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누군가를 닮는 것에 대해 언급할 때 아인슈타인과 그의 조교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나곤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여러 곳을 다니면서 상대성 이론에 대해 강의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를 따라다니던 그의 조교는 그 강의를 많이 듣다보니 그 내용을 거의 다 외었습니다. 하루는 선생님 아인슈타인이 상당한 피로를 느껴 강의하기에 상당히 불편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때 조교가 이러한 제안을 했습니다. "선생님, 지금 가는 곳에서 박사님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박사님을 대신하여 강의하겠습니다. 박사님은 제가 어떻게 하나 듣고만 계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조교가 강의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조교는 선생님 못지 않게 명강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겼습니다. 강의는 외워서 잘 했는데, 강의 후 어떤 사람이 아주 어려운 질문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이 조교는 당황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그 질문이요? 너무 단순한 질문을 하시는군요. 그 정도의 질문은 내 조교도 대답해 줄 수 있지요!" 이렇게 대답하고는 청중석에 앉아있던 아인슈타인을 향해 "조교, 그 질문에 대해 한 번 대답해 주지 않겠나?"라고 말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아인슈타인이 일어나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강연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대단히 놀랐다고 합니다. 아마도 조교의 명성이 대단히 높아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조교는 아인슈타인을 모방할 수는 있었어도 아인슈타인을 진정 닮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조교는 아인슈타인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창조력을 가지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피를 이어받았던 아인슈타인은 머리도 좋았기는 했지만, 성경의 말씀을 통해 항상 창조력을 키워왔습니다. 유대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가지 더 전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의 모범을 삼는데 있어 무엇인가 많이 다른 점을 본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 TV 뉴스 즉 새소식 즉 뉴스시간에 본 일입니다. 어느 기자가 유대인 학교에 가서 청소년들에게 “누구를 제일 존경하고 누구의 사진을 모으느냐?”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모은 사진을 내어 보여주었는데, 놀랍게도 랍비들의 사진이었습니다. 바로 그들의 종교지도자들의 사진이었습니다. 외적으로 화려한 자들이나 부자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정신세계와 영적인 세계에 대하여 가르치는 랍비들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들에 대한 존경은 유대인들을 다른 민족과는 다르게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저는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 랍비를 존경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유대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고 합니다. “그에게 가면 답이 있습니다.” 지혜를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랍비들을 존경하고 닮으려 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으려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참 하나님과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개척한 교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어려우면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있는 자신을 닮으라고 아주 강하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3:17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이러한 전승은 우리 믿음의 선조들을 통해 계속해서 내려왔습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토마스 아 켐피스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읽어보신 분이 있는 줄 압니다. 그는 15세기경에 살았던 수도사였습니다. 그는 깊은 신앙생활을 통하여 그가 깨달은 지혜들을 여기에 담고 있습니다. 영성생활에 대한 권고를 비롯하여 내적 생활에 대한 권고 등 주옥같은 신앙의 지혜를 여기에 담고 있는데, 그 목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이 세상에서 닮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이기 이전에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합니다. 더욱이 목사이기에 그러한 삶을 살고자 합니다. 교인들은 아무래도 목사를 닮기 마련입니다. 제 인격이야 여러분보다 더 나은 것이 별로 있겠습니까만, 목사는 영적인 인도자이기에 신앙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잘 인도하면 좋은 것을 교인들이 닮게 될 것이요 제가 잘못 인도하면 잘못된 것을 닮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저와 함께 있으면서 서로 좋은 면에서 서로 닮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는 그 분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함께 있다는 것은 단순히 옆에 있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긴밀한 관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도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에 그냥 그 옆에 가만히 서 계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1:1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이라는 또 다른 명칭을 가졌던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헬라어 전치사 '함께'는 영어 단어로 설명하면 with가 아니라 toward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옆에 계시는데, 바로 하나님을 향한 자세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목석처럼 그냥 옆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를 가지며 함께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도 이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육신적으로는 부활하신 후 하늘나라로 올라가셨지만,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써 우리와 영적으로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기 위해 함께 있다는 것은 단지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과 긴밀한 관계성을 가지고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바라보고, 그 분의 뜻을 알려고 하며, 그 분으로부터 전해지는 모든 말씀들을 수용하고 나의 응답을 전하는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시시때때로 성령을 통해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닮으려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6은 그 성령을 ‘보혜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보혜사는 παρακλ?το?로서 바로 옆에서 도우시는 분이라는 의밉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우리 곂에 서서 도우신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는 기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을까요?
