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의 삶의 법칙이 살아있는 교회 ] 2002-05-31 23:33:45 read : 3074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 9 : 1-7
어느 교실에서 선생님이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어떤 여인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이 여인에게는 8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셋은 귀머거리였고, 둘은 장님이고, 한 명은 정신지체아였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 여인은 매독이라는 병에 걸려서 고통 받고 있었습니다. 태중에 있는 아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진 것처럼 오늘 여러분들에게도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이런 상황일 때 그 사람에게 뭐라고 충고해 주시겠습니까? 혹시 그럴 리 없지만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 있게 되면 어떻게 결정하시겠습니까? 말씀 안 하셔도 마음속에 이미 결론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낙태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클래스에 있는 학생들도 그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이 아이를 낙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여러분은 베토벤을 죽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베토벤이라는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상, 우리가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이 땅에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일들을 분석하고, 해석하고, 결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확신을 가지고 결정했던 일이 오히려 더 큰 불행과 어려움을 초래하고, 엄청난 가능성을 막아 버리는 결정들을 하면서 살아 왔다는 것을 가끔씩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별히 우리 인생 속에 어려움과 고난이 다가올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고통과 고난의 원인을 찾으려고 하게 됩니다. 대체 내 인생 속에는 왜 이런 어려움이 찾아올까, 내가 원치 않았고,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일 그러나 어느 날, 어느 순간 찾아와서는 나로 하여금 고통과 아픔 속에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은 대체 누가, 어디에서 무엇 때문인가라는 의문들 말입니다.
어떤 분들은 어려움 앞에서 자기의 삶을 포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어려움을 통해서 자기인생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 내는 분들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완전한 인간으로 살았던 우리 주님은 길지 않은 이 땅의 인생을 살면서 가장 완전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자기의 삶을 살게 되었을까 자신 앞에 다가오는 수많은 문제들 앞에 어떤 원칙을 가지고 인생의 결론을 내리며 살아갔을까 하는 사실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주님께서 어떤 삶의 원칙을 가지고 살았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 보면서 오늘 저나 우리 교회가 주님이 사셨던 그 삶의 모습을 회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다시 시작하는 출발의 날이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어떤 일이든지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타내고자 하는 뜻이 있다는 것을 바라보고 믿으며 사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걸어 가다가 눈먼 소경을 보시게 되면서 시작됩니다. 아마 구걸하는 소경을 보면서 제자들 마음속에 어떤 연민의 정 같은 것이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자기들이 평소에 느끼고 생각하고 많은 사람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내용을 질문 하였습니다.
“예수님, 저 소경은 자기의 죄 때문에 그렇습니까, 아니면 자기 조상, 자기 부모의 죄 때문에 소경으로 태어났습니까?”
이 질문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면 그것은 그가 지은 죄 때문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와 더불어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던지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재미있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 문제를 바라보는 예수님 자신의 관점을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 사람의 죄 때문에 그렇다, 그 사람의 조상 때문에 그렇다’ 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볼 때 가망성이 없고 불행의 원인도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불쌍한 소경이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저 사람에게도 하나님께서 나타내고자 하는 뜻이 있어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3절 말씀을 우리가 함께 읽어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원치 않은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떤 마음을 갖게 됩니까? 먼저 원망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내가 저 사람을 만나서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다고, 내가 그때 조금만 늦게 갔었더라도, 아니 조금만 빨리 갔었더라도 등, 환경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우리는 일의 원인을 찾아서 그 사람, 그 대상, 그 사건과 그 환경을 원망하는 ‘그’ 하는 마음입니다.
