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적인 노인대학 운영으로 유명한 김세중 목사 2002-08-06 14:05:12 read : 3666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가없는 하나님의 사랑 함께 나눕니다”
‘아들보다 더 나은’ 노인대학 학장님
김세중 김해 활천제일교회 목사⑤
경남 김해시 삼방동 활천제일교회는 매주 목요일이면 전국 각지에서 몰려오는 방문객들로 붐빈다. 바로 활천제일노인대학의 운영을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배우려는 목회자들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노인목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노인들로부터 “아들보다 더 낫다”는 평을 듣는 김세중 목사의 참사랑 실천 이야기.
‘노인대학생’ 허성심 할머니의 목요일
목요일 아침. 김해시 삼방동에 사는 허성심(72) 할머니는 마음이 바쁘다. 바로 오늘이 손꼽아 기다리던 ‘학교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며느리의 정겨운 배웅을 받으며 동네 노인정으로 나간 허할머니는 이내 도착한 셔틀버스를 타고 친구들과 인사를 나눈다.
몇몇 노인정에 들러 학생들을 가득 태운 버스는 마침내 활천제일교회에 자리잡은 노인대학에 도착했다. 이 버스 말고도 11대나 더 되는 버스가 학생들을 내려 놓느라 길거리는 혼잡하기 그지없다. 학생들이 모두 교회 본당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자 담임목사이자 노인대학 학장인 김세중 목사님이 경건회를 이끈다. 허할머니가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목사님의 말씀 하나하나를 메모해 두었다가 나중에 며느리에게도 들려준다.
경건회가 끝나자 허할머니는 자신이 다니는 영어학과로 가서 수업을 듣는다. 이미 3년 동안 다녀 ‘졸업’했지만 평생수강권을 졸업 기념으로 받아 영어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졸업할 때는 대학생들과 똑같이 가운과 학사모를 쓰고 일일이 목사님으로부터 졸업장을 받았다. 그때 목사님에게 영어로 편지를 써 보냈더니 목사님이 너무 기뻐하셔서 우쭐했던 기억이 새롭다.
수업이 끝나는 오후 1시. 즐거운 점심시간이다.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는다. 영양사가 짜준 식단에 주방 아주머니들의 정성이 깃들여서인지 밥맛이 각별하다.맛있는 식사가 끝나자 집으로 돌아가는 친구들을 배웅하고 허할머니는 교회 바로 곁에 있는 무료 진료센터로 가서 한의사에게 진맥을 해본다.
무료 진료소에는 내과·치과·한의원 등 김해 시내에서 쟁쟁한 의사 선생님들이 와서 무료로 진료해 주어 노인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바로 곁에는 머리 손질을 할 수 있는 이발소와 미용실이 있다. 역시 뜻있는 자원봉사자들이 노인들의 머리를 매만져 준다. 법률상담을 할 수도 있는데, 아직 거기까지는 이용해본 일이 없다.
노인대학 성공으로 유명세
목요일과 일요일 두차례 열리는 활천제일노인대학은 김세중 목사가 지난 1997년 문을 열었다. 1984년, 이곳이 허허벌판이던 시절 10명의 교인과 함께 시작했던 다락방교회는 지금 재적신도 4,100여명에 달하는 큰 교회로 성장했다. 그 중 1,800명이 노인대학에 다니다 신앙을 갖게 된 노인들이다.
김목사가 5년째 심혈을 기울여 운영하는 이 노인대학은 이미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매주 목요일이면 전국 각지의 교회에서 목회자들이 달려와 노인대학의 운영을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하며 배운다. 또 각종 목회 세미나에서는 김목사를 강사로 모시기 위해 일정을 다툴 정도다. 지난 5월에는 김목사가 미국을 방문해 LA·시카고·샌프란시스코 등지를 돌며 순회 강연과 세미나를 통해 교민사회에도 소개, 뜨거운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복지 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도 활천제일노인대학은 초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것.
그러나 노인대학을 중심으로 한 목회를 하기 전에는 김목사도 무명의 평범한 시골교회 목사에 불과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의 목회 방법에 대해 통렬한 자기반성을 거친 후 새로운 목회자로 다시 태어났다.
“당시 왜 우리 교회가 이렇게 부흥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 첫번째 이유는 전도 방법이 잘못됐기 때문이더군요. 길거리에서 전도지를 나눠 주고 교회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이미 100년전 초창기 때의 방법입니다. 주인과 종, 남존여비 등 신분적 제약과 경제적 궁핍 등으로 삶의 의욕을 잃은 소외계층에게 ‘예수 믿으면 잘 산다’ ‘예수 믿으면 인간대접 받는다’ ‘예수 믿으면 죽어서 천국 간다’는 것으로도 통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런 방식은 통하지 않죠. 두번째로 그동안 언론을 통해 교회에 대한 좋지 않은 보도가 계속됐고, 이것이 마치 기독교의 전부인 것처럼 오해를 사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이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지금까지는 저의 목회는 하나님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하나님뿐만 아니라 ‘네 이웃’도 사랑하라고 했는데 이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 이웃에 사랑을 나눠 주는 목회를 하자, 그러자 누구를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더군요.”
