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책을 읽다가 운명을 바꾸는 방법에 대한 간단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적선을 많이 하거나, 둘째 참선(禪)을 많이 행하거나, 셋째 명당에 묘를 쓰거나, 넷째 독서를 많이 하는 것입니다.(조용헌,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168) 아마 여러분들도 가끔 들어본 방법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방법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종교적 영향이 많이 나타납니다. 적선을 하는 것은 선을 많이 쌓으라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특별히 불교적인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참선을 행하는 것 역시 불교의 가르침에 따른 것입니다. 그리고 명당에 묘를 사용하는 것은 한국 전통종교의 풍수지리설의 반영이고, 마지막으로 책을 많이 읽으라는 것은 유교의 영향을 보여줍니다. 이는 보이는 물질적인 세계 혹은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세계의 것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를 통해 볼 때 시대가 지나면서 각 종교의 특성들이 여기에 하나씩 첨가되었던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제 얼마 지나면 한 가지 방법이 더해질 것입니다. 이는 바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죄의 용서를 받아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는 영적인 문제로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운명을 영원히 바꾸는 것입니다. 죄로 인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지니 이 얼마나 엄청난 변화입니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운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용서받아야 할 죄들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성경은 이 세상에 크게 두 가지의 죄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는 원죄요 또 다른 하나는 실행죄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한 사람으로 인해 이 세상에 들어온 죄에 대하여 언급하고 또한 모세의 시대에 생긴 율법으로 인해 알려지게 된 죄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아무튼 이 두 가지 죄 모두는 사망 즉 죽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두 종류의 죄 사이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요?
먼저 죄 가운데는 율법이 전해진 이후에 깨닫게 되는 죄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모세 때 주어진 하나님의 율법은 어떤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것이고 그른 것인지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 율법의 내용을 잘 지키면 선을 행하는 것이요, 그 내용을 범하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생활 속에서 범하는 죄를 실행죄라 합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잠깐 잘못하여 율법의 조항들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짓는 죄들을 의미합니다.
물론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계명이 여기에 첨가됩니다. 신약성경은 실행죄를 ‘과실’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 6:14-15에 잘 나타납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여기서 과실은 paraptoma로서 ‘미끄러져 넘어졌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다가 잠깐 실수하여 잘못을 저지르는 죄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이러한 죄를 얼마나 많이 짓고 살아갑니까? 죄를 짓는 것도 습관성과 중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번 거짓말하면 이를 감추기 위하여 또 다른 거짓말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이를 감추기 위한 제삼의 거짓말을 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것이 생활화되면 아예 거짓말에 대한 경계심조차 없어지게 됩니다. 이는 거짓말이 습관화되고 이에 중독이 되는 것입니다. 담배나 마약에 대한 중독만이 우리의 몸과 정신을 망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러한 윤리적인 면에서의 죄도 우리도 몸과 마음을 망치게 됩니다.
