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첫 신자 - 루디아 2002-05-31 18:56:09 read : 2610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사도행전 16:11-15
지난 한주간, 미국 유니온 신학교 교수였던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 1892-1971)의 기도문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매일같이 부딪치는 문제를 지혜롭고도 용감하게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하는 기도문이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시여! / 나에게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일에 대하여는 /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주옵소서. 나에게 /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일에 대하여는 /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그리고 / 이 두가지 차이를 깨달아 알 수 있는 / 지혜로운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세상에는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고민하거나 속끓이지 말고, 짜증내지 말고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지혜입니다. 그러나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일에 대하여는 성실하게, 용기있게 고쳐나가야 합니다. 문제는 변화시킬수 없는 일과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을 구별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변화시킬 수 있도 쉽게 포기합니다. 반대로 변화시킬 수 없는 일을 끌어안고 안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두가지 차이를 깨달을 수 있는 지혜 - 내 의지만 가지고 되겠습니까? 기도문 가지고 매일 매일 묵상하면 좋은 지혜가 떠오를 것입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과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기위해 말씀드립니다.
"11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1절에 '직행했다'는 말은 바람을 잘 만나 우왕좌왕하지 않고 곧장 목적지를 향해 항해했다는 뜻입니다. 드로아에서 사모드라게 까지는 순풍이 불면 이틀걸리지만 역풍이 불면 닷새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네압볼리는 16km떨어진 빌립보에 위치한 외항입니다. 드로아에서 빌립보까지는 대략 240km가 좀 넘습니다.
12절에 빌립보가 나오지요. 바울팀이 유럽에서 처음 선교하여 교회까지 세워진 곳이 바로 빌립보입니다. 빌립보에 대하여 본문은 두가지로 설명합니다.
① '마게도냐 지경의 첫성이요
빌립보는 고대에 크레니데스(Crenides ; 작은 우물이라는 뜻)라 불렸는데,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빌립왕이 성도 쌓고 이름도 빌립보로 바꾸었습니다. 당시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방에서 제일가는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란 마게도냐 지구에 첫째가는 도시라는 의미와 함께 마게도냐 지경 전체 -데살로니가, 아데네, 고린도 등-에 복음을 전하는 전초기지라는 의미도 됩니다. 빌립보는 유럽입니다. 소아시아와는 여러 가지로다릅니다. 출발이 좋아야 계속해서 좋은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② '또 로마의 식민지라'
빌립보는 로마에서 직접 관할하는 식민지였습니다. 로마 식민지들은 대개 전술적 요새로서 숙련된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주둔군은 로마옷을 입었고, 로마어를 사용했으며 로마법률이 집행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빌립보는 '작은 로마'였습니다. 따라서 결국 빌립보 선교는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를 향한 첫 선교이기도 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가지만 더 설명하고 넘어갑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있을때는 성전중심으로 생활했지만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지역에 흩어져 살 때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지역이라 해도 열가족이 모이면 반드시 회당을 짓고 회당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어디가든지 회당먼저 지어놓고 회당중심으로 모여 살았습니다.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기 때문에 회당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곳에 살았습니다. 안식일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회당에 가서 성경읽고, 외우고, 해석하고, 명상하며 보냈습니다. 자기 집에서 지키는 것은 안식일이 아니었습니다. 회당이 없을 경우는 일단 집에서 벗어나 한적한 강가나 산으로, 숲속으로, 때론 바위굴로 가서 말씀 붙잡고 묵상과 기도로 보냈습니다. 내게 손해 될 일이 있어도 안식일만은 꼭 지켰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 안식일처럼 주일을 율법적으로 지킬 수는 없다하더라도 주일은 교회중심,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때로 집에서 기도하고, 집에서 예배드리면 되지 꼭 교회에 나가야만 하는가? 생각할 때가 있지요? 그러나 집에서 드리는 예배가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만큼 은혜스럽던가요? 경건하던가요? 경건한 예배는 하나님의 전에서 기도드리고 말씀듣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생활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 중심으로 정화되고 강건케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1. 유럽의 첫신자 - 루디아란 어떤 사람입니까?