저는 누군가와 함께 하며 그를 닮는 것이 얼마나 흥미로운 것인지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지난 7월에 우리교회에 남궁진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이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강연과도 같은 신앙간증을 했는데, 저는 앞자리에 앉아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말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김대중 대통령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김대중 선생님을 삼십 년 동안 모시면서 살다보니 말투가 닮았습니다.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심지어는 말을 하는 입의 모양까지 닮았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나름대로 존경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동안 닮는다는 것이 저렇게 무섭구나 하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영적으로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그분의 일거수 일투족 하나 하나까지 닮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사도 바울이 항상 강조했던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음에 있어 목표점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란다는 것은 그분의 인격을 닮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누가복음 6:40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예수님도 자신을 닮아가는 것이 제자들이 하여야 할 목표임을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데 있어 온전히 닮으려 하여야 합니다. 온전히 닮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이라는 분량을 다 채우는 일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라는 영화를 비데오테입을 통해 감상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교회도 나오지 않고 성경말씀이 언급되지도 않고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전혀 언급되질 않았습니다. 아마도 미국에서 그러한 것들을 언급하면 종교영화라고 여겨지고 별로 볼 사람이 없어서 그러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영활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 그 사랑을 이루어가고자 하는 한 중학생의 모습을 그리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이혼한 엄마와 사는 트레버라는 한 중학교 소년이었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던 첫 날 사회과목 수업에서 선생님으로부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한 가지 일을 이번 학기를 통해 이루자는 과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노숙자를 도우려 했지만 당장 보기에는 실패했습니다. 엄마와 자기 선생님 사이를 연결시키려 했지만 실패하는 듯했습니다. 자기 친구가 모듬매를 당하는데도 당장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도움을 주면서 사회를 변화시키려 하는 그의 시도는 그냥 보기에 모두 실패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시도는 알게 모르게 여러 사람을 통해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결국 어느 신문기자에게까지 전달이 되어 그는 트레버를 인터뷰하는 데까지 이르렀고 그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한 말을 이루기 위하여 모듬매를 맞고 있던 그 친구를 도우려 하다가 칼에 찔려 죽게 됩니다. 그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 소년의 뜻대로 서로 돕는 모습을 이루어가는 것을 그려준 영화였습니다.
비롯 미국의 세속주의적인 장면들이 몇 번 나오지만, 아마도 작가와 연출가는 그 가운데 진정 사랑이 흐르고 희생이 가지고 온 열매를 그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요 삶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모습은 우리 생활 곳곳에서 가능함을 그려준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감에 있어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또한 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으로서 신격을 가지시기도 한 분이요 한 인간으로서 인격을 가진 분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으로서 이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기에 그 분은 신격과 인격을 동시에 가지신 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의 신격은 우리가 닮을 수는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격을 닮을 수는 없을지라도 그 분의 인격은 온전히 닮고자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 분의 인격을 온전히 닮고자 하는 노력을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목적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진정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한글 개역성경을 보면 잘 구별이 되질 않습니다만,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앞뒤의 내용과 병행이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이 앞뒤로 비슷한 내용 사이에 끼어져 있습니다.
앞에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하고 바로 뒤에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것에 하나가 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는 것이요 이는 우리가 바로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간단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사람들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태초의 창조사건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하나님은 태초에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1:27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유지할 때 진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만 그 사람이었던 아담과 하와가 범죄를 함으로써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형상을 잃어버리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이로써 진정하고도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사람의 모양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상태에 있다면 우리는 아직 온전한 사람이지는 못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온전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온전한 사람으로 회복시키고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으로서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분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형상을 우리에게 회복시켜주기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바로 그 예수님을 믿고 아는 데에 하나가 되기까지 자라난 사람은 바로 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들도 진정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최초의 온전한 사람이었던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을 때 우리는 바로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이 보시고 매우 좋았다고 했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셨던 사람의 원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닮아야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놓여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대구제일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 다 함께 예수님을 닮아갑시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심점이 될 때 우리는 서로 다양하나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2000년전에 이 세상에 오셨고 또한 이 세상 끝날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것이 대림절을 맞이하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교훈을 실천해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