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중국 어떤 왕이 저녁에 신하들을 불러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이때 왕후도 같이 참석하여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갑자기 바람이 불더니 방안에 켰던 촛불이 다 꺼지고 말았습니다. 이틈에 한 신하가 왕후의 손목을 잡았습니다. 왕후는 놀라서 손을 뿌리치며 소리를 지르고 그 사람의 갓끈을 쥐어 뜯었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손목을 잡은 고약한 놈의 갓끈을 내가 잡아 뜯었으니 갓끈 떨어진 놈이 내 손목을 잡은 놈이다" 이때 왕이 이런 명령을 내렸습니다. "불은 조금 있다가 켜라. 그리고 대신들은 모두 갓끈을 떼라" 이 말에 모든 신하들은 다 갓끈을 떼었습니다. 왕후의 손목을 잡았던 신하는 왕의 관대한 마음에 감동하여 왕에게 충성을 다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하는데도 좀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내 상식에 맞지 않은 이웃을 보면 마음이 불편하지요? 다른 사람이 나를 보면 어떨까요? 100% 문제가 전혀 없는 사람으로 볼까요? 아니겠지요? 시각을 바꾸었으면 좋겠어요. "교회는 병원이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래요 너나 할 것없이 부족한 것이 있으니까 예수님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내 상식에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날때마다 피하려 하거나, 욕하려 하지 말고 '저 사람에게 정말 주님의 사랑이 필요하구나. 그래서 교회에 왔구나' 생각하며 더 따뜻하게 더 친절하게 대해주세요. 그리하면 주님게서 여러분에게 더큰 기쁨과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책망이나 외면이나 미움보다는 더 큰 관심과 은혜속에 모두가 성숙해 지는 교회가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화에 나왔던 왕처럼 신하의 잘못을 덮어줄 줄 아는 여유를 가져 보십시오.
오늘 본문을 보면, 먼저 19절을 봅니다.
"19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招引)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루스드라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전하면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엿던 사람을 고쳤습니다. 이일로 인하여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오해하며 법석을 떨었습니다. 겨우 말렸더니 그후에 드디어 또 일이 터졌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괴롭히고 핍박했던 유대인 박해자들이 뒤따라 왔습니다. 거리가 100km 정도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군중들을 설득하여 돌로 바울을 쳤습니다. 전도도 열렬하지만 박해도 대단했습니다. 그리고는 바울이 죽은줄 알고 성밖으로 끌어냈습니다.
1. 바울에게서 보는 놀랄만한 세가지
"20제자들이 둘러섰을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복음을 그 성에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1) 돌맞고 실신했다가 깨어나서 다시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돌로친 사람들이 죽은줄 알았다고 햇으니 아마도 실신햇던 모양입니다. 실신할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돌로 친 사람들. 보통 아니지요. 상상해 보세요. 사람을 죽을때까지 돌로 친다는 것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독한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이 죽은줄 알고 둘러서서 슬픔과 걱정에 싸여 있었는데, 그 순간 바울이 일어났어요. 그리고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성에는 누가 있겠습니까? 바울을 돌로 친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유유히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돌로친 유대인들도 보통이 아니지만 일어나서 다시 성으로 들어간 바울도 대단하지 않습니까? 무엇을 보여 줍니까? 박해가 전도를 막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죽음이 생명의 도를 막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바울의 전도는 이미 목숨을 건 전도였습니다. 죽음을 넘어선 사람에게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2) 다음날 바나바와 함께 다시 전도 여행을 떠납니다.
죽을 정도로 돌에 맞았으니 그 몸이 온전했겠어요? 상처도 났을 것입니다. 멍든 곳도 있을 것입니다. 붓기도 했을 것입니다. 몸이 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쯤되면 어디 산좋고 물좋은 곳에 가서 몸이 회복될때까지 조용히 쉬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다음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갔습니다. 더베는 루스드라에서 동남쪽으로 30여 km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더베성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목회자이고 평신도이고 때때로 주님의 일, 사역이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빈다. 밤낮쉬지 않고 일해도 별 열매가 없을 때, 얼마나 어깨에서 힘이 빠집니까? 그래서 주저앉고, 쉴때도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죽도록 돌에 맞고도 다음날에는 다시 다른 곳으로 복음을 전하러 떠납니다. 가슴이 뭉클하고 머리가 숙여지는 일 아닙니까?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일 하다가 이런 저런 시련에 부딛칠때마다 그냥 주저 앉기 보다는 오늘 바울의 모습을 생각하며 다시한번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3) 핍박받던 곳으로 다시 갔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의 종점은 더베였습니다. 더베를 |끝으로 다시 안디옥교회로 돌아가는데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을 거쳐서 귀로에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 모두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대단한 핍박을 받았었습니다. 자신을 돌로 쳤거나 치려했던 사람들이 아직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개의치 아니하고 그곳에 갔습니다.
