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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물가의 여인(1)
    2002-06-03 12:02:40   read : 3120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복음 4:1-10절 // 02/06/02

    한신대학교의 목회상담학 교수이자 미국 매코믹 신학대학원의 교환교수인 정태기 교수는 그의 저서 '내면세계의 치유'라는 책에서 "우리에게 있는 상한 감정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좋은 만남에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분은 많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굉장히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 한번은 좋아하는 생선요리에 아버지보다 먼저 젓가락을 댄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버릇없이 자식녀석이 아버지보다 먼저 생선에 젓가락이 갔다하여 젓가락 댄 손을 내리치는데 얼마나 사정없이 내려쳤던지 젓가락은 퉁겨져 나가고 생선은 천장으로 날아가서 한바퀴 공중곡예를 하고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어찌나 세게 맞았든지 젓가락을 집어들 힘도 없고 손가락은 이내 퉁퉁 부어 올랐다고 합니다.

    그래도 어떡합니까? 아프다는 소리한마디 못하고 어머니가 집어준 젓가락으로 닭 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꾸역꾸역 밥을 먹었는데 그때 정교수의 마음에 증오와 공포감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상한 감정은 그분의 나이 서른 일곱이 될 때까지 지속되어졌다고 합니다. 그 후, 유학시절 훌륭한 분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 안에 있는 상한 감정들이 치유되어질 수 있었다고 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상한 감정의 치유는 좋은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우리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정교수와 같은 그런 환경에서 자라지 않은 사람들은 없습니다. 대개는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기 감정을 억누르는 법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안에 치료되지 않는 상한 감정들이 자리를 잡게 되고, 그로 인해 성인이 되어서도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즉 이기주의적인 생각과 남을 배려하지 못하거나 오래 참지 못하는 습관들, 이 모든 것은 어린아이의 모습인데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모습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치유되지 않는 상한 감정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켜서 '성인아이'라고 합니다.

    우리들 가운데 부정적인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나 혹은 대인관계에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대개 그들이 어렸을 때 자라온 환경이나 배경에서 자신이 안고 있는 상처들이 치유되지 않아 그 상처에 의해 자신의 마음이 지배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 이런 상처를 받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좋은 만남을 통해 치유되어진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런 기회가 없어서 아직도 여전히 상한 심령을 가지고 '성인아이'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가장 상처받고 상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면 어떤 사람일까요? 제 생각에는 가정이 깨어져서 홀로 사는 사람들 즉 결혼생활에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요즘은 이혼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이제는 이혼 얘기를 들어도 별로 신기할 것도 없고, 이상할 것도 없는 것처럼 되어버린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20여년전만 해도 이혼은 사람들 사이에 매우 신기한 일처럼 여겨졌습니다.
    어렸을 때 받은 상처나 상한 감정이 치유되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어른이 되어서 경험하게 되는 이와같은 상처도 치유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교수의 주장대로 좋은 만남은 이 모든 것을 치료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실례를 오늘 본문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은 이미 여러차례 결혼에 실패를 경험한 여인입니다. 그녀가 왜 한번도 아니고 여러 차례에 걸쳐서 결혼에 실패를 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한번이라면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결혼에 실패했다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여러차례였다면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었다고 말하기엔 설득력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경우 대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혼자 살지 무엇 때문에 결혼을 한담'하면서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낼 것입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동네에서조차 별로 평판이 좋지 못한 여인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녀는 사마리아 여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이라면 개나 돼지처럼 취급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사마리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무시당하고 살아왔을 것이기 때문에 그 심령이 얼마나 상해 있었는지는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모든 상한 심령은 자신의 인생에서 한번의 좋은 만남을 통해 치료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치료되는 정도가 아니라 그녀로 하여금 그 상처를 딛고 일어서서 오히려 인생을 더욱 귀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1절에서 4절까지 보면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서 갈릴리로 가실 때 사마리아를 지나가시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지나가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지도를 보면 갈릴리는 북쪽에 있고, 유다는 남쪽에 있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는 그 중간지점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다와 갈릴리 지방에서 살았습니다. 물론 오늘날과 같이 교통이 발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한평생 살게 됩니다.

