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목장 2002-06-07 19:42:59 read : 3198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 설교자:박 종 화 목사
■ 설교일:2002년 4월 14일
020414.ram(LOAD:50)
구약의 말씀: 에스겔서 34:11 ~ 15
"참으로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나의 양 떼를 찾아서 돌보아 주겠다. 양 떼가 흩어졌을 때에 목자가 자기의 양들을 찾는 것처럼, 나도 내 양 떼를 찾겠다. 캄캄하게 구름 낀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 떼를 구하여 내겠다. 내가 여러 민족 속에서 내 양 떼를 데리고 나오고, 그 여러 나라에서 그들을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이스라엘의 산과 여러 시냇가와 그 땅의 모든 거주지에서 그들을 먹이겠다. 좋은 초원에서 내가 그들을 먹이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 위에 그들의 목장을 만들어 주겠다. 그들이 거기 좋은 목장에서 누우며, 이스라엘의 산 위에서 좋은 풀을 뜯어 먹을 것이다. 내가 직접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직접 내 양 떼를 눕게 하겠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서신서의 말씀: 베드로전서 5:1 ~ 4
나는 여러분 가운데 있는 장로들에게 같은 장로로서,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앞으로 나타날 영광을 함께 누릴 사람으로서 권면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먹이십시오. 그들을 잘 감독하십시오.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진해서 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여 할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그러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변하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을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요한복음서 10:14 ~ 18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내 양을 알고, 내 양은 나를 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이끌어 와야 한다. 그들도 내 음성을 들을 것이며, 한 목자 아래에서 한 무리 양 떼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그것은 내가 목숨을 다시 얻으려고 내 목숨을 버리기 때문이다. 아무도 내게서 내 목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원해서 내 목숨을 버린다.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이것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명령이다."
--------------------------------------------------------------------------------
요즈음에는 기술 문명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세계가 많이 좁아졌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여러 곳의 소식을 들을 수도 있고, 또 자기 소식을 전할 수도 있습니다. 인터넷 게시판 하나에서 이런 것을 보았습니다. 아름다운 우체부라는 제목의 글인데, 그걸 열어보니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로스알데 힐이라는 자그마한 마을에 편지를 배달하는 집배원이 쓴 이야기입니다. 아주 작은 이야기인데, 굉장한 감동을 전해 주는 것 같습니다. 그 집배원은 편지를 배달하느라고 걸어서 또는 차를 타고 50마일을 이동하는데, 50마일은 약 80킬로미터입니다만, 편지를 전해주는 일은 좋지만, 돌아다니는 길에 풀 한 포기도 없고, 또 편지를 전해주어도 사람 쳐다보지도 않는 마을, 이런 곳을 하루에 50마일씩 돌아다니면서, 그 집배원의 가슴이 너무도 허전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좀 아름답게 하고 싶어서, 그 사람은 자기 주머니를 털어서 꽃씨를 샀습니다. 그러고 편지 하나 편지함에 넣으면서 꽃씨 한줌을 집어서 그 집 앞 길가에 뿌리고, 편지 하나 전하면 또 뿌리고 했습니다. 싹이 나고 안 나는 것은 하늘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내내 꽃씨를 뿌리고 다녔습니다. 몇 달이 지나고 나자 씨앗들 중에 일부가 싹이 나서 꽃이 피는데, 마을 사람들은 영문을 모른 채 사시사철 갖가지 꽃이 만발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삭막한 동네 전체가 갑자기 꽃밭이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드디어 마을이 꽃밭이 된 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마을 사람들은 집배원의 정신을 따라서 마을에 꽃을 심고 사랑을 가꾸게 되었고, 그래서 그 동네가 꽃마을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시사철!
