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그릇이 되자 2002-06-18 14:49:45 read : 3176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06-16 // 딤후2:20-21
1. 결국은 사람이 중요하다.
여러분 지난 주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여러분 설교하기 전에 뭔가 해야 할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대-한민국 짝짝 짝짝짝..."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 박수는 유치원 아이들도 다 합니다. 지난번에 포르투갈과 경기를 할 때, 이것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여자분들은 운동 안하다가 이것을 하려니까 팔이 빠져서 병원에 온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대단했습니다. 설교 전에 아주 대한민국 사람다운 기특한 발상을 해봤습니다.
한국이 16강에 나갔습니다. 여러분은 기분이 어떻습니까? 요즘 월드컵 때문에 살맛이 난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왜 기분이 좋습니까? 왜 살맛이 납니까? 그것은 축구를 잘해서 그렇습니다. 우리 선수들 참 잘했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상을 줘야 합니다. 선수들이 받는 포상금도 수억씩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16강에서 한번씩 이기면 1억씩 준다고 합니다. 그래도 하나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번 한일월드컵을 치루기 위해서 축구장도 만들고, 공원도 만들고, 한 20조원 이상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태원에는 축제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 때문에 온 국민이 좋아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선수들이 만약에 경기에 졌다 그것도 5대 0이다 그러면 좋을 리가 없습니다. 좋으려면 결국은 선수들이 잘 뛰어야 좋은 것입니다. 승리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나 회사나 가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집에 건물이 크다, 회사 건물이 엄청나다, 교회 건물이 크다, 이렇게 잘 지어나도 그런다고 해서 신이 날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잠깐은 좋을 것입니다. 편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경거리는 될지언정, 그것 때문에 계속 신나 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가정에는 자녀들이 잘되어야 하고 회사에는 일군들이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일군들이 일 잘해야 합니다. 교회의 일군들이 잘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일군으로서의 그릇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 그릇은 밥을 담아먹는 그릇이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그릇을 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핍박자 사울을 불러 사도 바울로 세우시고자 하실 때, 다메섹에 사는 아나니아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이때의 그릇은 하나님의 일군으로서의 그릇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그릇은 무엇을 담는데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중요한 것은 음식입니다. 그러나 그릇이 없이 또한 그 음식을 담아놓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요리가 준비되어 있어도, 그릇이 없으면 담아 먹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아무리 중요해도 어떤 사람이라는 그릇이 담아서 사람들에게 주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음식점에 가보십시오. 음식이 맛이 있다,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종업원이 불친절하게 하면 밥맛 떨어진다고 하곤 나와 버립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지하철역에 갔습니다. 표를 달라고 하는데, 돈 내고 사는 사람은 다 주면서 할아버지는 안 주었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이 할아버지가 하는 말이 "사장, 나와"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복음이 아무리 중요해도 우리들이 잘못하면, 전하는 사람이 나쁘면 "그 교회 목사 누구야?" 하게 됩니다. 또 "하나님, 나와"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이 망신당하시게 됩니다. 누구 때문에? 나 때문에 그렇습니다.
축구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몰랐지 않습니까? 그것은 왜 그럽니까? 그것은 선수들이 그 동안 잘 못해서 그렇습니다. 지기만 하니까 재미가 없습니다. 잘하니까 축구가 재미있는 것도 알고, 그래서 응원도 하고, 온 나라가 빨간색으로 난리 아닙니까?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물론 복음이고, 음식이지만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과 하나님의 일군들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전하는 사람이 좋아야 합니다. 책임이 큽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상황이 그렇지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그의 사랑스런 제자인 디모데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에 파송 받아서 목회자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가 목회를 하는 에베소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와 빌레도, 이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평신도 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일군은 일군인데, 골치거리입니다. 한마디로 이들의 문제는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골치거리이겠습니까?
오늘 성경 본문 앞에 있는 14절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 아멘
보십시오. 이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말다툼이라는 것입니다. 일이 문제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일을 하면서 말다툼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논쟁하고 이것 때문에 "내가 옳으냐 네가 옳으냐"얘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의 본질은 보지 않고 말다툼하는 것만 보고 그것 때문에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도리어 듣는 자들이 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지금 지도자들이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5절에,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 상대하지 하나님 앞에 인정 받기 위해 힘쓰라는 것입니다.
