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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의 치료
    2002-07-02 11:53:03   read : 2860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눅 10 : 30 - 37 // 2002.06.30

    지난 주일 저녁찬양예배는 참으로 즐거운 예배였습니다. 왜냐하면 제 3, 5, 10 여전도회원들이 찬양과 율동, 연극 그리고 노래극을 통해 우리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처럼 발표하느냐는 의견도 그들 사이에 있었지만, 마지막 발표가 끝났을 때 거의 모든 성도들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그리고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찬양대에 앉아있던 청년1, 2부 회원들은 일어나서 박수를 쳤습니다. 예배가 이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기에 예배를 마치며 나아오는 교우들도 이러한 예배를 계속 꾸려나갈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여러분들로 인해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 가운데 제5여전도회는 오늘 함께 읽어드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가지고 무언극을 했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대표적인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고난을 당하는 자와 이를 대하는 두 종류의 즉 지나간 사람과 도운 사람을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로 하여금 어떤 자세를 취하여야 할 지 결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비유가 끊임없이 우리의 관심을 끌고 감동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가 이 비유를 설명해 가는 동안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이 비유는 먼저 고난을 당하는 자를 소개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매를 맞아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가 참으로 위험한 길을 간 것은 분명합니다. 실제로 그 길은 험해서 강도들이 활동하는 곳이기에 ‘피의 도로’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였습니다.

    그 사람은 참으로 재수없고 억울하게 당한 사람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을 이미 본문은 예고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예수님과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의 흐름을 보면 9:51부터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예수님의 방향과 거꾸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는 구원의 장소인 예루살렘을 떠나 세속적인 장소인 여리고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예수님과는 전혀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어려움에 처할 것이 예견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한 개인의 모습을 대변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와 같은 길을 가기를 원하십니다. 같은 방향으로 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늘나라를 향한 구원과 영생의 길로 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부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구원의 장소를 떠나 자신의 욕심과 명예를 위해 세속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모습과 같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분명 멸망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강도를 만난 자와 같은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사회적 현상으로도 나타납니다. 우리 한국사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의 요청을 받았음에 불구하고 이를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정직하지 못하고 부정을 저지르는 정치는 강도를 만난 자와 같은 사회를 만듭니다. 교육에 있어서도 더 나은 꿈과 미래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이 역시 강도를 만난 자와 같은 사회일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여도 계속적인 가난이 반복되고 권력과 야합한 자들만이 잘 사는 경제를 이끌어간다면, 이 역시 강도를 만난 자와 같은 결말을 이 나라는 만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사회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두 종류의 사람이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된 그 사람 옆을 지나갔습니다. 한 종류의 사람은 제사장과 레위인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 모두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종사하는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 모두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강도를 만난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일까요? 대부분의 신약학자들은 그들의 정결예식과 연관시켜 해석하려 합니다. 즉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제단에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었음으로 정결을 유지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시체를 만짐으로 인해 부정해지면 안되었기에 그냥 지나쳤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설보다 더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이는 제사장도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사장은 예루살렘에서 제사의 일을 다 마치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도를 만난 자를 만져 부정해진다 하더라도 별로 어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얼마동안은 성전에서 일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정결을 꼭 유지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레위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자세는 종교적 정결을 핑계삼아 생명을 경시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영원성을 핑계로 오늘의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입니다. 내 이웃은 어떠하더라도 나만이 깨끗하면 괜찮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아마도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종교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사장에 대해 그렇게 비난하는 우리도 그 길을 걷고 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 대부분은 자신의 평안과 영달을 위해 하나님 앞에 나올 것입니다. 사회 속에서 내 이웃에게도 내가 교회에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은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에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무언의 기대가 우리에게 향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부담이 될 때도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예 알리지 아니하고 홀로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상의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에게 말씀해 주시는 여러 사람들의 말을 바탕으로 해 보면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있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교회인들이 사회에서 어떻게 사는 지를 구체적으로 모르시잖아요. 그래도 교회에 올 때의 모습은 어느 정도 정돈된 상태로 오는 것입니다." 아마도 사회에서 정돈되지 못한 상태로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 같습니다. 