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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물가의 여인(2)
    2002-06-18 11:46:40   read : 3101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복음 4:11-18절 // 02/06/09


    우리나라가 월드컵에서 폴란드를 꺾고 첫 승을 거둔 다음날, 어떤 음식점에서는 점심식사를 공짜로 손님들에게 제공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음식점에서는 고기를 2인분씩 식사하러 오신 손님들에게 공짜로 제공을 했다고 합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 모 집사님은 우리나라가 8강에 진출하면 교회 성가대원들에게 한턱 쏘시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저희 집 아이가 그저께 느닷없이 "엄마는 왜 성가대를 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갑자기 뚱딴지 같이 왜 성가대를 하지 않는 것을 묻느냐?"고 되물었더니 그래야 그 집사님이 한턱 쏠 때 엄마 따라 자기도 갈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한바탕 웃은 적이 있습니다.

    월드컵이 갈수록 흥미를 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흥미를 더하게 하기 위해 각 방송사에서는 아예 스코어를 알아맞히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경품을 내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방송사에서는 미국과의 경기 스코어를 알아맞히는 사람들에게 승용차를 경품으로 내걸고 있습니다. 사실 전에는 텔레비전 아래 자막으로 경품에 관한 내용이 소개되면 "도대체 어떤 사람이 저런 일에 참여를 하는 걸까?"하고 궁금해했습니다. 그런데 거의 매일 월드컵과 관련해서 경품에 대한 내용이 나오니까 은근히 '나도 한번 참여해 볼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그 날 경기의 스코어를 알아 맞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맞히기만 하면 승용차를 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하니 구미가 당기는 일이 아닙니까? 하지만 그렇게 참여하는 사람들은 한 두사람이 아닐 것이고 추첨에 당첨된다는 보장도 사실은 없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런 식으로 경품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을 보면 신기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사실 전에 음식점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복권을 몇 번 긁어본 일이 있지만 그 흔한 500원짜리 한번 당첨되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경품을 받았다는 사람을 보면 아주 특별한 사람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말씀을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셨습니다. 어떤 말씀입니까?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요한복음 4장 10절에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여인에게 '너에게 지금 물을 달라고 하는 내가 누구인줄 네가 알았더라면 내가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쉬운 표현으로 말씀드린다면 "내가 누군지 알아 맞추면 생수를 경품으로 주었을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기왕에 경품으로 내걸려면 승용차나 에어컨정도로 하실 것이지 생수가 뭐냐?"고 말입니다. 아니 예수님 정도 되신다면 아파트 한 채 정도를 경품으로 내 거시는 것이 예수님의 사회적 지위를 감안할 때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기껏 내 거신 것이 생수라니 경품치고는 너무 초라한 것이 아닙니까? 이 정도 경품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끌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생수'를 그런식으로 가볍게 취급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생수는 '샘물'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 당시 샘물은 굉장히 중요한 재산적 가치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수돗물 대신 약수를 떠서 드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정수기가 많이 보편화되어져서 가정마다 정수기를 사용하고 있지만 몇 년전만 해도 물통을 들고 물 좋다는 곳에 가서 며칠동안 가족들이 마실 물을 통에 길어서 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해서 물을 드시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비록 약수터라고 알려진 곳이기는 하지만 비가 오면 물이 많이 나오다가 날이 가물거나 며칠째 비가 오지 않았을 때 물의 양이 줄어드는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물은 식수로 사용하기엔 부적합한 물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물들은 대개 충분한 여과작용을 거친 암반수가 아니라 빗물이 웅덩이에 고여 있다가 흘러 넘쳐서 나오는 물이기 때문에 마시기엔 부적합할 뿐 아니라 대개 이런 물들은 가뭄이 심하면 금방 말라버리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샘물은 그런 웅덩이에 고여있는 정도의 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가 오는 것과 상관없이 항상 물이 솟아나는 샘물을 말합니다.

    구약에 보면 우물 때문에 싸움을 했던 내용이 여러번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이삭과 블레셋 사이에 우물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 우물 때문에 싸움을 합니까? 차라리 우물을 양보하고 다시 우물을 파면 될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 우물은 보통우물이 아닙니다. 비가 오면 말라버리는 우물이 아니라 가뭄과 상관없이 물이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팔레스틴 지역은 오랫동안 건기가 지속되기 때문에 솟아나는 샘물이 없으면 건기동안 물을 마시지 못한 양들은 죽고 맙니다. 그러니 양을 많이 가진 사람이 부자가 아니라 샘을 가진 사람이 제일 부자입니다.

