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목사 김창식 2002-07-16 19:11:20 read : 2986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겸손과 순종의 머슴 목사
한국 최초의 목사 김창식
1901년 5월 14일, 한국에서 처음으로 목사가 나왔다. 서울 정동교회에서 개최된 미국 감리교 한국선교회 연례회에서 ‘집사 목사’(deacon pastor, 오늘의 준회원 목사에 해당) 안수를 받은 김창식과 김기범이 주인공들이다.
두 사람 중 먼저 안수를 받은 김창식(1857∼1929)은 선교사들로부터 ‘조선의 바울’이란 칭호를 받은 한국 개신교 개척 시대의 전설적인 전도인이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정작 그의 이름을 영문으로 표기할 때 ‘Kim Changsiki’라고 하는 경우를 종종 발견하게 되는데, 그대로 음역하면 ‘김창식이’가 된다. 유독 영문 이름 뒤에 ‘i’(이)가 따라 붙은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선교사 만행 잡으러 위장 취업
황해도 수안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김창식은 철들면서 농촌 생활에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알고, 열다섯 되던 해에 갈 곳도 모른 채 무작정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다’(창 12:1). 집안 식구 몰래 가출한 것이다.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머슴살이를 비롯해 마부, 지게꾼, 장돌뱅이 같은 밑바닥 일이 고작이었다. 15년 동안 전국 팔도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로 떠돌아 다녔다. 스물 아홉이 되어 비로소 늦장가 들어 남대문 안에 정착했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서울 장안에 떠돌던 흉흉한 소문 때문이었다. “서양 사람들이 조선 아이들을 데려다 지하실에 가둬 놓고 하나씩 잡아 먹는다더라.” “예쁜 애들은 밤에 끼고 자고, 싫증나면 자기 나라에 노예로 팔아 넘긴다더라.”
1888년 여름부터 돌기 시작한 소문이었다. 3년 전 서울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학교를 세우고 고아와 가난한 집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이를 시기한 수구파가 선교를 방해하려는 목적으로 ‘헛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흥분한 시민들은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학교와 병원에 난입해 난동을 부렸다.
학교와 병원은 문을 닫았고, 1년 전 시작된 종교 집회도 사라졌다. 선교가 중단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를 ‘영아 소동’(baby riot)이라 한다.
김창식도 소문의 진상을 파악하고자 했다. 선교사들이 조선 아이를 ‘잡는’ 현장을 잡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마침 한국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올링거(F. Ohlinger) 선교사가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김창식은 ‘행랑 아범’이라고 부르는 하인으로 출발했다. 그런 일은 이미 몸에 익숙한 것이기도 했지만, 선교사의 만행 현장을 잡기 위해 ‘위장 취업’한 직장이기에 목적을 이룰 때까지 성실하게 일했다.
평양이 ‘조선의 예루살렘’이 되기까지
김창식은 예리한 눈길로 선교사 가족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러나 그가 기대하던 만행은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선교사 가족들은 그를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대해 주었다. 올링거 선교사는 물론이고 그의 친구 선교사들은 나라님(고종)과 자주 만난다는데, 하인에 불과한 그에게 보내는 눈길과 손길은 따뜻하기만 했다. 하인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조선 양반들과 질적으로 달랐다.
그는 종종 자신과 같은 하찮은 사람에게 ‘인간 대접’을 해 주는 선교사들에게 감동했다. 그리고 그들의 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올링거 선교사는 성경을 주면서 마태복음 5장부터 읽어보라고 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시작하는 산상수훈은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성경을 읽고 난 후 개종을 결심하고 올링거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위장 취업해 들어간 지 2년 만이었다.
김창식은 세례 받은 후 전도에 나섰다. 1893년 의료 선교사 홀(W. J. Hall)과 짝이 되어 평양에 내려가 선교를 개척하였다. 보수적인 평양에서 선교사가 전면에 나설 수 없어 그가 나서 서문 밖에 선교사 사택과 병원, 학교와 교회 자리를 마련했다. 그 일로 그는 평양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평안 관찰사로 내려 와 있던 민병석은 선교사와 기독교를 아주 싫어한 수구파 인사로 평양에 기독교 확산을 막기 위해 1894년 여름 기독교인 체포령을 내렸다. 그때 김창식을 비롯해 평양의 감리교와 장로교인 10여 명이 투옥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평양 기독교도 박해 사건’이다. 평양판 ‘영아 소동’이었다.
홀 선교사는 즉시 서울에 있는 미국 공사관에 이 사실을 알렸다. 미국 공사는 조선 정부 외부에 항의하였고, 외부에서 내부에 석방을 요구하자 내부는 관찰사에게 석방을 명령함으로써 사건은 1주일 만에 해결되었다. 그때 배교를 거부한 김창식은 심한 매를 맞고 ‘거의 반 시체가 되어’(행 14:19) 실려 나왔다. 당시 평양에서 이 사건을 목격한 홀 부인의 회고다.
