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그리고 사역 2002-08-06 14:56:46 read : 3202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여기서 순서를 보라. 예수님은 고독에서 공동체로 그리고 사역으로 나가신다. 너무나 자주 나는 혼자 무슨 사역을 하려고 했다.
“제자”(disciple)와 “훈련”(discipline)은 같은 말인데 이 사실이 항상 나를 흥분하게 만든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작정했다면 우리는 훈련된 삶을 살아야 한다.
“훈련”이라는 말은 통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영적인 삶에서 훈련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행동하실 수 있는 빈 자리를 만드는 노력”을 말한다. 훈련이란 당신의 삶이 무엇으로 꽉 채워지는 것을 방지하여, 영적인 삶에서 당신이 계획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았던 무엇인가가 일어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제자가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제자로 남아있기 위해서 충실하게 지켜야 할 세 가지 중요한 훈련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훈련은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 않는 성경의 한 곳인 눅 6:12-19에 기록되어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및 그 형제 안드레와 및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및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및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이 구절은 밤에서 아침으로 또 낮으로 진행되는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예수님은 밤에 하나님과 단 둘이 시간을 보내셨다. 아침에 주님은 사도들을 주변에 모으시고 공동체를 형성하셨다. 오후에는 사도들과 함께 나가셔서 말씀을 전파하시고 병을 고치셨다.
여기서 순서를 보라. 예수님은 고독에서 공동체로 그리고 사역으로 나가신다. 너무나 자주 나는 혼자 무슨 사역을 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잘 안되면 다른 사람에게 가서 “제발 도와 주세요”라면서 공동체를 찾았다. 만일 그것도 되지 않으면 그제야 기도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그 반대이다. 주님은 하나님과의 조용한 시간을 먼저 보내시고 그 다음에 함께 소명의 삶을 사는 공동체를 만드시고 그 다음에 공동체가 함께 나가서 고치시고 복음을 전하셨다.
고독, 공동체 그리고 사역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자리를 만들어 드려야 하는 세 가지 훈련장이다. 만일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이 행동하시고 말씀하실 장소를 만든다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당신과 내가 제자가 되려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훈련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고독(solitude)
고독은 오직 하나님 한 분과 함께 있는 것이다. 당신의 삶 속에 그러한 자리가 있는가? 왜 당신이 산 위에서 오직 하나님 한 분과 보내는 시간이 중요한가? 거기서 당신을 “내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란 하나님의 음성이 당신 존재의 중심에 들리게 하여, 그 음성이 당신 전체에 울리게 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사랑 받는 자이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나오셨을 때 바로 이 음성을 들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사랑을 받는 자이신 것과 같이 우리도 사랑을 받는 자라고 당신과 나에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기 때문에 일생 동안 바른 길을 걸으셨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칭찬하고, 조롱하고, 찬양하고 거절하며, 호산나라고 부르고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부르짖었지만 주님은 중심에서 한 가지를 알고 계셨다. “나는 사랑 받는 자이다. 나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요 기뻐하시는 자이다.” 주님은 그 음성을 붙드셨다.
세상에는 시끄럽게 떠드는 다른 소리들이 많이 있다. “네가 사랑 받는 자라는 사실을 증명해 봐라.” “네가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증명해 봐라.” “무엇인가 타당한 것을 해 보아라.” “당신을 위하여 이름을 내소서.” “적어도 어떤 능력을 가져야 사람들은 당신이 놀랍고 위대한 자인 것을 알 것이다.”
이러한 음성들이 세상에서는 위력을 발휘한다. 예수께서 “너는 내 사랑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바로 직후에 이런 음성들을 들으셨다. 또 다른 음성이 있었다. “네가 사랑 받는 자인 것을 증명하라. 이 돌들을 변하여 떡 덩이가 되게 하라. 네가 유명한 것을 믿으라. 성전에서 뛰어내리라. 그러면 네가 유명해질 것이다. 참된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 권세를 잡으라.” 예수님은 “아니다, 나는 무엇을 증명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이미 사랑 받는 자이다”라고 대답하셨다.
