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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예수의 은혜로 받은 구원
    2002-05-31 19:01:49   read : 2561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사도행전 15:6-11



    사도행전 15장은 예루살렘 제1회 공의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회의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 왔습니다. 오늘 저희가 다루게 될 사도행전 15장은 교회에 문제가 되었던 것을 해결하려고 모인 공식적인 첫 회의인 예루살렘 공의회에 대한 내용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예루살렘 공의회는 상당히 힘든 회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7절 전반부를 보면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변론(辯論)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제테시스입니다. 변론은 자기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변론의 정확한 의미는 상호간에 의견을 공평하게 내놓고 합리적으로 결론을 도출해 내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많은 변론'이라고 했습니다. 변론 앞에 '많은'이란 폴뤼스라고 합니다.

    개혁성경에는 '많은'이라고 번역했으나, 공동번역은 '오랜'으로 번역했습니다.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아마도 상당히 깊고도 많은 진통을 겪은 회의였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예루살렘 공의회의 내용은 심각한 내용이었습니다.

    우리는 회의 문화에 익숙치 않습니다. 회의하는 방법에는 요령부득입니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수용하는 데에는 영 소질이 없습니다. 이렇듯 회의에서 막무가내로 달려들다 보니 잘해 보자고 하는 회의가 어떤 때는 악재(惡材)로 작용하여 오히려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회의를 잘못해서 조직이 와해되고, 교회가 갈라지고, 분열이 생기고 갈등이 생깁니다. 공들여 쌓은 탑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회의에 임하는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갖출 미덕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여 경청하는 것이 그 첫째 미덕이요 상대의 좋은 의견은 충분히 검토하여 수용하는 아량이 두 번째 미덕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로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미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이방인이 예수를 믿을 때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으냐, 아니면 믿음으로 구원받느냐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고도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제1회 예루살렘 공의회는 바로 그 문제가 불씨가 되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문제가 불거져 나오자 사도들과 장로들 사이에 많은 진통이 있었고 드디어 베드로가 그 매듭을 짓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보여준 문제해결에 대한 접근은 매우 신중했으며 지혜로운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섣불리 누가 옳고 누가 그르냐,를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옳고 그름을 구별하려고 시도했다면 더 큰 반발이 불거져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단지 자기의 입장에서 복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자기가 경험한 복음을 솔직하고 단백하게 그러나 힘있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베드로의 단순하면서도 확신에 찬 선포가 많은 변론을 잠잠케 했습니다. 이전의 불같은 성격의 베드로를 생각할 때 참 많이 겸손해 진 모습입니다.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



    1. 이방인에게도 같은 성령을 주셔서 믿게 하셨습니다.

