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근심과 걱정 그리고 고통 가운데 자신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평안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바램과는 다르게 고통과 고난 가운데 처할 때가 많습니다. 이 고통과 고난이 자신의 삶 가운데 다가올 때 많은 사람들은 체념하며 받아들입니다. ‘아이고 내 팔자야!’ 라고 하든지 아니면 ‘다 내죄지!’ 혹은 ‘내 운명인데 어떻게 하겠나!’라고 말하며 자신의 모든 고난과 고통을 운명으로 해석해 버립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샤머니즘적인 방법으로 이 운명을 바꾸어보려고 노력합니다. 저희 부모님도 제가 어릴 적에는 간난 아기들이 너무나 쉽게 죽는 것을 보고, 절에 이름을 올리고 공을 드려서 저의 운명을 바꾸어 보려고 시도했었습니다.
오늘 소개하려고 하는 야베스라는 사람은 자신의 삶이 고통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임을 성경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야베스라는 사람에 대해서 그 어미가 수고로이 낳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그의 이름을 야베스라고 지었는데 그것은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어머니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아이를 낳았으면 그 이름을 고통이라고 지었겠습니까? 임신기간 동안에 충격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동안 남편이 임신한 아내를 버렸든지 혹은 세상을 먼저 떠났든지 우리는 다양하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원치 않는 아이를 임신해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었는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이 어미의 마음속에 아들을 생각하면 자신의 고통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아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설교가는 그는 부모의 마음에 보면 볼수록 고통을 주는 장애인이었을 수도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의 이름은 그 사람을 향한 바램이었고 기대였습니다. 흔히들 이름을 사회적기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과 삶이 너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좋은 이름을 지으려고 많은 노력을 하게 됩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을 보십시오. ‘움켜잡다’라는 의미로 형의 축복도 움켜잡는 그의 삶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오미와 그의 남편은 두 아들에게 말론과 기룐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그 뜻은 ‘허약하다’, ‘수척해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아들은 정말 그렇게 살다가 일찍 죽고 말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야베스가 자아의식이 생겨서 자기의 이름 뜻이 ‘고통’이라는 것을 알 때, 그래서 자신의 삶이 고통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겪는 괴로움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인생의 출발도 고통스러웠지만 이름 속에 담겨 있는 의미는 자기인생을 스스로 저주스럽게 생각할 만큼 희망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슬픈 과거와 현재생활의 고통을 무겁게 지고 소망없는 내일을 살아야 하는 야베스는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그러나 성경은 그의 삶에 대해서 그렇게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끝났다고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형제보다 더 존귀한 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람 이름만 계속되는 족보 속에서 그에 대한 소개를 두 절에 걸쳐서 특별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말로만 존귀한 자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가문 속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비중을 이야기해줍니다. ‘존귀하다’라는 말은 무게 있는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인격이나 행동에 있어서 영예롭고 존경받을 만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고통 중에 낳은 아들, 그리고 볼 때마다 고통을 연상케 만들어서 그의 삶조차도 고통과 괴로움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던 이 야베스는 너무나 다른 삶의 운명으로 바뀌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원인을 성경은 그의 기도에서 찾고 있습니다. 당시에 성경적으로 축복을 위한 운명은 이름을 바꾸는데 있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름의 뜻과는 상관없이 복을 받고 존귀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기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10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십시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불행한 운명의 사람, 그 부모까지도 그에 대해서 고통스러운 존재로 인식되었으며 또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의 자녀라고 포기되었던 이 야베스, 그는 하나님께 간구했고 또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시어 형제보다 존귀한 존재로 바꿔주셨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나의 삶의 출발과 또 지금 처해 있는 환경, 나아가 앞으로 자신의 운명이 도무지 변화될 것 같지 않은 좌절 가운데 있는 분은 없습니까?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고 기댈 수도 없이 혼자서 자기의 고통을 스스로 짊어지고 나가야 하는 분들은 없습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나의 삶에는 특별한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분은 없습니까? 아니 죄 가운데서 저주와 고통으로 멸망의 운명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에 과연 무엇이 우리의 운명을 바꿀 수 있게 하겠습니까?