    첫 중국 선교여행때 산서성의 한 시골집을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도시에서 차로 3-4시간을 이동해서 간 집이었는데 토굴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몇 가구가 모여서 살고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한번도 도시로 나와 본 일이 없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기차를 본일도 없고 비행기를 본 일도 없다고 했습니다. 한평생 그렇게 문명과 거의 단절되어진 곳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 당시에도 별로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요즘은 자동차가 있어서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이 당시야 어디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태어난 곳에서 한평생 살다가 자신의 인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지역을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아도 잘 알 수 있듯이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로마를 여행했다든지 아니면 아시아 대륙을 횡단했다든지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멀리 벗어나지 못한 채 한평생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유월절이 다가오면 종교적인 행사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입니다. 물론 예루살렘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멀리서 오는 사람들은 연중행사처럼 가장 큰 일 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그 당시 사정으로 볼 때 대부분 걸어서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차를 이용하여 이동하는 오늘날에도 이렇게 먼 거리를 이동하려면 미리 지도를 보고 어떤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어떻게 가면 빨리 갈 수 있을까?를 먼저 점검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리를 단축시키는 것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유익과 더불어 경제적으로도 여러 가지 손실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먼 곳을 가면 사실 도로 통행료보다 아이들 간식비가 훨씬 더 많이 듭니다. 아이들은 휴게소가 보일 때마다 차를 세우게 합니다. 명목상 화장실에 가겠다는 것이지만 사실은 화장실이 아니라 휴게소에서 파는 간식거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행할 때는 가급적이면 빠른 길을 택해서 가는 것이 여러모로 좋습니다.

    이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아지역을 거쳐서 가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이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시간도 단축할 수 있고 경비도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은 사마리아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지름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를 거쳐서 가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마리아를 거쳐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길이 험하여 힘이 들어도 삥 둘러서 갔습니다. 왜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둘러서 갔습니까? 한마디로 '재수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저희 동네 입구에 어느 날 술집이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낯선 여자들이 담배를 물고 그 집 앞에 나와 앉아서 호객행위를 했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그 앞을 지나다니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갈 때에도 저의 손을 잡고 먼길을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왜 가까운 거리를 두고 먼길로 돌아다니느냐?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러나 저의 어머니는 아마도 담배를 물고 집 앞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술집 아가씨들을 어린 제가 보면 교육상 좋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피해 다니는 이유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사마리아인들은 그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술 마시고 담배피우면서 교육상 아이들에게 못 보일 것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곳을 피해 다녔던 이유는 일종의 인종차별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순수한 유대인의 피가 아닌 이방인의 피가 섞인 사람들과는 상종을 하지 않겠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멀어도 그곳을 지나가지 않고 돌아서 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런 곳을 예수님께서 지나가십니다. 예수님도 다른 사람들처럼 피해가실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곳을 피해가지 않으신 것을 보면 어떤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과 보여주신 행동 하나하나가 우리들처럼 생각없이, 그리고 의미없이 행하신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꺼리는 사마리아로 들어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은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자들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자보다 많다는 말이 바리새인들의 귀에 들어가서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도 아셨기 때문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를 줄 때 그들에게 사람들이 많아 모이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 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고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 주는 것은 왜 문제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첫째는 위기감 때문일 수 있습니다. 새롭게 등장한 신흥세력이 너무 세(勢)를 불리고 있다는 위기감 때문일 수 있습니다. 갑자기 세(勢)가 확산되고 있으니까? 늘어난 세(勢) 때문에 불안감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꼭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위기감을 느끼려면 세례요한이나 그의 제자들이 느껴야 하는데 지금은 바리새인들이 문제를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세(勢)가 불어난 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바리새인들은 왜 이것을 문제삼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근본적으로 요한과 예수가 다르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 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요한과 예수는 도대체 어떻게 다릅니까? "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소리쳤고, 예수도 동일하게 외쳤는데 도대체 뭐가 다르다는 말입니까? 요한의 회개촉구는 자신의 권위로 촉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달랐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그 권위를 가지고 외쳤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요한의 회개는 기회도 있고, 시간적 여유도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반면예수의 회개는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 회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남의 권위를 빌려서 회개를 촉구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 협상을 할 때 대리인이 가면 협상이 되지 않을 경우 다시 만나 조정할 수 있는 여유를 남겨놓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최종결정은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협상 당사자들이 만나면 그 협상은 분명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거냐 저거냐?'하는 분명한 선이 있습니다.

