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기준으로 사는 교회 2002-05-31 23:26:49 read : 2942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 예수 믿는다는 것은? ]
에베소서 1: 3-14
얼마 전에 서울의 한 초등학교 5학년을 대상으로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는지 설문조사를 한 것이 신문에 난 적이 있습니다. 이 어린이들이 선택한 세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부자로 살고 싶다, 유명해지고 싶다, 그리고 편하게 살고 싶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린이의 눈에 비쳐진 자신들이 복되다고 생각하는 삶의 기준이 바로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가치관이요 삶의 목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도 어쩌면 이런 일들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기준으로 살아간다면 오늘의 사회는 많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의사들이 편하게 살기위해서 산다면 힘든 정형외과는 선택하지 않고 돈을 벌지 못하는 분야의 전문의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현상들이 의대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요즘 아이들의 소원이 탈렌트나 개그맨이 되는 것이라고 하니 이미 이러한 흐름들에 거세게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에 있으면서 재미있는 현상을 보았습니다. 같은 점수를 80점을 받았는데 한 학생은 울고 불고 야단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학생은 좋아서 어떻게 할 줄 모릅니다. 그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우는 학생은 자신이 90점을 기준으로 세웠는데 작정한 기준에 미달해서 울고 있고 기뻐하는 아이는 60점쯤 생각했는데 예상 밖의 좋은 점수가 나와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같은 환경과 조건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나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감정과 태도와 삶의 방향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까? 인생에 있어서 울고 웃는 기준이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준이 바르지 못하다면 정작 우리는 울어야 할 때 웃게 되고, 웃어야 할 때 울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울은 에배소 교인들에게 자기 삶의 기준을 말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을 살면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에배소서는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지체된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씀하는 서신입니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에배소는 어떤 곳입니까? 로마제국의 아시아 지역 큰 항구도시로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이곳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습니다. 즉 종교의 영향력이 컸는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데미신을 숭상하고 있었습니다. 원형 경기장에서 검투사들의 싸움을 즐겼고, 시민 광장이 있어서 각종 행사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목욕탕이 상상하지 못할 만큼의 좋은 시설이 되어있었고 각종 바람직하지 못한 일들의 온상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주택가에 술집이 즐비했다는 사실이 발굴을 통해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아르테미스 즉 아데미신은 풍요와 생산의 신입니다. 그래서 신전에는 여사제가 있었고 음란한 행위들이 거의 보편화되어있는 분위기의 시대였다고 역사자료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상숭배가 보편화되었다는 것은 사람들이 쾌락 즉, 자기기준이 강한 곳이라고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하나님 말씀 앞에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라면, 우상숭배는 귀신이라도 바꾸어서 내 뜻대로 해보겠다고 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이 에배소서는 기록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혼율이 30%가 되었고 이혼사유의 절반 가까이가 배우자의 부정이라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늘어나는 술집과 우리나라 여성의 1/5이 술집이나 매춘과 관련된 직종에 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정신세계는 빈약해져가고 경제논리가 윤리나 도덕보다도 우선되는 시대며, 정치논리도 이익을 위해 힘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한 나라의 총리를 정하는데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를 들고 나오는 이 현실 앞에서 정말 우리는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방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대를 초월해서 수많은 세대들에게 진리를 전해주었고, 또 시대와 환경의 변화 앞에서도 우리에게 복된 인생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바울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복된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바울 삶의 첫 번째 기준은, 영원한 생명 즉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가장 귀하고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이것만 있으면 좌절하지도 않지만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7절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바울은 자신의 구속을 말하면서 두 가지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그리스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죄인이었던 자신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구원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고,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 된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함을 입어서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가장 귀중한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에배소서에는 바울의 핵심 사상인 「그리스도안에서」라는 것과 비슷한 문장이 35번이나 나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등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가 있어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6.25전쟁 이후 우리의 생활은 몹시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미국 구호물자로 살아가고 있었고, 미국 선교사들의 역할도 매우 컸습니다. 