16절,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이들하고 얘기하는 것은 망령되고 헛된 말을 하는 것이니 더 이상 얘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7절,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18절,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여기서 그릇되었다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말입니다. 지도자는 지도자인데, 잘못된 지도자니까 오히려 믿음을 떨어뜨리는 악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9절,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아무리 그런 사람이 있어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니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20장 29절, 30절에서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이단 사상에 대해 경고한 것이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이들의 거짓된 사상을 물리치라는 말씀과 함께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20절, 21절 말씀입니다. 이 두절에 계속 반복해서 나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을 유심히 보시기 바랍니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거기 귀하게 쓴다는 말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귀하게 쓰는 그릇이 쓰는 그릇이 되야 한다, 좋은 그릇이 되야 한다는 말입니다.
2. 사람은 질이 좋아야 한다.
좋은 그릇은 질이 좋은 그릇입니다. 여기에 금 그릇, 은 그릇, 질 그릇, 나무 그릇을 얘기했습니다. 그 중에 어떤 것이 제일 좋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그릇이 제일 좋습니까? 여기 귀히 쓴다, 천히 쓴다 하는 말이 나오는데, 여러분 같으면 귀한 손님이 오면 어떤 그릇을 내어놓겠습니까? 금 그릇과 나무 그릇 가운데, 어떤 것을 내어놓겠습니까? 당연히 금 그릇을 내어놓을 것입니다. 금 그릇을 내어놓게 되어 있습니다.
금은 보석입니다. 누구나 갖고 싶어 합니다. 가치가 있습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이런 사람은 가치 있는 사람이고, 갖고 싶은 사람입니다. 우리 살다 보면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같이 있으면 더 있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냥 헤어지면 또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냥 만나면 불편합니다. 같이 있는 자체가 힘듭니다. 이 사람 혹시 또 나한테 해꼬지나 안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질이 좋은 사람이 되야 합니다.
옛날에 어느 돈많은 할아버지가 노비를 많이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그해 섣달 그믐날 그 노비들을 다 해방시켜주겠다고 노비들 앞에서 공언했습니다. 노비들은 굉장히 기뻐하며 손꼽아 그날을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노비로서의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내일이면 꿈에 그리던 자유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종들을 불렀습니다. "너희들 이제 내일 나갈텐데, 얼마나 좋으냐? 그런데 너희에게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하자. 짚으로 새끼줄을 만드는데, 이제까지는 굵게 만들었는데, 너희들이 마지막으로 최대한으로 가늘게 새끼줄을 꼬아서 한 타래씩 해주고 가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새끼줄을 꼬아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가는 줄을 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런데 이 얘기를 듣고 나서 일군들의 반응이 두 가지였습니다. 게으른 노비들은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부려먹고도 이제 고작 하루 남았는데 그게 아까워서 끝까지 부려먹겠다 ? 원 세상에, 이리도 고약한 할아버지가 또 있을까?` 그들은 되는대로 짚을 한 움큼씩 잡고 굵직굵직하게 새끼를 꼬았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렇게나 내던져놓고 잠들어버렸습니다.