나는 렘브란트가 그린 “돌아온 탕자”를 사랑한다. 아버지는 그의 아들, 그의 딸을 껴안고, 만지시며 말씀하신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자다. 나는 어떤 질문도 하지 않겠다. 네가 어디에 갔든, 무엇을 했든, 사람들이 너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든, 너는 나의 사랑을 받는 자이다. 나는 너를 내 품에 안전하게 껴안고 너를 만진다. 나는 너를 나의 날개 아래 안전하게 품는다. 너는 그 이름이 긍휼이고 그 이름이 사랑인 나에게로 돌아왔다.”
만일 이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당신은 크게 실패하든 크게 성공이든, 당신의 아이덴티티(정체성)를 잃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의 아이덴티티는 바로 사랑 받는 자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부모나, 형제 자매, 교사나 교회가 당신에게 상처를 주거나 사랑하기 훨씬 이전에, 당신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거나 또는 비난 받기 훨씬 이전에, 이 음성은 늘 거기 있었다. “나는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한다.” 그 사랑은 당신이 태어나기 이전에 있었고 죽고 난 이후에도 있을 것이다.
오십, 육십, 칠십, 또는 백년의 삶도 “주님, 저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에 비하면 짧은 순간일 뿐이다. 하나님이 구유 안에서, 십자가 위에서 너무나 상처를 쉽게 받으시고, 너무나 보잘 것 없으시고, 너무나 의존적이 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애원하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정말로 나를 사랑하느냐?”
그곳이 바로 사역이 시작하는 곳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자유가 당신이 사랑 받는 자임을 주장하는 데 닻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신에게 세상으로 가서 사람들을 타치하고(touch), 치유하고, 그들과 대화하며, 그들로 하여금 그들도 사랑 받고 택함 받고, 축복 받은 자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당신 자신이 얼마나 깊이 사랑을 받고 있는가를 알게 될수록 당신은 인류 가족 안에서 당신의 형제 자매들이 얼마나 사랑 받는가를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비밀이다.
그러나 이것은 쉽지 않다. 예수님은 밤을 기도로 보내셨다. 기도가 당신이 늘 느끼는 어떤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자명한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당신이 귀로 듣는 음성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갑자기 당신의 조그마한 마음으로 들어오는 통찰이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의 마음보다 넓으며, 하나님의 정신은 인간의 정신보다 크며, 하나님의 빛은 너무나 강렬해서 당신을 눈멀게 하고 당신이 밤 속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은 기도해야 한다.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는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확인과 칭찬과 성공을 구걸하려고 온 사방으로 돌아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오, 만일 우리가 하루에 단지 반시간 만이라도 앉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복음의 단순한 한 말씀 예를 들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 . 그것을 세 번 말하여 보라. 그러면 우리는 그것이 참이 아닌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족한 것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참된 진리를 말하고, 그 진리가 당신의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가게 하고, 그 말씀들이 점점 당신의 속 사람의 심비에 새겨지게 하라. 이곳이 바로 동료나 일, 가족, 친구, 그리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장소이다.
문제는 기도하기 위해 앉아서 조용해지자 마자 당신은 “오, 이걸 잊었군,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그를 만나야 해,” 등을 생각하게 된다. 자리에 앉아서 조용한 가운데서 하나님이 당신에게 말씀하시도록 신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이런 음성을 통해 세상의 온갖 것들을 담을 수 있는 빈 장소를 만들 수 있다.
고독은 영적인 사역이 시작되는 곳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신 곳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이다.
가끔, 나는 인생은 많은 (차 바퀴의) 살을 가진 마차의 바퀴라고 생각한다. 바퀴의 중간에는 중추가 있다. 우리는 자주 모든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바퀴의 테두리를 돌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추에서 시작하라. 그러면 너는 모든 살과 연결되어 그렇게 바쁘게 다니지 않아도 될 것이다.”
공동체
하나님과 교제를 가지는 중추에서, 우리는 공동체로의 부름을 발견하게 된다. 고독을 통해 공동체로 나가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공동체라는 말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가족, 친구, 구역, 여러 가지 훈련 프로그램, 기도 그룹 등을 의미한다. 공동체는 어떤 조직이 아니라 삶의 방법이다. 당신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라는 진리를 함께 선포할 사람들을 당신 주위로 모이게 된다.
