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 2002-05-31 23:34:33 read : 3013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마가복음 14: 3-9
예수님께서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에 한 여인이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붓습니다. 사람들은 차라리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낫다며 여인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행위를 칭찬하셨습니다.
다음은 본문을 현대적으로 약간 각색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일주일 전, 자주 가시던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실 때였습니다. 한 여인이 나타나서 노동자의 일년 월급에 해당되는 값비싼 향유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붓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인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할 때, 그 때 주님께서 재미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여인은 나를 기쁘게 하였다. 내 장사를 준비하였다. 이 여인의 행위가 너무나 귀하다. 그리고 복음이 증거되는 곳마다 여인의 행한 일이 함께 전파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성적으로 객관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어리석은 여인. 그러나 우주의 창조자 되시고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주님께서 여인을 보시는 눈은 달랐습니다. 칭찬하실 뿐 아니라 낭비처럼 보였던 여인의 행위는 주님을 기쁘시게 했고, 다른 사람들도 이 여인과 같이 행하여야 한다는 숨은 의미와 함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기억될 만한 일, 나아가 우리의 하는 일이 주님께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랑하고 싶어 하실 우리의 행위는 무엇일까요? 특별히 부활절을 앞두고 고난주간을 지내면서 이 주간을 어떻게 보내야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이 될 만한 행위가 될까요? 오히려 정확하고 객관적일 뿐 아니라 분석적이고 합리적이었던 가룟 유다에 대해서는 ‘차라리 네가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하였다’고 책망하신 주님, 오히려 책망 받을 여인을 칭찬하신 주님을 대할 때, 과연 이 여인의 어떤 행위가 주님께 칭찬받을 만한 행위였던 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오늘 저와 여러분의 고난 주간을 준비하는 모습, 나아가 우리의 삶을 준비하는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여인의 행동은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이 담긴 행위였습니다. 6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여기에 주목할만한 단어가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내게’라고 번역되어진 단어는 엔 에모이, 많은 사람들의 오해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의 행동이 칭찬받을 만한 행동이 되는 까닭을 설명해주는 바로 그 단어입니다. 즉, 이 여인의 행위는 다른 사람도, 본인도 아닌 예수님께 유익하였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다른 한 단어는 ‘좋은 일’이라고 번역된 칼론 에르곤 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동참하는 일이나 혹은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일을 표현할 때 쓰입니다. 이 말을 종합해보면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께서 가장 기뻐 받으실 만한 일,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역을 도왔던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였던 정말 복된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는 것, 그 비싼 향유를 붓는다는 것이 쓸데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직전에 있었던 이 행위는 구약에 선지자와 왕 그리고 대제사장을 세울 때 머리에 기름을 부었던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바로 주님은 나의 구세주요, 그리스도시오 라는 고백의 행위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님께 행한 여인의 신앙 고백적인 행위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놀라운 일이 되었습니다.
어떤 여인이 인생을 비관하여 강물에 뛰어 들었습니다.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여인은 허우적거리며 점점 물 속으로 빠져듭니다. 발을 동동 구르면서 ‘수영할 줄 아는 사람, 저 여인을 구해 달라’ 고 사람들은 외치지만 정작 아무도 이 여인을 구하려고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때 한 청년이 물 속에 뛰어듭니다. 열심히 수영을 해서 여인을 건져 데리고 나옵니다. 박수소리를 받으며 급히 달려온 기자들과 인터뷰를 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구조하게 되었습니까?” 청년은 씩씩거리며 뒤를 돌아보더니 말합니다. “대체 누구입니까? 나를 뒤에서 밀은 사람이......”
위의 이야기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예배를 드리고 하는 것이 때로는 떠밀려서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체면 때문에 혹 안수집사고, 권사고, 장로고, 목사인데 하는 생각에 기쁨 없이 마음이 동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위의 환경에 떠밀려서, 직책에 떠밀려서 하는 행위가 우리들 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보다는 맹목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주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서 행한 행위는,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특별히 기억하시고 오고가는 세대 속에 자랑되어질 만한 행위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언젠가 말씀드렸듯이, 여덟 살 트로트의 신동들이 ‘사랑이 무엇인지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라고 나와 노래해도 사랑이 무엇인지 알겠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아무 의미도 모르고 부르는 찬송, 아무 생각 없이 드리는 예배, 이것은 주님께서 기뻐 받으실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그리고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우리가 집에서 밥을 하고, 직장에서 일을 하더라도 주님께서 나의 구세주 되심을 믿음으로 인한 행위는 주님께서 기념할만한, 기억하실만한 행위임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증거되고 있는 것입니다.