    이 사실을 사마리아 여인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우물가에서 만난 유대인이 자기가 누군지 알았더라면 생수를 주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입니까? 이것은 경품으로 승용차를 내거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파트 한 채를 내 거는 것과도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만약 우물가에서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을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아마 저는 믿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은 오랜 시간동안 먼 거리를 이동하여 이곳까지 왔습니다. 먼 길에 매우 지쳐 있는 표정입니다. 더구나 얼굴을 보니 젊은 사람이 어찌나 고생을 했던지 50대로 보일만큼 볼품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좋은 옷을 입은 부잣집 맏아들 모양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길을 잃은 부잣집 아들처럼 보였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그 말을 신뢰할 수 있을텐데 아무리 이리저리 훑어보아도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기를 알아보았더라면 샘을 주었을 것이라는 이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이 사람이 무엇을 믿고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샘을 얻으면 이 여인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녀는 물을 긷기 위해 공동 우물가를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편하게 집에서 물을 길어다가 밥을 하면 됩니다. 눈치를 보며 사람들을 피해서 공동 우물가를 찾아 나설 필요도 없고, 사람들을 만날까봐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물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어집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현실은 그것을 가능케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11절과 12절에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니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도다 더 크니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생수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렇게 밖에는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어떻게 생수를 얻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그녀가 만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물 길을 그릇을 치워버렸습니다. 깊은 우물가에서 물을 얻으려면 적어도 물을 길을 그릇이라도 있든지 아니면 우물이 얕아서 물동이를 가지고 바로 물을 길을 수 있어야 하겠는데 그 두가지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에게 생수를 주겠다고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이 사마리아 여인이 무엇에 근거하여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여인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그저 지금 자신이 만나고 있는 현실만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우물은 깊은데다 물 길을 그릇이 없는 것, 이것이 지금 그녀가 만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아마 우물이 얕거나 아니면 우물은 깊어도 물 길을 그릇이 있었다면 그녀의 질문은 달라졌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물은 깊고, 물 길을 그릇도 없다는 것은 가장 최악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어디서 생수를 얻겠느냐?"고 되묻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저와 여러분이라 할지라도 이 지금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이렇게 밖에는 할 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종종 우리가 만나는 현실문제에 부딪히게 될 때, 그것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살려고 하니까 뭐가 있어야 믿음으로 살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지금 당장 땟거리를 걱정할 판국인데 믿음으로 살라는 것은 너무도 고상한 말처럼 들립니다. 봉사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몰라서 봉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시간을 낼만큼 여유가 없는데 어떻게 봉사를 한단 말입니까?