또 어떤 마음으로 살아갑니까? ‘죄 값이지, 죄 값을 치르고 있는 거야.’ 라는 생각입니다. 제가 어릴 때 어머님이 가끔 하시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내가 죄 많은 사람이지...’하는. 그래서 “어머니가 무슨 죄가 많으세요?” 하니까, “그러기에 내 삶이 지금 이렇지...” 하시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자기 속에 다가오는 풀리지 않는 인생의 의문들과 떠나지 않는 불행과 갑갑함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 죄라는 것, 내 운명이라는 것, 이것이 예정된 내 삶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얼마 전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치유하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인생의 어려움이 대체 어디서부터 오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죄 값이라는 것입니다. 죄 값이라고 생각한다면 오늘 나의 삶은 어떤 삶입니까? 죄 값을 치르는 삶입니다. 죄 값을 치르는 삶 속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그 시간이 가능하면 빨리 지나가야 됩니다. 지긋지긋한 생각이고 생활입니다.
그러나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은 죄 값을 치루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발견하시고 예수님은 끝까지 마음과 생각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언제까지 그러셨습니까? 십자가에 가시기까지였습니다. 십자가는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손과 발이 다 묶이고 꼼짝할 수 없는 순간, 그리고 너무 고통스러워서 입도 눈동자도 눈빛도 맘대로 할 수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순간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무엇인가 이루기를 원하시는 뜻이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양옆에 묶인 강도에게도 하나님께서 나타내고자 하는 뜻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철저하게 믿으셨기에 고통 가운데서도, 한 강도가 ‘나를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게 하소서’ 할 때 그를 향한 구원의 손길과 구원의 약속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헛된 상황, 꼼짝할 수 없는 상황 속에 계시면서도 이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 뜻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믿고 사셨기 때문에, 길 가던 소경도 외면치 않을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죄 값을 치르고 살기 때문에 어렵게 산다고 생각하십니까? 죄 값이니까 빨리 치르고 내가 자유 함을 얻어야하겠다고 생각하십니까?
닉슨 대통령의 법률담당 보좌관이었고, 또 법률 고문을 했던 찰스 콜슨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찰스 콜슨은 닉슨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아는 이 사람은 다섯 명의 세력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사람이었습니다. 미국의 권력자면 전 세계의 권력자이기도 합니다. 부와 명예를 한 손에 거머쥐고 탄탄대로를 걷는 그의 인생 속에 어느 날 ‘워터게이트’ 사건이 벌어지면서, 하루아침에 감옥에 들어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명예도 잃어버렸습니다. 희망도 잃어버렸습니다. 꿈도 잃고, 가지고 있는 것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낙담했습니다.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내가 죄를 지었으니 그 값을 치러야겠구나 생각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생지옥이었겠지요.
그런데 어느 날 주님께서 그 감옥에 찰스 콜슨을 찾아갔습니다. 주님의 변함 없는 사랑, 주님의 구속하신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감옥생활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 감옥에 넣으셨을까? 내가 그대로 살았다면 전혀 알 수 없는 밑바닥 인생들이 사는 감옥을 왜 허락하셨을까? 과연 이 곳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을까 라고 질문하면서 살피기 시작했을 때 감옥 안에 들어와 있는 죄수들의 희망 없는 답답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회에 나가더라도 희망을 가질 수 없는 그들의 아픈 마음을 보면서 좌절감과 패배의식과 절망 가운데 사는 그들이 찰스 콜슨의 마음속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감옥 생활은 죄 값을 치르는 삶이 아니라 죄수들의 삶을 살피게 하시면서, 사역을 위한 준비의 시간으로 바뀌어졌습니다. 감옥생활에 그가 할 일이 생긴 것입니다. 옆에 있는 형제의 마음을 살피고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후에 출옥을 했지만 여전히 감옥에서 고통 당하며 희망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너와 함께 하시며 하나님께서 그 환경 속에서도 분명히 드러내기를 원하시는 뜻이 있노라’ 확신을 주면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 있다고합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우리의 고통과 아픔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나타내는 통로-더 분명하고 확실한 뜻을 증거하기 위한-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쉽게 경험하지만, 편안할 때는 하나님 메시지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될 때는 하나님께서 내게 하신 말씀이 시끄러운 애들 소리 이상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깊은 감옥 속에, 인생의 깊은 동굴 속에, 인생의 광야 속에 있을 때에는 또렷하게 들립니다. 그리하심으로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혹시 인생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일들 때문에 원치 않는 고통 속에서 오늘도 살아가야 하는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신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 죄 값을 치르며 살지 마십시오. 