혹자는 주님께 드릴 저 향유를 가지고 돈으로 바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안 되겠느냐 하고 계산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진실로 사랑하면 계산하지 않습니다. 사랑해 보신 분은 아십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다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더 주고 싶습니다. 심지어는 없다면 빌려서라도 주고 싶은 것이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계산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합리적이었습니다. 이성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합리적과 이성적이었던 중심에는 자기의 이익에 민감한 모습, 자기의 목표 앞에 민감한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 중에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믿음 생활이지 교회 나와서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안내하고 봉사하는 것이 그리 중요하냐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먹고, 마시고, 입는데 사용하는 저 교회에 헌금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 주는 것이 주님의 뜻에 더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라는 어떤 운동권 학생의 질문과 같이 말입니다. 질문의 의도를 잘 압니다. 여러분 중에도 혹 같은 생각을 가지신 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헌금하느니 내가 예배드리는 시간에 가난한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 헌금할 돈으로 직접 구제하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제가 젊은 대학생들에게 했던 대답에 관심 갖기를 바랍니다.
“당신에게는 어머니가 계시지요. 그 어머니께서 당신을 키우실 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착하게 살아라. 정의롭게 살아라.” 그렇게 키우셨다고 해서 어머니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과 어려운 이웃을 돕지는 않습니다. 어려운 이를 돕는 삶은 옳은 삶임에는 틀림없습니다만 어머니와 자식은 보통의 일반적인 관계와는 다른 특별한 관계입니다. 관계 속에서 온전히 어머니에게만 드릴 섬김과 사랑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서야 어머님의 가르침대로 많은 사람들을 위한 섬김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 임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드릴 독특한 섬김이 있는데, 그 섬김이란 신앙 고백적인 삶이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성경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예배드리는 부분은 절대적으로 주님의 명령과 말씀대로 행하길 구약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주님이 기뻐하실, 즐거워하실 온전한 나의 삶이 어떤 삶인가를 이번 고난 주간을 통해서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께서는 자신의 생애를 살면서 주님이 정말 기뻐하실 삶은 어떤 것일까 마음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나의 어떤 모습을 기뻐하실까? 헌금 많이 하는 것, 또는 주일 성수하는 것?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삶 속에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여 살고 고백하는 믿음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번 고난주간을 통해서 여러분의 신앙을 점검하고 회복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여인의 행위는 주님을 섬기는데 있어 중요한 시기를 놓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7, 8 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여인은 주님의 죽음을 미리 알고 죽은 자에게 필요한 향유를 부어 드렸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메시아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실 주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칼뱅은 이것을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여인을 감동시키시고 깨닫게 하셔서 주님의 죽음에 가장 합당하고 정확한 시기에 이러한 일들을 하게 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때가 어떤 때입니까? 예수님을 죽이려고 드는 사람에게는 가장 적절한 시기라고 받아 들여졌습니다. 주님을 배반할 사람들에게는 배신해야만 사는 마지막 시간, 마지막 시기였습니다. 도망갈 사람들에게는 도망가야 할 그 시간에, 여인은 값비싼 향유를 부음으로 주님의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직접적으로 섬세하게 섬겨드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 기회가 늘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내가 주의 일을 하여야 하리라, 밤이 되면 내가 할 수 없을 때가 온다’ 하는 지난주의 말씀과 연결지어 볼 때, 우리가 항상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주님을 섬길 기회가 때때로 우리들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에는 어깨와 발에 날개가 있고, 앞머리에는 머리카락이 있고, 뒷머리는 대머리인 모양의 동상이 있다고 합니다. 동상 밑에는 이러한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누가 그대를 만들었는가? 그대 이름은 무엇인가? -나는 기회이다.
왜 그대는 어깨뿐 아니라 발에도 날개를 달았는가? -빨리 빨리 날아다니기 위해서이다.
