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 감옥에서 생긴 일 2002-05-31 18:54:56 read : 2626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사도행전 16:19-40
서울시에 있는 어느 병원에서 실제 있었던 실화입니다. 새벽에 몸집이 좋은 한 사람이 심방마비로 병원에 실려왔습니다. 병원측은 이 신사를 급히 응급실로 옮겼지만 의사는 이미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의사는 죽어있는 이 사람에게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을 때는 손을 펴고 죽는데 이 시신은 오른손을 펴고 왼손은 꼭 쥔 상태였습니다. 죽은 사람을 싣고 온 친구들이 집으로 전화를 하고 부산을 떠는 동안 의사가 조용히 시신에게로 다가가 움켜쥔 왼손의 손가락을 하나씩 펴기 시작했습니다. 시신의 마지막 손가락이 의사에 의해 펴졌을 때 그의 손에서 화투 두 장이 떨어졌습니다. 그 두장의 화투를 보는 순간 의사는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 어, 삼팔광땡이네"
사연은 이러했습니다. 이미 고인이 된 이 남자는 초상집에 가서 친구들과 어울려 밤새도록 화투를 쳤는데 가지고 간 돈을 모두 잃었습니다. 새벽이 밝아 올 즈음 판돈이 잔뜩 쌓였는데 화투 두장을 받아 들고 살며시 펼쳐보니 삼팔광땡이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이런 패가 나오면 약조에 따라 이미 건 판돈의 세배 이상을 거둬들이게 된다고 합니다. 그는 너무 감격하여 놀란 나머지 화투 두장을 미쳐 펼치지도 못한채 "삼, 삼, 삼…"하다가 쇼크로 죽고 만 것입니다.(국민일보10.23. 로뎀나무 김남준 광땡 잡고 죽은 사나이 중에서 인용)
성도 여러분.
아마 여러분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가 막히다는 듯 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돈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세상사람들의 관심은 언제나 돈에 있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사람들의 관심이 가장 집중되는 것은 역시 '돈얘기'입니다. 무슨 대단한 이익이라도 생기면 무슨 일이든 하지만 이익이 없다고 판단되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곧 시시하게 여깁니다. 점치는 사람 있지요? 왜 점쟁이가 될까요? 사람의 인생에 관심이 있어서요? 아니요. 대부분 돈벌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왜 점쟁이를 찾아가서 점을 칠까요? 잘 살아 보려고. 맞습니다. 잘살아보려고. 그런데 잘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리대로 사는 것입니까? 아니요. 뭔가를 남보다 더 많이 얻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돈을 더 많이 벌고 싶거나, 미래에 남보다 더 안전한 보장을 얻기 위해서 점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점치는 여자 종에게서 귀신이 나가자 이제 더 이상 점을 칠 수가 없었습니다. 당황한 것은 그들의 주인들이었습니다. 주인들이 점치는 여자종을 데리고 있었던 것은 여자종이 불쌍해서 돌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복지나 사회에 공헌하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오직 돈이 그들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종에게서 귀신이 나갔으니 점쟁이로서의 생명도 끝이 났습니다. '그동안 돈 잘 벌어 먹었으니 됐다' 주인들이 이렇게 생각했습니까? 돈 맛 안 사람들이 그냥 있을리 없습니다. 주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19절보니 "저자로"- 저자란 일반적으로 시장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재판정을 말합니다. 20절 보면 "상관들"(스트라테고어;στρατηγοι)은 재판관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바울과 실라를 고소했습니다.
1. 고소당해 매 맞고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19-23)
실제적으로 종의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고소한 이유는 19절 전반부에 있습니다.
