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대표적 다국적 기업 소니(SONY)의 공동 창업자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 회장은 1921년 아이치현 나고야에서 태어났다. 그는 전후 일본 경제 부흥의 상징적 인물로 ‘메이드 인 재팬’(made in japan)의 위상을 세계 시장에 드높이는 데 기여한 탁월한 경영자였다.
모리타 회장은 1946년 기술과 기계에 탁월한 재능을 지닌 이부카 마사루(井深大)와 함께 도쿄통신공업사를 설립했다. 도쿄 긴자의 뒷골목에서 자본금 한화 약 6만 원으로 시작한 회사였다. 이부카는 기술 개발, 모리타는 경영으로 역할 분담해 회사를 키워나갔다. 이후 소니로 개명하고 세계적인 가전 및 음향기기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의 절묘한 조화 때문이었다.
기본 원칙 지키고 본분 유지
모리타는 오사카대 이학부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그의 전공은 경영 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물리학을 ‘많은 자연 현상에서 근본적인 공통점, 즉 기본 원칙을 발견하는 학문’으로 이해했다. 경영에서도 기본 원칙을 분명히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고 여긴 모리타는 어떤 경우에든 항상 기본 원칙을 지키려 애썼다.
모리타가 발견한 경영의 기본 원칙은 무엇인가? 회사는 특기, 즉 자신 있는 업종을 선택하여 본분을 지키며 마음껏 능력을 발휘하는 게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돈 좀 벌었다고 이것저것 다른 사업에 손대는 것은 마치 올림픽 출전 선수가 어떤 종목에서 우승했다고 다른 종목에까지 출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혀 승산이 없는 행동으로 보았다.
소니는 음향기기 분야로 목표를 정하고 녹음기부터 생산했다. 이를 위해 물리, 화학, 금속 분야의 기술자뿐 아니라 전기나 기계 기술자들을 고용했고 폭넓은 기술진을 새로운 분야에 활용하기 위해 라디오 생산에 뛰어 들었다. 그 결과 세계적인 빅 히트 상품 ‘소니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탄생하게 되었다.
라디오로 크게 성공한 소니는 트랜지스터 TV를 개발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트리니트론 방식 컬러 TV까지 개발했다. 또한 녹음기와 TV 기능을 조합한 비디오 분야에 진출하는 등 축적한 기술을 토대로 잇따라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오늘날 소니 제품은 매우 다양하지만 결코 엉뚱한 분야에 손을 뻗지는 않았다. 항상 현재 기술을 충분히 살릴 수 있는 분야에만 진출했다. 기본 원칙을 지키고 자신의 본분을 유지하는 물리학도 출신 모리타 회장의 경영 철학이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지금까지 소니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경영의 기본 원칙은 ‘직접 연구하고 생산한 제품은 시장을 형성해 계획에 따라 판매한다’는 것이다. 기본 원칙을 지키는 경영은 소니 브랜드를 처음부터 고집하는 것에도 나타난다.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개발하여 미국 판매에 나섰을 때 가장 먼저 부딪힌 문제는 브랜드였다. 미국 측 바이어는 인지도가 높은 자기네 상표를 사용하자고 요구했다. 모리타는 제품의 신용도를 높이기 위해 소니 상표를 사용해야 한다고 맞서 무려 10만 대의 라디오 판매 협상이 파기되고 말았다. 당시 50년 걸려 자리잡은 유명 브랜드를 이용한 OEM 수출 방식을 택하지 않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소니 브랜드를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걸리더라도 세계 소비자들에게 소니의 신용도와 인지도를 차근차근 높여 가는 게 장기적으로 이익이라고 판단한 모리타 회장의 기본 원칙은 ‘세계의 소니’로 성장시킨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초기 인지도가 낮아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세계인들은 소니 상표에 대해 신뢰를 갖기 시작했다. 오늘날 소니는 세계 톱 브랜드로 우뚝 서 있다. 만약 그때 눈앞의 이익을 좇아 상대방 주장에 굴복했다면 소니는 일본 내에서만 통했을 것이고 세계적인 초우량 기업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실력 제일주의
모리타 회장은 일본 재계에서 드물게 ‘실력 제일주의’ 철학의 소유자였다. 그는 학력보다 유연한 사고와 끊임없는 도전 정신을 갖춘 사람을 인재라고 생각했다. 인사 제도를 학력 불문 체제로 뜯어 고쳤다. 지금도 소니의 입사 지원서나 사원 이력서에 출신 학교를 기재하지 않는다. 또 불경기에도 종업원을 해고하지 않는 공동체적 인사 원칙을 일본 국내는 물론 해외 현지 법인에도 적용하고 있다. 모리타 회장은 ‘일본인이든 외국인이든 결국 똑같은 인간이다. 일본에서 통하는 원칙은 세계 어디서나 통하게 마련’이라는 철학을 고수했다.
모리타 아키오 회장은 일본 내에서 손꼽히는 국제 감각을 지닌 경영자였다. 그가 미국을 왕래하기 시작한 것은 1954년부터다. 당시 일본에는 해외 시장에 관한 정보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그는 무역회사에 의존하지 않고 자력으로 수출하겠다는 각오로 미국 시장에 발을 내디뎠고, 그곳에서 가족과 함께 상당기간 생활하기도 했다. 오랜 해외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키신저 전 국무장관, 먼데일 전 부통령, 로스 페로 같은 유력 인사들과 친분을 나누었으며 일본 기업의 미국 진출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일본이 미국과 무역 마찰을 일으킬 때면 으레 막후 중재역을 맡아 분쟁 해결에 기여하기도 했다.
유럽에도 그의 지인은 많다. 베를린 필 오케스트라 지휘자 카라얀과는 오랫동안 개인적인 친분을 쌓아왔다. 1989년 카라얀이 급서하자, 세계 음반사들은 그가 지휘한 교향곡들의 판권을 넘겨받으려 애썼다. 하지만 카라얀의 미망인은 유럽과 미국의 쟁쟁한 음반 제작사들을 뿌리치고 평소 고인과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모리타에게 판권을 넘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소니 사는 세계 9개 국, 15개 주식 시장에 상장되어 있다. 주식의 40% 이상은 외국인 소유이고 고객과 유통업자는 물론 자회사나 공장이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기업이다. 모리타 회장의 뛰어난 국제 감각과 경험이 소니를 일본 내에서 가장 국제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원칙에 충실하라
모리타 회장은 1999년 일본인으로 유일하게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경제인’에 선정되었다.
‘독창적인 것은 아름답다’며 생전에 입버릇처럼 되뇌던 이 말엔 평생을 벤처 기업가로 살았던 모리타의 일생이 함축되어 있다. ‘걸어 다니며 음악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현실로 옮겨 ‘워크맨’(walkman)을 생산하게 되었다. 그가 57세 때 개발한 ‘워크맨’은 가전 브랜드 사상 세계 최대의 히트 상품 대열에 올랐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눅 9:62)는 성경 원리처럼, 좌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회사의 특기에 주력하고 경영의 기본 원칙에 충실했던 모리타 아키오의 원칙주의가 오늘날 소니의 성공을 일궈 낸 것이다.
모리타 아키오의 8가지 경영 원칙
1.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기본 원칙으로 승부하라.
2. 국제적인 기업이 되려면 철저한 현지화를 추구하라.
3. 학력은 소용없다. 실력 있는 사원을 채용하라.
4.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하라.
5. 자신 있는 분야에서 경쟁하라.
6. 세계적으로 통하는 브랜드를 창조하라.
7. 기술은 국경을 초월한다. 고품질로 승부하라.
8. 소비자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