왜 그대의 앞머리는 무성한가? -기회가 올 때 사람들이 잡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왜 그대의 뒷머리는 대머리인가? -지나가고 나면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제 생애에 가장 아쉽지만 돌이킬 수 없는 기회가 한번 있었습니다. 아버님이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날따라 유난히 꼬치꼬치 물으셨고, 아이를 잃어버리고 아내는 병중에 있는 상황에서 “얘야, 며느리는 어떠니? 의사가 뭐라고 하드냐? 밥은 먹었니?” 하시는데 굉장히 짜증이 났습니다. 그때 짜증을 섞어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 저에게 더 이상 묻지 마세요. 저도 대답할 기력이 없어요. 너무나 지쳤어요. 그냥 좀 내버려 두세요. 혼자 있게 내버려 두세요. 별일 없어요.” 그렇게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세상에서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에 묘소에 설 때마다 제 마음에서 신음에 가까운 소리가 납니다. ‘아버지, 미안합니다. 손녀를 잃고 며느리가 병중에 있으니 아들이 그 일을 어찌 감당할까 답답한 마음에 하나하나 묻는 그 질문 앞에, 아버님을 격려하고 위로해야 할 그 중요한 때를 저는 짜증과 원망의 기회로 사용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정말 미안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섬김을 받으셔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섬김이 있든지 없든지 주님은 구세주로서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님을 섬겨드릴 그때를 주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로 여러분의 가정 안에서 가정의 문제를 통해 주님의 이름으로 묵묵히 사랑함으로 섬겨나가는 그러한 섬김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교회의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 다양한 문제들 안에서 여러분의 손길이 닿을 수 있도록 섬길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기회가 언제까지나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가장 섬김 받기를 원하실 때, 가정과 교회 그리고 민족 앞에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외면치 않고 섬겨드리는 그 사람,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번 고난 주간을 통해서 주님께서 어떤 기회로 우리에게 주실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지냅시다. 어쩌면 지금까지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을 용서하는 기회를 주실 지도 모릅니다. 원망했던 환경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며 오히려 하나님을 더 섬기고 봉사할 수 있는 새로운 각오를 갖게 되는 기회를 주실지도 모릅니다. 우리네 가치관을 바꾸고, 인생의 목표와 목적을 조정할 기회를 주실 주님이라고 믿습니다.
고난 주간을 여러분은 어떻게 쓰시겠습니까? 평상시대로 사셔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더 어렵고 골치 아픈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 삶을 향해서 말씀하시는 주님, 그리고 나를 통해서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시길 원하시는 주님,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주님의 그 때를 분별하며 기다리고 묵상하는 한 주간이 된다면 고난 주간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분의 시간을 돕기 위하여 새벽과 저녁에 시간을 마련해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특별히 이 한 주간을 통해서 섬김 받으시길 원하는 주님의 때를 놓치지 않고 기회를 잡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여인의 섬김에는 최선의 희생과 섬김이 있었습니다. 3절을 다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당시에 손님이 오면 오신 손님의 발을 씻겨주고 머리에 기름을 붓는 종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인은 직접 기름을 붓습니다. 이 향유는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노동자의 일년 월급에 해당되는 값비싼 향유이었습니다. 밀봉되어 있어 사용하기 위해서는 깨뜨려야 합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여인들은 일평생 단 한번, 단 한사람을 위해 향유를 사용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마리아라고 밝힌, 이 여인은 자기 일평생 단 한번 있을 기회를 예수님을 위해서 사용하였다는 바로 이 사실을 주님께서는 아름답다고 기억하셨던 연유입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릴 때에 단지 열의 하나를 드리는 것 아니라, 우리 삶의 가장 귀중한 것을 드리는 신앙 고백이 함께 드려지는 예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봉사부서를 임명할 때 있었던 일이었다고 합니다. 재정관리에 재능이 있는 분께 부탁 드렸더니, “저는 지금 회사에서 맡고 있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은퇴 후 시간이 날 때 그때 섬기겠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에,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세상이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은퇴 후에는 주님도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당신 최고의 시간을 주님께 드리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까? 우리에게 자신의 최고의 것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최고의 삶을 원하시고 계신다면 돌려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고난 주간 주님의 십자가는 자신이 가지신 최고의 것, 최선의 것을 주신 날입니다. 여인이 일평생 단 한번의 기회를 예수님께 사용하였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주님을 섬겨드릴 때도, 내 생애 최고의 것을 가지고 섬겨드릴 수 있다면 주님은 우리의 사역과 우리의 삶을 귀하고 복되게 보실 것입니다.