작지만 참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생겨난 꽃마을은 사실 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집배원과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그 작은 마을을 아름답게 만드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구약 본문에 "목장"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목장은 다른 게 아니라 꽃이 만발하고 사랑의 마음이 풍성하게 교차되는 곳입니다. 양떼가 있어야만 목장인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모여서 아름답게 살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목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대를 우리 쪽으로 옮겨 보겠습니다. 제가 2주일 전에 여러분과 함께 휴전선 근처에 있는 도라산 역과 도라산 전망대에 가본 일이 있습니다. 판문점에 가서 볼 때는 북쪽의 대성리 마을밖에 볼 수 없었는데, 도라산 전망대에서 보니까 개성 신시가지가 보입디다. 아파트도 보이고, 새로 도시도 보이고. 그러고 나서 브리핑을 받았는데, 도라산 역도 짓고 철로도 놓은 부대의 부대장님이, 군단장인데, 나와서 이런 보고를 했습니다.
"혹자는 도로를 닦아놓았다고, 철로를 닦아놓았다고, 이제 북쪽한테 지상으로 유유히 쳐들어올 수 있는 길목을 마련해 준 게 아니냐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신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동안에, 북에서 침략을 하게 되면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것으로, 대전차지뢰, 대인지뢰, 또는 콘크리트 장애물을 터뜨려서 길을 막는 것, 뭐 이런 게 있었는데, 그것 가지고는 상당히 부족했습니다. 땅굴도 있으니까 지하로 올 수도 있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놓은 길은 위로는 사람도 차량도 물건도 다 맘대로 다니게 됩니다만, 밑으로는 그와 완전히 다른 현실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방어 체계가 다소 허술했는데, 이번에는 도로를 닦고 철길을 이으면서 방어력을 이전의 다섯 배나 증강을 했습니다."
방어의 내용이 뭐냐 했더니, 버튼을 누르면 철길이 연속적으로 터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터져서 탱크 한 대가 부서지는 정도가 아니랍니다. 길이 연속적으로 내려앉으면서 탱크 부대가 모두 수장되도록 해 놓은 모양입니다. 그러면서 부대장 하시는 말씀이 "여러분 보십시오. 철길 밑에 호수를 만들어 놓았는데, 저기에 무엇이 있습니까? 잉어 떼, 붕어 떼가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임진강 붕어가 놀고 있지만, 전시가 되면 붕어가 아니라 탱크가 거기 빠져 있을 겁니다. 길을 닦았습니다만, 우리는 이런 대책 하에 길을 닦아 놓았으니, 그래서 군부로서도 안심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주위 분들에게 전해 주십시오." 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막혔던 담을 헐고 길 하나 연결하는데,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서 그 길에다 이런 저런 장치를 하여 안보를 든든히 하는 것은 좋지만, 그 차원을 넘어서 남북을 연결할 그 길로 사랑이 오갈 수는 없을까? 그 길이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의 강퍅한 가슴을 녹이고, 하나님의 목장을 향해 가는 길이 될 수는 없을까?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남북을 잇는 철길 침목 하나 하나에 참으로 평화의 뜻을 담는다면 북도 언젠가는 변화할 것이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목장으로 들어가게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깊이 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는 "목자인 나는 내 양떼를 위해서 튼튼한 우리를 만들겠다. 이 우리에 속한 모든 양들은, 다시 말해 나를 믿고 의지하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받고 생명을 얻게 해주겠다." 이것이 목자이신 하나님, 목자이신 예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변함없이 지켜질 것입니다.
