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를 구하는 삶 2002-06-06 13:55:04 read : 2858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마가복음 14:33-42 2002. 3. 24.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 돌아오사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9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저희가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 세 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의사선생님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입원해 있는 특실에 도둑이 들어왔습니다. “꼼짝마!” 그러자 환자는 “누구야?”하고 소리쳤습니다. “도둑이다. 가진 돈 다 내놓아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그러자 환자가 말했습니다. “아니 당신 지금 누굴 놀리는 거요? 의사선생은 내가 가망이 없다는데 당신이 무슨 수로 날 살린단 말요?”
도둑이 죽어가는 환자를 살린 수 없지요.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살리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여러번 소생기적을 행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피할 수도 있는 죽음을 스스로 맞이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말씀은 예수님이 생애 마지막 기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느냐? 아니면 사느냐?’ 하는 문제로 씨름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이 하나님의 뜻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이셨기에 죽음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높았습니다. 그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놀라고 슬퍼하였다.” 여기서 ‘놀라다’ 라는 말은 ekthambeisthai로서 ‘정신을 완전히 잃을 정도가 되다’라는 의미입니다. 임종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깜짝 놀라곤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아마도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 그렇게 놀라는 모습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여기서 ‘아바’라는 히브리어 말은 당시 아이들이 아버지를 향해 부르는 호칭이었습니다. 우리말에 ‘아빠’에 해당합니다. 성경은 헬라어로 쓰이면서 히브리어 ‘아바’의 의미가 잘 전달이 안될 것 같아 ‘아버지’라는 해석을 달아놓았습니다. 그래서 ‘아바, 아버지여!'라고 적혔습니다. 유대인 가운데 하나님을 감히 아빠라고 부른 기록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빠!’ 라고 부른 것은 절대절명의 간절함을 의미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그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예를 들면, 여러분들도 기억하는 분이 있으리라 생각되는데, 어느 나라에서 지진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진으로 인해 한 어린 아이가 땅에 묻혔습니다. 건물잔해와 더불어 몸이 묻혀 있다가 구조대원들에게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자그마한 구멍을 통해 자기의 손을 내 놓고 살려달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그 아이를 꺼내려 하는데 많은 건물잔해로 인해 바로 꺼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굴삭기를 동원해 주변의 잔해들을 제거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그동안 그 아이는 점점 더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이의 손을 붙잡고 조금만 더 참으라고 격려합니다. 그럴수록 그 아이는 젖먹던 힘을 다해 소리칩니다. “아빠 살려주세요!”
바로 그러한 심정으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지금 외치는 것입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향해서도 살려달라고 외치는 것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모든 것이 가능한 하나님을 향해 그러한 외침을 전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잔을 옮겨 달라는 인간이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외침입니다.
죽기를 거부하는 것이 사람들의 본능입니다. 저는 나이 많은 분들의 임종을 몇 번 대해본 적이 있습니다. 죽음을 신앙으로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분을 보았는가 하면,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이 못내 아쉬어 좀더 살고자 하는 분도 보았습니다. 하물며 자연사도 아닌 죽음으로 강제로 그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 그 사람의 심정은 어떠하겠습니까? 저항하는 것이 본연의 모습일 것입니다.
군목으로 근무했던 김우영 목사님이나 서울구치소에서 근무했던 박효진 장로님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사형수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얼마나 저항하는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형수는 잠시 후면 죽을 것임에도 신고 가던 까마 고무신이 벗겨지자 되돌아가서 신고 오는가 하면 어떤 사형수는 사형이 곧 집행되는데 소변을 보겠다고 옷을 벗겨달라고 한다. 사형집행관이 그냥 옷에 보라고 해도 굳이 벗겨 달라고 한다. 그래서 내가 벗겨 주었지만 벌벌 떨기만 하고 소변을 보지 못했다. 어떤 사형수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물으면 남기는 말 대신 담배를 달라고 한다. 담배를 주면 사시나무 떨듯 떨며 피운다. 사형수 가운데 당당하게 목에 밧줄을 걸고 죽은 흉악범은 거의 없습니다. 반면에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을 열심했던 사형수들은 천국을 바라보며 찬송하며 사형장에 올라가 자신의 잘못을 다시 한 번 열거하고 오히려 사형집행관들에게 전도하고 기도하며 죽어갔다고 간증한 것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라고 이러한 마음을 가지지 않으셨겟습니까? 예수님도 처음에는 다가오는 강제적인 죽음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시옵소서.”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이렇게 외칩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말은 자신이 죽음의 잔을 마시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순교의 길을 걷겠다는 최후 결단이었습니다. 많은 죄인들을 위한 대속적인 죽음이라면 자기가 그 길을 가겠다는 하나님을 향한 최후통첩이었습니다.