"13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14두아디라 성의 자주(紫紬)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빌립보에는 회당이 없었습니다. 회당이 있었다면 당연히 회당에 가서 전도했을 것입니다. 회당이 없었다는 말은 빌립보에 사는 유대인들 모두 합해도 열가정이 안되었다는 얘기도 됩니다. 회당이 없는 곳에는 대개 기도처가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강가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바울이 혹시나 하고 강가에 갔다가 거기 모인 여자들을 만납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유대교로 개종한 마게도냐 여자들이었습니다. 당시 마게도냐 여자들은 개종하기도 쉬웠고 개인재산을 자유롭게 축적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적인 활동이 매우 활발했습니다. 그래서 유럽최초의 교회였던 빌립보 교회는 여자성도들이 많았습니다.
유럽의 첫신자 루디아란 어떤 사람입니까? 14절에 두가지로 설명합니다.
①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라고 설명합니다.
먼저 루디아라는 이름이 실명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루디아는 개인이름이 아닙니다. 우리말로 하면 '춘천댁' '수원댁'하는 호칭과 같습니다. 두아디라는 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7대교회 중 하나인 두아디아 교회가 있는 곳입니다. 이 도시는 수세기동안 직조와 염료만드는 공업으로 발달했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루디아는 염료 중에서도 가장 값비싼 자색 염료로 처리된 자주(紫紬)를 취급하는 장사였습니다. 당시의 자색옷은 왕후, 귀족, 로마군인과 로마 시민들이 즐겨입는 고급옷감으로 상당한 자본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장사였습니다. 루디아는 남편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회적 분위기로 볼 때 자주장사는 남편이 있는 여자가 할 수 있는 장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루디아의 자주장사는 구체적으로 보면 두아디라에 공장이 있고 공장의 생산품을 마게도냐 일대에 가져다 파는 일종의 대리점이었을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남편없이 이만한 일을 해내는 것으로 보아 루디아는 생활력도 강하고, 성격도 적극적이며, 유능한 여성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루디아는 당시의 여성사업가였습니다. 후에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연보를 보내 바울의 옥바라지를 했던 사람도 바로 루디아였습니다.
② 루디아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루디아에 대하여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라고 표현한 것은 루디아가 이방인이었음을 나타냅니다. 당시에 이방사람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하여 성실하게 사는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종교로 개종하여 경건하게 유대종교의 규례를 지키고 안식일도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와 그 종들을 표현할 때 '경건한 사람''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안식일에 강가에 모여있던 사람들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경건한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비록 회당은 없었지만 말씀보고 기도하기 위해 모였지 않았겠습니까?
종합해 보면 루디아는 홀로사는 여자 사업가로 상당한 자본이 필요한 자주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유대교로 개종하여 하나님을 공경하며 살았으며, 언제나처럼 같은 신앙을 가진 여인들과 안식일에 강가에 나가 기도하는 중에 바울 일행을 만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자사업가로서 적극적이고 강한 생활력을 소유한 루디아는 후에 빌립보교회를 세우는 일은 물론이고 나아가서는 바울의 선교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됩니다.
2.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14…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루디아가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들었는데 바로 귀담아 듣게 하신 이가 주님이셨다는 말씀입니다. 주께서 마음의 문을 열어주셨기에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을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되짚어야 할 진리는 선교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성령이시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전도합니다. 그런데 어떤때는 전도의 열매가 쉽게 맺히는데 어떤 때는 땀만 뻘뻘 흘리다가 끝이 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전도가 성공할때는 내가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고 전도가 실패했을때는 내 능력이 떨어진 때문입니까?
여기서 저는 두가지 점을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는 아무리 내가 애를 써도 힘들여 말씀을 전한다 해도 성령께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열어 주셔야 비로소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결신을 하게 됩니다.