또 한 부류는 "그렇지. 저 주인은 다른 주인과는 달리 우리에게 자유를 주니 얼마나 감사하냐. 그러니 이 감사한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지"하고는 주인이 요구하는 대로 이것을 밤새 꼬다 보니까 이것이 너무나 힘들어서 밤잠을 못 자고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주인이 종들을 다 불러모았습니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이제 너희는 자유다. 그런데 자유를 주는데 알렉스 헨리의 뿌리에도 보듯이 흑인들이 종으로 살다가 자유를 주지만 막상 나가서 살려고 보니까 지식도 부족하고 정착금도 없고 못살지 않느냐? 그러니 나는 너희들에게 정착금을 좀 줘야 되겠다. 그래서 어제 너희에게 새끼를 꼬라고 그랬는데, 저 창고의 문을 열면 구멍 뚫린 동전이 산떠미같이 쌓여 있는데, 너희들이 나갈 때 어제 밤에 새끼줄을 꼰데다가 끼워 가지고 갈만큼 가져가라"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많이 가지고 갔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돈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주인된 입장에서 종들에게 자유를 주면서 이들이 나가서 잘살아야 되겠는데, 돈만 덥석 준다고 잘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세상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들이 어떤 사람이냐가 참 중요합니다. 그래서 세상 살아가는 삶의 비결을 얘기했던 것 같습니다. 늘 순종하면서 자발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잘 아시는 스티븐 코비라는 사람, "성공하는 사람의 일곱 가지 습관"을 쓴 사람이 한 이야기 가운데, 역사적으로 위대한 영향력을 많이 끼친 사람들을 조사하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두 가지 종류의 자질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부수적 자질(Auxilliary Quality)과 본질적 자질(Primary Quality)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수적 자질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학벌, 재산, 외모와 지위, 배경 등 외적인 것으로 이루어지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부 많이 했다, 돈 많다, 잘생겼다 그러면 이러한 것들로 그 사람의 위대함과 성공을 판단하여 버립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인생에 영향을 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부수적 자질이 있어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아니고 본질적인 자질이 좋은 사람이 영향을 미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질적 자질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성숙한 인격의 요소들입니다. 인내심, 사랑, 이해, 비젼, 결단력, 포용력, 믿음 등입니다.
이러한 본질적 자질을 가진 사람들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인격의 깊숙한 곳에 자극과 감동과 변화를 일으킵니다. 비젼을 발견하게 하고 자신에게 잠재된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격려합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기쁨을 느끼고 인격이 다듬어 지고 새롭게 발전해 나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맺어진 관계는 돈이나 지위만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끈끈한 인격과 사랑과 신뢰, 비젼과 감동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히딩크 감독의 경영 가운데 첫 번째가 기본적인 것을 잘해라 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체력을 중요시 여깁니다. 그런데 우리도 삶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이 책도 썼지만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유치원 때 다 배웁니다. 유치원 때 배운 것만 가지고 살아도 인생을 잘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옆 사람을 한번 쳐다보십시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웃으면서 인사해보십시오. "안녕하십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세 살, 네 살, 먹은 아이들에게 이 엄마가 가르치듯이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인사를 90도로 하게 하는 것처럼 여러분들이 그렇게 인사하고 살면 아마 사람들에게 "저 사람 괜찮은 사람이다" 이런 말을 들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식이 있고 없고, 재산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만약에 감사할 때 감사할 줄 알고, 기뻐할 줄 알고, 축하할 줄 알면 여러분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습니다. 기본입니다. 이것이 본질적인 자질입니다. 이런 사람이 영향을 미치고 이런 사람이 이 시대를 변화시킵니다.
1) 좋은 그릇은 금 그릇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성경 말씀 20절에 "큰집에는 금 그릇, 은 그릇, 질 그릇, 나무 그릇 등 여러 종류의 그릇들이 있는데 그 중에 귀하게 사용되는 것도 있고 천하게 사용되는 것도 있나니"라고 했는데, 우리들은 이 말씀을 그냥 지나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 속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그릇이라고 하는 것은 쓰임새에는 차이가 없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① 그릇은 쓰임새에서는 차이가 없다.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여러 그릇을 만들어 사용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식탁을 보면 물그릇인 컵이 있고, 밥을 담은 공기가 있고, 국을 넣은 대접이 있고, 된장을 끓이는 뚝배기가 있고, 반찬을 놓는 접시가 있습니다. 접시도 큰 것, 작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그릇은 쓰임새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다양하게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릇은 쓰임새로 볼 때 우열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것이 더 중요합니까? 필요하여 사용하는 데 밥공기와 국 대접 중에 어떤 것이 더 중요합니까? 큰 접시와 작은 접시를 비교하여 어떤 것이 더 낫다고 봅니까?