또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현재 우리 안에 있는 너희들뿐만 아니라, 우리 바깥에 있는 사람들도 내가 불러다가 내 양 우리 안에 거하게 해야 하겠다. 밖에 있는 무리들이 내 우리 안으로 돌아오는 일에 협조해 주기 바란다. 나는 반드시 그렇게 하여 이 양 우리를 구원의 동산으로 만들려고 한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이런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 교회를 사랑하셔서 우리 교회를 당신의 양 우리로 만드시지만, 이 우리 속에는 우리만이 아니라 아직 여기에 들어오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다 들어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에 여러분이 동참해주시기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베드로전서에 보면, "나는 여러분 가운데 장로로 있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종이요, 앞으로 나타날 영광을 누릴 사람으로서 권면합니다. 장로 되신 여러분, 앞으로 장로로 뽑히실 분들, 그리고 장로라고 생각하고 사는 분들, 나와 함께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십시다. 그 일을 하되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더러운 이익을 탐하는 마음으로 하지 마십시오. 지배하려고 하지 마시고, 양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장차 올 영광의 면류관을 미리 받으실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부터 야웨 하나님이 목자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양떼라고 믿고 살았습니다. 야웨 하나님 이외에 어떤 목자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야웨만이 계신다는 야웨 유일신론(唯一神論)이 이스라엘의 신론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야웨 하나님 외에는 아무 신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는 이단이 없었습니다. 유대교의 역사를 보면 이단이 나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야웨 하나님 말고 그분과 비슷한 신의 이름을 가지고 나와서 인간들을 현혹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야웨 하나님, 그분이 바로 목자입니다. 그분 이외에는 아무도 목자가 아닙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철저한 야웨 유일신 사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 이외의 다른 민족은, 다른 사람들은 이스라엘이라는 목장 속에 들어올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 버린 배타주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심하신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를 유일신으로 믿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이 놈의 목장 속에는 유대백성 아니면 아무도 들어올 수 없으니 목장을 허물어야겠다. 이스라엘의 울타리를 부수어 버리겠다. 유대주의도 무너뜨리겠다. 그래서 완전히 담을 허물고, 이방 백성들도 불러들여 다시 목장을 만들겠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목장을 가지고는 인간 구원을 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중동 땅에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싸우고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주의만 가지고는 하나님의 구원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선민의 백성이라 한들 하나님의 뜻을 담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주의 속에 세계 구원을 담을 수는 없다. 이스라엘 인종주의 속에 세계 구원을 담을 수는 없다. 그 인종주의, 그 민족주의를 허물어라. 그래서 보다 큰 이스라엘, 보다 큰 유대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성서는 제2의 이스라엘, 제2의 아담을 말합니다. 좁고 굳은 울타리를 부수고, 이방백성까지 합하여 더 큰 평화의 동산을 만들자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뜻을 받들어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왜 구세주이십니까?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성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품성을 받지 않고서는 구세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세상에 참 사람이라고 자칭하는 사람, 참된 사람으로 숭앙받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참 사람이자 참 하나님으로 숭상받는 사람은 아직은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다고 우리는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참 하나님이신 그분이, 참 목자이신 예수, 그분이 지금 우리에게 와서, 우리의 편협한 담을 헐고, 이념의 담, 민족주의의 담, 종족주의의 담, 차별의 탑을 헐고 커다란 하나님의 목장을 만들려고 하십니다. 저는 도라산에 복구해 놓은 철길이 그 목장으로 이끄는 한 길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까 샌프란시스코의 한 우체부가 만든 꽃길이 그런 목장으로 이어지는 그런 길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목자 중에는 참된 목자가 아닌 삯꾼 목자가 있습니다. 참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희생하는 목자입니다. 앉아서 받아먹는 목자가 아니라, 오히려 양떼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목자가 참 목자입니다.
2천년 기독교 역사 속에 수많은 이단들이 나타났습니다. 21세기라고 하는 지금에도 이단이 있습니다. 최고의 문명국이라고 자랑하는 미국 같은 나라에 오히려 이단종교의 수가 제일 많습니다. 유럽 같은 곳에서도 이단이 넘쳐납니다. 무식한 사람들 가운데에 이단이 많은 게 아닙니다. 유식하고 지적이고 과학적인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 최고의 부를 누리는 곳, 그곳에 이단 사설이 오히려 많이 창궐합니다. 미국의 사이비 종교사건 보셨죠? 수많은 이단 신도들이 화염 속에 싸이는 것도 보셨죠?
그런데 이단의 지도자, 목자라고 나서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나는 목자다, 나는 절대권자다 하고 내세웁니다. 그들 중 어느 사람도 자기 양떼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 목자는 없었습니다. 어느 이단 목자가 자기 목숨을 버려서 자기 양을 구했습니까?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어느 목자도 그 동안 객관적으로 신적인 성품을 받았다고 입증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지 않은 목자, 신적인 부분이 없는 목자는 미안하지만 구원의 목자는 아닙니다.