성도 여러분. 과거에 좋지 않은 경험이 있던 곳이나 물건은 다시 가거나 보기도 싫지가 않습니까? 예를 들면 군대 다녀온 사람들 제대하면서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쪽보고서는 소변도 안 보겠다" 생각만 해도 싫다 이겁니다. 배고파 먹을 것이 없을 때 지겹도록 먹던 옥수수 - 보기만 해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과 바나바는 생명의 위협을 받던 그곳을 다시 갔습니다. 대단하고도 놀라운 일입니다.
2. 바울의 선교전략, 갈때-전도, 올때-양육
바울이 왜 생각하기도 싫어할 정도로 좋지 않은 경험을 했던 곳을 다시 거쳐서 안디옥으로 돌아가고 있습니까?
실제로 길리기아 다소를 거쳐가면 훨씬 가깝기도 했고 길리기아 다소는 바울의 고향이었으니 가보고 싶은 마음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확고한 선교전략이 있었습니다. 갈때는 부지런히 복음을 전했고, 귀로에는 다시 일일이 만나서 확인하고 양육하는 일을 했습니다. 22절 23절 보시겠습니다.
"22제자들이 마음을 굳게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
구체적으로 양육한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무슨 권면을 했습니까?
(1) 마음을 굳게 하라
바울은 먼저 마음을 굳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믿게 되긴 했지만 그러나 결코 편하게 믿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을 굳세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모세가 죽은 후에 대를 이어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땅을 향하는 여호수아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뭐라고 권면하셨습니까?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膽大)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는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닐터인데 내가 언제나 너와 함께 할 터인즉 너는 굳세고 용감하여라, 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을 굳게 하는 것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생각해 보면 바울은 지금 개종자들에게 권면하고 잇는데, 개종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감동과 확신에 차서 개종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됩니까? 감동은 식어지고 의심도 생기고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내가 과연 제대로 가고 있는가?' 거기다가 주변에서 개종자들에 대해 한두마디 하면 혼란까지 옵니다. '믿어도 하나를 믿어야지, 우물을 파도 한우물을 파랬는데' 이러면 마음까지 흔들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고나서는 한동안 세심하게 돌보며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게 먼저 믿은 사람이 도와 주어야 합니다. 흔들리는 마음을 꼭 잡아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양육의 첫단계입니다.
성도 여러분. 처음 믿다 보면 의심도 많이 생기고 조그만 일에도 흔들리기가 쉽다는 사실을 아시고 처음 믿는 사람들을 꼭 붙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굳게 하여 흔들리지 않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2) 믿음에 거하라
바울은 믿음에 거하도록 권했습니다. 흔히 신앙생활하다보면 혼란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몰라서 제대로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맞는 얘기 같지만 온전한 얘기는 못됩니다. 제대로 아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는 것은 믿음을 도와 줄수는 있어도 믿음 자체는 아닙니다. 구원은 아는 지식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골로새서2:6-7을 표준 새번역으로 보겠습니다.
"6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 들였으니 그의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7여러분은 그의 안에 뿌리를 박고, 세우심을 입어서, 가르침을 받은대로 믿음을 굳게 하여, 감사의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골로새서2:6-7은 제자양육의 근거로 삼는 성경구절입니다. 예수를 영접한 후에 예수 안에서 살아라. 예수 안에 뿌리를 내려라. 가르침 받는대로 살아라는 얘기입니다. 뿌리가 튼튼해야, 뿌리가 깊게 내려야 줄기가 바로 설 수 있지 않습니까? 혼자 설 수 있도록 믿음의 뿌리를 내리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양육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의 뿌리가 중요합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믿음의 연륜도 무척 중요합니다. 지난 부흥회의 주제는 「믿음의 가문을 세우라」였습니다. 대를 이어 예수 믿는 다는 것 쉽지 않습니다. 2대 3대 4대 5대 대를 이어 예수 믿는 것, 가문에서 목회자가 나오고 장로님이 나오는 것 영광된 일입니다. 본인들도, 자녀들도 영광스럽게 알아야 합니다. 바로 믿음의 뿌리입니다. 믿음의 뿌리가 굳게 내려 흔들리지 않고 예수 안에서 가르침 받은 대로 감사하며 사는 것이 복된 믿음생활 아니겠습니까?
(3)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본문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머리에 스쳤습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한 것도 모자라서 루스드라까지 돌을 들고 쫒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바울 자신이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여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 뒤에서 옷을 지키며 사주했었고 다메섹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을 붙잡아 예루살렘으로 압송하려고 예루살렘에서 직선거리 200km나 떨어진 곳까지 극성스럽게 쫓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찌되었습니까? 이제는 자기가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핍박하면 됐지 루스드라까지 쫓아와?'하고 말할 처지자 못되는 것 아닙니까?
바울 자신도 참 환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27에서 바울은 자기가 겪었던 고난을 설명합니다.
