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지기 신앙으로 살라! 2002-07-15 16:57:36 read : 3288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창세기 39장 1-10절 // 2002-7-14
우리는 이 세상이 악해져만 간다는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세상뿐만 아니라, 교회 역시 변질되고 있다는 소리도 많이 듣습니다. 이러한 소리를 들으면 의기소침해집니다. 특별히 전도를 하다가 '요즘 교회가 얼마나 타락해 가고 있는데, 그런 교회를 다녀서 뭐합니까?'라는 소리를 듣게 되면,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 들 때도 많습니다. 실제로 교회를 다니다 보면, 세상 사람들보다 별 나은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부정부패의 현장에 성도가 있고, 때로는 살인 현장에도 성도가 있습니다. 이렇게 큰 이슈 말고도 성도들 간에도 더 심한 경쟁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남을 비판하기를 좋아하고 헐뜯기를 즐겨하며,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 상황을 볼 때, 교회에 다닌다는 것이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교회 나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그곳에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병원에 가면 때로는 악취가 진동할 때가 있습니다. 온 몸에 피를 흘리는 환자가 들끓을 때도 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올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병원이라는 곳이 그리 아름다운 곳은 아닙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몸이 아주 많이 아픈데 병원에서 나는 악취 냄새가 싫어서, 또는 그곳에서 피 흘리는 환자의 모습이 싫어서, 또는 신음소리가 듣기 싫어서 병원에 가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곳에 병든 사람들을 보살피는 의사와 간호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죄인들이 모인 곳이 교회이기는 하지만, 교회에 반드시 와야 하는 이유가 있는데, 교회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피흘려 죽으시고 삼 일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따라야 할 예수님의 삶은 어떠한 삶입니까? 많은 말씀을 드릴 수 있겠지만, 저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청지기의 삶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번 7월 한 달 동안 '청지기'적인 삶의 모습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이번 한 달간의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 스스로가 청지기적인 삶을 살고자 결단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청지기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먼저, '청지기'에 대한 정의를 내려봅시다.
성도 여러분, 청지기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4절로 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4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5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6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4절 말씀을 보면, 보디발이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았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요셉을 청지기로 삼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어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보디발이 요셉으로 하여금 자기 집과 모든 소유물을 관리하도록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청지기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바로, 청지기는 큰집의 가사를 책임지고 돌보는 사람으로써, 주인의 식탁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사람, 또 가내의 종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사람, 또 주인을 대신하여 가사의 비용을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 한 가지가 있는데, 청지기는 '종'이나 '하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청지기와 종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노예나 다름없는 '종'에게는 아무리 주인의 재산을 잘 관리한다고 해서 그에게 포상금이 주어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종'은 그 주인의 재산과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하지만, 청지기는 다릅니다. 주인은 청지기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겨 관리하도록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맡겨진 주인의 재산을 잘 관리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에게로부터 위임받은 것을 잘 관리함으로써 주인에게 상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할 경우에는 주인으로부터 해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열므나 비유나 달란트 비유를 보세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받은 청지기가 왜 주인에게 칭찬을 받았습니까? 그것은 주인이 맡겨준 재산을 잘 관리하고 이윤을 남기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받은 청지기는 왜 있는 것마저 빼앗기는 신세가 되었습니까? 이 청지기는 주인이 맡겨준 것을 잘 관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이윤을 남기려 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청지기는 관리자로써 주인의 것을 제대로 관리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요셉이 보디발로부터 받은 임무를 얼마나 잘 감당해냈는지를 알 수 있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3절 말씀을 함께 봅니다.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은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신뢰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보디발이 요셉의 행함을 보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고 계심을 깨달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6절 말씀을 보니까, 요셉이 보디발의 가정 총무로 있으니, 그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요셉은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보잘것없는 그가 청지기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해냄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존귀한 자가 됐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청지기라는 직분의 가치가 청지기인 그 자신이 얼마만큼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을 얼마만큼 잘 관리하는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즉 청지기의 가치는 '소유가치'가 아닌 '존재가치'에 의해 판가름 납니다.