(성경예화)
누가복음24장을 보면 석양에 예루살렘을 등지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때를 같이 하여 불어닥친 핍박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소식을 들었지만 초조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등지고 엠마오로 향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제자들과 함께 한 사람이 동행하고 있었는데, 그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두 제자와 함께 예수님은 대화하십니다. "두분이 서로 주고받는 이 말들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두제자가 이제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하지요? 예수께서 말씀을 전하셨던 일, 법정에 서셨던 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 그리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일 - 여인들이 무덤에서 예수의 부활을 알리는 천사들을 만난 일. 그래서 무덤까지 가 보았더니 무덤은 비었고 부활하신 주님은 거기 계시지 않았다는 얘기 . 그때 예수께서 책망하시지요? 왜 예언자들이 한 말을 믿지를 못하느냐? 그리고는 성경에 쓴 모든 것을 자세히 풀어 설명합니다. 그러는 중에 마을에 도착합니다. 먹을 것을 앞에 놓고 예수께서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니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보더니"(눅24:31)
눈이 밝아져서 알아보았습니다. 예수께서 함께 계셨지만, 함께 말씀도 나누었지만 몰랐어요. 눈이 밝아져서야 알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눈을 밝게 하셨어요? 주님께서. 보이는 것만 볼 수 있어도 대단한데 보이는 것도 제대로 못봐요. 그런데 믿음의 성도는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고, 나에게 말씀하고 계신 주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성도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옵소서" " 눈이 밝아져 주님을 볼 수 있게 하옵소서"
계속해서 성경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구운 생선토막도 같이 드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 시편에 예수님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말씀을 설명하셨습니다. 바로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이제까지 예수님께 수없이 들었던 말씀이었지만 마음이 열려졌을 때 비로소 성경 말씀이 깨달아 졌습니다. 누가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주님께서 '눈도 열어'주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마음도 열어'주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성령께서 주장하셔서 루디아의 마음문을 열어 듣게도 하고 깨닫게도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마음문을 열어 주셨어요. 그래서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마음문을 열어 주셔야' 비로소 믿게 된다면 믿지 못하는 것도 성령께서 역사해 주지 않은 탓이니 내 책임은 없고 성령의 책임이라는 얘기도 되는 것 아닙니까? 이 문제는 구원론과 맞물려있는 미묘한 문제입니다. 어느 교파에서 주장하듯 구원이 예정된 것이라면 전도해도 예정되지 않은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고 예정된 사람은 어떻든 구원받게 되는 것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원의 의지를 가지고 계셔도 구원받고자 하는 나의 의지와도 맞아 떨어져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마음문은 성령께서 열어주십니다만 동시에 나도 마음문을 열어야 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께서도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주께서 열어주시기도 했지만 루디아는 믿음생활에 성실했습니다. 안식일에 강가 기도처에서 무슨 일을 했겠습니까? 말씀 묵상하며 기도햇을 것입니다. 사모했을 것입니다. 여자의 몸으로 그 시대에 적지 않은 사업을 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래도 안식일에 모든 것 접어두고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분을 향해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때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루디아의 심령 깊은 곳의 문을 여시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깨닫고 순종케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땅에 발붙여 살고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말씀과 은혜를 사모하세요. 사모하는 것이 내가 마음문을 여는 의지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내 마음문을 여시고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은혜를 주시고, 믿음의 능력도 주실 줄 믿습니다. 언제나 하늘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눈을 여시기 바랍니다. 내가 의지를 가지고 나갈때에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십니다. 사모하는 믿음, 열린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과 대화해 보세요. 정말 큰 깨달음과 확신이 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내게 주시는 은혜요 능력입니다.
3. 루디아의 집이 다 세례를 받고 바울을 집으로 청했습니다.