"23…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번 태장(笞杖)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破船)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꿂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은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여러 가지 육체적인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고린도후서12:7을 보면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무엇인지 정확하게 집어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바울은 육체의 심각한 질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렸지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응답만 받았을뿐 질병이 낫지 않았습니다. 평생 병을 몸에 지니고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고린도전서9:27에서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내몸을 쳐서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
바울은 다른 사람은 구원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버림받을 수 있다는 실존적 위기의식이 있었습니다. 사실 목회자와 전도자가 가질 수 있는 내적인 고민이 아닙니까?
이런 환난을 체험했고 또 체험하고 있는 바울은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왜 환난을 당해야 합니까? 아니 바울이 왜 환난을 당하며 묵묵히 견디어 냈습니까? 감옥에도 갇혔습니다. 매도 맞았습니다. 바다에도 빠졌습니다. 강도도 당했습니다. 굶기도 했습니다. 병에도 걸렸습니다. 바울의 신앙생활은 결코 순탄하지가 않았습니다. 바울은 왜 견디면서 신앙생활 했습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바울이 어떻게 고난을 견디어 냈습니까? 비결이 무엇입니까?
로마서8:18입니다.
"생각컨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도다"
현재 내가 당하고 있는 고난 - 대단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내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누리게 될 영광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겁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현재 고난이 대단해도 참을 수 있다. 왜? 영광이 비교할 수 없도록 크기 때문에 이것을 믿지 못하면 신앙은 아름답지만 생명이 없는 조화와 같습니다.
대부분 예수 믿게 되면 만사형통의 복만 가르칩니다. 예수 믿으면 복받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달랐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고난도 겪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 믿으면 축복과 영광도 있지만 영광에 이르기까지는 고난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환난은 한마디로 강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요즈음 수술하고 낳은 아기와 자연분만을 통해 낳은 아기의 차이에 대해 얘기합니다. 자연분만을 통해 낳은 아기가 더 참을성이 있다고 합니다. 일리가 있는 얘기입니다. 태어날 때 고생해본 아기가 세상 어려움을 참는 인내력이 더 강하다는 것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환난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환난을 통해 강하게 되고 환난을 겪으면서 자기 부정을 통해 겸손하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은 환난을 없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환난을 이기게 해 주는 힘입니다.
23절에서 바울은 양육하고 영적 지도자를 택하여 그들에게 부탁합니다. 장로들은 누구에게 부탁했습니까? "믿는 바 주께 부탁하고" 세상 책임져 주실 수 있는 분은 우리 주님 밖에 없습니다. 주님 바라보도록 했습니다. 주님 바라보게 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잡아 주어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홀로서기를 해야 합니다.
3. 바울의 귀환보고
24절에서 26절까지 보면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 밤빌리아, 버가, 앗달리아를 거쳐 드디어 출발했던 안디옥에 도착합니다. 27-28절은 간략한 선교보고입니다.
"27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28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1)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보고는 상상해 보면 대단한 무용담이 될 것도 같습니다. 가는곳마다 복음을 전할 때 대단한 역사도 나타났습니다. 믿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가는곳마다 무지한 박해도 당했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으로 귀환하는 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시 만났습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잘 볼보았습니다. 1년이 넘는 동안 5천리 전도여행에서 한일도 많건만은 바울과 바나바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행하셨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겸손합니까?
또하나 바울과 바나바는 지금 안디옥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모아놓고 선교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을 파송해 주고 기도해 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하는 심정이 어떻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해 주셨습니다. 병자도 고쳐주셨습니다. 앉은뱅이도 일어서게 하셨습니다. 믿는 사람도 많이 생기게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끔 간증듣지요?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전하는 입이나 듣는 귀는 언제나 은혜와 기쁨이 충만합니다.
(2) 이방인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했습니다.
유대인 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믿음의 문을 열어 주셨음을 보고했습니다. 기독교가 이제는 유대인의 종교에서 세계적인 종교로 확실하게 뻗어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감격적인 보고입니다.
(3)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바울과 바나바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얼마나 외로웠겠어요?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것도 같이 믿는 사람이 있어야 힘이 나는 법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었다고 했습니다. 짐작키는 성도들 가정에 초대를 받아서 음식도 나누고 선교경험도 나누고 그리했지 않았겠습니까? 이런 경험은 대단히 귀한 경험입니다. 우리교회에도 선교사들이 있지요? 선교사들이 귀국하면 초대도 하시고, 음식접대도 하시고, 중요한 것은 그분들의 선교보고를 잘 듣는 것입니다. 그래야 기도제목도 생기고, 선교사들이 얼마나 신이나고 힘이 되겠습니까?
<정 리>
성도 여러분.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의 마무리를 보면서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 힘써 뿌리면 반드시 열매가 있습니다.
· 환난이 오더라도 참아야 합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 환난이 오히려 홀로서서 견딜 수 있는 강한 능력이 되기도 합니다.
·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 -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이렇게 열매가 열렸다.
복음의 씨 뿐만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도 많이 뿌리고 참고 견뎌 좋은 결실을 맺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는 복된 성도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