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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룩한 추적
    2002-06-03 12:07:15   read : 3765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 6. 2 // 행 9:1- 9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저는 자서전을 상당히 좋아합니다. 여러분도 아마 한두 권의 자서전은 다 읽어보셨을 겁니다. 자서전이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진솔하게 써 놓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중에 프랜시스 탐슨이라고 하는 사람의 인생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끼쳐 왔습니다. 그 이유는 이 사람의 인생이 상당히 극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일찍이 목사로 만들려고 신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공부를 중도에서 그만두고 맙니다. 그러자 교육열이 높은 아버지가 다시 그를 설득해서 의대를 지원하게 했습니다. 의사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도 중단해 버립니다. 결국 그는 런던 시내 한가운데 노숙자가 되어 버리는데, 거기서 마약을 하고 성냥과 신문을 팔며 하루하루 살아가다가 급기야는 밑바닥 인생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가 이런 생활을 하며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순간 순간에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우연히 그의 재능을 윌프레드 메이넬이라는 한 출판사 사장이 발견하고 그를 돕기 시작합니다. 병원에 데리고 가서 마약을 끊게 만들고, 사랑으로 용납하고 품어주며, 인내하며 그를 결국 문학가의 한 사람으로 올려놓습니다. 그가 훗날 유명한 시집(詩集)을 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집의 제목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천국의 추적」, 재미있는 제목입니다. 그 책에서 그는 하나님을 사냥꾼으로 묘사합니다. 사냥꾼을 주제로 한 '헌터'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사냥꾼이 얼마나 끈질기게 인내하며 동물을 쫓아가는지, 그리고 사냥을 하면서 동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영화에서는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을 아름답게 그려 놓았습니다.

    그가 왜 그 시집에서 하나님을 사냥꾼으로 묘사했을까? 그는 새사람이 되어 어느 날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자신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집요하게 추적하셔서 기어코 자기를 변화시킨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자신이 잘나서 변화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의 자기를 만든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이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음을 깨닫고 그 은혜를 자신의 책에 썼으며, 그 제목을 「천국의 추적」, 이 얼마나 멋있는 제목입니까?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읽은 본문은 너무도 유명한 사도 바울의 회심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기독교를 핍박하던 사도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삶에 너무나도 중요했기 때문에 아마도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예배 시간마다 자신의 간증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사도행전에만 해도 똑같은 사도 바울의 회심 사건이 세 번이나 나타나 있는데, 오늘 본문과 22장과 26장에 누가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이 놀라운 변화를 한 신학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울을 바울로 바꾸셨다! 그리고 바울은 세계 역사를 바꾸었다!' 여기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지난 세기를 살펴보면 바울이라는 한 사람의 역할 때문에 세계 역사가 바뀐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 즉 종교적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그는 엄청난 영향력을 이 인류 역사에 끼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도 바울을 누가 바꾸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바꾸셨습니다. 그는 원래 이 역사를 바꿀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바꾸셨습니다. 이 사도 바울의 변화, 하나님이 그를 바꾼 사건을 오늘 본문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변화를 원하십니까? 우리 모두는 아마도 마음속 저 깊은 곳에 무언가 변화를 위한 갈망이 있을 것입니다. '내 인생을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다. 지금보다는 좀더 나아져야 되는데...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는 정말 위대한 인생을 살 것인가?' 변화 받고 싶고 변화되고 싶지만 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인생이 변화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오늘 사도 바울처럼, 사울이 바울이 됨으로 이 세계사를 바꾼 것처럼 우리도 변화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이 주제에 대해서 저와 여러분에게 몇 가지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를 향한 집요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한다고 본문은 얘기합니다.