자기의 운명을 바꾼 야베스의 기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신기도,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운명을 바꾸어주신 그 동일하신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주시는 분인 것입니다. 이 기도는 4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네 가지는 별개의 것이 아니고, 다른 것 같지만 연결이 되어있고 단계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베스는 어떤 기도를 드렸습니까?
첫째, 야베스는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말은 ‘아버지! 아버지, 저에게 진심으로 복을 주세요. 저에게는 정말 많은 복이 필요합니다.’라는 간구입니다. 자신의 환경이나 이름이 이야기해주는 삶을 볼 때, 하나님께서 복에 복을 더해주시지 않으면 복된 인생으로 살아갈 수 없다 라고 하는 절박한 절규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중에 많은 내용이 ‘기복 종교화’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자신의 고통과 가난 그리고 연약함에서 벗어나 부요하고 권세를 얻고 풍요롭게 사는 것을 지나치게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제가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을 지난번에 추천했을 때 저희 교회 홈페이지에서 야베스의 기도는 이기적이요 기복신앙적인 내용이라고 비판한 글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 형제의 비판과 우려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가 자신들만이 복을 받고 또 잘 살고 편안히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구한다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요 또 경계해야할 일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너무 경계하고 조심한 나머지 기독교에 담긴 중요한 의미를 한꺼번에 잘못 이해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과 성품을 조사해보면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을 축복하셔서 풍성하고 생명력 있게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잠언 10:22 에 보면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으로 창조해놓으시고 하신 첫 번째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창 1: 27-28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기를 원하시고 또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축복이 구약에서는 주로 자손, 땅, 집, 물질 등 이 땅에서 소유의 풍성함으로 표현됩니다. 그것이 신약으로 오면서 산상수훈에 영적인 의미로 변화되는 것을 보게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복의 기준이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물질과 건강 그리고 권세 등,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기복적인 복의 요소를 배제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가 무엇을 얼마만큼 가졌든 간에 복이 있는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즉 부자든 가난하든, 높은 지위에 있든 남을 섬기는 위치에 있든지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그 심령이 가난한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가난, 청빈, 고통과 고뇌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 모든 것을 풍성하게 누리는 것을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금해야 하는 것으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정결하고 깨끗한 부자를 말씀하고 있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무엇에 쓰느냐에 더 진지한 기준과 관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마태복음 7장 7절에 오히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고 약속합니다. 나아가 야고보서 4장 2절에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라고 말씀합니다
야베스가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달라고 구하는 것이 해서는 안 되는 기도이며 잘못된 간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자신의 삶의 환경을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을 주시기로 구하는 것이 정말 자녀가 하나님 아버지께 해서는 안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솔직하게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봐야 합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남에게 지배를 받고 약해서 억압당하고 고통 가운데 사는 것이 진정 바른 것이요, 또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의 풍성함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올바른 기독교인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오히려 야베스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시지 않으시면, 고통과 괴로움 그리고 가난과 질병으로 인해서 나는 죽을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물질 때문에 고난 때문에 주님을 부인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주님 나를 추복하여주십시오. 저는 약한 존재입니다. 내 인생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나를 축복하셔서 풍성하게 살도록 인도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것이 더 솔직한 기도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부모의 입장이 되어서 우리의 자녀가 고통과 가난 가운데 있는 것을 볼 때, 풍성한 부모에게 도움을 구하는 자녀가 잘못된 것입니까? 복을 구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라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야베스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진정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그 하나님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주님은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무엇을 우선적으로 구해야 할지에 대한 우선순위와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축복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가에 더 많은 초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야베스가 간구한 그 복을 우리도 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야베스처럼 정당하게 우리 인생을 존귀하게 만들 이 기도를 하셔야 합니다. ‘주님! 저와 저의 교회를 진정으로 축복하여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십시다.