외딴 집에 사는 어느 한 여인이 유복자를 갖게 되었습니다. 눈이 오는 어느 날 새벽, 산기를 느껴 고통스러워하는데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건너 마을에 외국인 선교사에게 도움을 청하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눈이 쏟아지는 길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만 가는 도중에 해산하고 말았습니다. 힘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는 새벽에 여인과 갓 태어난 아이는 이제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인이 무엇인가 결심하더니 자기 옷을 다 벗어서 아이를 감쌌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동맥을 끊어서 아이가 있는 주위에 뿌렸습니다. 눈 가운데 묻혀버리면 아이를 발견하지 못할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품에 안고 엎드려 아이에게 눈이 내려 쌓이는 것을 막아주었습니다
건너 마을에 있는 선교사가 마침 길을 지나다가 눈이 쌓여있는 길가에 핏자국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눈을 헤치고 살펴보니 한 여인이 발가벗고 얼어죽었는데 여인의 품에 갓 태어난 아이는 아직 살아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교사는 아이를 데려와 자기 양자로 삼았고, 여인은 장사지내고 묘지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아이가 자랐습니다.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자기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 아이는 반항아로서 살아갑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엄마가 없는지, 아버지는 왜 코쟁이인지 아이들이 놀릴 때마다 아이는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선교사님이 아이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10여년 전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일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출생비밀에 대해서 너무나 궁금했던 아이는 이야기를 들은 후 자기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틀이 지나고 방문이 열리면서 아이가 갑자기 미친 듯이 뛰어나갑니다. 양아버지는 걱정이 되어 따라 가보았더니 바로 그 엄마의 무덤을 끌어안고 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옷을 하나하나 벗어서 무덤을 덮으면서 ‘얼마나 추우셨어요 어머니, 얼마나 부끄러우셨어요!’
하염없이 울고 돌아와서는 아이의 삶은 바뀌었습니다. 자신이 힘들 때에도, 고통스러울 때에도, 유혹이 밀려올 때도 자기를 있게하기 위해 희생한 엄마를 생각하며 아이는 잘 자랐다고 합니다. 어떤 책에 보니까 아이가 자라 감리교목사가 되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언급은 없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잊을 수 없는 분입니다. 허물과 죄로 이미 심판받아 죽어야 할 자신을 살려 주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녀 삼아 하나님 당신의 일을 하게 한 분입니다.
그는 예배소서 2장 3절과 4절에 이렇게 선언합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바울의 생애를 보십시오. 고전 11: 23-27절, 그는 수고를 많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 하고, 사십에 하나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을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 가운데서 보냈으며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와 광야와 바다의 위험, 여러번 자지 못했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습니다.
그리고 고전 12: 8-9을 보면 몸의 가시를 위해서 기도했지만 응답받지 못해서 고통 가운데 있기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자신을 능욕하고 모함하고 시기하고 핍박을 받고 배신을 당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선교를 하는 중에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선물이 너무나 크고 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로마의 시민권이나 사람들이 존경하는 학문과 비교할 때 세상의 것들이 배설물처럼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구속하신 사랑과 또 구원의 영광이 너무나 크고 존귀하기에 말입니다. 예수님은 전혀 가능성 없던 자기를 찾아오셔서 오히려 자녀 삼으신 것을 생각할 때 너무나 귀하더라는 것입니다.
제가 섬기던 미국교회 청소년들하고 농구를 할 기회가 자주 있었습니다. 대표되는 두 친구가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이긴 사람이 사람을 자기편으로 택하는 것입니다. 다섯명을 뽑는데 제가 4번째 뽑혔습니다. 제가 농구를 잘해서가 아닙니다. 혹시 게임에 질 경우를 대비해 햄버거를 살 물주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생각하는 나와 아이들이 보는 내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농구경기를 하는데도 나이가 들어 잘 뛰지 못한다고 뽑아주질 않습니다.
그런 나를 사랑하시다니, 무능한 나를 쓰시다니.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셨다는 믿음 때문에 지금까지 걸어왔다는 것이고 또 앞으로도 그는 그렇게 살겠다는 선포입니다.
다윗이 죄를 범하고 두려워하면서 회개 중에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 시편 51편 12절에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다 잃어버려도 살 수 있지만 오늘 내가 나의 삶을 희망차게 사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구원의 소식이 얼마나 크고 귀한가를 알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구원이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영원한 약속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울고, 웃고, 즐거워하고 슬퍼합니까?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슬퍼하고 낙심할 때 혹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 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이 있다면 나머지는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입니다.