    1. 하나님의 집요하신 사랑을 깨닫자

    하나님이 나를 집요하게 쫓고 계심을, 하나님이 나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지금도 나를 찾아 헤매고 다니심을 깨닫는 자만이 참 인생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실, 성경은 영혼의 추적자에 관한 기록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하나님을 영혼의 추적자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당신을 포기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탕자처럼 멀리 떠나 그분을 잊고 방황할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을 기다리셨습니다. 고멜과 같이 세상에 짝하여 방탕할 때도 그분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쾌락에 묻혀 살 때도 그분은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짓고 두려워 숨어있을 때에 하나님이 아담을 찾아 나서셨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가 숨어있는 장소를 몰라서 부르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아담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또한 가인이 그 동생 아벨을 죽이고 전혀 회개할 마음이 없을 그 때에도 하나님은 가인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를 역시 부르셨습니다. "가인아,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오늘 사울이 예수 믿는 자,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칙령을 받아들었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이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약 230km, 그 당시 상당히 먼 거리인 예루살렘부터 다메섹까지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1절에서는 그가 칙령을 받으러 들어갈 때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위협과 살기의 마음이 등등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에 살기가 있었습니다. 미움이 있었고 분노가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여야 되겠다 라는 미움이 그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었어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살기 등등한 마음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향할 그 때에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다고 얘기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그 다메섹 도상에 찾아가셔서 예수님은 사울의 이름을 따뜻하게 불러 주십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죄 지은 아담을 부르셨던 하나님, 살인한 가인을 부르셨던 하나님,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살기 등등해서 찾아가는 사울을 부르셨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을 부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목놓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녹취한 책입니다. 우리를 포기할 수 없어서, 우리를 끝까지 그의 품에 안으시려는 하나님의 추적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한 선지자를 택하십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목사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얘야, 너 오늘 가서 저 창녀와 결혼하라!" "아니, 하나님, 제가 목사인데 창녀와 어떻게 결혼합니까?" "결혼하라!" 명령하셨습니다. 할 수없이 그가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그 창녀가 옛 버릇을 못 버리고 도망을 갔어요. 그렇게 사랑해 주었는데, 목사가 창녀를 데려왔는데... 하나님이 또 명령을 하십니다. "가서 돈을 주고 찾아 오라!" 포주에게 속했던 그를 다시 돈을 주고 찾아와 아내를 삼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런데 평생을 감사하며 그를 남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할 터인데, 그 창녀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또 도망을 갑니다. 이번에는 이름도 모르는 한 남자와 동침을 해서 아들까지 낳아버렸습니다. 하나님이 그 목회자에게 찾아와서 다시 그 여자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으라고 하십니다. 너무나 괴로웠지만 하나님의 명령이라 할 수 없이 순종했습니다. "여보, 이제는 도망가지 마라! 내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당신을 이렇게 사랑했잖아! 내가 가진 재산을 다 버리고 당신도 누군지 모르는 아들을 내가 키우지 않소! 여보, 이제 나를 사랑하고 나를 믿음으로 내 평생 내 가슴에 상처를 입히지 말고 살아주오!" 애원했지만 얼마 세월이 지나지 않아 이 여자는 또 도망을 가버립니다. 그리고 다른 남자의 아기를 또 갖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이 그 목회자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가서 그 창녀를 데려오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이 상상이나 가는 일입니까? 오늘날 한번만 외도를 해도 이혼의 사유가 되어 이혼을 하겠거든, 몇 번씩이나 외간 남자의 아이를 가진 그 여자를 데리고 와 같이 살라니요? 아내로 같이 데리고 살라니요? 하나님이 도대체 어떻게 이런 명령을 내릴 수 있단 말입니까? 소설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역사, 성경에 기록된 호세아 선지자의 얘기입니다. 호세아서를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은 왜 이 잔혹한 일을 선지자 호세아에게 시켰습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백성들에게 전달하기 전에 하나님의 심정을 호세아 선지자 스스로가 한번 겪어보라는 겁니다. 네가 내 사랑을 안다고 설교하느냐? 정말 네가 내 가슴을 알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이러한 여자와 한번 살아보아라! 수없이 하나님을 떠나 도망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되풀이하시며 쫓아다니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 보라는 겁니다. 호세아가 이 메시지를 받고는 그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호세아를 위한 메시지가 아니라 오늘 바로 당신을 향한 메시지가 여기에 들어있는 겁니다. "얘야, 내가 너를 향한 사랑이 어느 정도인 줄 아니? 네가 계속해서 내 곁을 도망가는구나! 데려다 놓으면 또 죄를 짓고, 세상에 빠지고, 쾌락에 빠지고, 물질에 빠지고... 그러나 나는 너를 한번도 포기한 적이 없단다!" 우리를 사랑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친히 보여 주셨던 하나님은 그것으로도 되지 않아서 마침내 그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도대체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겠니?