사람도 그렇습니다. 사람은 쓰임새에 따라 여러 직업인이 있습니다. 병원에 가면 병을 고치는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약을 짓는 약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3종류의 사람이 있어서 병원이 운영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외에 환자가 찾아가면 안내하는 분들이 있고, 접수하는 행정직원이 있고, 청소하는 청소부와 집을 지키는 경비원도 있습니다. 그밖에 알지 못해 거론하지 못하는 분들이 더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사가 중요하다고 해서 의사가 청소까지 다하고 안내까지 다하면 언제 의사 일을 하겠습니까? 의사가 의사다운 것은 행정직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있기 때문에 행정직원도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수입면에서 누가 더 나은가, 또 일을 하는데 누가 더 편한가 이런 것으로 더 나은 것을 얘기할 수 있어도 쓰임새에 있어서는 절대로 더 나은 사람은 없습니다. 다 필요한 것입니다.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불편해서 안됩니다.
② 하나님은 그릇의 소재에 대한 차이를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릇의 차이를 무엇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릇을 만든 소재의 차이입니다. 금 그릇, 은 그릇, 질 그릇, 나무 그릇 이것은 다 소재를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소재 가운데도 귀하게 쓰는 것이 있고, 천하게 쓰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도 귀한 사람이 있고, 천한 사람도 있고, 귀한 일군도 있고, 천한 일군도 있는데,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말씀드린대로 귀하다고 하는 것은 그 그릇의 질이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질이 좋아야 합니다. 우리 인격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중요합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그가 궁중에서 바로의 아들로 살 때 그는 성공적인 인생을 위한 부수적 자질을 다 갖추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애굽의 최고의 학문과 지위와 배경과 보장된 미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품을 수 있는 포용력과 인내와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좋은 부수적인 조건을 가지고도 자기의 혈기를 참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그것 한번 써먹지도 못하고 광야로 도망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광야 40년 동안에 역경을 이기는 능력을 갖게 하고 사람을 죽이던 그가 양을 치면서 양 한 마리를 귀하에 여기는 따뜻한 마음의 사람이 되게 하고 혈기의 사람이 겸손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이만큼 온유한 사람이 없다 할 정도로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만나시고 그를 쓰시는데, 그를 출애굽의 지도자도 쓰시고 자그마치 250만이라고 하는 사람을 애굽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지도자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쓰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후매내오와 빌레도는 어떤 사람인가? 일은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말다툼을 합니다. 가르침을 받기보다는 자기 주장을 하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입니다. 당시 인간을 중시하는 헬라 사상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본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고,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기가 주인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데, 선생이 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지 않습니까? 순종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순종하는 것이 금그릇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본질적 자질을 갖춰야 할 것입니다. 이 본질적 자질은 신앙 안에서 배우고 훈련함으로 갖추어져 가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 좋은 분들을 보면 다 이런 본질적인 자질이 좋은 분들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는 질이 좋은 사람입니다. 요셉도 애굽의 노예생활 중에도 형들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았고 형들을 만나도 원수 갚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질이 좋은 사람입니다.
목동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울 왕의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관용할 줄 아는 다윗, 질 좋은 사람 아닙니까?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한 스데반, 질 좋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신 예수님이야 말로 정말 질이 좋으신 분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은 이런 질 좋은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지도자이고 그런 사람이 후배들을 키워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의 지도자들의 자세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후매내오와 빌레도, 정말 질 나쁜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지도자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교회를 헤치고 주의 종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성도들의 신앙을 떨어뜨리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에 말한대로 악성 종양을 퍼져 나가게 하는, 그런 살이 썩어 고름이 나게 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질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시 하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행복을 주는 사람 (용혜원)
잠깐 만나
커피 한잔을 마시고 헤어져도
행복을 주는 사람이 있다.
생각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고
꿈과 비전이 통하는 사람
같이 있기만 해도 마음이 편한 사람
눈빛만 보고 있어도 편안해 지는 사람
한잔의 커피를 마시고 일어나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면 그 약속이
곧 다가오기를 기다려지는 사람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
행복을 주는
다정한 사람이 있다.
여러분이 그런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 이 땅의 천국은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정말 내 부모를 귀하게 여기면 부모님에게 공손합니다. 내가 이 교회를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면 우리 몸과 마음과 자세가 다릅니다. 늘 그렇게 본질적으로 질이 좋은 금과 은 같은 우리들을 통해서 이 세상을 천국 만드시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 한남제일교회를 통해서 이루어 가실 줄로 믿습니다.