    요한의 회개촉구는 타협의 여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장본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듣는 사람들의 마음도 부담감이 적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의 말에 대한 최종적인 권위는 요한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경우는 분명 달랐습니다. 지금 당장 회개의 장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타협의 여지도 없습니다. 나오지 않으면 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강력하게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이 더 많이 그의 말에 수긍을 하고 그에게로 나아가서 세례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복음이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단입니다. 믿음이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단입니다. 심지어 야고보 선생은 결단 없는 믿음은 마귀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결단은 매우 중요합니다. 요즘 이주일씨가 금연운동에 적극 앞장을 서고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왜 그분이 금연운동에 앞장을 서고 있습니까? 폐암진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폐암의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 담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금연을 촉구하면서 무슨 말을 했습니까? '일년만 일찍 담배를 끊었더라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텐데'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뒤늦은 후회였습니다.

    그분은 수 차례 금연할 것을 의사와 동료들로부터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단하지 못하고 미루다가 그만 폐암선고를 받았습니다. 그저께 월드컵 개막 전에 나와서 인터뷰할 때 그가 뭐라고 했습니까? "월드컵 개막전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사형선고를 이미 받아놓은 상태고 얼마 있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결단하지 않는 것입니까? 아직도 타협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주의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고 목회자의 설교로 듣고 있기 때문에 결단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목사님은 그렇게 말씀하셔도 앞으로 잘 하면 되지, 언젠가는 나도 그렇게 될 날이 오겠지"하면서 결단할 것을 미루고 있는 것이 지금 나의 모습은 아닙니까?

    바리새인들이 위기감을 느낀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당장 결단하라고 촉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룰만한 여유를 주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핑계도 대고 변명거리를 찾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말하는 예수 앞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고 급기야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 세례 받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문제삼아 예수를 어떻게 해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들이 위기의식을 느껴 자신에게 어떤 나쁜일을 도모할 것을 미리 아시고 그것이 두려워 도망가시듯 그곳을 떠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신 근본적인 이유는 아직 자신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에서 실랑이를 벌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치솟는 인기로 인해 그들을 자극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단하지 않는 자들, 마음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 그들보다는 차라리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상처받은 자들을 찾아 나서시는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말씀이 들려질 때 결단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일 선포되어지는 말씀이 목사의 설교정도로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 나를 향해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결단하지 못할 것도 없고, 미루거나 타협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만약 이 말씀을 듣고도 미루고 싶다면, 만약 이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타협하고 싶다면 주님은 여러분의 곁을 떠나 사마리아로 발길을 돌리실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곳을 떠나 사마리아로 가셨습니다. 5절과 6절을 보면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지금이 예수님께서 가신 곳은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한 동네였습니다. 그곳은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야곱의 우물이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여기서 야곱이 요셉에게 준 땅과 야곱의 우물에 대한 역사적인 사건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그 사실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따지다 보면 본문의 내용을 흐트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은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길을 행하시다가 몹시 피곤하여 그 야곱의 우물곁에 앉게 되었는데 때가 제 육시라고 했습니다.