    그 당시 사람들은 다 목축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비유로 가르치십니다. 너희에게 양이 백 마리 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 중에 한 마리가 우리를 나가면 너희가 까짓것 백 마리 있는데 저까짓 한 마리 죽으면 죽었지 하고 놔두겠느냐? 아흔 아홉 마리를 우리에 가둬두고 물 건너 산 너머 가시에 찔리면서 잃어버린 그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또 너희에게 아들이 둘 있다고 치자. 한 아들이 네 재산을 다 허비해 버리고 창기와 허랑 방탕해서 네 마음을 아프게 했다고 치자. 그러면 너는 그 아들을 호적에서 없애버리고 잊어버리고 살 수 있겠느냐? 그럴 아버지가 어디 있겠느냐? 오히려 네가 참 아버지라고 하면 그 아들이 마음을 돌이켜서 돌아오기를 얼마나 기다리겠는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가을이 되어 낙엽이 지고 겨울이 올 때도 저 문 앞에 나가서 언제나 네 아들이 돌아올까 기다리지 아니하겠느냐! 너는 내 마음을 알겠느냐?

    주님이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이 부족했기에 마침내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다 흘리시면서 자기 목숨을 당신을 위해 주셨습니다. 그가 왜 돌아가셨습니까? 내가 그 자리에 달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손에 박힌 그 못은 바로 내 손에 찔려야 합니다. 내가 받아야 할 창을 그가 대신 옆구리에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불러도 불러도 우리가 대답하지 않으니까 우리를 업어서라도 천국에 데려가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 이 한마디를 남기셨습니다. I love you! 얘들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수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며 스데반을 죽이고도 모자라 살기 등등하던 사울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메섹으로 찾아가 부르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당신을 찾으십니다. 오늘 당신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당신은 과연 듣고 계십니까? 오늘 왜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습니까? 왜 그토록 신앙생활을 오래하고도 우리 마음에 변화가 없습니까? 그 이유는 성경을 수없이 읽으면서도 이 애타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우리가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음성을 듣는 자는 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음성을 들으십시오. 사울을 찾으셨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을 찾으십니다. 당신의 있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오늘 이 말씀을 듣는 가운데 내 머리 속의 하나님이 아닌, 성경 속에 기록된 제3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 모두가 듣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가 변화 받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집요하신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과연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그분이 나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심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본문에서 사울이 회심한 이유를 얘기하는데,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을 깨달아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올바로 바라 보아야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2. 자신을 올바로 바라보자

    예수 믿는데 가장 방해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왜 사람들이 예수를 못 믿는가? 또 예수를 믿고 나서도 왜 신앙생활을 잘하지 않는가? 신앙생활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입니다. 이 세상 살면서 신앙생활 하는데 가장 원수가 자신입니다. 본문의 사울이 그러했습니다. 모든 판단의 주인이 자신이었어요. 자신의 견해로 볼 때 예수님은 가짜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사람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스데반을 과감하게 죽였어요.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리고 이것도 모자라서 예수 믿는 사람, 저 230km 밖에 있는 사람까지 전부 잡아다가 감옥에 넣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불교신자라도 이렇게 못하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안 믿는 사람이 아니라 유대교 신자였습니다. 그는 구약성경,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이렇게 악하게 행동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유는, 그가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실제로 자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자신을 믿는 사람이 오늘날 교회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판단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미워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에게 말의 상처를 입힙니다. 여러분, 이 인류역사에서 가장 잔혹한 전쟁이 누구의 이름으로 일어났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발발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십자군 전쟁입니다.
    임신한 부인의 배를 갈랐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실상은 자신을 믿고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자신을 들여다보십시오. 정말 하나님을 믿고 있나요? 오늘날 교회에 나온 지 10년 20년,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의 마음에 칼을 꽂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목회자들이 모여서 서로의 마음을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나를 믿는 겁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때가 정오라고 얘기합니다. 낮이 얼마나 밝습니까? 태양이 얼마나 밝은가요? 그러나 놀랍게도 그날 이 태양보다도 몇 십 배, 몇 백 배 더 환한 빛이 사울에게 쏟아졌습니다. 홀연히 쏟아졌습니다. 그 빛을 받은 사울이 도저히 견딜 수없어 그 자리에서 시력을 잃어버리고 땅에 고꾸라집니다. 그리고 사울이 가장 먼저 한 말이 무엇인가 하면 "주여! 뉘시오니까?" 옛날에 예수가 나타났으면 이렇게 물었을 겁니다. "너, 누구냐?"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부릅니다. "주여!" 사도 바울이 그를 구세주로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만 하나의 존경의 표시였겠지요. 무한한 힘을 바라보고 자기를 부르는 그 위대한 분을 향해 "주여! 뉘시오니까?"라고 대답합니다.