"15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强勸)하여 있게 하니라"
15절에서 루디아의 또다른 두가지 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루디아의 사람됨과 지도력입니다. 강가에서 바울을 만나 예수를 믿자마자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곳이 강옆이었겠다 그냥 세례받았어요. 한마디로 루디아는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받는데 '생각해 보겠다' '기도해 보겟다' '나중에 받겟다' 여러 얘기 하지 않앗습니다. 마음이 열려 믿게 되었는데 망서릴 것 없지요. 문제는 루디아 본인만 아니라 '그 집'이 다 세례 받았어요. 그 집에서 먹고 자고 하는 사람들, 가족만이 아니라 하인들까지도 다 세례받았어요. 자기야 바울이 전하는 말씀듣고 세례받았겠지만 어떻게 가족과 하인까지 받았겟습니까? 평범한 일은 아니지요. 그때의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보면 대략 이랬을 것 같습니다. 루디아가 그랬겠지요. '모두 모여! 오늘 모두 세례받기로 한다.' '세례가 뭔데요?' '받으라면 그냥 받아. 세례 좋은 거야' 재밌는 것은 그런다고 가족들이 다 받았어요.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루디아의 평소인품입니다. 주인으로서, 가장으로서, 경건했어요. 성실했어요. 진실했어요. 무엇을 하든지 틀림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부터 내가 예수 믿기로 했어. 나 세례받았어. 당신들도 예수 믿어 세례받아' 끝! 내일로 미루지 않았어요. 당장 세례받게 햇어요. 대단한 지도력입니다. 대단히 신뢰받는 인물이었습니다. 백부장 고넬료도 그랫지요? 자기가 믿고 세례받으면서 일가친척까지 세례받게 했습니다.
평소 내가 신뢰하는 사람이 하는 것 - 그냥 따라 해 보세요. 손해 볼 것 없어요. '알고 믿겠다'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기독교진리는 믿어야 알게 됩니다.춘천중앙의 성도들도 어디에 있든지 루디아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신뢰받고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하나는 루디아의 솔직하고 헌신적인 자세를 봅니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강권합니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루디아가 바울에게 은혜받고 세례받고 자기 집으로 청합니다. 이 당시 지금처럼 숙박업이 발달했던 것도 아니니 전도하는 사람들이 해가 지면 성도의 집이나 교회 한 구석에서 잠을 자야 했습니다. 바울도 빌립보에 왓지만 머무를 곳이 마땅치 않았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명하셔서 왓지만 빌립보에 아는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아무도 반겨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루디아는 잘 사는 집이었으니 집도 컸나 봅니다. 바울일행을 자기 집에 묵게 하고 싶었는데 루디아는 과부였기에 이것이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루디아가 바울에게 말합니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가 신실한 믿음의 성도라고 생각한다면 나를 여자로 보지 말라. 오직 예수 믿는 사람으로 본다면 내 집에 와서 유하라. 루디아의 입장에서는 바울이 안됐보였을 것입니다. 여행중이니 얼마나 행색이 초라했겟습니까? 잠자리도 편치않고 먹을 것 부실햇을 것이니 안스러워 보였을 것입니다. 루디아는 그런 바울 일행을 섬기고자 했습니다. 주의 말씀 전하는 일에 모든 것 버리고 헌신하는 바울에 대한 섬기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으로 청했습니다. 자기 집에 단순히 머무는 정도가 아니라 루디아의 집이 빌립보 선교의 중심지가 되게 합니다. 집을 개방한 것입니다. 후에 빌립보교회의 시작이 되지 않았습니까? 바울일행을 따뜻하게 영접하여 마음 놓고 빌립보 선교를 하도록 뒷바라지를 하는 루디아 - 헌신하는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 아닙니까?
정리하면서
유럽전도가 빌립보에서 시작되는데 루디아라는 참 좋은 사람을 만납니다. 잘 살기도 했지만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되자마자 세례받았습니다. 온식구가 다 받았습니다. 바울을 정성껏 뒷받침 하면서 빌립보 선교가 활발하게 펼쳐지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
루디아처럼, 열린마음, 열린 눈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나 하나 잘 믿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선교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로 물질로 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