뉴욕대학의 윌리암 바인디어 박사는 우리 인간의 가치는 1불 8센트의 가치밖에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우리 육체를 말할 때의 일입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다 쏟으시고 살이 다 찢기시고 고통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귀하게 여기십니까?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무엇 때문에 살아갑니까? 돈입니까? 지위와 명예입니까? 건강입니까? 자녀들입니까? 이것이 정말 여러분에게 귀합니까? 그러나 다 썩어질 유한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의 축복을 귀하게 여겨서 다른 일들 앞에 낙담하지 않고 기도하며 다시금 삶의 즐거움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이 시대를 살아가며 우리가 가져야 할 기준은 바로 고통과 고난에 대한 개념입니다. 바울은 너무나 극심한 고통과 핍박과 괴로운 일들을 이렇게 받아들였습니다. 4절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6절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함이라’
고난과 핍박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셔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찬미하게 하기위한 이유였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그냥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내 삶에 함께하셔서 나를 간섭하시고 다듬으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1996년도라고 기억합니다. 시카코에 한 14살 된 여자아이가 살해되었는데 그 범인이 11살 먹은 흑인 아이였습니다. 경찰에서 용의자를 추적한 결과 동료갱에 의해서 살해된 것이 알려졌습니다. 엄마는 27살이고 4번째 남자에게서 얻은 일곱 번째 아이였는데 버림당했던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아이는 갱단에 들어가서 자기 마음대로 살았고, 온 몸에 피멍든 자리와 담배불로 지진 자리, 그리고 마약주사를 맞은 자국이 많았다고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낳기만하고 버려진 아이, 양육되지 못한 아이가 얼마나 비참합니까? 간섭이 없어서 행복했겠습니까?
로마서 1: 24 말씀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 즉 하나님께 창조하심을 받고도 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를 자기 마음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어 서로 욕되게 하셨다. 포기한 사람은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우리 모습대로 쓸 수가 없습니다. 무너진 신뢰와 인격 그리고 마비된 양심과 교만을 가지고는 아무것에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다듬고 가꾸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을 살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고난과 어려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벌 받아서 그런 것입니까? 재수가 없어서 그렇습니까? 바울은 고난과 고통 저 너머에 아름답게 가꾸어져 주님께서 마음대로 쓰실 수 있는 완성된 자아를 바라보며 고난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택하사’, ‘뜻대로’, ‘예정하사’, ‘경륜’, ‘보증’ 등의 단어를 계속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자신의 고난과 고통 그것자체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의 크신 계획 속에 포함된 과정임을 믿고 이겨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과 어려움을 우리 삶에 주시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차도 고쳐 쓸 차가 있고 폐차처분 할 차가 있는 것입니다. 고치는 비용이 많이 들어서 가능성이 없을 때는 폐차 처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실 때에 조금만 고치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쓸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함 얻음은 확실히 믿기는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무슨 이야기입니까? 나를 고치기 위해서 들어간 비용이 얼마나 되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죽이기까지 나를 고쳐서 쓰시기 위해 투자했다면 우리를 포기하실 까닭이 없습니다. 가능성 있습니다.
미스코리아선발대회에 대한 기사를 오래전에 읽었는데 행사 당일 날 대회에 나오기까지 한 사람당 들어가는 돈이 6000만원이 든다고 합니다. 한 7-8년 전 이야기이니까 지금은 1억이 훨씬 더 들것입니다. 후보자들을 선발해서 먹이고 재우고 화장시켜주고 교양을 가르치고, 피부 맛사지도 해주고, 전문가를 붙여서 투자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선발합니까? 가능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조금의 돈을 투자하면 미인대회에 가능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즉 원판이 괜찮은 사람입니다. 저나 여러분은 글쎄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돈만 들어가고 고생한 보람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투자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을 보십시오. 우리를 가능성있다고 믿고 투자하는데 자신의 독생자까지 바쳐서 우리를 구원하여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 앞에 존귀한 존재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한 번은 공자님이 제자들과 담벽에 붙어서 볼일을 보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을 불러오라고 해서 호통을 치고 야단을 칩니다. 오랫동안 나무란 끝에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모퉁이를 돌아오자 이번에는 길 한 복판에서 볼일을 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생각하기를 ‘아까 그 사람은 한참동안 정신없이 야단맞았는데 저 사람은 오늘 죽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공자님이 아무 말씀도 없이 지나갑니다. 제자들이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 자기 선생님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처음만난 사람은 조금만 나무라면 가능성이 있지만, 뒤에 만난 사람은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이기에 말할 필요가 없었네.’