    학자들은 여기서 말하는 제 육시가 오전 육시를 말하느냐? 혹은 오후 육시를 말하느냐?로 의견이 분분합니다. 만약 오전 육시라면 우리시간으로 정오쯤 됩니다. 그러나 오후 육시라면 저녁 늦은 시간이 됩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고 반문하실지 모르지만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열쇠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오전 육시, 즉 우리시간으로 정오정도로 생각하기보다는 오후 육시 즉 저녁 늦은 시간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오는 시간은 주로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그 전후로 우물을 찾게 되는데 아마 이 여인은 그 시간을 피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녀가 다른 여인들과 같이 우물을 정상적인 시간에 뜨지 않은 것입니까? 자신에게 부끄러운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자신에게 있는 상한 심령이 사람들을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물을 뜰만큼 여유를 가지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물은 여인들이 물을 기르는 목적도 있지만 집안에만 있던 여인들이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옛날 우리네 어머니들이 그랬습니다. 우물가에 보이면 동네에서 일어나는 모든 얘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인터넷은 여인들의 우물가입니다. 오늘날은 컴퓨터를 통해 정보의 바다를 항해하지만 그 당시에는 우물가에서 정보의 바다를 항해했습니다. 누구네 집에 무얼 사고, 누구네 집에 무슨 일이 있고, 아무개 집은 숟가락이 몇 개고, 어젯밤에 무슨 일어 벌어졌고 다 압니다. 아니 정보를 교환하는 장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사람들에게 별로 평판도 좋지 못한 이 여인이 굳이 그 시간을 택해서 물을 길으러 갔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여인들이 물을 다 길어가고 한가한 시간에 이곳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이곳에 사마리아 여인이 먼저 우물가에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보고 예수님께서 그녀 곁에 다가가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물가에 앉아 있을 때 그녀가 물을 길으러 왔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한마디 던지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물을 좀 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두 사람 다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물을 길으러 왔고, 한 분은 그 물을 마시려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물'이라는 공통점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먼저 '물을 좀 달라'는 것입니다.

