리켜 십자가라고 말하지 않
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잘못해서 가난하게 살면서도 '십자가를
진다' 그러고 제 실수로 욕을 먹을 때도 '십자가를 진다' 고 합니다.
결혼을 잘못하여 남편에게 시달려도 '십자가를 진다'고 합니다. 물론
다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힘든다고 해서 다 십자가는 아닙니
다. 십자가는 결코 일반적인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자기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나의 십자가입니까?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바른 길, 의의 길입니다. 의의 길에서 당하는
고난과 아픔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현세적인 출세, 또는 세속적인
것, 욕망 다 잊어버리는 것, 이런 포기가 순교자적인 삶입니다. 결국
은 사랑의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10장 35,36절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
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
니까? 예수 믿으면 무조건 부모와 자식이 싸워야하고 며느리와 시어머
니가 다투어야 된다는 의미이겠습니까? 그런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를 믿으면 이제는 이전처럼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의 뜻
을 따라야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표
준으로 삼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마저도 거슬리게 할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가족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사
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원수가 될 수
도 있습니다.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사람과 화목해야 합니다. 특별히 그리
스도인은 가족을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이 일에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그러나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
오. 부모님을 사랑한다고 해서 제사를 지내라고 하면 지낼 것입니까?
아무리 부모님을 사랑해도 제사지낼 수는 없지요. 귀신을 섬기는 것인
데 어떻게 제사를 지냅니까? 이것이 아픔이 되고 고통이 됩니다. 바
로 그 아픔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려고 하다가 당하는 불편함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
해 고통과 고난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잘 믿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진
정 예수 잘 믿는 것은 이 평안한 시대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바른 길을 가고, 의의 길을 좇을 때 거기 많은 불편함이 있
습니다.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따르기 위해
내가 져야할 십자가요, 그 아픔이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일종의 순교
자적인 삶입니다.
현대를 가리켜 가치혼란의 시대라 합니다. 무엇이 옳은가? 대부분
상대적입니다. 절대적 가치관이 상실되고 있습니다. 즉 삶의 표준이
없는 시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도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만연해 있습니다. 적당하게 다 타협해 버리고, 여기서는 이렇
게 저기서는 저렇게 편리한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니 십자가가 있을 리
가 없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좇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7장 13,14절에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했고 좁은 길
을 가라고 했습니다. 좁은 문에서 좁은 길로 이어집니다. 좁다는 말
은 제약이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런 제약 없이 예수 믿고 있다면 좁
은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좁다는 말은 또한 험하다는 뜻입니
다.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것은 험하고 어려운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 주님을 보다 더 사랑하는 것, 더 사랑하기 때
문에 어느 결정적인 순간에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아픔이 곧 십자가라는 말씀입니다. 이 십자가가 오늘의
순교입니다.
벧전2:20-21절에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
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
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 장로는 우리가 부름받은 것은 복음을 위하여 고난받는 삶
을 살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의 고
난을 받으신 것은 바로 당신을 위하여 나를 위하여 받으셨다고 했습니
다. 이유는 그것을 보고 따라오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
것은 바로 십자가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 십자가에 예수님이 죽으
신 것처럼 우리가 죽어지는 삶, 이것은 곧 순교자적인 삶입니다. 순교
자의 길을 걷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부름에 응답
하신 성도 여러분! 오늘의 여러분의 삶은 어떤 삶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은 사도 바울처럼 오직 주님
을 위해 남은 고난을 채우는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목사님이 어떤 정
신으로 살았는가를 옥중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 잘 나타
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파도 곤란해도 핍박을 당해도 괴로움을 당해도 기뻐하십시오.
아버님 편지에서와 동인 어머니의 편지를 보오니 외롭고 서러워하시
며 슬픔의 눈물로 세월을 보내신다 하니 인정상 도리로서는 듣기에 매
우 가슴이 아프고 동정의 마음과 죄송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사오나 영
생의 소망을 가진 우리 신자의 생활과 소위 믿음이 있다고 소문난 손
장로님의 가정이 삼 형제를 주님의 사자로 내보내어 놓고 가정의 고통
을 참고 견디지 못하고 믿음으로 위로를 받고 살지 못한다면 우리의
예수를 믿어 복되다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나가서 믿음 없는 자에
게 향하여 예수님을 믿으면 금생과 내생에 복된 생활됨과 어떤 환경에
서라도 평강 한 마음의 은혜를 받게 된다고 강단에서 어떻게 외치며
길거리에서 어떻게 가르치게 될까요? 우리가 물질에서 가난해도 신령
한 은혜로는 풍부해야 되겠고 겉 사람은 후패하고 괴로워도 속 사람
은 기쁘고 날로 새로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삶을 이미 우리에게 떡과 포도즙을 통하여 주시는
것을 받아먹는 저희들이 단순한 의식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이 떡을
먹고 포도즙을 먹은 후의 삶은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명, 나를 일꾼 삼으신 복음의 일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
음의 일꾼된 삶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 보셨습니까? 여러분이
순간순간 주님의 말씀 때문에 포기해야 할 것이 어떤 것들이었습니
까?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몽땅 주셨습니다. 이분
께 여러분은 무엇을 내어놓으시렵니까?
혹시라도 예수믿는 것 때문에 직장에서 진급이 늦어지거나 기회
를 잃어버린 분 계십니까?
돈벌 기회가 왔으나 말씀을 순종하여 공의롭게 처신하다가 부자
될 기회를 잃은 분 계십니까?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여러분이 손해보고 양보하고 자신의 권리마
저 주장하지 못하고 죽어지내는 분 계십니까?
얼마든지 잘먹고 잘입고 좋은 보석으로 치장하고 보다 크고 넓은
집에 살 수 있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닐 수도 있으나 예수님 때문에 그
렇게 하지 않고 살아가시는 분 계십니까?
얼마든지 입씨름을 할 수도 있고, 화낼일이 있어도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여러분이 참고 양보하며 포기하면서 사는 분 계십니까?
잘 하셨습니다. 바로 그렇게 사는 삶이 순교자적인 삶입니다. 나
를 죽이는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가족이나 전토
를 버리는 자가 여러 배를 받게 되고 영생을 얻게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신앙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기뻐하는 삶이 되시
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