    "7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베드로의 주장은 명확합니다. 이방인에게도 우리와 같이 성령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문제의 본질을 짚어 나갑니다. 이방인의 구원에 관한 문제는 교리적인 기준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베드로는 즉각 알았습니다. 단지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셨던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를 증거하는 것이 유일한 해법임을 베드로는 경험적으로 알았습니다. 이방인들의 구원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베드로는 이미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베드로 역시 이방인의 성령강림에 대하여 매우 강하게 거부감을 드러냈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선민의식에 사로잡혀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허락하셨고 바로 그 기념비적인 일을 베드로에게 시키셨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 사건이 바로 그 기념비적인 사건입니다. 사도행전10:9-16절의 사건은 베드로가 욥바에 머물고 있을 때였습니다. 습관적으로 기도했던 베드로가 그 날도 제 육시 쯤에 기도하기 위해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베드로가 환상을 본 것이 바로 그때였습니다. 하나님은 환상을 통하여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이 이르렀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베드로는 처음에 부정한 것을 가까이 하지 않는 유대인의 전통에 호소하며 강하게 거부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 없는 대화입니다. 베드로는 감히 하나님의 명령에 토를 달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근거는 유대인의 전통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무단히 노력하는 과정에서 율법의 범위를 넓혀놨습니다. 집을 에워싸고 있는 울타리처럼 율법을 범하지 않기 위해 율법 주위에 울타리를 쳐 놨는데 바로 그 울타리가 유대인의 전통으로 대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율법만큼이나 이 전통을 소중히 간직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베드로는 처음엔 율법과 유대인의 전통에 충실했습니다. 율법과 전통이 도리어 생명을 억압하는 것으로 오용되고 있었음에도 베드로는 그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서 봤던 환상은 바로 이 편견으로 가득찬 유대인들의 잘못을 지적하신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이 환상을 기점으로 베드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유대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세계만국에 걸쳐 완성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한 지역에 국한되었던 복음이 이제는 세계로 전파되어져야 함을 베드로는 배우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러한 자신의 경험을 증거했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는 다양한 의견이 서로 충돌하며 진통을 겪고 있었지만 베드로가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대한 비전을 접한 순간 잠잠했습니다.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셨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베드로의 선포는 가장 강력하고도 명확한 결론이 되었습니다. 성령은 유대인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도 유대인들에게 처럼 동일한 성령을 주셨습니다. 베드로의 지혜로운 선포도 대단했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겸손히 받아들였던 공의회 회원들의 모습도 돋보입니다.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모두 회의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의견보다 나은 의견에 겸손히 동조하는 겸손과 아량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도 구원하셨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도 유대인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총안에서 성령받고 구원얻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에 있어서 이방인과 유대인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 분간치 않으시는 하나님

    "9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10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베드로의 증거를 통해서도 확실해 졌듯이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치 않으셨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우열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에게 율법이 있다면 이방인들에게는 순결한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믿음으로 깨끗케 하셔서 율법을 필요치 않게 하셨습니다. 율법 역시 사람을 께끗케 하는 수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방인을 믿음으로 깨끗케 하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듯이 율법과 믿음 역시 구원에 있어서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베드로는 율법을 주장하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믿음으로 구원얻는 길을 열어놓으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율법을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믿음으로 깨끗케 하는 것을 직접 봤는데.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참 무서운 경고입니다. 누가 있어 감히 하나님을 시험할 수 있습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면서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인다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신앙생활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열심이 지나치다 보면 어느 순간 순수한 동기는 사라지고 업적과 형식만 남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속에 생명은 사라지고 외형만 남게 됩니다. 지금 유대인이 그러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겸손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한국 초기 기독교에 재미나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하루는 선교사가 차를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가다보니 저 앞에 한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지고 힘겹게 걷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선교사는 안된 마음에 차를 세우고 할머니를 태웠습니다. 이런 저런 얘길하면서 가다보니 이 할머니가 아직까지 머리에 이고 있는 짐을 내려놓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선교사가 물었습니다.

    "할머니 왜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않고 여태까지 이고 있습니까?" 선교사의 물음에 할머니는 깜짝 놀라며 말했습니다. "이렇게 차를 얻어 타게 된 것도 미안한데 어떻게 무거운 짐까지 내려놓겠습니까? 무거운 건 내가 지고 있어야죠!"』



    참 황당한 이야기입니다만 할머니의 심정을 이해할 만 합니다. 자동차가 익숙치 않던 때라 할머니는 짐을 내려놓기가 미안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할머니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해는 되도 지혜로운 처사는 못됩니다. 율법은 할머니가 이고 있던 짐과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내려 놓아야 합니다. 율법은 유대인의 예에서 보았던 것처럼 죄인된 인간이 질 수 없습니다. 멍에로 작용합니다. 율법의 무게에 눌려 신앙생활의 기쁨도 만족도 느끼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조상대대로 율법의 무게에 눌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한번 해 보지 못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이방인에게 다시 율법을 강요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지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10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10절)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베드로는 계속하여 자신의 경험을 증거합니다. 베드로의 계속되는 논지는 '우리 조상도 메지 못하는 멍에를 왜 이방인에게 지우려고 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실은 유대인도 율법을 잘 지키고 있지 못하는데 왜 이방인에게 지키라 하느냐? 나도 잘 못하면서 남에게 하라고 하는 것이 문제다, 라는 지적입니다.

