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4 : 13-27절 2002-05-31 23:35:45 read : 2784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 성경구절 : - 설 교 자 : 김형준
이 아침에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와 은총이 저와 여러분의 삶 위에 넘쳐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990년대 초에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열차 사고가 나서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살아남은 기관사는 큰 충격으로 병원에 입원했지만, 사고 원인을 조사하려는 경찰의 대답에 응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심한 충격으로 인한 정신분열증으로 고통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병실에 있는 그에게 어느 날 펜실베니아 철도 사장인 에토베리씨가 병실을 방문했습니다. 생각과 시선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그에게 에토베리 사장은 손을 잡고 한참동안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마디를 했습니다.
“당신이나 나나 나이가 들어서 고생이 많군요. 이게 웬 고생이요. 당신이 느끼는 아픔과 고통이 곧 나의 것이요.” 하고 병원을 떠났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기관사의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다시 현실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고, 사고가 일어난 상황을 또박또박 자세히 설명함으로 인해 더 큰 사고가 일어날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기관사는 불과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변화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충격과 고통을 직면하고, 또한 이겨내며 더 큰 어려움 앞에 두려워하지 않고 견딜 수 있었을까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기관사가 이겨낸 경험과 그 용기를 우리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관심을 가지면서 본문에 나오는 두 사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원대한 꿈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바라고 소원했던 모든 것-개인의 영욕뿐만 아니라 민족과 나라가 새로워지는 소망과 소원-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또한 그런 증거들을 그들은 보았습니다. 반드시 예수를 통해서 자신들의 소원뿐 아니라 민족이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 예수님은 너무나 허무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대화는 단순히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가졌던 그들의 희망과 꿈이 함께 죽고, 그들의 미래도 무덤 속에 갇혀있었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희망과 소망이 꺾여진 모습으로 살아가는 제자들의 모습이 어떠한지 본문은 몇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저들이 걸어가는 삶의 방향을 볼 수 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기회가 많은 곳,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그리고 자기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곳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 사람의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는 우리나라 옛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그들은 원대한 꿈과 기회가 있던 희망의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예루살렘으로부터 조그만 시골 엠마오로 내려가는 바뀐 삶의 방향을 보게 됩니다. 역사의 큰 흐름 앞에 주인공으로 서기를 원했던 그들, 그들은 어느새 역사의 주변인으로 서서히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인들 주변인으로 머물고 싶겠습니까? 정치와 경제, 종교와 문화의 중심지에서 보잘것없는 작은 마을로 누구인들 삶의 방향을 틀고 싶겠습니까? 희망이 꺾인 사람, 삶의 중심부에 있다가 점점 단역을 맡는 사람으로 그러다가 결국은 엑스트라로 전락해 버리는 경우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저들의 대화를 한 번 보십시오. 길 가는 동안 슬픔과 죽음의 대화, 생명이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인생길을 가면서 소망이나 미래가 없는 대화를 나눌 때가 적지 아니합니다.
연령에 따라서도 대화의 소재가 많이 달라집니다. 주로 이제 10대, 20대는 재미있는 것에 대해서, 30대는 뭔가 의미 있는 것에 대해서, 40대가 되면 집안의 아이들과 직장에 대해서, 50대가 되면 건강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어디에서 만나느냐에 따라서도 대화가 달라집니다. 교회에 와서 목욕탕 이야기를 하는 분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대화든 두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고 기쁨과 약동하는 힘이 있는 말, 생명이 있는 말이 있고, 생명으로 하여금 그 기운을 빼앗는 생명을 죽이는 말이 있습니다.
1997년도 6월 21일 조선일보에 서울 신남성 초등학교 조순재 선생님에 대한 기사가 난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산수 문제를 풀다가 자기 반에 선천성 뇌성마비 장애우인 박성준 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와서 칠판에 있는 산수 문제를 풀어보라.” 그 때,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이야기를 합니다.
“선생님, 성준이는 못해요.”, “ 쟤는 못해요. 할 수가 없어요.”
그 때 선생님은 아이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왜 성준이가 못한다고 생각하니? 성준이는 할 수 있어.”
