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받을 만한 믿음 2002-05-31 19:04:43 read : 2968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사도행전 14:8-10
루스드라는 이고니온에서 남쪽으로 30km지점에 있는 도시로서 디모데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도행전 14:6에 나오는 더베는 루스드라 동남방 27km 지점에 있는 도시로 바울과 바나바의 제1차 전도여행의 마지막 종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 전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짐작키는 루스드라에는 회당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바울이 회당에서 전도했다는 얘기는 없지 않습니까?
8절을 같이 봅니다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자라"
오늘 사건의 한가운데 등장하는 사람이 있지요? 세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이 사람은 발을 쓰지 못하는 지체장애인이었습니다.
둘째 이사람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었습니다.
셋째 따라서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상상이 되십니까? 온 가족의 관심속에 태어난 이사람이 나면서부터 걸어보지도 못하고 평생 앉은뱅이, 지체장애인으로 살아왔으니 얼마나 슬픔과 고통이 많았겠습니까? 성경에 그런 말씀은 없지만 이 사람은 세상 살면서 걸어볼 수 있다고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되었습니까?
9절과 10절을 함께 봅니다. "9)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0)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한마디로 사건이 생겼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성도 여러분.
남의 일처럼 생각지 마시고 가까이서 보세요. 평생 걸어보지 못한 지체장애인의 아픔을 공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이 사건이 얼마나 크고 대단한 사건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언뜻 보면 본문의 바울이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은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미문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친사건과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사도들이 고쳤다는 점은 같지만 다른점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앉은뱅이는 거지였고 본문의 앉은뱅이는 말씀을 듣는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는 베드로가 앉은뱅이의 손을 잡아 일으켰는데 본문에서는 바울이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큰소리로 외치기만 했는데 나았습니다. 주석학자들은 사도행전 3장과 본문의 두 사건을 비교하면서 베드로와 바울의 동등한 사도권을인정하면서 베드로는 유대인을 고침으로 유대인을 위한 사도로, 바울은 이방인을 고침으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성경은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오늘 문제는 - 사도행전 3장과 본문의 차이점 중 하나는, 사도행전 3장의 걸인은 신앙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었고 오늘 본문의 나음받은 사람은 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 - 어떤 믿음입니까?
먼저 구원에 대해 정리해야겠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 위험으로부터의 구원(마8:25),
- 악한 세대로부터의 구원(행2:40),
- 잃어버림으로부터의 구원(눅19:10),
- 죄로부터의 구원(마1:21)
- 그리고 종말론적인 구원(롬13:11, 고전5:5, 딤전:18, 벧전1:5)이 있습니다.
- 또 하나 육신의 질병으로부터의 구원이 있습니다.(마9:21, 눅8:36)
그러면 오늘 본문은 어떤 구원을 의미할까요? 종말론적인 구원요? 맞습니다. 종말론적인 구원을 의미한다고 해도 맞습니다. 그런데 희랍어 '구원받을'에 해당하는 「소조」(σωζω)라는 말은 '구원하다'라는의미와 함께 '온전하게 되다', '건강하게 되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he had faith to be made well(RSV)'고침받을 만한 믿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구원이든 육적인 구원이든 앉은뱅이에게는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고침받은 앉은뱅이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설교를 하던 바울은 그에게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는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했습니다. 그래서 나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었으면 좋겠지요? 나에게도 기적이 일어나는 믿음이 있었으면 좋겠지요? 그런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질문합니다.
1.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성도 여러분.