“홀 박사가 서울에 있는 동료들에게 전보를 치고, 그 결과 외부에서 평양 관찰사에게 모든 기독교인들을 석방하고 또 선교사들을 보호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관찰사는 교인들을 사형수 감방에 가두고 마치 다음날 사형을 시킬 것처럼 겁을 주고는 교인들을 끌어내어 배교를 강요하였답니다.
그때 우리 용감한 김창식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 5: 29)고 응답하였고, 그로 인해 아주 심한 매를 맞았다고 합니다. 그 무렵 평양 거리는 돌 투성이였는데, 석방 후에도 돌 세례를 받으며 가까스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그의 발 밑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신실한 증인의 모습을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선교사를 부끄럽게 만든 김창식의 신앙 투쟁은 평양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며칠 후 그를 매질한 관찰사는 선교사를 찾아와 사과하고 배상금을 물어야 했으며 얼마 후 좌천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평양 주민들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평양 관찰사의 위세도 선교사와 교회에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독교는 ‘치외법권’ 종교였다.
이 사건 직후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평양은 청군과 일본군의 주전장(主戰場)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평양 주민들은 대부분 성밖으로 피난 갔지만 김창식은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김창식 목사(가운데 앉은 사람)와 그의 가족
“일청전쟁 때의 일이다. 이 때 평양은 일·청 두 나라 군인의 전쟁터가 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후에 들은즉 중국 군사는 패하고 일병이 성중으로 들어온다 하여, 이 말을 들은 성중은 인심이 물끓듯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피난하는 자가 무수하였다.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조금도 두려워 아니하고 피난할 생각을 버리고 성중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의 문으로 인도함이 나의 의무임을 깨달았다. 나는 또 성중의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육신의 위로까지 줄 기회가 있었음으로 그때부터 예수 믿는 사람이 많이 생기고 교회도 몇 곳에 새로 설립되었다.” <김창식, 「나의 교역생활」(조선기독교창문사, 1927), 3쪽.>
그가 말한 ‘육신의 위로’란 전쟁 중에 교회로 피신한 사람들 혹은 성밖으로 피신하면서 교회에 맡긴 피난민들의 짐을 안전하게 보호한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전쟁 중 청나라나 일본 군대는 ‘십자기’(十字旗)를 내건 예배당을 공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병사들을 보내 보호 조치를 취하였다.
이는 교회를 공격함으로써 선교사를 파견한 미국과 영국 등 서구와 외교적 마찰을 일으킬까 우려한 때문이었다. 전쟁 중 십자기가 달린 교회는 양쪽 군대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성역’이었다. 피난 갔다 돌아와 짐을 고스란히 돌려 받은 평양 주민들이 교회를 보는 눈이 달라졌음은 물론이다.
전쟁 후엔 전염병이 돌게 마련이다. 평양에도 전염병이 창궐했다. 홀 선교사와 김창식은 몸을 돌보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러다 홀은 병에 걸려 신음하다가 결국 회생하지 못하고, 겨울 한강변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평양 사람들의 감동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희생이었다. 이런 헌신과 희생이 선교의 밑거름이 되어 훗날 평양을 ‘조선의 예루살렘’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낮은 자리, 밑바닥 목회
이후 김창식은 계속 전도하면서 신학회에 들어가 정식 목회자 수업을 받은 후 1901년 한국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4년 정년 은퇴하기까지 영변, 수원, 해주 지방을 돌며 125개 교회를 개척하였고 48개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그는 한 곳에 머물러 장기 목회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감리교 특유의 ‘순행’(巡行) 목회자였다. 열 다섯 나이에 집을 떠나 유랑 생활을 하면서 얻은 길 지식이 목회에 도움이 된 것은 물론이다. 그는 ‘길 위의 목사’(pastor on the road)였다. 다시 홀 부인의 증언이다.
“김 목사를 생각할 때 한 가지 떠오르는 가슴 저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의 어린 딸 에디스 마가렛이 평양에서 죽었을 때, 그 무렵 기차도 없었고 배편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시체를 서울로 옮겨야 했는데 김 목사가 자진해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나는 그를 믿고 딸의 소중한 시신을 맡겼습니다. 그는 관을 만들어서 지고 먼 길을 걸어 한강변 아펜젤러 목사님이 묻힌 곳, 태어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랑하는 아버지(W. J. Hall) 곁에 묻었습니다.”
선교사들은 관을 지고 평양에서 서울까지 천 리 길을 걸어가는 김창식 목사의 모습에서 지겟짐을 지고 가는 머슴의 모습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김창식은 머슴 출신으로 한국 최초 목사가 되는 신분의 수직 상승을 경험하였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낮은 자’의 겸손과 순종을 잊지 않았다.
그가 처음 선교사 집에 소개받아 왔을 때, 주변 사람들이 그를 부르면서 “어이, 창식이, 창식이!”하는 소리를 듣고 선교사들은 그의 이름이 ‘김창식이’인 줄 알고 영문 표기 때 ‘i’(이)자 하나를 더 넣은 것이다. 김창식은 굳이 그것을 빼 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낮은 자리’가 자신이 떠날 수 없고 떠나서는 안 될 은혜의 자리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