죄책감에 시달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죄 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도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붙드시고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여러분을 여러분 자신보다 더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어려운 상황과 사건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뜻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의 관점을 바꾸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두 번째, 예수님의 일상 생활 속에서의 삶의 원칙은 하나님께서 보내셨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위해서 나를 이 시대 이 땅에 보내셨다고 하는 바로 ‘보냄 받은 자’의 확신을 가지고 사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4절과 5절 말씀을 우리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예수님만큼 왜 자기가 이 땅위에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 분명히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으로 도전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 사는 의미를 아십니까? 여러분이 남자로, 혹은 여자로 그리고 하필 이 시대 속에 한국 사람으로, 동안교회 교인으로, 여러분의 가정에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의미를 알고 계십니까? 살아가는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허무합니다. 공허하고, 마음속에 기쁨이 없고,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가는 의미를 아는 사람은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형제들에 의해 팔려갔습니다. 팔려갔어도 그는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성실하게 일했지만 다시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낙담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나를 보내셨고, 나를 통해서 이루기를 원하시는 일이 있다는 확신과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러기에 선한 자존심을 갖을 수 있었고 자기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여유와 품위를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오시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에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 19: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네 안에 계시어 그 일을 하는 것이라”
(요 14: 10)
마음대로 사는 것 아니라 내 삶 속에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일들을 행하고 살아가신다는 말씀입니다. 내 뜻대로 사는 것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사는 자의 기쁨과 행복을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철저하게 믿고 사셨기 때문에 나같이 죄 많고 잘 배신하고, 의심 많은 불충한 내가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보내신 이유를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교회를 떠나올 때 굉장히 큰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교회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는 중에 갑자기 한국을 들어가야 되겠다고 했더니 미국에 계신 우리 교인들이 모두다 말렸습니다. “목사님, 생각을 다시 해 보시죠.” 그러다가 설득해도 안되니까 마음을 돌리셨습니다. 그때 얼마나 큰 상처와 아픔이 되는 일들을 경험 하였는지 너무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교회는 계속 성장했지만 목회를 하다가 아내의 건강도 상한데다가 이 분들이 돌아서니까 얼마나 매정하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한국에 돌아올 때 참 마음 아팠는데 공항에 아무도 안 나오셨습니다. 장로님들도 아무도 안나오셨습니다. 그리고 다음해 여름, 기도하는 중에 마음에 걸려 미국에 들어갔습니다. 어쨌든 목회자의 개인사정으로 인해 장로님들 마음에 상처가 되었다면 ‘내가 잘못한 거다’, ‘다른 목적을 갖지 않고 장로님들 만나서 그 마음 풀어드리리라’ 결심하고 미국에 들어갔습니다. 한 일주일 작정하고, 장로님들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처음엔 반갑게 “아, 목사님 오십시오.” 그러시더니 다음날 다시 전화를 하셔서는 “목사님 오지 마십시오.”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와 전화한 후에 장로님끼리 통화가 되어 김목사를 만나지 말자고 말씀들을 하신 모양이었습니다. 저와 가장 가까웠던 장로님 댁에 무려 3번 내지 4번 찾아갔었어도 만나 주지 않으셨습니다. 호텔에 돌아와서 혼자 울었습니다. 울고 한국에 있는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어머니 이제 제가 할 일을 다한 것 같습니다. 제게는 더 이상 책임이 없습니다.” 했더니 저의 어머님 하시는 말씀이 “김목사, 네가 그 일 때문에 갔다면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만나라.”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떠나는 날 아침에 꿈을 꾸니, 상패를 하나 받는 꿈이었는데 그 상패에 박힌 아주 조그마한 날카로운 침을 2개 뽑는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다시 그 장로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장로님께서 문을 열어 주시면서 악수를 청하시고, “목사님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내 마음은 안 그런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결국은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내가 미국에 간 목적이 분명하고 포기하지 않으니까 반드시 이루어내더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본인이 오신 목적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포기치 아니하셨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서 하나님 은혜를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포기치 않고 버리지 아니하신 주님,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그 생명을 더 풍성케 하시기 위한 목적에 충실하게 사셨던 주님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왜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살도록 하셨을까요? 때로는 아픔의 모습으로 살게도 하시고, 때로는 부하게 살게도 하시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짓밟히며 살게도 하시고, 때로는 존경과 환영을 받으며 살게도 하시는 삶의 다양한 모습들을 주님은 왜 허락하셨을까요? 주님은 처한 상황 모습 그대로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짓밟혀도 내가 분명히 해야 될 일을 아는 사람은 자존심 상하지 않습니다.