"19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利益)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가 귀신들린 점쟁이 여종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냈지요. 18절을 보면 그 귀신에게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했습니다. 귀신이 나갔으니 점이 제대로 되겠어요. 점쟁이 문닫아야지요. 더 이상 돈 벌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주인들 입장에서는 기가 막혔겠지요. 화도 났겠지요. 그래서 바울과 실라를 잡아 재판정의 재판관들에게 고소합니다. 20절 후반절과 21절입니다. "20…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21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風俗)을 전한다 하거늘" 그런데 본문을 보면 고소하는 이유가 실제적인 이유와 전연 다른 내용입니다. 그 여종의주인들은 먼저 바울과 실라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당시에 이방인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던 반유대적 감정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고소의 첫 번째 죄목은 '소요'였습니다. 그러나 바울 일행은 불법적으로 소요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고소이유도 허위였습니다. 두 번째 고소 죄목은 이상한 풍속을 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한 풍속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루디아가 받았던 세례나 공동식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해 볼 수는 있겠는데 당시 로마사람들은 다른 종교나 사상에 대해 개방적이었기에 기존질서에 위협을 주지 않는 이상에는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과 일행이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기 전까지는 아무런 문제를 삼지 않았는데 일단 기존질서의 변화 - 점쟁이 때문에 벌던 돈을 벌 수가 없자 참지 못하고 고소했습니다. 실제 내용은 돈때문이었는데 밖으로의 명분은 소요와 잘못된 풍속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한 이유였지만 내용은 돈 손해 보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교육 얘기하고, 사회발전 얘기하고 국민건강 얘기하지만 그 근본적인 목적은 돈입니다. 돈이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원초적인 요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기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돈벌이에 있으니 어린이들이 사용하는 문구류에 수은성분을 섞고, 어류에 납덩이를 넣는 몰상식한 일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이 돈 때문에 비뚤어져 있으니 정의로운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가 여러차례 박해를 받았을때도 언제나 실제적 내용과 밖으로 드러난 이유는 달랐습니다. 일반적인 박해의 이유들은 '정부전복기도' '스파이 혐의'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죄인인 인간들이 빛된 진리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본성적으로 죄인된 인간은 복음을 싫어합니다.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아담을 기억하십니까? 범죄한 아담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지 않습니까? 기독교 박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이유는 박해의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겉과 속을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있어야합니다.
고소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22-23절 봅니다.
"22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訟事)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많이 친 후에 가두고 간수(看守)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여기 한순간에 바울과 실라가 당한 고난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점쟁이 주인들과 함께 하는 무리들이 공격에 가세하니 재판관들이 즉시로 옷벗기고, 매로 치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보세요. 재판관이라면 고소한 사람들의 이유도 들어보고 고소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어 보아야 할 터인데 그런 절차도 없이 그냥 옷벗기고 매로 쳤어요. 기세 등등한 빌립보 사람들(스스로 로마사람이라고 했지요?) 이 행색도 초라한 바울과 실라를 잡아왔으니 그냥 가볍게 여기고 어쩌면 귀찮게 여겼을수도 있어요. 매로때리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옷을 그냥 벗긴것도 아니고 찢어 버렸어요. 매도 많이 맞았어요. 얼마나 맞았을까요? 본래 유대인들에게도 태형이 있었어요. 고린도후서11:24보면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유대인들은 40대 이상 매를 치지 않았어요. 많이 때려야 39대입니다. 그런데 25절 보면 "세번 태장(笞杖)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여기 태장은 유대인들의 법이 아닙니다. 집행관이 그만 때리라고 할 때까지 40대가 넘어도 계속 때리는 형벌입니다. 많이 맞았다고 했으니 40대가 훨씬 넘었을 것입니다. 저도 군대에서 매를 맞아 보았어요. 제 생각으로는 옳지 않다고 생각했던 상관과의 다툼 때문에 구대장 대위에게 매를 맞는데 13대까지는 맞았는데 더 못 맞겠어요. "차라리 감옥가겠습니다"하고 일어섯습니다. 화도 나서 오기로 맞으려 했는데 오기도 안 통하더라구요. 거기다가 24절 보면 "착고(着錮)"에 든든히 채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극을 보면 중죄인들 목에 무엇을 씌웁니까? 칼. 칼쓰고 있으면 움직이지도 못하고 눕지도 못하고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착고는 어떤 자료를 보니까 널빤지에 구멍 다섯을 뜷고 손과 발과 목을 끼우는 것이라고 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문제는 바울과실라의 태도였습니다. 재판도 없이, 죄목도 정해짐이 없이 매로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는데 바울과 실라는 항의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철학에도 능통했고 언변도 대단했습니다. 그런데도 한마디 하지 않고 고스란히 그 고통을 당했습니다. 왜 그랫을까요? 왜 때리는냐? 알아보고 때려라. 재판장 좀 보자. 본문 37절에 로마시민임을 밝히는데 여기서 밝혔으면 이런 억울한 일 덜 당했을텐데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여기 굉장한 신앙의 신비가 있을 것 같은데, 왜 침묵하며 고난당했을까요? 대답은 저도 몰라요. 다만 베드로전서2: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는 말씀이 있지요. 고난당할 때 따지지 말고 하나님 생각하고 참으라는 말씀 아닙니까? 하나님 생각하고 참으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섭리를 반드시 이루십니다. 억울하다, 원통하다, 분하다 하고 따지다 보면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나 자신은 물론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따지다 보면 하나님의 섭리는 안 보이고 인간적인 불만만 쌓이게 됩니다. 그래서 일찍이 시편기자는 이러한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다음과 같은 권고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시37:7-9)
성도 여러분.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머리가 똑똑하다고 해서 따지지 마세요. 변명하지 마세요.