공동체는 쉬운 것이 아니다. “공동체란 전혀 같이 살고 싶지 않은 사람과 같이 사는 것”이라고 어떤 사람은 말했다. .” 예수님의 열 두 사도의 공동체에는 주님을 배반하게 될 사람이 끼여 있었다. 어떤 공동체에도 그런 사람이 끼여 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일 수도 있다.
공동체 이전에 고독이 먼저 오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임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공동체 속의 누군가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어 주기를 기대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에게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기를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는 “나는 너무나 외롭다, 너도 또한 외롭다”라는 식으로 외로운 자가 외로운 자를 붙드는 곳이 아니다. “나는 사랑 받는 자요, 너도 사랑 받는 자요, 우리는 함께 가정을 이룰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고독과 고독을 통해서이다
공동체의 훈련에는 용서와 축제의 훈련이 있다. 결혼이든, 친구이든, 아니면 다른 공동체의 형태이든, 용서와 축제를 통해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용서란 무엇인가? 용서란 다른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 것을 허락하는 것이다. 용서란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신은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필요가 없다. 어떤 인간도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상처를 가지고 있다. 우리 모두가 너무나 많은 고통 속에 살고있다. 그것은 모든 성공 후에 스며드는 외로움, 모든 칭찬 뒤에 숨어있는 무용감(無用感), 사람들이 우리를 대단하다고 할 때조차도 느끼는 무의미 등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을 붙들고 그들이 줄 수 없는 호의와 사랑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마귀가 된다. 우리는 “나를 사랑해 달라!” 라고 말하며, 당신이 깨닫기 전에 이미 사납고, 지나치게 요구하고, 남을 쥐고 흔들게 된다.
우리가 서로를 계속해서 용서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삶의 매 순간에 이루어져야 한다.
당신을 조금 밖에 사랑하지 않는 사랑을 용서하는 것은 어려운 훈련이다. 또한 다른 사람을 조금 밖에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계속 나를 용서하기를 바라는 것도 어려운 훈련이다.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조금만의 사랑을 주어도 되도록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그것은 어려운 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용서하고 지나치게 요구하지 않은 곳에서 공동체가 시작된다.
이곳이 바로 공동체의 두 번째 훈련인 축제가 들어오는 곳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만이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주지 못하는 형제를 용서할 수 있다면, 당신은 그 사람의 은사를 기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이 베푸는 사랑은 “내가 너희를 먼저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반영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와, 참으로 아름답구나!” 라고 축하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공동체인 “새벽”(Daybreak)에서 우리는 용서를 많이 해야 한다. 그러나 그 용서의 한가운데에 축제가 있다. 이 속에서 우리는 사회에서 어둠의 자식들로 여겨지는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본다. 용서와 축제를 통해, 공동체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은사를 찾아내어 칭찬해 주고,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 받는 딸이요 , 사랑 받는 아들이다”라고 말하는 장소가 된다.
다른 사람의 은사를 높여주는 것은 서로에게 “피아노를 잘 치시네요,” “노래를 참 잘 하시네요”와 같은 작은 칭찬을 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달란트를 자랑하는 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은사를 높인다는 것은 서로의 인간 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웃을 수 있고 “어서 오세요”라고 말할 수 있으며, "많이 드시고, 즐기세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의 눈에 상심해 있던 사람들에게 갑자기 생명이 가득 차게 된다. 왜냐하면 당신 자신의 아픈 마음이 그들을 통해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거부’(self-rejection)의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 “나는 좋지 않아. 나는 쓸모 없어. 사람들은 정말 나를 좋아하지 않아. 나에게 이러한 영향력이 없다면 그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성공하고 유명해졌지만 속으로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두려움에 젖어 사는 사람들이 있다. 공동체의 삶을 통해 사람들은 연약함을 드러낸 체, 서로 용서하고 서로의 은사를 축하하면서 살 수 있다.
나는 “새벽 공동체”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나의 진정한 은사는 글을 쓰는 것이나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이 아니었다. 성공도 모르고 책도 많이 읽지 않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줄 충고가 있어요. 당신 자신이 쓴 책을 좀 읽어보세요”라고 말했다. 이들은 항상 내 속에 있는 나의 조그만 이기적인 태도와 행동을 용서할 수 있었다. 이런 것을 통해 나는 치유될 수 있었다.