두 번째로 야베스는 자기의 지경을 넓혀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지경의 의미를 ‘해변 혹은 경계’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베스 당시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상황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각 지파에게 그 약속의 땅을 분배해주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야베스의 이런 간구는 자신이 관리하고 지배할 수 있는 땅을 더 넓혀 달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지배하고 관리할 수 있는 땅을 더 넓혀달라는 의미를 무엇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영향력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의 영향력이 미쳐지는 곳이 더 많아지게 해달라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영향력이라는 단어를 연상할 때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개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리더십’이라는 것입니다. 리더는 영향을 끼치는 사람입니다. 비전과 욕망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비전이 선한 영향력이라면, 욕망은 악한 영향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비전이 공동체를 위한 것이라면, 욕망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비전이 사랑이 동반된 것이라면, 욕망은 지배욕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전이 사명의 성격을 띄고 있다면 욕망은 자기만족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욕망을 비판하면서 건강한 비전, 아름다운 영향력과 혼돈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비전과 욕망이 없는 사람을 한 마디로 죽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시체는 아무런 욕구도 비젼도 꿈도 없습니다. 아무런 기여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비전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면 욕망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욕망을 경계합니다. 현대의 의미로 기도한다면, ‘하나님! 저의 사업을 더 확장시켜주셔서 제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을 더 넓혀주시기를 원합니다.’ 라는 기도를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결혼을 해야 할 총각 처녀가 ‘하나님, 나에게 결혼할 자매를 주시고 저에게 귀한 자녀를 주셔서 제 인생으로 하여금 영향력의 영역을 넓혀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지 않을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들 중에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 나의 사업을 더욱 번성하게 하셔서 제 인생의 영향력과 영역을 더 넓혀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지 않을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어떤 조직사회에 있다면, ‘하나님, 저로 하여금 더 높은 자리 책임감있는 자리로 옮겨주셔서 저의 영향력을 더 확장시켜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지 않을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기도와 바램이 없다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구입한 땅을 두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할 것입니다. ‘교회가 무슨 땅을 사느냐? 더 이상 확장하지 않아도 되는데 골치아픈 일을 왜 시작하느냐?’ 부담스럽다고 더 이상 그만하자고 한다면 이분들은 무엇인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건강한 비전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영향력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교회 공동체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적어도 그것에 관한 욕망도 없는 분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영향력 없는 가난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영향력 있는 풍부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물질의 풍성함을 구하십시오. 높은 지위도 구하십시오. 많은 식구도 간구하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욕망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그것이 비전을 이루는 건강한 영향력을 위해서 간구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그에게는 더 귀한 일을 위해 주님께서 찾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욕망 때문에 건강하지도 거룩하지도 못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건강한 비전까지 포기해 버리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인생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풍요로움을 스스로 포기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 이제 저의 삶에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허락해주십시오.’ 간구하십시오. 그리고 함께 비전을 나누십시오.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뜻이 더 확장될 수 있는 일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 그래서 내 인생과 더불어서 사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함이 나누어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더 넓게 증거될 수 있도록 영역의 확대를 위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야베스는 주의 손으로 나를 도와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야베스는 자기가 간구하는 복과 자기의 지경이 넓혀지는 것이 주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고백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복을 만들어 자기 것으로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과 노력으로 지경을, 영향력을 점점 확대해 나간다고 생각합니다. 무력과 술수 그리고 노력 등으로 이루어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인간이 이루어놓은 복의 허무함과 스스로 만든 영향력이 가지는 한계를 보았습니다. 