    훗날 이 사건을 돌이켜보며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자신을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라고 일컬었습니다. 나는 율법적으로 흠이 없고, 도덕적으로 예수 믿는 너희보다 낫다. 이만하면 내가 너희를 정죄할 자격이 있다라고 생각했던 사울, 그래서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 그러나 그는 오늘 이 다메섹에서 비로소 자신을 바라보았습니다.
    왜 사람들이 교만한 줄 아십니까? 자신을 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왜 함부로 남을 정죄하는지 아십니까? 자신을 못 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못 보는 이유는 하나인데,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도 저 멀찌감치서 만났어요. 여기에 아무리 환한 빛이 있어도 100미터 정도 떨어져서 반짝거리는 불빛 아래 깜깜한 밤에 옷을 보십시오. 아무런 티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밝은 빛에 오면 올수록 깨끗해 보이던 옷과 얼굴이 더러워져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 사울은 자신을 보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이었던가, 내가 얼마나 교만해서 내 지식에 미쳐서 살았던가, 그래서 함부로 판단하여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정죄하며 살았던가를 그는 보았던 것입니다. 그후, 날마다 날마다 간증하기를 "죄인 중에 내가 죄수니라." 남은 인생을 그는 이렇게 간증하며 살았습니다.

    변화되기 원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당신을 바라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성도 여러분! 나를 보십시다. 나를 보십시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나를 돌아보면 허물이 나에게만 있고 남에게 있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있지 않고, 아내에게 있지 않고, 자녀와 부모에게 있지 않습니다. 모든 허물이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주여! 뉘시오니까!" 여기서 내 과거가 해석되기 시작합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내 과거를 올바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거를 잘못 해석합니다. 그래서 부모를 원망합니다. 자기 환경을 탓합니다. 내가 왜 이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나, 나는 왜 키가 이만한가, 나는 왜 돈 없는 부모를 만났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보십시오.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면 비로소 여러분의 과거가 해석되기 시작합니다. "아! 하나님께서 이래서 나를 그런 가정에 태어나게 하셨구나! 하나님이 이래서 나를 그렇게 고생시키셨구나!" 과거가 비로소 해석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의 돌아봄이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도록 우리 모두 기도합시다.

    변화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자

    7절을 보십시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소리를 어떻게 했습니까? 들었습니다. 다시 22장으로 가보면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자기의 간증을 또 이렇게 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아니, 9장에서는 들었다 해놓고 22장에서는 못 들었다고 하니 성경이 틀린 것이 아니냐? 이것을 발견하신 분은 성경을 꽤나 많이 보신 분입니다. 못 발견하신 분은 아직도 멀었습니다. 성경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말로 직역을 했을 뿐입니다. 영문법을 공부한 분은 이것을 잘 이해할 것입니다. 똑같은 동사가 뒤에 오는 전치사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게 나타나는데, 여기서도 두 가지 전혀 다른 의미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리를 듣는다'의 말과 '말귀를 알아 듣는다'의 '듣는다'는 똑같지만 다릅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하면 이해력이 부족하다는 얘기입니다. 9장에서 '들었다'고 얘기하고, 22장에서는 '듣지 못했다'고 얘기하는데, 이 '들었다'고 얘기할 때는 소유격을 썼습니다. 그것은 "우르르릉~" 하는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사울을 부르실 때에 무슨 큰 이상한 소리가 있었던가 봅니다. 그런데 사울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누구만 이해했는가? 그것은 사울의 귀에만 이해되어졌습니다. 소리는 다같이 들었는데 이해는 사울만 했어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까?"