서부 영화 중에 「하이눈」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케리쿠퍼라는 배우가 나오는 아주 오래된 영화입니다. 서부극의 유명한 배우인 캐리쿠퍼가 주연한 영화를 보면 마지막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마을에 악당들이 쳐들어옵니다. 보안관인 캐리쿠퍼가 마을 사람들을 향해서 외칩니다.
“여러분들 나와 함께 총을 잡고 저 악당들을 물리칩시다, 전쟁을 합시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지원하지 않습니다. 그 때 캐리쿠퍼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나는 총을 잘 쏘는 사람을 찾고 있지 않습니다. 이일이 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총을 잘 쏘는 사람을 찾지 않습니다, 오늘 이 마을을 지키는 일이 보안관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라고 그렇게 믿고 그 일에 참여하는 사람을 나는 찾고 있습니다.’
‘나는 돈 많고 능력 있고 잘생긴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건 이미 나에게 다 있다, 단지 가정 속에 짊어지기 어려운 짐들,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들, 교회에서 짊어져야 될 봉사의 짐들, 사회에 대해서 짊어져야 할 문제 등 이러한 문제들을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의 일이라고 받아들이고 살기를 원하는 사람을 나는 부르고 있노라.’고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일을 위해서 나를 보내셨다고 받아들일 때 지극히 일상적으로 보이던 소경이 다시 보이게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소경의 마음이 읽혀지고, 무엇을 해 주어야 될지 구체적인 필요가 보이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파트너로 삼아 주셨습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서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교회 구석구석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해야 될 일들을 위해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 가정의 어려운 짐을 지는데 주님대신 나를 보내셔서 지게 하시고 감당하도록 보내셨습니다. 많고 많은 나라 중에 하필 허리가 잘려진 이 나라 가운데 나를 보내신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기를 원하시는 그 일을 나의 일로 받아들이는 그 사람을 주님은 오늘도 찾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부를실 때 믿음으로 응답하여 우리를 보내신 목적을 아름답게 이루어 드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앞 글에 이어서...>
마지막 세 번째로 주님의 삶의 원칙은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할 수 있는 일의 분량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 사역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참하나님이시면서도 참인간이셨던 주님, 하나님으로서는 초월하실 수 있었지만 한 사람의 완전한 인간으로서는 인간의 한계를 아시고 한계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인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4절 말씀 함께 하겠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미국의 유명한 기독교 신앙가면서 영향력 있는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고든 맥도널드 목 사님이, 예수님의 삶은 ‘사명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을 어떻게 이루어 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인가’ 하는 것 한 가지와 ‘인간의 한계 안에서 어떻게 최선을 다해서 주님을 섬겨야하는가’ 하는 두 가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주님도 써야 될 시간이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도 이 땅을 살아가면서 써야 될 시간과 물질과 건강이라는 것에 한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쓰신 시간을 가만히 보면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에 가장 많은 시간을 쓰셨습니다. 두 번째는 제자들을 양육하는데 많이 쓰셨고, 셋째는 고통하며 방황하는 사람을 만나는데 쓰셨습니다. 군중과 높은 사람을 만나는 일에 주님은 가장 적은 시간을 할애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15절에서 17절은 우리에게 이런 교훈을 줍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우리에게 주어진 때와 기회를 잘 사용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그 기회를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시간은 저축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때를 잃고 나서야 깨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물질도 언제나 우리 것이 아닙니다. 