그리고는, 그 아이를 안아다가 칠판 앞에 세웠습니다. 문제를 풀게 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일어납니다. 다음 학기에 성준이라는 친구가 반장으로 출마해서 53명중에 47표를 득표해서 회장에 당선됩니다. 장애우인 성준이라는 학생은 동국대에 진학하게 되었다고 하는 내용의 신문 보도였습니다. ‘성준이는 왜 안돼. 성준이는 풀 수 있어.’ 반 아이들과 선생님과의 대화는 생명의 대화였습니다.
생명을 살리고 소망과 기쁨을 주며 인생의 의미를 찾게 하는 그런 대화였습니다.
반면에, 불과 얼마 전에 신문에 난 기사가 있습니다. 한 담임선생님이 아무래도 반 학생이 자기 핸드폰을 훔쳐간 것 같아서 학생을 붙들고,
“너 내 핸드폰 훔쳐갔지?”
“아니에요.”
“너 훔쳐간 것이 틀림없어.” 며칠 뒤에 이 학생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자살했습니다. 그것을 못 견딘 선생님도 자살 시도를 했던 것입니다. ‘너 내 핸드폰 가져갔지?’ 하는 대화는 핸드폰이 주제가 아니라 사실은 죽이는 말이었습니다. 생명이 없는 언어, 힘을 빼버리는 언어, 용기를 주저앉게 만드는 언어였습니다.
교회에서도 이런 대화를 많이 합니다. 가정에서도 죽은 대화를 하며 마음의 상처를 입고 심령이 다 죽어서 상담하기 위해 오는 아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성경은 절망 속에 희망이 꺾인 이들의 얼굴빛에 대해서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슬픈 빛을 띤 모습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얼굴 표정은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것입니다. 느헤미야라는 선지자에게 근심이 있을 때, 근심이 얼굴에 나타나 왕에 의해서 발견되었습니다. 마음의 상태가 얼굴 표정 속에 나타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웃음 너머에 쓸쓸함이 배어 있습니다. 미소 속에 쓴 웃음이 느껴집니다. 이것이 꿈과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의 표정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들의 꿈과 희망이었던 예수 그리스도가 무덤에 들어가고 자기들의 미래가 끝나버리고 돌무덤 속에 함께 장사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예기치 않은 일로 낙담과 절망 가운데 빠질 때가 있습니다. 삶이 자꾸 움츠려듭니다. 자신이 없어지고, 용기도 없어집니다. 사람들 속에 뛰어들어서 내 꿈과 계획들을 펼치고 싶은 욕망과 용기는 다 꺾여지고 어느 새, 사람들 주변으로 점점 멀어지며 피하게 되고 움츠려드는 상태, 이제는 사람들과 접촉하는 일 마저도 힘들어지는 그런 상태가 될 때가 있습니다. 이야기를 하는데도, 원망과 불평과 짜증이 섞인 생명력 없는 대화를 합니다. 일상적이 대화인데도 불구하고, 그 속에는 사람들의 힘을 빼버리고 가족들의 용기를 꺾어버리는 대화를 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얼굴이 늘 어둡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웃도록 만드셨건만, 웃음 대신 늘 어두운 그림자가 얼굴 속에 배어있습니다. 한 번도 해맑고 밝은 아름다운 미소가 얼굴 속에서 솟아날 길이 없을 정도로 절망과 어둠 가운데 처할 때가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본문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러한 두 제자들의 표정과 대화와 삶의 여정 속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표정은 밝아집니다. 이들의 대화는 부활이요 생명으로 바뀝니다. 삶의 걸음은 다시금 삶의 중심부를 향해서, 역사의 중심부를 향해서 바뀌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변화가 오늘 우리에게 있다면, 진정 그 변화는 오늘 부활절을 맞이하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이 될 것이며,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이 살맛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두 제자가 바로 나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때는 없었습니까? 지금 그런 모습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분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제자들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상당한 해답을 줄 것입니다. 어떻게 그들의 삶이 새로워질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들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날 수 있었을까요?