믿음은 어디에서 옵니까? 어떻게 해야 믿음이 생깁니까? 어떻게 해야 믿음이 자랍니까? 어떻게 해야 믿음이 강해집니까? 생각해 봅시다. 노력하면 믿음이 생깁니까? 애쓰면 믿음이 생깁니까? 운다고 믿음이 생깁니까? '믿습니다' 큰 소리로 외치며 기도한다고 믿음이 금방 생깁니까? 믿음은 그렇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생기는 것입니까? 믿음의 씨가 뿌려져야 합니다. 아무리 능력있고 아름다운 여자라도 혼자 애기 낳을 수는 없지요. 남자로부터 생명의 씨앗이 여자에게로 들어가야 비로소 임신이 되지요. 절대로 애기는 혼자 낳을 수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내 생각으로, 내 지식으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 방법대로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 방법대로는 10년, 20년이 지나도 제대로 된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믿음이 생깁니까? 잘들으세요. 말씀의 씨가 내 마음에 심어져야 그때에 비로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뭐라 했습니까? 로마서10:17절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을 들을 때 제대로 생긴다는 말씀입니다. 들어야 돼요. 예수님 뭐라 하셨어요?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할지라도 하나님 뜻대로가 아니면 헛일이다' 말씀하셨지요? 기적 행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방언하고, 귀신 쫓고 하지말라 - 이 얘기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 믿음, 내 행함이 하나님/주님뜻과일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말씀입니다. 말씀을 계속들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지난 6월 셋째주간 며칠 금식하면서 - 신문, TV 안보지요. 만나서 얘기할 사람도 없지요. 성경보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하나님 음성듣고, 그런데 성경을 계속보는데 마음 속에 어떤 확신이 와요 -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 아닙니까? 말씀을 떠난 기도, 말씀을 떠난 믿음은 헛된 자기 확신일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니까 바울도 믿음이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생긴다고 하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말씀 들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말씀 들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오늘 앉은뱅이는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기에 걸을 수 있는 기적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지금부터 바울과 앉은뱅이의 관계를 살펴보고 깊이 꿰뚫어 보면서 우리도 나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변화시켜줄 새로운 믿음으로 무장하시는 귀한 시간 삼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긴다고 했어요. 그러면
2. 어떻게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1) 집중해서 들어야 합니다.
"9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있었던 일은 앉은뱅이가 바울의 설교 -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듣거늘" 에 해당하는 희랍어 "에코우엔"(ηκουεν)은 미완료동사로 계속적으로 듣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누구의 말을 듣는 정도가 아닙니다.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집중해서 열심히 지속적으로 듣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들었습니까? 바울이 설교를 시작해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큰 소리로 외칠 때까지. 바울의 설교를 처음부터 집중해서 열심히 계속해서 들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의 기적사건은 말씀과 함께 일어났다는 사실을 주시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말씀의 능력이 어떻게 앉은뱅이에게 나타났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의 능력이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말씀의 능력이 사람의 생각을 바꿔놓았습니다. 말씀의 능력이 사람의 의지와 감정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일어서게 하지 않았습니까? 말씀을들으면서 예수님의 사랑/하나님의 능력을 깨닫습니다. 마음도 담대해 집니다. 영혼도 건강해 집니다. 정성과 마음을 다해 말씀을 집중해서 듣는 중에 말씀의 능력이 몸에까지 전해옵니다. 그러면서 누구도 생각지 못한 엄청난 기적을 체험하지 않았습니까?
성도 여러분.
능력있는 믿음을 갖기 원하십니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원하십니까? 말씀에 집중하세요. 말씀이 불이되어 뭔가 모를 힘이 내게도 솟아나는 체험을 하실 것입니다. 히브리서4:12에 뭐라 하셨습니까?(표준새번역)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양날칼보다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갈라냅니다"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에너지가 있습니다. 혼과 영을 변화시킵니다. 관절과 골수 - 육신을 변화시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은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일으켰지 않습니까? 말씀을 집중해서, 지속적으로 듣게 될 때 능력이 내 속에 역사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바울이 왜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보았겠나?를 생각해 봅니다.
"바울이 주목하여"
성도 여러분,
바울이 설교하는 곳에 오늘의 주인공 한 사람만 있었겠습니까? 11절"무리가 행한 것을 보고" 라는 구절을 보면 여러 사람이 설교를 듣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많은 사람가운데 이 앉은뱅이만을 집중해서 보았을까요? 왜 앉은뱅이만 똑바로 보았을까요? 그 이유가 중요합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 사람이 집중해서 설교를 열심히 듣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설교할 때 성도들을 보면 참 듣는 모습도 다양합니다. 목사가 설마 그런것까지 보겠느냐 하겠지만 강단 위에만 서면 교회안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설교를 들을 때 음악감상하듯 눈을 지그시 감고 듣습니다.
어떤 분은 열심히 딴 것 하면서 들어요
옆사람과 소곤소곤 얘기하는 사람도 있구요(이런분은 설교듣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빚 받으러온 얼굴로 설교 듣는 사람도 있습니다.