사역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은 사역하도록 부름 받았다. 사역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역이란 비록 당신이 많은 것을 하지만, 당신이 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사역이란 당신이 맡기는 어떤 것이다. 만일 당신이 사랑 받는 자이며, 당신과 공동체를 함께 형성하는 사람들을 끊임 없이 용서하고 그들의 은사를 높이 평가한다면 당신은 이미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종류의 복잡한 일들을 하심으로써 사람들을 치료하신 것은 아니다. 그분으로부터 능력이 나가서 치유한 것이다. 그분은 “십분 간만 나로 하여금 말할 수 있게 하라. 그러면 내가 여기에 관해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분을 만진 모든 사람은 나음을 입었다. 왜냐하면 그분의 순수한 마음으로부터 능력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그 한 가지만을 원했다. 그분은 완전히 순종한 자이며 항상 아버지의 음성을 듣는 자였다. 이러한 들음으로부터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나왔으며, 예수께서 보고 만지시는 모든 사람에게 그것이 퍼져갔다.
사역은 당신이 그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나 딸이라면 능력이 당신으로부터 나와서 사람들이 치유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나가서 병자를 치유하고, 뱀을 밟으며 죽은 자를 일으키라”는 것은 결코 사소한 말씀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하는 것을 너희도 할 것이요 또 이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보내어진 것처럼 너희도 고치고 낫게 하기 위해 세상에 보내어진다”라고 정확하게 말씀하셨다.
치유의 능력을 믿으라. 만일 당신이 사랑 받는 자로 산다면 당신이 의식하든 하지 않든 사람들을 고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 부름에 충실해야 한다.
치유 사역은 “감사”와 “긍휼”이란 두 가지 단어로 표현될 수 있다. 흔히 사람들을 감사로 이끌 때 치유가 일어난다. 왜냐하면 세상은 분노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분노란 무엇인가? 차갑게 화내는 것이다. 점차적으로 부정적이 되는 것이 많아지고 곧 나는 분개하는 사람이 된다. 분노란 당신을 당신의 실패나 실망에 묶어두며 당신의 삶에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불평하게 만든다. 우리의 삶은 잃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꿈을 잃고, 친구를 잃으며, 가족을 잃고, 희망을 잃는다. 항상 이러한 엄청난 고통에 분개로 답하고자 유혹하는 위험이 있다. 분개란 우리의 마음을 굳어지게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감사하도록 부르셨다.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인자가-그리고 당신과 우리가- 고통을 겪고 영광으로 들어가야 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러한 고통이 너희를 기쁨에로 이끄는 해산의 고통인 것을 알지 못하는가? 우리가 상실로 겪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눈에 얻는 것이 되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목숨을 잃는 자는 얻을 것이다. 만일 밀알 하나가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으려니와 죽으면 열매를 맺는다.”
당신은 당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로 인해 감사할 수 있는가? 단지 좋은 것들 만이 아니라 당신을 여기까지 이끌어온 모든 것에 대해서? 그것은 크리스천이라고 알려져 있는 식구들을 만드신 하나님의 아들의 아픔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이다.
우리의 사역은 사람들이 분노에서 멀어지고 고통의 한가운데 있는 축복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미치광이 같은 세상에는 좋은 때와 나쁜 때, 슬픔과 기쁨 사이에 분명한 구분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별 차이가 없다. 고통이 있는 곳에 치유가 있고, 애통함이 있는 곳에 춤이 있고, 가난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의 고통으로 인하여 울라, 그러면 내가 바로 너희의 눈물 가운데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너희의 연약함 가운데 있는 나의 임재로 인해 감사할 것이다.” 사람들이 비록 고통과 함께 있을지라도 삶을 감사하게 하도록 돕는 것이 바로 사역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돌보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주님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고통이 있는 자는 복이 있나니 내가 거기에 있다” 라고 말씀하신다. 사역하기 위해 당신은 고통이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 때때로 고통은 겉으로는 고통이 없고 성공한 자들 속에도 숨어있다.
긍휼은 함께 고통을 당하는 것,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사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이 나인 성 과부를 보셨을 때 “이는 독자를 잃은 과부”라는 것을 아셨다. 그리고 주님은 긍휼에 의해 마음이 움직이셨다. 주님은 그녀의 아픔이 자신의 심령 속에 너무나 깊이 느껴져서 그 긍휼로 인해 그 아들을 살려서 어미에게 돌려주셨다.