여러분 이것이 세상의 논리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가능성 있다고 인정하시고 우리에게 투자하시는 것이 바로 ‘고난’이란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난과 아픔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결코 포기치 아니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보실 때 ‘내가 아무리 비싼 댓가를 치루더라도 너를 포기하지 않을꺼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독생자를 잃어버릴지언정 나를 포기치 아니했습니다. 부모도, 나 자신도 나를 포기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확신이요 약속입니다. 이것은 소망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다시 일어섰습니다.
청송 감호소에서 신앙으로 죄수들을 전도했던 박효진 장로님의 간증비디오를 본적이 있습니다. 청송감호소는 가족들도 포기한 사람들이 많은 곳입니다. 가족들도 포기한 사람의 모습이 어떠한 가를 보여주는데 자신이 처음 부임해서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 야단을 쳤더니 자꾸 괴롭히면 입을 꿰맨다고 하더랍니다. 설마하면서 해보라고 했는데 갑자기 이쑤시개를 꺼내더니 양쪽입술을 아래 위로 뚫으며 꿰메더랍니다. 너무 놀랬는데 다른 사람들 이야기로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눈을 자기가 빼어버립니다. 거기에서 1등한 사람은 자기 배를 갈라서 창자를 어깨에 매고 애국가 부르다가 쓰러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과 사회로부터 포기당한 소망 없는 사람의 삶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도 주님은 포기치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고난과 고통을 오랫동안 혹은 힘에 넘치도록 만났기에 포기한 사람처럼 마음대로 살아가십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를 결코 포기치 않습니다.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있습니다. 이 피아노는 라흐마니노프, 리스트, 호르비츠 같은 대가들이 즐겨찾는 피아노입니다. 피아노 거장들이 스타인웨이를 찾는 까닭은 제작방법에 있습니다. 140여년 전과 동일한 방법으로 만드는데 그것은 20,000개의 부속과 200여명의 기술자가 18겹의 단풍나무판을 구부리고, 5번 옻칠을 하고 그리고 두드리는 방에 가서 건 반 하나당 10,000을 두드려서 이상이 없으면 출고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피아노는 음색이 변질되지 않고 또 연주자가 표현하기를 원하는 음과 모양을 정확하게 나타내준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들은 어떠할까요?
우리는 목에 걸고 다녀야 할 패찰이 있습니다. 그것은 공사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완성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이 내게 맡겨지면 지체되고, 왜곡되고, 무시되고, 흉하게 되는 공사중 인생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시고 다듬어 가시는 것입니다. 고난과 어려움 앞에 낙담하지 마십시오. 주께서 우리를 포기치 않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13절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가질 기준 중 세 번째는 바로 우리의 자리 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자리에 앉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리에 따라서 많은 것들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누가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을 것인가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편한 자리, 존경받는 자리, 남을 지배하는 자리, 많은 것이 보장되는 자리를 찾을 것입니다.
5절-6절 보십시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14절을 보면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바울이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을 버리고 끝까지 놓치 않고 머물기를 원했던 자리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는 자리에 두신 주님의 뜻을 따라 이만큼 그에게 의미있고 귀한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대학에 있으면서 음악과 학생이 졸업연주회를 하는데, 제가 농담삼아 음악과 학과장에게 ‘나도 저 무대에 설수 있습니까?’, 그랬더니 ‘아무나 서는 줄 아십니까?’ 라는 농담섞인 진담을 말했습니다. 아마 노래방기계가 저 같이 의욕은 앞서고 능력은 안되는 사람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도 사람을 함부로 세우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합당한 사람을 찾아 세웁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정말 감당해낼 수 있는지를 여러 가지 점검해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리는 그러한 제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는 자리라면 어떤 자리든지 간에 귀하게 여기는 사람의 몫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서기를 원했던 자리는 어떤 자리였습니까? 주님과 늘 교제가 이루어지고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자리였습니다. 즉 기도하는 자리였습니다. 주님과 끊임없는 교제와 사랑이 오고가는 자리입니다. 나의 사정을 아뢰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공급받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서 공급 받았습니다. 세상을 이길 힘을 얻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용기를 공급받았습니다. 결국 십자가의 고난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자리입니다.
