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 사랑하기를 2002-06-18 11:55:53 read : 4215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6월 2일 // (약2:8-13)
옛날 어떤 마을에 두 명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남성이 있었습니다. 한 여자는 자기보다도 열 살이나 연상의 여인이었습니다. 반대로 다른 아내는 자기보다도 열 살이나 연하의 여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자기의 나이와는 상관없이 남편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많은 여자는 아무래도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남편과 같이 사니까 남들 보기에 조금은 쑥스럽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든지 자기 남편을 나이가 좀 더 들어 보이게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자기에게 올 때마다 기회가 되는 대로 남편의 머리 속에서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씩 뽑아주었습니다. 나이가 적은 여자는 반대였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남편으로 하여금 좀 더 젊어 보이도록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자기에게 올 때마다 그는 기회가 되는 대로 남편의 머리에서 흰 머리카락을 하나씩 뽑아주었습니다.
남편은 불쌍하게도 이 집에 가서 검은 머리카락을 뽑히고, 저 집에 가서 흰 머리카락을 뽑혀서 번갈아 가며 뽑히기만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내들의 등쌀에 남편의 애꿎은 머리카락만 죄다 뽑혀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얼마가지 않아서 그는 빤질빤질한 대머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두 여인은 자기 남편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이기적인 생각입니다.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행동에 불과할 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라, 거짓된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나를 희생하는 것만이 참된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그의 서신서에서 종종 참과 거짓을 대조적으로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믿음에도 참 믿음이 있고 거짓 믿음이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 믿음이 될 수가 없습니다. 믿음에 실천이 수반되지 않으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거짓 믿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1:26∼27에 보면 경건에도 참 경건이 있고 거짓 경건이 있음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참 경건입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는 경건하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지 않는 삶은 거짓된 경건에 불과할 뿐입니다.
또 3:13이하에 보면 지혜에도 참 지혜가 있고 거짓된 지혜가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 하나님이 주신 지혜는 참 지혜입니다. 성결합니다. 언제나 화평을 이룹니다. 그러나 거짓된 지혜도 있습니다.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입니다. 이런 거짓된 지혜가 있는 곳에는 다툼과 시기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늘 소란합니다. 악한 일만 생기게 됩니다.
사도 야고보는 오늘 본문에서 사랑에도 참 사랑이 있고 거짓 사랑이 있음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할 때 그것은 참된 사랑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나님께로부터 이러한 칭찬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된 사랑도 있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해서,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식으로 차별대우하는 것은 거짓된 사랑입니다. 사랑을 가장한 이기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결론은 자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누구를 대하든지 간에 그 사람의 외모를 바라보지 말고, 그 사람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생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따뜻한 사랑으로 대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야고보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참된 사랑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8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이 말씀은 구약성경 레19:18에 있는 말씀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이 말씀을 "최고한 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 당시에는 로마의 황제가 제정한 법은 절대적인 구속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감히 황제가 제정한 법은 어길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만왕의 왕되신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감히 이 세상에 그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최고한 법입니다. 지고의 법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누구도 이 말씀을 어긋나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루는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사람이 율법사인 것을 아시고 그에게 되물으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더냐? 네가 어떻게 읽느냐?"
그는 잘도 대답했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대답을 인정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잘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렇게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살리라."
그러자 율법사가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내가 사랑해야 할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우리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우리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는 있는 것을 다 빼앗겼습니다. 옷도 벗겨졌습니다. 실컷 맞아서 인사불성이 된 채 길바닥에 누워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도움을 주어야만 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의 인생길을 걸어가다 보면 우리 눈앞에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보일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이든지, 그 사람의 외모가 어떠하든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그 사람이 우리가 사랑해야 하고 우리가 도와주어야 할 우리의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참 사랑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이웃 사랑하기를 우리의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배우지 않아도 우리의 몸 돌보기를 저절로 터득합니다. 배고프면 먹입니다. 추우면 옷을 입힙니다. 병들면 약을 먹이기도 하고 또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이와 같이 돌보듯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이 있으면 그렇게 보살펴 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25:40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이웃을 도와주는 것이 곧 예수님을 돕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히13:2∼3에 보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돌보아줄 때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이들도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습니다. 또한 롯도 그러했습니다.
어떤 청년이 직장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몇 달을 집에서 쉬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마음에 드는 회사에서 직원을 채용한다는 광고가 나왔습니다. 그는 이력서를 제출했습니다. 다행히 서류전형에서 합격을 했습니다. 그는 회사로부터 정해진 날 면접을 보러오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제 면접 보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는 아침부터 잘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넉넉하게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서 차를 몰고 회사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달려가는 도중에 그는 웬 아주머니가 길가에 차를 세우고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펑크난 타이어를 갈아 끼우기 위해 쩔쩔 매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간이 조금 바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차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아주머니 대신에 자기가 펑크난 타이어를 갈아 끼워주었습니다.
그러는 바람에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습니다. 그는 부랴부랴 회사로 갔지만 면접이 다 끝나버렸습니다. 그는 인사과를 찾아가서 사정을 했지만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풀이 죽은 채 뒤돌아 서는데 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일부터 회사로 출근하세요."