    22장에 보니까 사도 바울이 한마디를 더 합니다. 9장에서는 얘기하지 않던 것입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랬더니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주여,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이것이 무슨 얘기입니까?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당신이 말씀하는 대로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사울은 그 순간 자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자, 그리고 자신을 올바로 하나님 앞에서 발견한 자는 하나님의 손에 나를 맡깁니다. 그렇지 못한 자는 여전히 모든 것이 다 내겁니다. 시간도, 건강도, 인생의 주인이 모두 나입니다. 내가 관리합니다. 나에게 책임이 있고 권리가 있습니다. 내 물질도 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만나 자기를 바라본 자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당신은 어느 정도 맡기셨습니까?

    9장 9절을 보세요.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사울은 그 날부터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합니다. 요나가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 사흘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서 지냈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기 위해 사흘 길을 고통 가운데 걸어가야 했습니다. 예수님도 사흘을 무덤에서 지내셨습니다. 요나의 사흘이요, 아브라함의 사흘이요, 예수님의 사흘이요, 사울의 사흘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때때로 우리에게 이러한 고통의 날들이 필요하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집요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깨닫기 위해, 때때로 우리 인생에는 고통이 주어질 수도 있으며 사건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사건과 고통을 당할 때, 과연 그 속에서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을 발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때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 당할 때 남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짜증내며 인생을 끝내버립니다. 가인은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거역했습니다. 그래서 멸망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가인아, 가인아!"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부르셨건만 그는 그 음성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사울과 요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돌이켰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만남으로 그날 돌이켜서 자신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드림으로 바울로 변하여 세계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의 추적을 받는다면 우리는 나를 보고 내 인생을 비로소 하나님께 맡겨야 할 것입니다.

    일상적인 사건과 고통의 순간 속에서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의 추적을 받고 주께 돌아온 사람들의 예를 우리는 교회사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감리교를 창시한 웨슬레는 평범한 교인이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배를 타게 되었어요. 그 배가 풍랑을 만납니다. 도저히 살 가망이 없을 정도의 큰 풍랑이었어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죽으면 어떻게 하나! 그래서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저쪽에서 일련의 사람들이 모여서 너무나 평안하게 찬송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날 비로소 웨슬레는 자신이 그저 교회를 형식적으로 다니는 교인이었음과 구원의 확신이 없는,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돌아가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가 요한 웨슬레가 되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방황을 했습니다. 고민이 극에 달해서 마침내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거울 앞에 서서 면도날로 자신의 동맥을 자르기 직전 거울을 바라봅니다. 마지막 자신의 인생 얼굴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웬일입니까?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가 그 유명한 D.L 무디의 제자 R.A 토레이 박사입니다. 토레이 신부의 할아버지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르틴 루터, 기독교 역사를 바꾼 그는 평범한 교인이었습니다. 그가 젊은 시절 어느 날 친구와 들판에 놀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비가 오더니 벼락이 쳐서 옆에 있던 친구가 벼락에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어요. 너무나 놀란 마르틴 루터는 그 자리, 나무 밑에서 부들부들 떨며 주저앉았습니다. 처음에는 겁이 났습니다만, 그 순간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그날 이후 마르틴 루터는 변화되고,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루터에게만 말씀하셨나요? 웨슬레에게만 말씀하셨나요? 토레이에게만 말씀하셨나요? 아담에게만, 사울에게만, 가인에게만 하나님이 말씀하셨나요?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얘기하십니다. 내가 지금도 너를 부르고 있노라! 질병을 통해, 자식의 아픔을 통해, 사고를 통해, 친척간의 괴로움을 통해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당신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분은 결코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실 겁니다. 끝까지 당신을 온전한 자리에 앉히기 위해 노력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그 부르심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늘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사울이 바울이 되어 역사를 바꾼 사도 바울처럼 오늘 당신의 가정을 바꾸고, 당신의 인생을 바꾸고, 당신이 속한 이 사회를 한번 바꾸어 보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왜 날마다 세상에 패배하며, 죄에 지며, 물질의 노예가 되어 살아야 합니까? 우리 남은 인생을 하나님 앞에 맡기십시다. 오늘 당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맡기십시오. 오늘 하나님은 당신을 통해 이 부산의 역사를, 한국의 역사를 다시 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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