2) 좋은 그릇은 깨끗한 그릇이다.
21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그랬습니다. 교회 일군을 깨끗해야 합니다.
이번 613지방선거의 결과를 보셨지요? 집권당이 참패를 했습니다.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거의가 야당이 되었습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가?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습니다. 더러운 그릇에는 나라 일을 맡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야당이 좋아서가 아니라 더러운 것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못하겠다 그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이런 부정부패가 있는가? 그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엘리야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바친 제물을 팔아먹고 있습니다. 못된 짓은 다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을 보십시오. 얼마나 하나님이 귀하게 쓰신 종입니까? 그런데 자기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주의 종의 자리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주의 종 자체를 업신여겼습니다. 우습게 여겼습니다. 하나님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들을 죽이시고 버리시는 것입니다.
후매내오와 빌레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이 없다 이 말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교회 일군이라고 얘기하는 사람, 그것이 바로 깨끗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깨끗하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왜 죄가 없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죄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심령이 깨끗한 자는 하나님을 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깨끗한 사람은 하나님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군을 깨끗해야 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금 그릇도 있고, 나무 그릇도 있는데, 그 손님대접할 때 어떤 것을 쓰시겠습니까? 깨끗한 것을 쓰는 것입니다. 특별한 그릇은 아니더라도 깨끗해야 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존재론적 가치라고 합니다. 우리 신앙인의 존재론적인 가치는 무엇인가? 깨끗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번 월드컵에서의 승리는 대한민국에 대한 광고효과가 엄청나서 14조원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우리의 선교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한국이 기생관광하고, 나쁜 것은 아니지만 개고기 먹는 나라, 데모 많이 하는 나라라고 알려져 왔습니다. 앞으로 바라기는 우리나라가 깨끗한 나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나라, 이런 나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교회 건물이 더 크면 하나님께 더 영광 돌리고 더 하나님을 들어내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세계 사람들이 우리 나라 교인 많은 것도 알고 교회 건물 큰 것도 알고 세계에서 제일 가는 교회가 있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교회들이 많이 있어도 이 나라가 아직 부정부패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 한국교회가 보여줄 것은 딱 하나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깨끗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는 대통령 당시에는 무능한 지도자라고 해서 재선이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 후에 그는 더욱 존경을 받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단하나! 신앙인으로서 정직하고 깨끗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디든지 문제가 있는 곳마다 이분이 가서 해결을 하십니다. 우리는 깨끗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난 주간 신문을 보는데 충남 논산의 한 병원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충남 논산에 가서 택시를 타고 "고려의원으로 가자"고 하면 모르는 기사분이 별로 없을 정도로 유명한 병원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병원건물이 커서가 아닙니다. 간판도 화려하지 않은 30년 된 건물을 가진 동네의원일 뿐입니다. 이 병원의 의사 선생님이 의술이 뛰어나서도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의사선생님 때문에 유명해졌습니다. 이 의사 선생님이 최의규장로님인데, 이분은 의사인 것이 자랑스럽답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남을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직업을 평생 갖게 되어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이 장로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고 공부를 하고 자립을 해서 대학교수도 목사님도 배출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램이 있다면 이 분들도 자기처럼 남을 돕고 사는 삶을 살면 좋겠다고 합니다. 이 분의 좌우명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이렇게 살게된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어떻게 나를 위해서만 쓰느냐 남을 위해서도 쓰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자기가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선교사들을 보면서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나라가 이만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나라가 아주 어렵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선교사들이 자기 고향에 좋은 것 다 내버리고 여기에 와서 피땀 흘려서 시간 들여, 돈 들여서 일 하시는데, 한번은 환자가 피가 모자란다고 하니까 선교사님이 자기 피를 뽑아서 주더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것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살아야 되겠다` 했답니다. 그렇게 살았더니 유명해졌습니다. 그렇게 살았더니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높임 받고 그러는 것입니다. 신문에 났다 안났다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분의 삶을 보면서 인도의 빈민촌에서 한 평생을 살면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줌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데레사 수녀가 했던 말이 기억이 납니다. 데레사 수녀 무엇을 했냐? 건물을 지어 놓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빈민촌이 없어진 것도 아니고 무엇을 했냐 했더니 그 분이 한 얘기가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 아니고 이 세상의 작고 깨끗한 한 방울의 물이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이 더러운데 나의 깨끗한 물방울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여럿이 모여서 더러운 물 속에 들어가면 그 물이 언젠가는 깨끗해지지 않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우리 깨끗한 물방울이 되어야 합니다.