    예를 들어 율법 100개가 있는데 하나를 못 지킨거나 100개를 못지킨거나 못지킨 것은 일반입니다. 다른 율법은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할례만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 조상들도 율법을 못지켜서 고통스러워했는데 이방인들에게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는 못하면서 남을 고치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 반감이 생기는 경우는 지도자는 못하면서 남만 하라고 강요하는 때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칠 때, 교회에서 목회자가 성도를 가르칠 때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전국민적으로 개혁(改革)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는 것도 실은 국민이 안해서가 아니라 지도자들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개혁의 지연을 국민 탓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유대인도 마찬가집니다. 자기는 못하면서 이방인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상대방을 변화시키고 싶으십니까? 먼저 자신이 변화되십시오! 아내가 변화되기 원하면 먼저 남편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남편이 변화되기 원하면 먼저 아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자녀가 변화되기 원하면 먼저 부모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진리입니다.



    3. 누구에게나 동일한 복음

    (11절)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구원이라는 것은 율법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은 행위나 율법으로 얻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행위나 율법이 구원의 근거였다면 우리는 구원의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죄많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도는 은혜로 삽니다.

    은혜만이 구원얻는 길입니다. 이러한 은혜의 감격을 알았던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하게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기쁨이고 복음입니다.

    유대인들은 마치 물건의 독점권을 가진 것처럼 복음에 대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성결하고 거룩하고 이방인들은 짐승보다 못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있는 것을 무슨 대단한 훈장을 받은 것처럼 여겼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데 사용하기보다 자랑하고 뽐내는 데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교만에 싸여있던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구원을 달갑게 용납할 리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외칩니다. '우리도 저희와 동일하게 은혜로 구원받는다' 유대인들은 은혜를 몰랐습니다. 인간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진리를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자유를 주기 보다 멍에로 작용하고 있었음에도 그들은 굳이 율법을 고집하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베드로의 선포는 유대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이방인의 구원도 놀라운 일인데 한걸음 더나아가 이방인의 구원이나 유대인의 구원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언제나 기득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의 꿈이 한순간에 산산히 부서지는 순간입니다. 유대인들의 잘못은 은혜를 몰랐다는데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모든 성도는 은혜로 살고, 은혜로 호흡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편63:3) 은혜가 생명보다 낫다는 것을 다윗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은혜없이 하루도 살수 없다는 고백이 위대한 다윗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은혜 앞에서 구원은 누구에게나 가능합니다. 은혜 아래서 모든 사람은 동일합니다. 은혜 아래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이 없습니다. 은혜 아래서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 결론 >

    베드로의 전하는 메시지에서 뭘 배울 수 있는가?

    베드로는 옳고 그름의 얘기를 하지 않고 자기의 체험을 통해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베드로는 사도로서 어떤 권위로서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경험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도로서 귀한 자세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겠다고 한 유대인의 주장에 대하여 베드로는 성령의 역사, 또 구원에 대해서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차별없이 동일한 주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다는 것을 동일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를 깨닫고 있습니까?

    그러면 은혜 아래서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은혜 아래서 모든 성도들을 용납하시기 바랍니다. 실수와 허물이 있어도 용납하세요.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허물을 용서함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은혜 아래서 모든 사람과 동일한 교제와 사랑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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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감사가 넘치게 하라
    탁월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되라
    삶의 균형을 이루라!
    마라에서 엘림으로
    부흥을 확산시키라!
    부흥을 이끌 수 있는 사람이 되라!
    흔들리지 않는 신앙인이 되라
    부흥을 경험하라
    부흥을 사모하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라
    섬기기를 즐겨하라
    욕망을 다스리라
    평생 사명을 가지라!
    의미 있는 삶이 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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