    뭐가 있어야 봉사도 하고, 믿음으로 살수 있는 것이지 지금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는 것이 우리들의 생각이며 입장입니다. 즉 시간과 여건이 허락되어야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지 아무것도 받쳐주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미스코리아에 나가려면 얼굴이 받쳐 주든가 아니면 돈이라도 많아서 화려하게 자신을 가꿀 수 있도록 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 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굴이 받쳐 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미인대회에 나갈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래 네 마음대로 해봐라' 면서 그 사람에 대해 아예 포기를 해버리든지 아니면 쫓아가서 뜯어 말리든지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돈도 없고 ,백도 없고, 얼굴도 받쳐주지 않는데 도대체 뭘 믿고 그러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생각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교회에서 봉사하고 믿음으로 살려고 한다면 하다 못해 비록 믿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남편이 교회에 나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이해해주고 도와준다든지 아니면 시간적인 여건이나 환경이 받쳐줘야만 가능한 것이지 그런 것이 전혀 받쳐주지 않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는 것이 우리들의 생각이며 수준이 아닙니까? 사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주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이런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물가에 물 길을 그릇이 없다는 것을 주님이 모르셨을까요? 사마리아 여인보다 먼저 우물가에 와 있었으니 주님이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생수를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은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사마리아여인의 생각이 그렇습니다. 어떻게 물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자기에게 생수를 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 우물은 야곱이 후손들에게 물려준 우물인데 당신이 돈이 많아서 이 우물을 통째로 사서 줄 수 있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13절과 14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지금 사마리아 여인의 생각이 무엇입니까? 이 우물은 야곱 때부터 내려온 우물입니다. 건기가 되어도 마르지 않는 샘물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물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 그렇습니다. 이 물을 마셨다고 해서 다시 물을 마시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매번 물을 길으러 이곳까지 와야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자신이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한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그런 물이 있을까요? 그런 물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우물가에서 길어온 물을 마시면서 그 물이 '생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물들은 모두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갈증을 느끼게 할 수 밖에 없는 물이라는 사실을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 얼마나 목 말라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열심히 삽니다. 집 한칸 마련하면 집에 대한 갈증이 해소될 것 같아서 열심히 벌어 집을 장만합니다. 그렇게 하기까지 때때로 주일까지 범하면서 집을 장만합니다. 그러고 나면 집 장만에 대한 갈증이 모두 해소가 됩니까? 아닙니다. 더 큰집을 향한 갈증이 생깁니다. 월드컵 때문에 대형 텔레비젼이 불티나게 팔린다고 합니다. 제가 결혼했을 무렵에 저희 집에는 14인치 텔레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 텔레비전이 작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25인치 텔레비전을 누가 주어서 그 텔레비전으로 시청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희 집에 있는 텔레비전은 굉장히 크게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요즘 대형텔레비전이 나오고 축구경기를 대형텔레비전을 통해서 보니 25인치는 텔레비전 같지도 않았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느낀 갈증들은 물을 마셨다고 해서 해결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갈증을 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추구하는 것들은 우리의 인생에 진정한 생수가 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생수처럼 착각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마리아여인도 그랬는지 모릅니다. 이 우물은 야곱 이래로 마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우물이 최고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매번 그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동반하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 때문에 언제나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녀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우물가에 모인 여인네들이 물만 긷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 저 사람 얘기를 하는데 왠지 자기 얘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이 너무 부담스럽기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물을 길으러 가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 말씀은 정말 자신의 속을 시원케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마실 수만 있다면 그녀의 모든 문제가 일순간에 해결되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녀는 지금까지 이런 물에 대해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야곱의 우물이 지금까지 마르지 않고 물을 공급해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물을 마신 사람들이 다시는 목마르지 않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계속해서 물을 길어 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한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에 대해 그녀는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마시면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운동하고 갈증을 느낄 때 마시라고 선전하는 음료수들이 있습니다. 이온음료 혹은 스포츠 음료로 일컬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음료를 마시면 두 번다시 물을 마시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그런 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한번 마시면 영원토록 갈증을 느끼지 않을 생수를 언급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여인은 주님께 그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15절에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이 물을 통해 두 가지를 해결 받고 싶었습니다. 하나는 목마르지 않는 것과 또 하나는 그로 인해 물을 길으러 이곳에 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녀는 아직도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우물가에서 나오는 물 인줄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 지금까지 자신이 마셨던 것과 같은 물, 그러나 그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물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물은 그런 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을 물질적인 것에 국한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번에 집을 옮겼더니 집 가격이 껑충 뛰어올라 두 배가 되었더라"고 하면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런가하면 "같은 시기에 직장에 들어온 사람들은 다 퇴직하게 되었는데 남편은 오히려 승진하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축복하신 것 같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집 값이 배로 뛰어서 뜻하지 않게 재산이 증식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은 퇴직해야 하는데 오히려 승진하는 기회가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매사에 그런 식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분들은 대개 집 값이 하락을 한다든지 아니면 똑같이 퇴직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주님이 이 사마리아여인에게 주시고자하는 것은 그런 물질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시는 물을 주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것이며 그녀의 삶을 진정으로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상처받은 심령을 가지고 성인아이로 살아가지 않도록 삶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주시겠다는 것과 이 여인이 받기를 원하고 있는 것에는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녀는 물질적인 것을 원했지만 주님은 그보다 더 깊은 영적인 문제를 다루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디 이 여인만 그렇겠습니까? 우리들도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들이 받기를 원하는 것과 주께서 우리들에게 주시기를 원하는 것의 차이는 없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무엇을 받고자 하십니까? 자녀들의 성공입니까? 아니면 남들보다 좀 더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삶입니까?

    만약 주께서 그런 것 대신에 '너희의 상한 심령을 고쳐주겠다' '너희의 삐뚤어진 마음을 바로 잡아주겠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주님 그런 것은 지금 당장 나에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물질을 좀 더 채워주시지 않겠습니까? 주님! 사업의 환경을 개선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좀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할 수 있게 해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지는 않을까요?

    사마리아여인은 주님께 그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 물은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게 하는 물이라고 했으니까 이 물만 마시면 이제 다시는 이 지긋지긋한 우물가에 오지 않아도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다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그 물을 주시겠다고 하시고서는 정작 그 물을 달라고 하니 엉뚱한 말씀을 하십니다.

    16절에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목마르지 않는 물을 마심으로 다시는 이 물을 길으러 오지 않게 해달라는 그녀의 말을 듣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남편을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왜 남편을 데리고 오라는 것일까요?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는 것과 이 여인의 남편이 무슨 상관이 있길래 그 남편을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17절과 18절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했습니다. 남편을 데리고 오라는 주님의 말씀에 이 여인의 대답은 남편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슨 말입니까?