첫 번째로, 성경은 예수님께서 이들과 함께 동행하셨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낙담하고 죽음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저들 걸음걸음에 참여하셨습니다. 인생의 주변인으로 돌아가는 그 방향으로 함께 동행하셨다는 사실이 이들로 하여금 변화되는데 모든 원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복되게 생각하는 단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가장 저주스런 단어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줄 아십니까? 이가봇!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내게서, 우리에게 떠났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야기 합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누가복음 2장 10절에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알리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 왜 복된 것인가를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 걸음을 걸어가는 동안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셨을 때, 그들의 고난은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광야가 광야가 아니었고, 홍해가 홍해가 아니었습니다. 홍해를 마른땅 걸어가듯이 걸어갈 수 있었고, 전쟁은 오히려 용기를 북돋아 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굶주림 가운데 빠지지도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실 때 광야지만 길을 잃어버리지 아니했습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주님이 동행하실 때, 승리자의 모습으로 걸어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이 그들을 떠났을 때, 그들은 풍요로움 속에서도 배고픔을 느꼈습니다. 평안함 속에서도 불안했습니다. 길을 가고 있었고 그 길이 분명했지만,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서로 싸우며 마침내는 비참하고 아름답지 못하게 몰락하게 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비록 실패와 좌절과 어둠의 길을 걸어간다 할지라도 나를 싫어하지 아니하시고, 나와 함께 동행하며 내 마음을 알아주시고, 나의 대화 내용을 바꾸어주시는 함께 하십니다. 내 인생의 가는 걸음을 아시는 분이고, 나를 만드신 분이며, 나를 도와줄 마음도 갖고 계시면서 도와줄 능력도 갖고 계신 분입니다.
그 분과 함께 가면서도 제자들은 주님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어려움과 동시에 따라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상실감, 좌절, 낙심, 분노, 불안, 두려움, 불신, 원망, 미움 등이 우리 주위를 둘러칩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주님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엠마오로 가는 제자와 동행하신 그 주님, 걸어가서는 안 되는 정 반대의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 그런 제자들과 같은 모습으로 걸어가는 우리들은 아닙니까? 아무도 초청하지 않았지만, 어느 새 우리와 함께 하는 절망과 좌절이라는 동반자로 둘러싸여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우리.
여러분! 여러분 주위에 우리 주님이 계신 것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근심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자주 듣는 모래 위에 발자국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꿈을 꾸었는데 모래 위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나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얘야, 이것이 너와 함께 걸었던 발자국이다.” 인생의 여정을 더듬어 보면서 어느 순간 보니까 발자국이 한 개만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를 살펴보니 자기 인생 속에 가장 어려웠던 시련의 시기였습니다. “아! 하나님 이 때가 내 인생 속에 가장 어려웠던 때인데 주님이 함께 계시지 않았군요.”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아니, 아니야!! 그 때는 말이야 너도 너무나 어려워서 스스로 걸어갈 힘이 없었단다. 바로 그 한 사람의 발자국은 너를 업고 간 나의 발자국이란다.” 우리 하나님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야곱이 발견한 은혜가 무엇입니까? 아버지 집을 떠나 외롭던 광야 거기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여기이 주님이 계시는구나’를 깨닫고, 여생을 힘차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또한 얍복강 강가에서 하나님이 여기만 계신 것이 아니라 나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 인생 속에는 낙담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걸어가고 계십니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면서 동행하고 계신 사실을 믿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의 삶을 돌이킬 수 있는 중요한 첫 번째 이유가 됩니다.
두 번째 원인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이 제자들에게 잘못된 신앙에 대해서 가르치시고 설명하고 책망하셨습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이렇게 그들을 책망했다고 말씀합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아.” 사실 이들은 여인이 전한 말도 베드로와 요한이 전한 부활 소식도 알고 있었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미련하다는 말은 깊게 생각지 아니하고 말씀을 듣는다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이들과 함께 동행하시면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너희들은 너희들대로 잘 가라 난 나대로 가겠다.’ 가 아니라 계속해서 말씀을 풀어 주셨습니다. 새로운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주님께서 하신 말씀, 구약에 예언자와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내가 고난도 받지만, 그 고난 위에 영광을 받는다는 말씀을 너는 읽지 못했느냐? 왜 듣지 못하느냐…….그것은 너희가 미련하기 때문이다.” 자세히 주의하여 듣지 아니할 뿐 아니라 이미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경험과 가치관을 가지고 말씀을 잘라서 자기에게 맞도록 규격에 맞춰서 듣는다는 책망이 담겨있습니다.