죄도 자꾸 저지르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우리가 죄를 짓게 되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비유적인 이야기를 통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돌과 여인’이라는 단편글을 보면, 어느 날 두 여인이 나이 많은 수도사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그 수도사는 두 여인에게 참회의 고백을 시켰습니다. 첫째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큰 죄인임을 고백했지만 둘째 여인은 자기는 지금껏 도덕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참회할 만한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수도사는 첫째 여인에게는 큰 돌 하나를 구해오라고 했고 둘째 여인에게는 작은 돌들을 많이 구해오라고 했습니다. 그런 뒤에 그 수도사는 주워온 돌들을 다시 본래의 자리에 두고 오라고 했습니다. 첫째 여인은 그 돌을 금방 두고 올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둘째 여인은 한 두 개는 어디서 주워왔는지는 알아도 나머지는 어디서 주었는지 도저히 기억하질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쩔쩔매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 수도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고백도 그렇습니다.”(국민일보, 2001. 12. 4. 겨자씨)
그렇습니다. 죄에 대하여 민감한 사람은 첫 번째 여인과 같습니다. 그는 자기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죄를 지었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죄를 짓고도 이에 대하여 무감각하여 자주 아니 항상 죄를 짓는 사람은 둘째 여인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너무나 자주 지었기에 도저히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실행죄를 자주 짓습니다. 실행죄에 대해서는 저도 하나님과 여러분 앞에 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이 죄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개인적인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회와 그 사회를 이루고 있는 민족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욕심이 많이 나타날수록 사회적인 죄는 더욱 커집니다. 오늘 날 우리 나라가 이 문제에 있어 심각한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죄를 저지르지 않으려는 노력을 항상 하여야 합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의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글을 보니 유대인들 가운데 아주 근본주의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지은 죄가 기억날 때 전봇대 꼭대기와 같은 기둥 위에 올라가 하루 열두 시간을 머무르며 죄를 회개하고 다시는 그러한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다짐하는 모습도 보인다고 합니다. 물론 거기에 올라가 있는다고 죄가 용서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기를 바라기는 하겠지만, 그 정도로 같은 죄를 다시 짓지 아니하기 위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죄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에 희망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용서에 따른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또 다른 종류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담과 연관되어 나오는 죄입니다. 아담 이래로 그의 죄로 인해 모든 사람은 최후에 육신의 사망 즉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죄는 앞에서 지적한 실행죄보다 더 위력이 큰 죄요 더 근본적인 죄입니다. 이 죄는 더 근본적인 죄로서 ‘원죄’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이 원죄는 선악과와 연관되어 표현되어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 아담이 죄를 짓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거부한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따먹음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근대의 대신학자요 철학자인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 안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깨는 그때에 바로 사람 안에 있는 낮은 성품에 대한 인식도 깬다.” 즉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되고 그 하나님에 대한 부담감이 생기는 그 순간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바로 죄의식이 싹튼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원죄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와 대조적으로 우리 사람에게 강하게 다가오는 영적인 현상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가지지 않을 때는 별로 느끼거나 생각하지 않는 종류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없던 것은 아닙니다. 내재되었으나 알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깊은 본성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Karl Barth)는 로마서에 대한 그의 유명한 주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나 상태나 또는 그러한 것들의 총체라든가 역사적, 심리학적인 우연성으로서가 아니라, 항상 그리고 어디서든지 똑같이 전제된 인간적인 사건과 상태들의 규정성으로서 이 세계 안에 존재한다.” 죄는 사람들이 선택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의 권력으로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개혁교회의 신학적 기반을 세운 칼빈도 이 죄는 인간에게 본연적으로 생기는 것이라 했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도 아니요, 사람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영적인 본질입니다. 자녀는 부모로부터 육신의 형질을 물려받지만, 원죄는 본래 사람의 본성 깊숙이 자리잡고 사람마다 지배하는 영적인 힘입니다.
바로 우리 모두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여러분들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생각하는 순간 우리에게 있는 죄의식이 함께 발동되었던 사실 말입니다. 이러한 죄의식을 애써 외면하려 해도 그 원죄에 의해 죄의식은 살며시 우리를 파고듭니다. 이러한 죄를 우리 사람의 의지로는 제거할 수 없습니다. 아주 근본적인 악의 힘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려는 영적인 세력이기에 이 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사람이 아닌 그 이상의 힘이 필요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힘입니다.