아마 세상의 사람들과 구별됨 없이 세속적이며 이기적인 삶을 사는 자세를 언급하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제사장과 레위인이 아무도 보지 않는 것을 알고는 강도 만난 자를 피하여 자신의 잘못을 숨기는 것과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오늘날 교회에 비유될 수도 있습니다. 희망과 꿈 그리고 미래가 없는 것처럼 무너지고 있는 사회에 대해 무관심을 보인다면, 이 역시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된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지나가는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마찬가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교회가 이 언덕에 아름답게 서 있는 것은 이 대구도성을 향하여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희망과 꿈 그리고 미래를 전하겠다고 겉으로는 외치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하지 않는다면 이 역시 제사장과 레위인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가는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킵니다. 그도 역시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된 사람 옆을 지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서로 미워하고 원수처럼 지내던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충격적입니다. 이 비유가 감동적이고 충격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이에 지나 자발적으로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구해주었습니다. 자기의 돈을 들여가며 더 치료해주었습니다. 기대했던 사람은 기대에 못 미치고,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이 기대 이상으로 하는 것이 감동적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살기에 그러한 느낌을 가지지 못하지만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로산(J. D. Crossan)이라는 학자는 이 비유를 ‘역전의 비유’에 분류하였습니다. 죤스(G. V. Jones)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선한 일을 행한 한 여행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사회적이고 인종적이고 종교적인 면에 있어 우월성에 대한 비판적인 선언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되었던 사람이 도움을 받게 되고, 더 하나님께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멀어져 있음을 보이고,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오히려 버림을 받는 모습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정말 기대하지 않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하는 돕는 모습은 바로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닮는 것입니다. 내가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사랑으로 감당하는 자가 바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어느 군목님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는 어렵게 사단장을 교회로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군대에서 그러하듯이 목사님은 사단장을 맨 앞자리에 좋은 의자로 모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단장이 설교에 감동을 받고 그 자리에 앉을 수가 없습니다. 대신 무엇인가 봉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시키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교회 문앞에서 주보를 나누는 것을 부탁드렸습니다. 그 다음 주일부터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습니다. 별 두 개를 단 사단장이 이등병에게까지 반갑게 맞이해 주면서 주보를 나누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군대에서는 감히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전혀 기대하거나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사마리아인의 자세를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가 사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으려고 교회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을 때 전혀 그렇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 더 기여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는 오히려 팔짱을 끼고 무관심하고 있는데, 버려진 곳의 버려진 사람들을 향하여 나아가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회의 아픔을 치료하는 사람들이 월드컵 기간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기독교계에서 좀 멀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우리 기독교인의 정서에는 맞지 않아 그러했던 사람들입니다. 바로 ‘붉은 악마’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들에게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우리민족의 가능성을 응원을 통해 응집시키고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인도하였습니다. 그들은 정치나 경제나 교육 등 여러 면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이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자부심과 가능성을 동시에 확인시켜주었습니다. 그들은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직장을 가지고, 사업을 하며, 또한 대학생으로 공부하는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름대로 매우 바쁜 사람들이었지만, 자원봉사를 통해 큰 일을 해냈습니다. 교회가 대처하지 못하고 인도하지 못한 것을 그들은 감당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여길 때 그들은 오히려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큰 일을 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저도 붉은 악마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앞으로 이 열기를 통일을 위한 서울-평양간 축구경기에 그 응원의 열기를 쏟으면 어떻겠느냐는 글을 남겨놓았습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하여야 할 것은 축구경기나 축구응원 자체가 우리에게 지속적인 효과를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제는 영적인 힘을 이 사회에 불어넣어 진정한 힘을 얻게 하는 일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을 교회가 감당하고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하비 칵스(H. Cox)는 그의 책 ‘세속도시’에서 교회의 봉사적 기능은 ‘도시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에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회의 악을 치유하고 분열과 갈등을 화해시키고, 갈라진 것을 합치게 하는 유기체적 건강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같은 교회의 봉사적 기능을 위해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그 본보기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큰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회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기대를 받고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에 못미치게 살아갈 때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기대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우리는 기대에 못 미치는 삶을 살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대 이상으로 겸손하게 그리고 헌신하는 삶을 살 때 우리도 사마리아인과 같은 모습으로 예수님의 기대를 충족시키며 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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