찬송하는 자리입니다. 성가대나 찬양팀에 소속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을 통해서 여호와를 송축하는 자리입니다. 유다라는 말은 찬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다 지파를 축복하셔서 유다 지파를 통해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메시야 즉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통로로 사용된 것입니다.
봉사하는 자리입니다. 생활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리입니다. 내 삶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의 주 되심을 선포하는 자리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자리를 아무에게나 맡기지 아니하셨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거룩한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거룩한 자리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살전 4장 3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오늘 우리는 어떤 자리에 자주 앉습니까? 기도하는 자리대신 낙심과 불평하는 자리는 아닙니까? 경건한 자리대신 남을 험담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자리에 있지는 않습니까? 혹 우리에게 주어진 건강으로 바르지 못한 좌석에 앉아서 가족과 이웃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울은 고난과 고통의 때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따를 때에도 하나님께 영광돌렸습니다. 어느 자리에서든지 하나님과 함께하는 이 자리를 결코 양보해 본 적이 없습니다. 죽음이 위협하더라도 그는 지켰습니다.
제가 성남 공단 수영복회사에서 사목활동을 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쉬는 시간에 신앙이 좋은 한 자매가 찾아왔습니다. 갑자기 ‘전도사님은 좋겠어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전도사님 목사님들은 하는 모든 일들이 주님의 일이니까 얼마나 존귀하고 상급이 많을까 생각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처지를 보니까 돈을 벌어서 고향에 있는 남동생 학비를 대주고 가족들 생활비를 위해서 밤낮일하면서 주님의 일을 할 시간이 없더랍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매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성직자로서 교회의 일을 하지만 내 마음의 동기와 목표가 나를 위한 것이면 이 일은 세상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재봉일을 하든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일임을 믿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면 그것이 바로 거룩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맡은 일을 통해서 어느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지를 점검해보세요.’ 라고 말입니다
며칠 전 새벽기도가 끝난 이른 아침 우연히 쓰레기통을 열어 보았습니다. 저의 가슴을 때리는 정말 충격적인 쓰레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라이타와 한 두가치 정도 피운 담배곽이 있었습니다. 한참동안 쓰레기통을 바라보았습니다. 여기에 버리기까지 갈등을 겪고 결단을 했을 것을 생각하니 말입니다. 잘 하셨습니다.
내 인생의 기준을 바꾸면 전에는 대단히 귀하고 소중하던 것이 별것이 아니게 됩니다. 반대로 예배시간이나 봉사 그리고 감사와 기도 찬송 등이 내 삶에 정말 소중한 자산으로 남습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내 삶을 아름답게 가꾸고 싶은 마음도 새롭게 생길 것입니다. 정말 소중했지만 가치를 몰라서 버렸던 수많은 것들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초등학생이 글을 읽는 것과 대학생이 읽는 것은 같은 책이라도 다릅니다. 초등학생은 글자를 익히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대학생은 그 글을 통해서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가 하는 메세지를 읽습니다.
비신앙의 사람들은 세상의 복자체가 중요하지만, 신앙의 사람들은 세상이 말하는 복이라는 것을 통해서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나를 슬프게 하고 화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말 화날 일에 화가납니까? 슬퍼할 일에 슬퍼합니까? 나는 실패라고 말하는데 주님이 보실 때에 성공인 경우가 많습니다. 잘못된 기준을 가지고 낙심하거나 즐거워하지 말고 나를 구원하신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승리하며 나아가셔야 합니다.
슬픔에서 일어서십시오. 그리고 교만에서도 자만에서도 내려오십시오. 세상의 잘못된 기준으로 우리 자신을 보지마십시오. 이 땅을 살지만 우리는 하늘의 기준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이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것을 다 잃어도 구원받은 즐거움으로 다시 시작하는 동안교회가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