저는 바둑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보통 바둑을 한 400수정도 둔다고 합니다. 약 400수정도 되는 것을 바둑을 다 두고 나서 바둑판을 싹 밀고 어떻게 놓여있었는지 다시 복귀하라고 하면, 고수들은 이것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바둑을 TV로 중계하는 것을 보면 참 답답합니다. 저는 한 수 탁 놓으면 그만이지 하는데, 생각하고 고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한 수 한 수 놓을 때마다 의미를 두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 예상해서 헛되게 놓는 적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들을 때, 그 말씀이 내 삶 속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 어떤 말씀으로 다가올 것인지 진지하게 귀 기울이고, 심각하게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화가 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에게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절망과 낙심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의 삶 속 어디에 위치하고 있습니까? 잘 되고 부하고 평안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 있습니까? 고난 속에, 즐거움 속에 가려서 그 말씀이 여러분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 말씀 속에는 고난도 있고, 절망도 있고 그리고 십자가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너머에 변치 않는 영원한 생명,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변치 않고 붙드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오병이어’ 사건이 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인 사건은 정말 놀랄만합니다. 그러나 그 일에 참여하였던 제자들은 오병이어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습니다. 큰 은혜와 기적과 역사의 자리에 참여했었는데도, 그것이 내 삶 속에 무슨 유익을 주는지 몰랐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한다.” 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고난과 두려움, 염려사이에서 희망을 말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아는 것과 생각하는 것 그것만 듣기 때문에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환경이 주는 이야기만 들려옵니다. 나아가 그 하나님 말씀이 주는 희망과 소망의 메시지를 그냥 지나쳐 듣습니다.
로이 로버트슨이라는 미 해군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1941년 12월 6일 하와이 진주만에 정박한 함정 ‘웨스트버지니아’ 호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 배와 다른 여러 종류의 배는 360대의 일본 비행기에 의해서 무참히 파괴되었습니다. 일본군 비행기가 날아올 때, 로버트슨은 재빨리 기관포가 있는 쪽으로 갔습니다. 기관포를 들고, 저들이 기총 소사와 포탄을 가지고 옆에 있는 형제들을 죽이는 현장에서, 공포탄 밖에 없는 기관포를 잡고 절규합니다. “따따따따.......” 자기 입으로 소리를 냅니다.
소리를 내는데도 지나가는 비행기를 격추시키지 못하고, 격추하지 못했기 때문에 또 다시 죽어야 되는 형제들을 바라보며 울분을 터뜨립니다. 빈 실탄, 공포탄을 가지고 쏘아야하는 자기의 신세를 분명히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연습용 탄환만을 가지고 15분간 그는 처참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 후 어느 날 그는 성경공부 그룹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10명쯤 둘러앉았는데, 인도자가 성경 한 구절씩 서로 돌아가면서 외우도록 하였습니다. 로버트슨 병사가 암송할 수 있는 성경 구절은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슬아슬하게도 자기 앞에 사람이 외워버렸습니다. 자신의 차례가 왔을 때 외울 말씀이 없어, 할 수 없이 같은 구절을 암송하고 화끈거리는 얼굴로 성경 공부를 마쳤습니다. 그날 밤 교회에 혼자 앉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신의 친구들이 죽어 가던 그 현장, 실탄 없이 공포탄으로 비행기를 맞서서 싸우던 처참한 모습. 그리고 또 다시 복음의 핵심과 본질을 보지 못하고, 그 말씀이 자신의 삶 속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모르고 습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독백합니다.