미국의 덴 밀르멘이라는 분이 스탠포드 병원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는 경험에 대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스탠포드 병원에는 희귀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리자라는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는 점점 죽어가고 있는데 아이가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미 그 병을 앓고 면역체가 형성된 다섯 살 된 동생의 피를 수혈 받아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의사들이 다섯 살 꼬마에게 얘기합니다. “얘야, 너의 피를 누나에게 주면 누나가 살아 날 수 있어.” 얘기를 들은 꼬마의 표정은 굳어지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얘야! 너의 피를 주면 누나가 살 수 있단 말이야.”라고 의사들이 반복하여 말하자, 꼬마는 비장하게 “그래요. 좋아요, 하겠어요. 내가 누나를 살릴 수 있다면, 할께요.”하며 누나의 옆에 누웠습니다. 의사들이 피를 뽑습니다. 그러자 누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소생하기 시작합니다. 의사들도 가족들도 모두 환호를 합니다. 처음에 같이 기뻐하던 꼬마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며 의사에게 묻습니다. “의사선생님, 저는 언제 죽게 되나요? 피를 주자마자 나는 죽게 되나요?”, “아니, 너는 죽지 않아.” “아니, 의사선생님, 제가 피를 주면 제가 죽게 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꼬마는 의사선생님 말을 오해하였던 것입니다. 자기의 피를 누나에게 주게 되면 자신은 죽는 줄로 알았고 그래서 잠시 주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누나가 살 수 있다면, 주리라 결심하였기 때문에 누웠던 것입니다. 아이는 피를 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면 우리에게는 드릴 의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가지고 계신 가장 소중한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대학시절 C.C.C 활동을 할 때, 간사님으로부터 전해들은 일화가 있습니다.
미국의 어떤 마을에 섬과 섬을 연결해 주는 철길의 다리가 있었습니다. 이 다리는 일정한 시간이 되어 들어 올려지면 도시지방에 생활필수품을 전해주는 기선이 지나가고, 기선이 지나가고 나면 산모퉁이에서 사람을 가득 싣고 오는 열차가 지나가게 되어있는 다리였습니다. 다리에는 ‘다리지기’가 있어 다리를 들어주기도 내려주기도 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다리지기에게는 늦은 결혼을 해서 갖게 된 아이가 있었습니다. 사내아이가 네,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일하는 곳에 와보고 싶다고 하여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기선이 지날 시간이 되어 다리를 들어 올렸고, 다시 내릴 즈음 아이를 찾아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 쪽에선가 ‘아빠, 나를 살려줘요!’ 라는 비명소리가 들립니다. 아이는 들려진 한쪽 다리 끝에 매달려 울부짖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기 산모퉁이에서는 사람을 가득 실은 기차가 오는 것이 보입니다. 다리를 내리지 않으면 기차 안의 수많은 사람들은 강물에 빠져 죽게 됩니다. 기관사가 브레이크를 잡아도 소용없이 강물로 기차는 떨어질 것입니다. 다리지기는 다리를 내려야만 하는데, 그러자면 자기의 아이는 죽게 됩니다. 다리지기의 머릿속에는 결혼 이후 지금까지 아이에 관한 수많은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쁨이고 소망이고 자신의 전부인 아들의 살려달라는 비명 소리를 외면한 채 스위치를 내렸습니다. 그 위로 기차는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지나갑니다. 기차에 등을 돌리고 서서 흘리는 아버지의 눈물 속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미래를 잃어버리고 가장 사랑하는 것을 잃어버린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죽이시지 않으시면 우리를 살릴 수 없기에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외침마저도 외면하셨고, ‘이 잔을 피하게 해 달라’ 고 간청하는 아들의 간청을 거절하셨던 아비의 아픈 마음, 그것이 이 고난 주간을 보내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주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최선을 것을 달라’ 그 주님 앞에 ‘no'라고 말씀하실 분은 안 계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주간 아니 우리의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면 나에게 이런 사랑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기억하실 만한 삶을 살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삶을 살까요? 의미 없는 것만 같던 우리의 삶, 다시 한번 주님이 나의 구세주 되심을 확인하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내 가정 속에서 내 교회, 직장 속에서 섬김을 받길 바라시는 그 시기를 놓치지 말기를 바랍니다. 나아가서 내 생애 가장 귀한 것으로 드리라고 하실 때, 가장 귀한 것으로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기억하시고,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이 되길 바라시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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