2. 감옥에 갇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바울과 실라(24-26)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많이 맞은 후에 깊은 감옥에 갖혔습니다. "24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발에 착고까지 채우고 깊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깊은 감옥이란 지하감옥으로 중죄인을 가두는 곳입니다. 바울과 실라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히고 억울했을 것입니다. 또 온몸을 매로 맞았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요즘 제가 생각한바가 있어서 할수만 있으면 1주일에 한번은 등산을 가려고 합니다. 근간에 삼악산, 팔봉산, 오봉산, 검봉산을 다녀왔는데 아직도 등산하고난 후면 온몸이 말이 아닙니다. 하물며 생매를 그렇게 많이 맞았으니 오죽하겠습니까?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지하감옥이니 습하기도 했을 것이고 컴컴했을 터이니 얼마나 처량하기도 했겟습니까?
그런데, 25절 봅니다. "25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바울과 실라가 억울하게 매맞고 감옥에 갇혔는데 밥이나 제대로 먹엇겠어요? 어쩌면 냄새 가득한 지하감옥에서 한동안 기절해 있엇는지도 모릅니다. 한밤중에 몸이 쑤셔와서 고통 속에 정신이 들었겠지요. 그런 상황속에서 바울과 실라는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기도하고 찬미했습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억울하게 매맞고 감옥에 갇혔다면 마음에 분노로 속상해 하고 점쟁이 주인을 원망하고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하며 슬퍼해야 하는데 그 상황에서 기도와 찬미가 나옵니까? 바울과 실라는 자신들을 고소한 점쟁이 주인들을 생각하지 않앗습니다. 불의한 재판관들도 생각하지 않앗습니다. 오직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만 생각햇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성도 여러분.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사람을 보지 마시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해할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배신의 아픔이 자신의 영혼을 괴롭게 할 때도 기도하고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바울과 실라가 고통 중에서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느끼자 그들의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밀려오기 시작합니다. "오 하나님 당신은 위대하십니다. 당신은 신실하십니다. 나의 찬양을 받아주옵소서" 찬양합니다.
지하 컴컴하고 습한 감옥. 착고에 채워진 상처입은 몸에선 칼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이 엄습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오는 한밤중에도,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성도 여러분.
우리 중에 어려움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상황이 좋지 않습니까? 바울과 실라처럼 기도하세요. 찬양하세요.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을 다른 죄수들이 들었어요. 시끄럽다고 소리지르지 않았어요. 기적입니다. 그리고 26절 봅니다.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지진이 나고, 옥터가 움직이고 감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어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베푸시기도 하는데 조심할 것이 있어요. 그 기적은 매일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때에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기적이 계속되면 자연스러운 것이 되지요. 자연질서 가운데 기적 아닌 것이 있습니까? 성경에도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언제나 기적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문제 앞에서, 고난 앞에서, 기도와 찬양이 살아잇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와 찬양은 문제를 해결합니다. 우리가 환난과 고통 속에서 찬양하는 것은 문제를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실패의 암담함과 배신의 고통과 얽매이는 것들로부터 받는 영혼의 고뇌 속에서 과감히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랄 때 세상이 알 수도 없으며, 줄 수도 없는 평안과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고난가운데 있는 성도 여러분. 욥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욥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아픔과 고난을 그 한몸에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이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1:21) 고난 속에서 드린 욥의 기도가 마치 바울과 실라를 통해 메아리 치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성도 여러분. 욥의 기도가 바울과 실라에게 이어졌듯이 이제는 바울과 실라의 기도가 우리에게 이어질 수 있도록 살아있는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3. 구원받은 간수(27-34)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지진이 나고 옥터가 움직이고 감옥문이 열리고 - 여기까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런데 죄수들을 옭아매고 잇던 착고가 벗어졌는데도 바울과 실라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죄수들을 지키던 간수들이 만일 죄수들이 탈옥을 하게 되면 그 형벌을 대신 져야 햇습니다. 놀랜 것은 간수였습니다.