신적인 성품을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자기의 목숨을 고통 중에서 최악의 형태인 십자가에 던져서 이웃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신적인 성품을 받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자기 목숨을 희생하여 이웃을 구하지 않습니다. 신적인 성품은 무엇입니까? 신적인 성품이라는 것은 값을 받지 않고, 죄 지은 자를 위하여, 소외된 자를 위하여, 죽을 운명에 빠진 자를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제물로 바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양들을 위해서 자신을 바친 예수, 그분을 가리켜 참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참 하나님이 없는 양떼는 이단에 이끌리는 불행한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경동교회가 참된 하나님의 공동체인 것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신 신, 울어 주시는 신, 함께 고통받으시는 신, 그 신이 우리의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목자가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나는 양떼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목숨을 버리는 희생이 없는 목자는 이단이라고 제가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오늘도 수많은 이단들이 있습니다. 받으려고 하는 목자는 이단입니다. 우리한테 예수께서 부탁하십니다. "그대들도 함께 희생적으로 봉사하여라."
그러면 그 하나님의 목장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목자이신 그 목장에는 하나님이 베푸신 자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뭡니까? 그분의 이름은 야웨! 그 뜻은 뭡니까? 야웨라는 이름은 자유를 뜻합니다. 죄로부터의 자유,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소외로부터의 자유, 가난과 빈곤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모든 것에서 해방 받아서 자유함을 누리는, 자유인들이 모여 사는 목장, 그것이 하나님의 목장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목장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자유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자유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리 노예라 해도 현 노예체제하에서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은 자유인이고, 아무리 자유인이라고 해도 현 상황 속에서 불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노예다. 현 상황 속에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고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다. 그가 누리는 이 자유가 가장 큰 자유다."
자유는 의무의 보증이 있어야 합니다. 자유는 책임이라고 하는 것이 보증을 서야 합니다. 그 보증이 없으면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다 압니다. 자유에 대한 보증, 의무와 책임의 보증은 누가 서줍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는 그 보증을 서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죄악으로부터의 자유, 이 자유를 주시면서, 자신의 목장에서 풀 뜯고 물 마시며 하늘 향해 찬양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너희를 지킬 책임과 의무는 내가 지겠다." 이것이 진정한 목자의 도리입니다.
목자가 흔히 하는 일 중에 이런 일이 있습니다. 자기 양이 이리떼의 공격을 받으면, 목자는 신속히 가서 이리떼를 쫓아내야 합니다. 양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럴 경우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양으로서는 목자가 나를 이리떼한테서 구해주었으니 "감사합니다. 당신은 해방자입니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먹이를 얻으려고 했던 이리는 반대되는 주장을 펼 수 있습니다. "양을 잡아먹는 것도 자유인데, 당신은 왜 내 자유를 파괴합니까?" 이리의 항의입니다. 한 쪽은 자유를 지키게 되어 고맙다고 하고, 다른 한 쪽은 자유를 유린당했다고 난리입니다. 누구의 음성이 옳습니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희생당해서 내 몸이 찢기고 피를 흘리며 죽는 것은 구원받아야 할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이다." 생명을 위한 희생이지 죽음을 위한 희생이 아닙니다. 죽음을 위해서 예수께서 죽은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죽을 자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셨습니다.
생명을 위한 자유, 이걸 위해서 예수가 오늘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고 합니다. 현실에는 자유를 짓밟는 자유도 있고 자유를 드높이는 자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으로 향하는, 생명을 창출하는 자유가 아니면 진정한 하나님의 자유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살게 해야 합니다. 살게 하는 힘은 하나님이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오늘도 우리한테 오셔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장으로 오라고 하십니다. 생명의 목장으로 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유를 약속하십니다. 그 자유의 대가로 치루어야 할 희생은 오늘도 십자가에서 예수가 감당하고 계십니다.
생명을 은혜로, 선물로 받아 가라고 하십니다. 어찌 예수를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는 우리의 중심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한 인간 해방, 그 해방은 바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새로운 목장으로 연결되는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 생명의 길, 영원한 하늘나라로 가는 길, 그 길로 여러분을 예수께서 오늘도 초대하십니다. 그 길로 가십시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