우리는 가난, 외로움, 고통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보내어진다. 당신 자신을 고통의 장소로 던질 때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을 발견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라. 역사적으로 모든 사역이 그러한 비전 위에 세워졌다. 새로운 세계는 긍휼에서부터 자라나온다.
너희 천부께서 자비하심과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그것은 위대한 부르심이다. 그러나 두려워 말라. “나는 그것을 할 수 없다” 라고 말하지 말라. 당신이 사랑 받는 자인 것을 깨달을 때, 그리고 공동체에 함께 살고 있는 친구들이 당신 주위에 있을 때에,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당신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당신은 자유롭다. 나는 그것을 끊임없이 경험하였다. 내가 가난을 느낀 바로 그곳에서 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발견하였다.
바로 몇 주 전에 친구 한 명이 죽었다. 그는 나의 동창이었는데 나에게 장례 예배의 테이프를 보내주었다. 첫 설교는 작은 강에 대한 것이었다. 작은 강이 말하였다. “나는 큰 강이 될거야.” 그리고 열심히 일하였다 그러나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강은 말하였다. “나는 이 바위를 돌아갈거야.” 그 작은 강은 밀고 밀었지만 너무나 힘이 들어서 바위를 돌아서 흘러내렸다. 그러자 강은 곧 높은 담을 만났다. 이제 강은 힘을 키웠기 때문에 이 담을 계속 밀었다. 마침내 강은 협곡을 만들어서 통과할 수 있었다.
점차 물이 불어가는 강은 말했다.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밀수 있어. 나는 어떤 것을 만나도 주저 앉지 않을거야.” 그러자 엄청난 큰 숲이 나타났다. 강은 말했다. “나는 어쨌든 앞으로 갈거야. 힘을 다해 나무들을 무너뜨릴거야.” 그리고 강은 그렇게 했다. 강은 이제 힘이 세어져서 해가 내려쬐고 있는 커다란 사막 가장자리에 와닿았다. “나는 이 사막을 지나갈거야.” 그러나 뜨거운 모래가 곧 강 전체를 삼켜 버리기 시작했다. “아니야. 나는 해내고 말거야.” 그러나 강물은 곧 모래 속으로 다 빠져 버렸다. 그리고는 조그마한 진흙 웅덩이만 남았다. 그리고는 강은 위로부터 들리는 음성을 들었다. “단지 굴복하라. 나로 하여금 너를 들어올리도록 하라. 나로 하여금 일을 넘겨받게 하라.” 강은 말했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 그러자 해가 강을 들어올려 강을 커다란 구름이 되게 했다. 해는 강을 들고 사막 위를 통과하게 하여 멀리 있는 들에 내리는 빗물 되게 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였다.
우리는 사막 앞에 서서 스스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 때가 있다. 그러나 들려오는 음성이 있다. “굴복하라. 내가 너로 열매 맺게 해주리라. 너 자신을 나에게 달라.” 당신과 나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성공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것이다. 당신 자신이 당신의 삶의 열매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
흔히 당신의 삶의 열매는 당신의 고통, 당신의 연약함, 그리고 당신이 잃어버린 것 속에서 생겨난다. 당신의 삶의 열매는 쟁기가 당신의 땅을 갈고 지나간 후에야 나온다. 하나님은 당신이 열매 맺기를 원하신다.
“남은 기간 동안 내가 얼마나 많이 일할 수 있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는 준비를 함으로써 내 삶이 열매를 맺게 할 수 있는가?”이다.
우리의 삶은 조그마한 인간의 삶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시는 자가 보시기에는 큰 존재이다.. 당신과 내가 이 땅에서 볼 수 없지만 우리는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신뢰하는 열매이다.
고독, 공동체, 사역, 이 세 가지 훈련을 통해 우리는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다. 예수 안에 거하라. 그러면 주님이 당신 안에 거하실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많은 열매를 맺고, 크게 기뻐하고, 당신의 기쁨이 온전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 저술가이자 교사인 헨리 나우엔은 토론토의 “새벽 공동체”의 멤버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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