27절을 봅니다.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自決)하려 하거늘" 간수는 죄수들의 탈옥을 전제해서 스스로 자결하려고 햇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소리칩니다. 28절을 봅니다.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여러분. 바울의 경우라면 도망했겟습니까? 그냥 있엇겠습니까? '아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했더니 하나님게서 기적을 일으키셔서 풀어주시는구나, 얼른 나가서 또 복음을 전해야지' 생각하며 도망갈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만약 바울이 자기 이익을 챙기려고 했다거나 어떤 욕심 때문에 감옥에 갇혔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바울은 돈을 벌거나 어떤 이익을 챙기려 한 것이 아니었기에 눈 앞에 기적이 일어낫지만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도망 갈 수도 있지만 안가는 것이 진짜 신앙입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만일 도망갔다면 간수의 구원은 생각도 못할 일 아닙니까?
도망가지 않았다 하니까 간수가 등불을 들고 감옥 안으로 뛰어들어옵니다. 29절입니다. "29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俯伏)하고" 간수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무릎을꿇었습니다. 참 신기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간수가 무엇이 무서웠을까요? 형벌요? 죽음요? 스스로 자결하려 했던 사람이 무엇이 a무서웠겟습니까? 영적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의 기적도 보았습니다. 그런 중에 도망 가지 않는 바울과 실라를 보았습니다. 영적인 두려움입니다. 간수가 죄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런 영적 두려움에서 간수가 묻습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간수는 이제까지 우상과 상관과, 돈을 섬겼지만 이 상황에서 그런 것들이 아무 힘도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간수가 말하는 구원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크신 능력 앞에서 죄 많이 짓고 산 내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잇겠습니까? 이런뜻입니다.
이때 바울과 실라가 무라 합니까?31절을 봅니다.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하니)" 여기서 두가지를 보아야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 문제 해결의 열쇠는 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간수는 예상치 못한 사건을 경험하면서 영적 눈이 뜨여졌습니다. 우리도 세상에 살면서 이런 경험 할때가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교통사고를 당해 하나님을 만납니다.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은 젊은이에게 심방을 갑니다. 목사가 얼마나 말씀 전하기에 힘들겠어요? 그런데 청년이 말합니다. "목사님 하나님 은혜로 이 정도입니다" 어떤 사람은 중한 병이 들고나서, 어떤 사람은 사업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만약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면 그건 화가 아니라 복이 아닙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여기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이 말은 한 사람이 믿으면 그 믿음 때문에 자신과 그의 모든 가족이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여기서 '너와 네집이'라고 한 것은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라는 뜻입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밤에 간수가 바울과 실라를 자기 집에 데려다가 맞은 자리를 씻기고 또 온가족이 세례를 받고 음식 나누고 하나님 믿고 기뻐했다는 말씀입니다. 36절로 40절까지는 바울과 실라가 석방되는 내용이지요. 이때 비로소 바울은 로마 시민권 이야기를 합니다. 로마 사람을 재판도 없이 때리고 옥에 가두는 것은 황제에 대한 충성의 문제로 보아 재판관들이 크게 다칠 수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사과받고 루디아의 집으로가 형제들을 만나 위로했습니다.
마무리하면서
바울과 실라는 참으로 억울하게 매도 맞고 착고에 채워져 옥에 갇히기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원망하지 않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옥문이 열리고 매인 것이 다 풀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힘든 일이 있습니까?
억울한 일이 있습니까?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까?
질병에 걸렸습니까?
원망하지 마세요. 불평하지 마세요. 하나님 보세요. 주님 바라보세요.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와 찬양이 내 입술과 마음에서 살아있기만 한다면 분명히 옥문이 열려 자유의 몸이 된 것처럼 문제가 해결될 줄 믿습니다. 병도 물러갈 줄 믿습니다,. 구원의 역사도 나타날 줄 믿습니다. 춘천중앙의 성도 여러분. 바울과 실라를 거울삼아 최악의 상황에서도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여 하나님 베푸시는 기적도 경험하고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