여기서 그는 할아버지·할머니를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았다. 당시 김해는 신개발지이자 공단이 있어 맞벌이 부부가 많았다. 30대 초·중반 인구가 전체의 65%를 차지할 정도였다. 많은 젊은 부부들이 ‘부산에서 전셋돈이면 김해에서는 우리집’이라는 매력에 끌려 김해로 몰려오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젊은 부부가 생계를 위해 맞벌이를 나가다 보면 어린 자녀를 놀이방이나 유치원에 맡겨야 하는데 금전적 부담이 너무 컸다. 결국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아이를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시골의 부모님들은 전답을 정리하고 도시로 이사를 오게 됐다. 이런 연유로 지금도 김해 시내에는 노인정이 362곳이나 있고 전체 34만명의 시민 중 60세 이상 노인이 2만2,000명이나 된다.
그가 노인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5∼6년전. 당시 김목사는 미국 맥코믹 신학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지역사회학을 배우면서 처음으로 노인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때 마침 지도교수이자 부총장인 월리 박사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제자인 김목사가 시무하고 있던 김해까지 일부러 찾아왔던 것.
제자의 안내로 이곳저곳을 둘러본 월리 박사는 “미국 교회의 부흥은 지역사회와의 유대가 튼튼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의 부흥은 기대하기 힘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때까지도 피상적으로 노인문제를 이해하고 있던 김목사는 이 말에 두 눈과 귀가 번쩍 뜨였다고 한다.
“그동안 저는 말로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한다고 했지 행동이 없었습니다. 길거리에서 전도지를 나눠 주고 새로운 사람들이 교회로 찾아오기를 기다렸죠.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만 했지 우리 이웃에 나눠줄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를 깨닫게 되자 우리 동네에 노인들이 아주 많이 산다는 사실이 새삼 떠오르더군요.”
지역사회와 밀착해야 교회도 부흥한다
“노인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 부흥 프로그램을 한번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 서자 그는 곧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먼저 2인1조로 팀을 짜 김해 시내에 있는 노인정을 모조리 방문해 노인들의 생활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절과 암자가 무척 많은, 말하자면 불교동네였다.
때문에 마을 주민들은 애초에 교회가 들어서는 것도 무척 완강하게 반대했다. 특별임무를 부여받은 전도요원들은 무려 2년 반에 걸쳐 시내에 있는 26개의 노인정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노인들에게 ‘좋은 말동무이자 친구’로 다가갔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되자 이번에는 노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6개월 동안 더 세세하게 조사했다.
“노인들은 사회와 자식들로부터 완전히 외면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식처럼 대해 주는 우리 전도요원들과 가까운 사이가 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죠. 또 하루 종일 할 일 없이 지내야 하는 일상생활의 무료함을 해소해 줄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그래서 무언가 마음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기회를 갖고 또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해 뭔가 새로 배울 수 있는 ‘노인대학’을 열기로 결심했죠.”마침내 1997년 11월30일, 그동안 사귀었던 노인들을 교회로 초대했다. 그러나 막상 교회에 도착한 노인들은 “예수 믿으라”고 권유할 것이라는 지레짐작으로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김목사의 회상-.
“그동안 정이 들었는지 교회로 노인들을 초대하자 일단 900분 정도가 오셨어요. 교회 본당 안으로 모셨죠. 처음으로 교회에 들어와 보는 분들도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조심스러운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노래를 불렀습니다. 찬송가요? 아니죠, 유행가를 먼저 불렀죠. 맨 처음에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 다음에 ‘동백아가씨’ ‘짝사랑’…. 교회에서 유행가를 부르니까 ‘별 희한한 목사 다 있네’하는 표정으로 쳐다봅디다. 이런 식으로 계속 분위기를 잡아가자 노인들도 마침내 마음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는 김목사는 무척 감개무량한 표정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우리 교회에서 노인대학을 하게 됐으니 많이 나오십시오”하고 알렸다.
‘노인대학은 종교에 관계 없이 운영한다’는 대원칙을 세운 그는 개교 한달 전부터 교인들을 철저하게 교육시켰다고 한다. 노인들이 혹시라도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해 노인대학을 한다’고 오해하지 않도록 언행을 극도로 조심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 때문에 그는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목회에는 철저한 연구와 준비가 필수적이라고 재삼 강조한다.
쉬운 예를 하나 들어 보면 자기 이름을 모르는 노인들이 의외로 많다는 점이다. 노인대학에는 수시로 입학하도록 하고 있는데, 새로 입학한 학생에게 자기소개를 시키면서 이름을 물어보면 “몰라~” 하는 할머니들이 제법 많다고. 아예 “나는 이름이 없어”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열 몇살때 시집와 택호로 불리다 아이를 낳은 후에는 아이의 이름으로 불리고…. 그러기를 무려 50년이 넘으니 이름을 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금방 기억하지 못하던 노인들도 한참을 끙끙거리다가 이름을 기억해내면 모두가 박수를 치며 환영한다. 이 과정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한다.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 자리인 데다 큰 박수까지 받게 되면 ‘이곳은 나를 알아주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에 정을 붙이고 학교에 꼬박꼬박 나오기 때문이라는 것.
항상 소외감을 느끼던 노인들을 위해 지난해부터는 ‘할아버지·할머니의 날’을 제정해 기념하고 있다. 5월이 되면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이 계속 이어지지만 할아버지·할머니를 위한 기념일은 없어 그렇잖아도 외로운 노인들이 더욱 소외감을 느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6월8일과 11월3일 두번을 할아버지·할머니의 날로 정하고 봄에는 소풍, 가을에는 운동회를 치른다. 올 봄에는 노인학생 1,000명과 도우미 100명이 경주 여행을 다녀왔다. 지난해 가을 운동회 때는 무려 2,300명이 참가해 김해 실내체육관이 비좁을 지경으로 성황을 이루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