    이 여인은 과거에 다섯 번이나 결혼한 경력이 있는 여인입니다. 그러나 그 남편들과 헤어지고 지금 한 남자와 함께 살고 있는데 그것은 정식 결혼생활을 통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동거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편이 없다는 것이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행위가 정당화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가 결혼하지 않고 남자와 살고 있으니 이보다 더 부정하고 음란한 생활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녀는 지금 음란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혼을 해서 다섯 번이나 헤어지고 지금은 아예 동거생활을 하면서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여인이 무엇 때문에 다섯 번이나 결혼에 실패하고 여섯 번째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남자와 동거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미루어 짐작해보기는 이 여인에게는 결혼에 대한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어떤 가치관이 분명히 서 있는 것이 아닌 듯 보여집니다. 물론 다섯 번이나 결혼에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섯 번째 남자와 살려면 다시 정식 결혼의 과정을 거쳐 생활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절차를 무시하고 동거하고 있다면 그녀의 결혼생활은 책임과 의무를 동반하지 않는, 단지 쾌락의 대상으로 여겼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 가운데 결혼은 하지 않고 동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왜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로부터 자유로와지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정을 이루게 되면 여자는 한 남편의 아내로, 남자는 한 여자의 남편으로 그리고 자녀가 태어나면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동거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런 책임과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거하는 이유는 동거생활을 통해 성적인 만족을 얻으려는 것뿐입니다.

    성은 결혼을 통해 이루어질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성은 음란하고 부도덕한 것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용납되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사마리아 여인은 어떠합니까? 그녀의 생활은 음란한 생활입니다. 부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하신 것은 그러므로 이 여인의 죄를 불꽃같은 눈으로 보시고 그 죄를 지적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사실입니다. 동거하는 남자는 있어도 남편은 없습니다. 그런데 얼핏 들으면 한번도 결혼한 적이 없는 것처럼 들려집니다. 적어도 그녀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말을 듣고 '그렇다면 한번도 결혼한 일이 없는 사람인가?'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지금 음란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섯 번의 결혼이 실패한 이유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래 네 말이 맞다 지금까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은 딴 남자와 살고 있지만 정식으로 결혼해서 사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신 말씀은 그녀의 사생활을 훤히 꿰뚫어 보시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주님은 우리의 모든 모습을 훤히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행동만 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생각까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많은 핑계와 변명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사람들에게는 용납되어지고 허용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런 핑계와 변명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집사님 지난주에 못 뵈었군요?" "예 몸이 아파서요" 그러면 몸이 아픈줄 압니다. 그러나 몸이 아파서 나오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교회 나오려다 사소한 문제로 다투다가 기분이 나빠서 빠진 것입니다. 저는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십니다.

    교회생활만 보면 나무랄 데가 없는 것 같은데 사회생활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 이상으로 거칠고, 험악합니다. 참 경건한 삶을 사는 것 같은데 그 마음속에는 경건과 별로 상관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고상한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비수를 들이대고 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 같은데 엉뚱한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남편을 존경하는 것 같은데 그 안에는 미움과 증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우리 주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녀 가운데 있는 죄 때문이었습니다. 주께서 그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죄는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입니다. 그 장애물을 걷어내지 않고는 결코 은혜의 생수를 맛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진실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의 생수,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를 마시고자 한다면 우리 가운데 있는 죄악을 걷어내야 합니다.

    죄라는 장애물을 걷어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금까지 나의 정욕대로 살았던 삶을 청산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살았던 삶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고 있는 이 죄가 우리로 하여금 목마르게 했습니다. 갈증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물을 마셔도 그 물로는 우리의 갈증을 해소해 주지 못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까? 그녀안에 있는 상한 심령을 치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녀는 왜 자신이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하고 피해다녀야만 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부끄럽고 창피한 일 정도로만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 달갑지 않아서 사람을 피해 우물가를 찾았던 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십니다. 단지 그런 문제 때문이 아니란 것을 말입니다. 그녀의 상한 심령 이 문제였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가로막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녀가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문제를 끄집어 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설령 자신이 잘못했거나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끄집어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꼭꼭 숨기고 싶어합니다.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끄집어 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을 당당하게 고백하지 않는 한 결코 상한 심령이 치유되어질 수 없습니다. 성인아이가 치료될 수 있는 방법은 내 안에 잠자고 있는 상처를 드러낼 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주께 고백해야 합니다. 부끄러운 치부를 드러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안에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목마름은 없습니까? 여러분 안에 자리잡고 있는 죄악된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상처받은 여러분의 심령을 드러내 놓으시기 바랍니다. 잠자고 있는 여러분의 병든 영혼을 깨우시기 바랍니다. 그때 여러분의 삶을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 상처받은 심령이 치유되어지고 더 이상 성인아이로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섯명의 남편과 헤어졌다는 것도 자랑할 일은 아닙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섯 번째 남자와 동거하고 있다는 것은 더더욱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로 자신의 허물이 가려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다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솔직하게 고백함으로 내 안에서 나를 지배하고 있는 악한 것들을 벗어 던지는 것이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고백되어져야 할 죄는 없습니까? 이 시간 주님앞에 여러분의 모습을 내어 놓은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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