이번 한일 월드컵 때 응원하는 이들은 우리 자신은 물론 세계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물론 응원입니다. 빨간 색 옷을 입고 하는 응원의 열기 대단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경기장에서 길거리에서 응원을 하면서도 질서가 있고 청소를 깨끗이 하고 그것도 비가 오는 날인데도 그렇게 질서정연하게 감정을 드러내면서도 할 일을 하는 모습은 우리의 미래를 밝게 하는 현장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사는 것도 이 응원처럼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부활이 없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없다 이런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스스로의 가치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 가치는 무엇이냐 하나님을 믿는 데 있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윤동주의 시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승리하고 그런 사람 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3. 결론- 하나님께 사로잡히면 된다.
위어스비라는 목사님에게 여비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비서 남편이 고통사고가 나서 그만 맹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래서 목사님이 심방을 갔습니다. 딱하고 답답한 나머지 목사님이 비서를 위로했습니다. "나는 당신과 당신 가정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했더니 이 비서가 되물었더랍니다. "뭐라고 기도하십니까?"
목사님이 말씀하기를,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시어 당신의 고난을 면케해 달라고 기도하지요." 그랬더니 여비서는 "그렇게 기도하지 마세요, 목사님" 하고 뜻밖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이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모든 은혜를 다 받으려고 합니다. 끝까지 참고 견디어서 받아내야 되겠어요. 그러니 목사님, 제가 그 축복을 받아냄으로써 오늘 당하는 이 고난이 헛된 고난으로 끝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세요"
우리 모두 끝까지 하나님을 믿는 주의 성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목회에 욕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욕심을 부리지는 않습니다. 목사님 교회 언제 지으실 겁니까? 저도 교회 짓고 싶은 욕심을 있습니다. 크게 멋있게, 정말 제가 원하는 이상으로. 그러나 욕심 부리지는 않습니다. 무슨 얘긴가 하면 저는 제 당대에, 총회법에 의하면 앞으로 20년쯤 남았습니다. 그 20년 동안에 꼭 지어야 되겠다 욕심은 있습니다. 그러나 꼭 지으려고 욕심 부리지는 않겠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까.
우리는 일을 하면서 너무나 하나님보다 자기를 내세우기가 바쁩니다. 그 일도 하나님이 내게 하게 하시니까 하는 것이지,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립니다. 감사를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을 합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깨끗한 것이고, 하나님이 이런 사람에게 복 주시고 이런 사람으로 하여금 승리케 하실 줄로 믿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선거 때가 아니니까 제가 이런 얘기를 하겠습니다. 여러분, 선거 때 가 가지고는 누구를 찍을까 보지 마십시오. 평소에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일군이 되야 하나를 보십시오. 얘기는 분명합니다. 금 그릇 같이 질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학벌이라든가 돈이라든가 중요하지만 질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숙한 인격과 기본이 된 사람입니다. 예배 시간에도 가끔 보십시오. 질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깨끗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저는 선거 운동하는 것,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어느 교회가 임직 하고 나서 그것 때문에 분쟁이 났습니다. 그것 때문에 당회가 반으로 나누어 졌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좋은 것이 아니구나 생각했습니다. 선거 때 운동하지 마십시오. 전화 돌리지 마십시오. 그냥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을 해야 될 것인지 보십시오. 뽑아달라 해서 되는 사람, 하나님이 절대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교회는 참 은혜로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어떤 교회냐, 좋은 일군이 있는 교회인데 깨끗한 금 그릇 같은 일군들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기다 하나님의 복음을 담아서 세상 사람들에게 주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따라 하시겠습니까? 금 그릇이 되자. 깨끗한 금 그릇이 되자. 여러분, 바로 그런 그릇과 같은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이 세상에 전해지고 이 세상은 나 때문에, 그런 일군들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그런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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