성도 여러분,
이점을 잘 이해해야만 합니다. 요즘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소유가치'에 의해서 판단하며 또한 판단받기를 좋아합니다. 그가 얼마만큼 재산을 가지고 있고, 그의 배경은 어떠하며, 그는 어떤 학교를 다녔고,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등 이러한 '소유'에 근거하여 사람의 가치를 판단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사실 우리는 '소유가치'에 의해서 판단되어야 할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고 세상을 주실 때에 소유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청지로써 관리하도록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어떠한 가치로 판단되어야 합니까? 바로 청지기적인 삶을 사느냐 못사느냐에 따라 판단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청지기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삶을 제대로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판단되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판단하실 때, 여러분 자신이 얼마만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판단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니, 솔직히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을 볼 때, 소유가치에 의해서 판단하려고 합니다. 소유가치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아십니까? 이런 삶의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교만한 태도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세상을 주실 때, 소유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관리하라고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내가 가진 것이 많고 적음에 대해서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소유가 많다는 것은 관리할 것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며, 더불어 많은 이윤을 남겨야 한다는 부담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관리해야 할 때에는 관리할 것이 많고 적음에 의해서 으쓱된다거나 움츠려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얼마만큼 청지기로써의 삶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2. 성도 여러분, 청지기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청지기는 모든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히 인정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늘의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이 세상에 모든 만물을 누가 만드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늘의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이 세상에 모든 만물들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십니까? 인정하신다면, 제가 한 가지 물어봅니다. 지금 여러분의 핸드백이나 속주머니에 있는 지갑 속의 돈은 누구의 것입니까? 여러분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까? (헌금하라는 말 하지 않을 테니, 한번 솔직히 고백해 보세요.) 대답하기 곤란하시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사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이 세상 모든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않고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갑 안에 있는 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번 돈이고 더군다나 내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내 지갑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돈까지도 사실은 하나님의 것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물질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봉사할 때 그것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봉사는 '내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봉사는 내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봉사도 하나님께서 힘을 주실 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4장 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봉사할 힘을 누가 주신다구요? 하나님이.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5장 9-10절에서 "9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10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교회학교 교사로, 성가대로, 찬양단으로, 안내위원 및 헌금위원, 때로는 청소로, 그리고 그 밖에 하는 모든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봉사할 때 실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세울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닌데, 자랑할 것이 어디 있으며, 실망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소유권은 단순히 물질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봉사도 그분에게 소유권이 있음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물질과 봉사가 하나님의 소유이듯 권세와 능력 역시 하나님의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기도를 하면 즉시 병을 낫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칩시다. 그 능력은 누구의 것입니까? 내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킬 때 그들은 그 권능이 자신으로부터 나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한다"고 했습니다. 권세와 능력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럼으로, 청지기의 삶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청지기의 삶은 자신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나폴레옹이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 속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아십니까?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세상의 주인이 자기이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이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었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가 세계 정복사에 많은 업적을 남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말을 했음에도 전혀 다른 인생을 산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것-아무나 할 수 있는 말입니까? 아니지요. 세상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소리입니다. 이는 언뜻 보면, 나폴레옹이 한 말과 비슷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에게는 분명한 전제가 있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만유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두 고백에 어떠한 차이가 있습니까? 나폴레옹은 세상의 주인이 자신으로 믿었지만,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은 단지 청지기에 불과한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자기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합니다. 그러나, 청지기는 이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재물이라는 우상 앞에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치관이 소유에 있기 때문에 사람을 업신여기지만 청지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으로 청지기에게 요구되는 삶의 자세는 모든 소유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사는 것입니다.