조는 사람도 있구요. 학교에서 설교학 시간에 뭐라고 가르치느냐 하면 설교할 때 잘하려면 설교를 가장 잘 듣는 사람을 보면서 설교 하라고 합니다. 딴짓 하는 사람보면서 설교하면 힘빠져요. 설교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아멘도 하고, 감동이 올때는 고개도 끄떡끄떡하고, 우스운 소리하면 소리내어 웃고(우스운 소리하는데 근엄한 표정짓는 것이 젊잖은 것입니까?) 울일이 있으면 울고 - 이런 사람 쳐다 보면서 설교하면 설교가 힘이 난다니까요. 특별히 설교시간만 되면 조는 사람 - (입까지 벌리고) 설교자 힘빼는 일입니다.
성도들 입장에서도 할말이 있겠지요? 은혜가 되어야지 아멘하지요. 우스워야 웃고 감동이 와야 울 것 아닙니까? 도대체 나의 입맛에는 맞지가 않아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이 음식 탓합니까? 병든 사람이 음식 탓합니까? 건강한 사람은 음식을 가리지 않습니다. 무엇이나 잘 먹고 잘 소화해 내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음식탓하는 것은 내 입맛이 병든 탓이라는 말씀입니다. 씨뿌리는 비유 아시지요? 씨는 똑같은 씨였는데 어디는 30배요 어디는 100배의 결실이 맺히는 이유는 바로 밭이 다르기 때문 아니었습니까? 아무리 종자가 좋아도, 아무리 말씀이 귀해도 듣는 자가 바로 듣지 못하면 열매는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란 바로 말씀을 제대로 듣는 믿음을 말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바울의 입장에서는 마치도 배고픈 사람의 음식을 먹듯 말씀을 받아 먹는듯하는 앉은뱅이를 주목한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3) 열심히 듣는 것을 보니 바울의 마음에도 감동과 확신이 왔습니다. "일어서라"
바울은 앉은뱅이가 말씀을 열심히 듣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믿음이 왔습니다.
'저사람이 말씀을 제데로 받는구나' '저사람 영혼이 구원을 받았구나' '저사람이 변화되고 있구나' '저사람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고 있구나' '저 정도라면 능력이 나타날 수있다' '저 정도라면 일어설 수 있다'
바라보는 바울에게도 감동이 옵니다. 믿음의 확신이 옵니다. - 이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시편81:10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는 너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여러분. 어미새가 먹이를 물어오면 노란 입을 벌리고 반기는 새끼새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입을 딱 벌리고 있기만 하면 어미새가 물어온 먹이를 넣어줍니다. 살펴보면 너무 어려 미처 눈을 뜨지 못한 새끼도 있어요. 그래도 입만 벌리면 어미는 먹을 것을 넣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향하여 외치십니다. "입을 열라"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성도 여러분.
설교하는 입장에서 보면, 설교듣는 사람의 상태, 설교듣는 사람의 믿음을 느낄 수가 있어요. '아 믿음이 저 사람 속에서 역사하고 있구나'
(4)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들어야 말씀이 능력이 되어 기적이 일어납니까? 가끔 설교하다 보면 옆사람 쳐다보면서 빙긋이 웃으면서 쿡쿡 찌르는 모습이 보입니다. 부부관계를 설교할 때 남편역할 얘기하면 아내가 쿡 찌르고 아내 역할 얘기하면 남편이 쿡 찌릅니다. '잘 들어' '당신이나 잘들어' 왔다 갔다 합니다. - 이해 하지만 좋은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듣는데는 옆사람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몰입해야 합니다. 아! 나를 향하신 말씀이구나. 말씀들으면서 - '이 설교는 김집사가 꼭 들어야 하는데. 최권사가 꼭 들어야 하는데 골라서 결석해'하면서 아쉬워 할 것 없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나를 향한 말씀이다' '내 과거, 내 현재, 내 미래가 어떻든, 내 처지가 어떻든 관계없어요' '바로 내게 주시는 말씀이다' 하고는 몰입해서 말씀을 듣다보면 자연적으로 순종하고 픈 마음이 생기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말씀에도 '아멘' 저 말씀에도 '아멘'하다가 보니까 '일어서라' -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설 것입니다. '할렐루야'
성도여러분.