    7절을 보면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손이 없습니까? 발이 없습니까? 먼저 왔으면 물을 손수 떠 드시든지 그것도 귀찮으면 제자들에게 좀 떠오라고 하시면 될 일이지 무엇 때문에 그녀에게 지금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물론 8절에 보면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고 했기 때문에 이 당시 제자들은 곁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목이 마르면 손수 떠서 드시면 될터인데 왜 목마른 채로 우물가에 있다가 그녀가 왔을 때 그녀에게 물을 달라고 하셨단 말입니까? 그러고 보면 예수님께서 정말 목이 말라서 요구하신 것은 아닌 듯 합니다. 다시말해서 의도적으로 이 사마리아여인에게 접근하고 계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 여인에게 접근하신 것일까요? 우리는 3장에서 니고데모는 자신이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반해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먼저 이 여인에게 접근하고 계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니고데모는 자신에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어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갔지만 그녀는 사실 자기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몰랐습니다. 그녀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상한 심령이 얼마나 자신을 파괴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녔고, 그것 때문에 떳떳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우울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내적치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기 안에 있는 문제를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라는 말로 자기에게는 별로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진정한 치유가 불가능합니다. 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인아이'로 살아갑니까? 자기 안에 있는 상한 감정이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이라는 것으로 그것을 덮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일상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물이 필요해서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그러나 상한심령 때문에 자신있게 우물가를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크게 문제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의 문제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첫 말씀을 던지셨는데 '물을 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그냥 이곳에서 물을 손수 떠서 드셨더라면 더 이상 얘기가 진전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왜 물을 달라하십니까? 그것은 물을 마시지 못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단순히 목이 말라서 물을 달라고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한 주님의 의도적인 접근이었습니다. 물이 필요해서 우물가를 찾은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갈 중요한 도구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지금 여러분에게 어려운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주를 만날 기회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정의 문제, 혹은 직장의 문제, 혹은 대인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이것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그것은 나로 하여금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께 나아가게 하는 중요한 도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물을 주셔야 할 분이 오히려 물을 달라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들은 주께 달라고 요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주께 무엇을 드려야 할 것인지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 얼마나 많이 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까? 아마 손을 꼽으면서 헤아려 본다면 엄청나게 많을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것을 달라하면서 과연 나는 주께 무엇을 드리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물은 내 것도 아닙니다. 그냥 동네입구에 있는 우물입니다. 누구든지 마음대로 길어갈 수 있는 물입니다. 주께서 달라고 하신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얻어야만 문제가 해결되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선행이 되어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달라고 하기전에 우리가 주께 무엇을 드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얻었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어지는 것보다 내가 드렸기 때문에 해결되어지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과연 주께서 요구하시는대로 주께 드리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드리지 않으면 해결해 주시지 않는다는 식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주께서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출발점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9절을 보면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지극히 상식적인 선에서 예수님의 요구에 대해 답했습니다. 유대인인 당신이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인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느냐?는 것입니다. 원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거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정결예법에 따라 그들과 함께 같은 그릇을 사용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개나 돼지처럼 취급하고 있는 판국에 '물을 달라'고 요구하는 예수의 요청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1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주님은 상한 심령의 그녀를 진리가운데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조금 전에 예수님은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느닷없이 생수를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완전히 전세가 역전되어지는 말씀을 던지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 우물가의 이 여인에게 물을 구하고 있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녀가 모르고 있다는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녀를 야단치시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진실로 알게 되기를 원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그녀에게 주시려는 것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생수'입니다. 정수기에서 삼투압작용으로 걸러져 나오는 생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생명의 물입니다. 이것을 마시면 영원히 죽지 않는 그런 생명의 물입니다. 그녀의 상한 심령을 치유하고 다시는 성인아이로 살지 않게 만드는 영원한 생명의 물입니다. 그것을 주려 하십니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이 예수에게 물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을는지 모릅니다. 단지 유대인이 요청한 것이기에 거절하였을 뿐 물을 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이라고 생각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그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진정으로 물이 필요한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우물가에 있는 이 사마리아 여인이라는 것과 예수님 자신은 그 물을 공급해주는 하나의 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물가에 있는 여인에게 물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물이 얼마나 많은데 정작 물이 필요하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우리들 현재의 삶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영적으로 가장 고갈되어져 있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기도는 하는데 허공에 메아리치는 의미없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기도를 통해 어떤 영적인 기쁨과 감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가장 많은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누굽니까? 우리들이 아닙니까? 입만 벌리면 '은혜', 대화 중에도 '은혜' 은혜아래 사는 것 같은데 제일 은혜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우리들이 아닙니까? 가장 많은 사랑가운데 있는 사람이 누굽니까? 우리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사랑을 제일 많이 말하면서도 여전히 미워하고 질투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자기 변명늘어 놓기에 바쁜 것이 우리들이 아닙니까?

    가장 많은 용서를 받은 사람이 누굽니까? 죄에 대해 용서함 받은 우리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들은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용서하지 못하고 정죄 하려하지 않습니까?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문제삼아 떠들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어쩌면 우리 안에 있는 상한 심령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이것을 치유하기 위한 진정한 만남이 있기 전까지 우리는 여전히 상한 심령으로 남아있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수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왜 생수입니까? 우리들에게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해서 뭔가 하나 얻었다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내가 남보다 좀 더 잘 살게 되었다고 좋아하는 인생에 그친 사람만큼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지식을 남들보다 더 가지게 되었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불행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근본문제는 생명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명의 물입니다. 이것이 있을 때 상한 그녀의 심령이 치료를 받게 됩니다. 치료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능력있는 삶을 살게 되는지 본문 이후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은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녀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문제가 해결되어지는 축복을 누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부터라도 여러분에게 가까이 다가와 있는 예수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바르게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과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영원한 생명의 물로 인해 여러분 안에 있는 상한심령이 치유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능력있는 삶을 사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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