“나는 가짜야. 나는 빈 깡통이야. 나는 가짜야“
그리고 하나님 앞에 다시 기도합니다. ‘하나님! 그 동안 건성으로 들었던 복음, 오늘 죽어 가는 많은 사람들 속에 하나님 복음이 왜 생명이 되고, 어떻게 구원 얻는지 진정으로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알기를 원합니다. 실탄을 가지고 총을 쏠 수 있는 병사처럼, 복음의 본질을 붙들고 복음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말씀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는 빌리 그레함 전도단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훗날, ‘트로트 맨’이라는 사람과 함께 세계적으로 유명한 “네비게이토”라는 선교 단체를 만들게 됩니다. 많은 선교 단체가 있지만, 네비게이토의 훈련 방법은 독특합니다. 복음의 핵심과 구원의 확신에 대한 부분은 어느 성경 공부도 따라 올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훈련시키는 단체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듣고, 신앙 생활할 때 그 말씀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까? 예배를 드릴 때마다 그 말씀이 어떻게 다가올까 두렵고, 떨리지 않습니까? 말씀이여 들려라 나는 나대로 살겠다하는 태도라면 이 말씀은 여러분 삶 속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런 영향력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빈 깡통」입니다. 「가짜」입니다. 말씀이 약속하는 희망을 우리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만든 하나님을 믿지 마십시오. 내 경험과 들은 지식 그리고, 단편적으로 본 성경 몇 구절, 욕구와 함께 뭉쳐진 그 하나님 모습이 진짜 하나님인줄 알고 믿고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본래의 하나님 하나님 되도록 성경 말씀 속에서 진지하게 대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구원의 소식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받아들이기를 원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주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돌이키고 깨닫게 할 수 있는 하나의 사건을 준비해두셨습니다. 무엇인가하면 제자들과 함께 떡을 떼며 음식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길을 걸어가며 말씀을 풀어주십니다. 날이 저물어서 머물러 서서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데, 주님께서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우러러 축사하시고 그들에게 먹이십니다. 여기에서 제자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예전에 광야에서 절망적인 순간에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축사하시면서 오천 명을 먹이셨던 주님, 죽은 자도 살리신 그 주님, 주님이 나에게 하셨던 그 말씀들이 기억나기 시작합니다. 오늘의 본문 사건을 통해 그 능력의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잡히시던 날 밤 떡을 떼어 축사하시고, 이것은 내 몸 내 피라고 말씀하시며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그 후에 영광을 받아야겠다고 말씀하셨던 그 주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그 능력의 주님이 살아나셨구나!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다시 확정하여 믿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다시 회복하셨던 분 중에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어떠한 계기를 통해서 다시 말씀을 붙드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 말씀이 새로운 말씀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이미 나에게 주셨던 말씀입니다.
얼만 전에 세상을 떠나신 고 하회룡 목사님을 아십니까? 벧엘 교회를 담임하시던 목사님이셨습니다. 그 목사님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큰 아들이 대학을 다니다가 군대를 마치고 복학해서 학과에 학회장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학과 일로 조교와 함께 M.T 장소를 답사하러 간 중에, 홍천 강에서 수영을 하다가 그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홍천 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느 새 날은 어두워지고, 강변에 아들이 누워있는 광경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눈은 반쯤 뜨고 하늘을 향해 누워있는 아들을 본 순간, 아버지는 아들의 눈을 감기면서, 아들의 볼에 자신의 볼을 대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참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니 눈물이 모두 입안으로 흐르고 가슴으로 흐르는 것 같았다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인간으로서 가장 제일 절망적이고 참담하고 설명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캄캄한 순간에 하나님,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리고서도 한참 생각했다고 합니다. 함께 갔던 부목사님에게 예배를 드리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처절한 죽음 앞에 그는 자기가 수없이 설교하고 수없이 고민하였던 「주님은 생명의 주님이라는 것 너희가 나를 죽어도 믿는 자는 부활하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생함을 얻겠다」라는 그 말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요」하는 말씀이 그의 마음속에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오! 하나님. 오! 하나님. 부활이 있어야만 합니다. 부활이 있어야만 합니다. 내 아들과 내가 다시 만나는 그 부활, 부활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그 동안은 부활에 대해서 의미 없이 설교를 했을 지도 모릅니다. 물론, 설교를 많이 하시고 깊게 이해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이 사건은 부활의 필요성과 부활의 확신에 대해 더 깊게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후에 나온 목사님의 설교집을 보면 진리 안에서 얼마나 깊은 진리의 말씀들을 증거하고 있는지 보게 됩니다.
다시 부활하시고, 세상 끝날 까지 함께 동행하시마 약속하신 주님의 놀라운 말씀을 기억나게 하신 사건, 그것이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혜의 사건입니다.
앞서 기관사가 다시금 회복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기와 함께 울고 있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여전히 그 사장은 자기를 사랑하고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았기에 문제를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 걸음이 고달프십니까? 어디로 향해서 가고 있습니까? 지금 하고 있는 대화는 어떤 대화입니까? 또 표정은 어떤 표정입니까? 두 제자의 모습이 어느 정도 나의 모습이라면 주님이 나와 함께 동행하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그 말씀 속에서 나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붙드시고 회복시키시고 인도하시고 축복하시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 약속을 온전히 믿으십시오.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이 시간, 내 삶에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 앞에서 주의 말씀을 마음속에 되새기며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부활주일 저와 여러분은 이 복된 날의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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