죄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제가 잘 아는 분이 티눈 하나 때문에 고생을 했습니다. 약을 발라도 빠지지 않고 손톱깎기로 뜯어보아도 잘 빠지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의사 선생님에게 물어보았더니 수술을 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약 4만원 정도 경비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별로 넉넉하지 않았던 그 분은 그 돈이 아까워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중국에 갔는데, 길거리에서 티눈 뿌리를 뽑는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를 뽑는데 2위안 약 320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는 무척 싸다 생각되어 그 자리에서 결정을 했습니다. 자기 몸에 생긴 티눈은 서 너 개 정도의 뿌리만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1,500원 정도면 될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뽑고 보니 그 작은 티눈이 무려 172개의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58,000원 정도를 지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려 172개의 뿌리가 살속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으니 어떻게 이를 쉽게 뽑을 수 있었겠느냐고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알코올에 담아와 저에게 보여주면서 그분은 우리 사람의 원죄를 빼기가 이렇게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영의 안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는 원죄는 쉽게 제거되거나 없어지지 아니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죄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와질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성을 제시합니다. 우리에게 원죄가 내려온 것이 아담이라는 한 대표적인 사람에 의한 것이라면, 이 죄를 극복하고 회복하는 것도 대표적인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또한 역사적인 사람들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담을 태초의 사람으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새롭게 여는 영적인 세상의 처음 사람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담은 오실 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의 그늘 아래 들어가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를 대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그늘 아래 있을 때 우리는 원죄를 해결할 수 없는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그늘 아래 들어가기를 선택하면 이는 원죄로부터의 용서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 선택을 이미 하신 분들이 여기에 많이 있습니다. 아직 이 선택을 하지 못하신 분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용서와 은혜의 그늘에 들어오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실행죄를 통해 원죄를 깨닫게 되고 이를 동시에 해결시켜 주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길선주 목사의 이야기를 소개할 수 있습니다. 1907년 1월 13일 주일 밤이었다. 평양에서 연합부흥회가 열리고 있는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이길함(Graham Lee) 목사는 당시의 집회 분위기에 대하여 "집회는 전혀 영적인 생기가 없었으며 하나님의 성령이 회중 가운데서 떠나 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사람들은 매우 답답하여 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두 그러한 집회 분위기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길함 목사가 무엇 때문에 집회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졌는가하고 회중들을 향해 물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때에 한 사람이 일어나서 자기의 죄를 눈물로 뉘우치며 고백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집회에 은혜를 내리시지 않는 이유는 바로 나 때문입니다. 나는 바로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집회에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약 일년 전에 내 친구 중 한 사람이 임종하면서 내게 부탁하였습니다. '길 장로, 내가 세상을 뜨거든 내 유산을 돌보아 주시오. 내 아내가 세상을 너무나 모르니 당신만을 믿겠소'. 나는 잘 돌보아 줄 터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약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난 뒤 미망인의 재산을 관리해 주면서 미화 일 백불 상당의 돈을 사취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길선주 장로였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그의 눈에서는 회개의 눈물이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자기를 신뢰한 친구와 미망인을 속인 죄를 자백하며 날이 밝는 대로 사취한 돈을 미망인에게 돌려주겠노라고 배상의 약속을 하면서 쉬지 않고 자기의 죄를 공중 앞에서 자복한 것입니다. 그의 고백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회개하기 시작하였고, 바로 그 순간 여러 날 동안 무겁게 짓누르던 장벽과 같은 담이 별안간 무너져 내렸다고 합니다. 죄에 대한 애끓는 회개가 예배당을 휩쓸었으며 저녁에 시작한 합심 기도가 예배가 이튿날 새벽 두 시가 되었는데도 끝나질 않았습니다. 막혔던 하늘이 열리고 성령의 폭발이 나타난 것입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실행죄로 인해 막혔던 영적인 은혜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장대현교회의 중직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길선주 장로의 죄에 대한 고백은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는 문을 연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의 중직자가 교회에서 긍정적으로 활동하면 그 긍정적인 결과가 엄청나게 나타나는 것이요, 반대로 부정적으로 활동하면 또한 그 부정적인 피해가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사랑하는 대구제일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순절 네 번째 주일에 들어서 있습니다. 이 기간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를 대표하고 대신하여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원죄에서 해방되어 의인이 되었으나 우리 육신의 연약함으로 실행죄에서는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마틴 루터는 “우리는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참 의인의 모습을 가져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시는 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