건강도 언제나 우리 것이 아닙니다. 명예와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날 끝나게 됩니다. 끝나기 전에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하는 오늘의 메시지를 듣고 스스로 걸어서 나갈 수 있다면 아직 여러분의 때는 낮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밤이 찾아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이 때를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위해서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우쌀레시오라는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퇴부까지 잘려 나갔습니다. 성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치고 와서 개인사업을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인생 속에 뜻하지 않는 ‘혈액순환 부전증’이라는 병이 찾아 왔습니다. 병이 악화 되면서 다리가 썩어 들어가 일곱 번의 수술을 거쳐서 다 잘라 버렸습니다. 우리는 일곱 번이라고 쉽게 말들을 하지만 몇 년의 세월들과 치료비,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잘려나간 자신의 다리를 보는 절망감, 좌절감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일곱 번씩이나 반복되는 수술 가운데 아내는 남편의 곁을 떠나 버렸습니다. 가족도 다 흩어졌습니다. 1983년 강남 서울 시립병원에서 퇴원할 때, 그의 손에 있는 이십 만원 외에는 가진 것이라고는 없었고 갈 곳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곧 산동네 올라가서 이십 만원 사글세를 살게 되었습니다. 하는 일이라고는 없어진 다리를 질질 끌고 몸뚱이만 가지고 가끔 성당에 가서 자기 신세를 타령하며 실컷 울다오는 것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겨울 초에 집으로 오는 길에 집 근처 곧 죽을 것 같은 중풍 맞은 할아버지가 쓰러져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두 다리도 없는 가운데 할아버지를 끙끙거리고 끌고 와서 자기 집 조그만 안방에 뉘었습니다. 뜨거운 물로 맛사지하면서 할아버지를 살려냈습니다. 할아버지가 나를 제발 쫓아내지 말라고 애걸복걸하여 할 수 없이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인 할아버지가 네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때 집주인이 와서 계약 위반이라고 내어 쫓아 버렸기에 성당 뒤편에 동굴을 파고 할아버지를 모시고 살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그들로 화장지나 비누 등을 팔게 해 주어서 생계를 이어가게 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성금을 모아서 주었기에 하남시에 있는 ‘프란체스코’라는 집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프란체스코 집은 중증 장애인 48명이 함께 기거하는 집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편히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우쌀레시오는 그 곳을 떠나버렸습니다. 태백산 기슭에 또다시 움막을 짓고 중증 장애인 20명과 이들의 대소변을 받아 내며, 장애인용 자가용을 몰고 병들 때 병원에 실어 주고, 치료받게 해 준답니다. 그는 이런 기도를 새벽마다 드린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 불쌍한 사람들이 주님 앞에 갈 때까지 헐벗지 않고 살게 해 달라고..”
사랑하는 여러분, 다 끝난 인생같이 보이던 그는 그러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더 아름답고 진지한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까? 결코 죄 값 때문이 아니라 다리가 잘려져 나간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쓰러진 중풍병자 할아버지를 보면서, 그를 살려내는 과정을 보면서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을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시간이 내가 그 일을 해야 될 시간이라고 깨달았던 그는 많은 것을 가지고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의 피곤한 걸음을 걸어가고 있는 여러분들, 어느 날 다가온 어려운 문제들이 내 삶의 주변에서 떠나지 않고 괴롭히고 짓누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관점을 바꾸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분명히 하고자 하시는 뜻이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나를 보내셨다는 사실에 믿음으로 철처히 반응하며, 지금이 시작할 때라는 사실을 기억하시면서 운명과 싸워서 이겨나가고, 거센 시련의 흐름 앞에서 휩쓸려 가는 것 아니라 거슬러 올라가는 믿음의 사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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