주님의 손으로 이루어 주시지 않으면 인간의 노력은 헛된 것임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지 않고는 자기의 운명을 바꿀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은 아무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가 더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야베스에세거 쉽게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야베스가 고백한 여호와의 손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묘사하는 성경적인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요단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요단강 속에 있던 열두 돌을 취하여 기념탑을 세우라고 말씀하시며, 이는 홍해와 요단강을 여호와의 손이 도우심으로 가능하게 되었음을 알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초대교회 때에도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라고 말씀합니다. 즉, 야베스는 주의 손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인간 스스로 했을 때의 실패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자기의 힘으로 주님을 따르려고 했을 때에 불을 쪼이며 어린 계집종 앞에서 부인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성령의 인도 앞에 철저히 자기를 위탁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도 나의 노력으로가 아니라 ‘주의 손이 나를 붙들지 아니하면 더 크고 위대한 일을 할 수 없나이다.’ 고백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나간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하셨으니(고후 3:5-6)’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 있음을 고백하는 믿음의 기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야베스는 자기의 영역의 확대를 위하여 인간 스스로 노력해서 채우기는 어렵다는 것에서 인생의 고갈과 어려움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허무하게 무너지는가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도행전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부탁하십니다. ‘너희는 여기를 떠나지말고 여기에 머물라 그리고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즉, 능력 없이 떠나 사역할 제자들의 실패와 고갈 넘어짐과 무너짐을 아셨기에 먼저 하나님의 손의 능력을 덧입지 않고는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지경이 넓혀 지기를 위해 간구하십니까? 하나님의 손이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 야베스처럼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여러분의 가정을 위해, 자녀를 위해. 배우자를 위해. 사업을 위해. 나의 지혜와 노력과 경험이 아닌 주의 손의 도움이 필요함을 인정하시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네 번째로 그는 자신으로 하여금 ‘환난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야베스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어떻게 해야 아름답게 누리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환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는 간구였습니다.
여기서 환난을 가장 권위가 있다고 말하는 영어성경 KJV에서는 ‘harm’ 아닌 ‘evil’ 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나에게 닥쳐오는 어떤 ‘해받음’ 혹은 ‘악한 영의 시험’에서 건져달라는 의미입니다. 즉 죄와 악한 영의 시험에서 건져달라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중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다만 악에서 건져주옵소서’ 라는 기도와 일맥 상통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물질의 축복을 받은 분이 많습니다. 그리고 권세와 명예의 축복을 받은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받았던 축복이 오히려 저주와 파멸의 시작이 되었던 일들이 많았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의 사역을 위해 지도자로 세우셨는데 오히려 주어진 위치에서 주님의 일이 진행되는 것을 막는 결과를 가져올 뿐 아니라 공동체에 상처와 아픔을 주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물질과 건강을 주셨는데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예민한 신뢰를 어둡게 만들고 무례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공격하는 어둠의 영의 유혹에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야베스는 그 유혹과 넘어짐 앞에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음을 고백하며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 하나님은 야베스를 존귀한 자로 세워주셨습니다.
‘존귀한 자’라는 뜻은 무엇일까요? 여러분, 정말 존귀한 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존귀와 영광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야베스의 인생은 어떤 인생입니까? 나를 위해, 나의 영광과 욕망을 위한 삶이 아니라 영혼을 살리며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증거하는 자의 삶을 말합니다. 돈이 많다고 존귀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권력이 있다고 존귀하지 않습니다. 그의 삶이 바로 존귀하신 하나님께로 인도되고 주님을 증거하는 자의 삶이 될 때에 그의 삶이 존귀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 전, 거의 비슷한 시기에 두 여인을 떠나보냈습니다. 영국의 왕세자비였던 다이애나와 인도의 빈민촌에서 가난한 사람을 돌보았던 마더 테레사 수녀입니다. 어떤 사람이 더 존귀하다고 했습니까? 종교가 다른 인도의 힌두인들 조차 마더 테레사의 장례식에 참석해서 얼마나 슬퍼하며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습니까? 그녀는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존귀한 자로 여기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 운명을 바꾸어가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는 사람, 또 이미 그러한 축복을 받은 분들은 존귀한 자 바로 나의 축복을 통해서 주님을 증거하고 전달하는 일에 모든 것을 다 쓰는 사람을 말합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사람을 통하여서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나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며 주님께서 위탁해주신 귀한 사역을 함께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영향력을 가진 사람, 그 분이 바로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교회가 모든 형제들보다 더 존귀한 존재가 되기 위해 야베스의 기도와 그 삶을 함께 찾아나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