왜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이 자기의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통해 이러한 기도를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따르라고 가르치셨기에, 자기에게 막상 그 뜻이 임할 때 잠시 고민은 했지만 최종적으로 순종하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잘아는 단어 ‘살신성인(殺身成仁)’과 맥을 같이하면서도 더 숭고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논어>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보면 “지사인인(志士仁人) 무구생이해인(無求生以害仁)하며 유살신이성인(有殺身以成仁)이라.” ‘지사와 인인은 삶을 찾아 인을 해치는 일이 없고, 몸을 죽여 인을 이룩하는 일은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살신성인이란 “어떻든 그가 가지고 잇는 신념을 살리기 위해서도 하나밖에 없는 생명도 달게 버릴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말”입니다. 뜻을 가진 사람들은 인을 위해 목숨을 버릴 정도는 알건만, 하나님의 아들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仁)을 이룰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순교의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외침은 이러한 말씀을 읽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자신이 간 길을 따르라는 호소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주어진 구원의 은혜와 혜택을 받고 있기에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 자가 될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바로 순교자가 되어야 할 때 순교자가 되고 항상 순교하는 자세로 살아갈 것을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요청하십니다. 순교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 볼 때 죽겠다고 할 때 하나님은 오히려 살리시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예를 들면, 민수기 11:14에 기록된 바와 같이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불평하고 원망할 때 하나님에게 자기가 죽게 해달라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기원을 할 때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더 많은 능력과 힘을 주셔서 그 백성들을 이끌어 갔습니다. 또한 열왕기상 19:1-8에 보면 엘리아 선지자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바알과 400명을 죽이고 이세벨 왕후가 무서워 도망갈 때 어느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죽여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그에게 힘을 붇돋아 주고는 호렙산에 나타나 그에게 능력을 더하여 주었습니다. 이후 엘리야는 엘리사를 제자로 택하며 그의 선지자권을 넘겨주고 하늘로 올라가는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아무튼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위대한 지도자들은 자신이 죽음을 택할 정도로 고통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시 힘을 얻고 살아서 더 큰 일을 한 경우를 겪곤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사도 바울도 보여주었습니다. 그분은 갈라디아서 2:20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고백한 후 이제는 자기를 살리신 그분을 위하여 육신 가운데 거하고 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생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마침내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반열에 서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는 그 목숨을 잃을 것이요, 오히려 그 목숨을 잃고자 하는 자는 얻을 것이니라. 이는 진정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목숨을 내놓고 하는 사람치고 성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목숨을 내어놓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주후 3세기경 초대교회 교부였던 터툴리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종자(씨앗)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순교자의 피를 마시며 자라났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말씀대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순교자의 피가 지금의 교회와 우리를 있게 한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 김은국 목사님이 쓴 장편소설 ‘순교자’를 읽었습니다. 거기에는 세 종류의 목사들을 등장시키면서 누가 진정한 순교자이며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사람인가를 판단하게 합니다. 먼저 해방 후 공산치하에서 살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전인 6월 18일에 공산당에게 끌려가 살해를 당하는 열명의 이름없는 목사들. 둘째, 그들 가운데 있었으나 순간 살고싶은 욕망으로 인해 신앙적 배신을 했으나 후에 1.4후퇴 때 노약한 교인들을 버릴 수 없어 남하하기를 거부하고 그들과 함께 북에서 죽어간 중년의 신 목사님. 셋째, 이와는 다르게 북에서 목회를 하던 당시 남한을 위해 첩보원 노릇을 하다 들통이 나게 되자 남쪽으로 피신했다가 평양수복과 더불어 평양에서 국군의 도움으로 다시 크게 활동하고 1.4후퇴와 더불어 다시 남하해서 어느 섬에서 피난민들을 위해 헌신하는 고 목사님. 이 세 종류의 목사들을 등장시키면서 누가 진정 순교자인가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필요한 분이지를 따져보고 있습니다. 물론 저자는 결론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독자들로 하여금 결론을 내리도록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몸을 던지는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현재 우리나라에는 기독교에 대한 외적인 핍박과 탄압이 없는 때에 순교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도 마치 예수님처럼 순교를 각오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러한 경우가 순교를 각오한 경우라 여겨집니다.
서울의 신월동에 고용복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는 1972년 철거민들이 밀집한 이곳에 천막을 치고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목회하겠다고 기도를 해 오기는 했으나, 막상 현실은 비참했습니다. 끼니를 잇기도 어려웠고 너무 힘겨웠습니다. 그러한 상황을 보고 신학교 동기가 “방에 불이나 지피고 살아라”고 호주머니를 털어 연탄 300장을 사주었는데, 이튿날 아침 그 연탄 300장 모두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모두 도둑맞은 것입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옳지, 이곳이 바로 내가 찾던 사역지다.” 그때 감사의 기도가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목회한지 30년 현재 큰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신앙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잃고 낙심할 때 바로 그때가 바로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여야 할 순간입니다. 그때가 바로 순교하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며 살고자 작성하고 또한 살아갈 때
여러분. 여러분도 이러한 경우를 가질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신앙으로 인해 사업 가운데 성수주일을 하다 망한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가 그것이 바로 순교자의 모습입니다.바로 그 분에게는 순교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순간이 바로 다음에 있을 부활을 준비하는 순간입니다. 주일에 예배에 나오기 위하여 친목회나 동창회에 참석하지 못하여 모든 친구들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관계가 전혀 되지 못하도록 신앙이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이 예수님을 위하여 우리가 순교하는 순간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이는 순간 바로 그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더욱 유지하는 모습이 순교의 순간입니다. 인간적으로는 희망이 없어 보여도 하나님은 어느 누가 뭐라고 해도 살아계시고 우리를 돌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순절의 마지막 주일이자 종려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수난주간을 맞이합니다. 이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감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기리는 주간입니다. 함께 그 고통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히려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이 신비롭고도 역설적인 법칙을 체험하는 귀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