그는 깜짝 놀라서 뒤돌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웬 아주머니가 웃고 계신데 조금 전에 길가에서 자기가 도움을 주었던 그 아주머니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아주머니가 바로 그 회사 사장님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도움을 주었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셈이 된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는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할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칭찬하실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우리 삶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가 최고한 법을 지켜 행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거짓된 사랑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다.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결코 참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가장한 이기적인 행동입니다. 이것을 사도 야고보는 "죄"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외모를 많이 갖춘 사람도 있고, 반면에 외모를 많이 갖추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어떤 사람이 부자를 만났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와 친하게 되면 많은 덕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컨대 돈이 필요할 때는 돈을 빌릴 수도 있을 것 같고, 또 필요하면 보험도 들으라고 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자식들의 취직부탁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만 만나면 환한 미소를 띄고 인사도 잘합니다. 그리고 온갖 친절을 베풉니다. 이런 것은 참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동기가 불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 2:4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반대로 가난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와는 친해보았자 별로 덕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내가 도움을 받을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저 도와주기만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성가십니다. 그래서 애써 못본 척 외면해 버립니다. 또 꼭 만나야 될 일이 있으면 아예 눈아래 보면서 괄시해 버립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명백히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에 위반되는 행동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그러한 사람을 범죄자로 단정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아니 내가 도적질한 것도 아니고, 간음을 행한 것도 아니고, 살인을 행한 것도 아니고, 그저 사람의 외모를 좀 보고 차별적으로 대했을 뿐인데 그것이 무슨 큰 죄가 됩니까?"
이런 불감정을 사도 야고보는 오늘 본문에서 단호하게 질책하고 있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예를 들어서 설명해 봅니다. 여기에 큰 거울이 하나가 있습니다. 쇠망치로 거울의 정 중앙을 내리쳤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큰 거울 전체가 "와장창!" 소리를 내면서 깨져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똑같은 원리입니다.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율법의 모든 조항은 사랑이라는 기본정신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 조항을 어겼습니다. 그러면 그 당시 그 사람의 마음 속에는 사랑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다른 율법도 다 어긴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한 가지 실례를 통해서 그 사실을 우리에게 설명했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어떤 사람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 사람을 향해서 말했습니다.
"당신은 율법을 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렇게 반문합니다.
"무슨 섭섭한 소리를 하십니까? 나는 간음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도적질도 하지 않았습니다. 거짓 증거하지도 않았습니다. 또 부모님께 효도했습니다. 이 모든 율법을 다 지키고, 단 한 가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만 어겼을 뿐인데 내가 율법을 범한 자라니요? 정말 섭섭한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하겠습니까? 아닙니다. 한 가지를 범하게 되면 그것 역시 율법을 범한 것입니다. 세상법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일평생 동안 나라를 위해서 수고를 많이 했다 할지라도, 마지막 순간에 실수해서 그가 죄를 범하게 되면 그는 죄인입니다. 감옥에 갇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야고보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을 결코 가볍게, 시시한 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 한 가지 만으로도 충분한 죄가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외모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우리 모두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람을 대할 때 긍휼의 마음을 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고 그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면서 그를 귀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칭찬하실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그러나 우리가 사람의 외모를 보고서 가난하다고 해서 괄시하고 부자라고 해서 아니꼽게 생각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우리 삶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사도 야고보의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야고보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셨으니까, 우리도 누구를 대하든지 그 마음을 가지고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우리말 성경은 원문을 직역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대로는 이해하기가 조금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리를 파악하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이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두 권의 책이 놓여있다고 했습니다. 한 권은 생명책입니다. 또 한 권은 행위의 책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생명책에는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행위의 책에는 무엇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한 모든 것들이 적혀 있겠습니까? 위에서 살펴본 대로 사도 야고보는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우리가 살아가면서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과 말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만일 그런 것이 행위의 책에 깨알같이 모두 적혀있다면, 우리는 그 책이 펼쳐지는 순간 절로 고개를 수그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범죄자로 정죄하기 때문에 우리는 수치스러워서 감히 천국 문을 향하여 걸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절로 우리의 발걸음은 그 반대 방향으로 옮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로 깨끗하게 씻음을 받았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모세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롬8:1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 관한 행위의 책에는 모든 것이 깨끗하게 사라지고, 거기에는 아무것도 기록이 되어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는 깨끗이 씻은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기록이 되어 있다면 이 말씀만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 깨끗함을 입었음. 의롭다 하심을 받았음."
그 책은 자동적으로 우리 눈앞에서 덮여질 것입니다. 우리는 큰 감격 가운데 기쁜 마음으로 천국을 향해서 우리의 발걸음을 옮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12절에 기록된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의 뜻입니다. 우리는 모세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따라서 우리의 모든 죄는 사함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외모를 조금 갖추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결코 낙심하거나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여 주셨습니다. 믿음에서 부요한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자입니다. 천국을 품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말과 행동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떳떳하고 당당하게 하면서 살라는 뜻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공로가 있어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긍휼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똑같은 원리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긍휼의 마음을 품고서, 말도 그렇게 하고 행하기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13절 말씀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받지 못했으니까 긍휼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 긍휼을 행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대로 율법적인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행위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다릅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를 이미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미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긴 자들입니다. 우리 눈앞에 있는 행위의 책은 곧 닫혀지고, 우리는 할렐루야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이 그 자녀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세세무궁토록 영생복락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의 결론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서 우리도 누구를 대하든지 간에 그 사람의 외모를 보고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눈이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듯이 누구를 대하든지 우리도 그 마음을 품고서 대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괄시하지 마십시다.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부자라고 해서 꼴보기 싫어하지 마십시다. 부자도 역시 우리가 모르는 남모르는 무거운 짐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사람들도 우리가 긍휼을 품고 대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 가운데는 사랑의 아름다운 꽃이 피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열매가 풍성히 열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긍휼의 마음을 품고 누구를 대하든지 그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형상을 보면서 예수님 앞에 내가 서 있는 심정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히 여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날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하나님께 칭찬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