말씀 들으면서 꼭 다짐해야 할 것 - '내가 듣는대로 순종하며 살리라' 이런 마음으로 이런 믿음으로 들으면 기적의 역사는 반드시 일어납니다. 설교 들으면서 쉬운 것은 하고, 힘든 것은 다음에 하고 이 정도는 장로되어서야 해야지 - 이런 마음 가지면 신앙 안자라요. 신앙생활하면서 다른 사람 얘기 하지 마세요. '장로가 뭐 그래' ' 권사 믿음이 겨우 그 정도야' - 다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원칙 '나만 잘하면 된다' - 모두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앉은뱅이가 '일어서라' 했는데 '여보시오 나를 잘 모르는 모양인데 나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요.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야. 일어서고 싶지 않아서 안 일어선 줄 아시오?' 했다면 영영 앉아서 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말씀 들으면서 순종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말씀들으면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2000. 6.25일 1부예배 마친 후 모 집사 부부가 어린아이와 함께 찾아 왔는데 알지 못하는 아이라서 어떻게 된 애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어느 부흥회에 참석했을 때 부흥사 목사가 '애기 낳고 싶으면 감사헌금해라' 해서 애기가 갖고 싶었는데도 갖지를 못했었던 터라 헌금했더니 바로 애기를 갖아서 이제 낳은지 10개월이라는 겁니다. 많은 지성인 성도들이 반문하고 싶을 겁니다. '목사님 헌금한번 해서 애기 낳는다면 못 낳을 사람 없겠네요' 예 맞아요 애기 낳은 사람과 못낳은 사람의 차이는 간단합니다. 믿고 하니까 낳았고 믿지 못했으니 안한 겁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들을 때 감동이 오면 무엇이든 믿고 하세요. 역사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애기 갖기가 불가능한 사람인데 - 현대과학으로는 안된다는데 설교 듣다가 마음에 감동이 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된다' 확신이 옵니다. 기도합니다. 어려움이 옵니다. 또 기도합니다. 주위에서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드디어 새 생명이 태어났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만 기적입니까? 이것은 기적 아닙니까? 기적입니다.
요한복음 5장을 보면 38년된 병자가 베데스다 연못가에 앉았습니다. 38년이나 병을 앓았으니 얼마나 지쳐 있었겠어요? 그래도 그는 신비의 연못, 전설의 기적의 연못 베데스다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뭐라 하셨어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어떻게 됐습니까?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만일 38년된 병자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 내가 38년된 병자입니다, 자리 들고 걸어갈 정도면 여기 이렇게 있겠어요. 물이 동할 때 벌써 먼저 연못에 들어가서 병 치료하고 집으로 갔겠지요. 자그만치 38년 동안이나 자리에 누워있는데 어떻게 일어나 자리까지 들고 걸어갑니까? 이런 마음이 없었다면 기적은 물 건너 갔을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말씀 들을 때마다 '나도 저렇게 할 수 있다' '나도 순종한다' 확신과 믿음 가지고 순종할 때 기적은 반드시 나에게도 일어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정리합니다.
3.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믿음으로 일치되면 역사는 일어납니다.
열심히 들었습니다. 너무 집중해서 빨아들일 듯 말씀을 들으니까 바울이 주목했습니다. 바울이 주목해서 보니 앉은뱅이의 마음에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음이 느껴졌습니다. 바울에게도 감동이 왔습니다. 믿음의 확신이 왔습니다. 바울은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잡아 일으킨 것도 아닙니다. 안수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소리친 것뿐입니다. 그런데 어찌되었습니까? 뛰어 걸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믿음으로 일치되면 역사는 반드시 일어납니다. 병고침이든, 문제해결이든 어떤 것이든지 믿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에 대하여 이의하지 마세요. 내 고집, 내 방법, 내 지식을 접어 두세요. '당신은 됩니다. 하면 아멘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나서기만 하면 이루어집니다. 순종하려는 마음, 순종하려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 바라보세요. 매일 매 순간 주님을 주목해 보세요. 믿음을 쏟고 마음을 쏟으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역사가 나타납니다.
<정리>
춘천중앙의 성도 여러분.
믿음은 말씀을 들을 때 생깁니다.
집중해서 들으세요 '말씀 속에 길이 있다. '말씀속에 방법이 있다' ' 말씀 속에 에너지가 있다'
순종하려는 마음으로 들으세요. 나중에가 아닙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그래도 나는 할 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 '순종은 내 몫이고 역사하심은 하나님께서 하신다'
내 판단, 경험, 지식은 내려놓고 믿음으로 순종할 때 역사는 일어납니다.
< 루스드라의 앉은뱅이 사건에서>
믿음의 능력을 보고 깨달으면서 나도 '구원받을 만한 믿음'의 성도로 문제를 극복하고 승리를 노래하는 자랑스런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