후안 카를로스 오르띠즈(Dr. Juan Carlos Ortiz) 목사님은 오늘날 무신론에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현실이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청지기로써 당연히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면서 살아야 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내가 번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원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나만의 소유를 만들기 위해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경우까지 생기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얼마나 비일비재합니까? 반대로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는 관리하고 보존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것인데, 그들은 오히려 땅을 황폐케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야 말로 청지기 신앙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청지기 신앙을 회복할 때 소유문제로 발생되는 모든 문제를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청지기 신앙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청지기 신앙을 회복하고자 한다면, 청지기에게 가장 중요하게 요구되어지는 덕목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오늘 저는 딱 한 가지 덕목만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정직함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청지기는 꾀가 많아 일처리에 능숙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청지기는 정직한 사람입니다. 정직하지 않은 청지기는 절대로 좋은 청지기가 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청지기는 주인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고 다루어야 할 사람인데, 그러한 사람에게는 항상 유혹이 뒤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유혹뿐만 아니라 권력에 대한 유혹, 또한 성적인 유혹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동침하자는 제안을 받습니다. 물론, 보디발은 집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동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비록 주인이 모든 것을 위임했지만, 주인의 아내와 동침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못한 행동일뿐만 아니라, 주인에게도 정직하지 못한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중의 일부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 싶은 유혹을 항상 받을 수 있습니다. 정직하지 않다면 이런 유혹을 쉽게 물리칠 수 없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지 않습니까? 공금을 횡령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 아닙니까? 뇌물을 받는 것도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 아닙니까? 그럼으로 우리는 정직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성도 여러분,
정직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무엇보다도 주인이 허락한 부분만 취하는 것을 가리켜 정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부자의 재산을 관리해 주고 한 달에 3백 만 원을 받기로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우리가 주인의 재산을 임으로 이용해서 더 많은 것을 취한다면, 우리는 분명 도둑입니다.
성도 여러분,
대통령의 아들이 대통령입니까? 왜 대통령의 아들이 마치 자신이 대통령인냥 권력을 행사합니까?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도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경계(Boundary)를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럼으로, 자신의 경계(boundary)를 지키는 것-그것이 바로 정직이고, 이 정직함이야말로 청지기에게 요구되는 최고의 덕목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사람 앞에 정직하지 못합니다. 그 대표적인 행동이 무엇입니까? 모든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땅을 투자하고 생명이 있는 씨를 주십니다. 또한 그것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돌보십니다. 즉 하나님은 땅을 투자하고 씨를 제공하며 자라기에 알맞은 열과 빛을 주고 호흡할 수 있도록 산소를 공급하며 그밖에 필요한 것들을 주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혼자서 다 처리한다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는 것이라곤 고작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뿐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햇빛과 비, 그리고 종자를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떠한 소득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소득이 주어졌는데도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다면 정직하다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득의 십일조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모든 것 중에서 90%는 마음대로 하되, 나머지 10%는 그 분의 뜻대로 사용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10%마저 나의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십일조를 하나님 손에 드려야만 합니다. 십일조는 헌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정직한 행동일 뿐입니다. 종종 TV 뉴스를 통해서 상류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지방세를 납부하지 않아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를 접하게 됩니다. 그럴 때, 어떤 기분이 듭니까?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고 가로챈다면 하나님도 동일하게 느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십일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정직한 청지기가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선으로 하고 사는 정직한 사람이 십일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탈세행위와 마찬가지입니다. 성도 여러분, 청지기로써 살고자 원하신다면 모든 일을 함에 있어 정직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정직하십시오. 사람들에게 정직하십시오. 나 자신에게 정직하십시오. 그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결 론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날 사회는 소유에 대한 잘못된 견해로 인해 많은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청지기로써 살 것을 다시 한번 요구하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청지기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제껏 우리의 것으로 여겨왔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그 모든 소유권을 하나님께 돌려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그분의 소유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건강, 가족, 재산, 직장, 일터, 명예, 권력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잘 관리하면 됩니다. 정직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청지기로 살고자 한다면, 반드시 정직해야만 합니다. 대쪽같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월드컵에서 4강을 일구어낼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말할 수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히딩크 감독의 정직성이었습니다. 그는 어떠한 압력 앞에도 굴하지 않는 모습으로 선수들을 판단하고 선발함으로써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정직이 최선의 정책입니다. 사람 앞에서도 정직하세요. 하나님 앞에서도 정직하세요. 이제껏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더라면 십일조를 드리세요. 그것도 작은 실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며 정직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을 축복해주십니다.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더 큰 축복으로 이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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