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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지치료의 성서적 조명
    2002-06-07 15:41:22   read : 2674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박재우(서강대학교 인턴, 온누리교회 하가문 부장)

    어느 자유주의 신학을 신봉하는 모임의 대표가 말을 했습니다. 성경 구약에 나오는 기적들은 거짓이니 구약의 모세 오경은 찢어버리십시오. 사람이 부활했다는 말도 거짓이니 사복음서도 찢어 버리십시오. 이런 식으로 몇 주간의 강론 끝에 사람들 손에는 성경 가죽표지만 남겨졌고 사람들은 더 이상 그 곳에 모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참으로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는 예화입니다.

    어쨌거나 신학이라는 이름이 붙은 학문을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웃지 못할 예화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구약의 모든 기적을 믿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모두 믿는 우리말입니다. 우리에게도 혹시 요즘 세상에 구약의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쓰여진 시기가 아득한 옛날이었던 것만큼이나 낡은 오래된 이야기처럼 느껴지고 있지는 않은가요? 아니 어쩌면 흙으로 사람이 지어졌다는 이야기나 6일만에 천지가 지어졌다는 이야기는 교훈을 위해서 주어진 어떤 비유라고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우리에게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느 날 제게 한 때 아득한 동화 속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던 구약 성경의 어떤 부분에서 현대의 심리학자들이 거창하게 들먹이는 이론이 아무 것도 아닌 듯이 거론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좀더 설명을 드리자면 인지-치료라는 이론 그러니까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비합리적인 신념과 잘못된 생각이 정신적인 문제의 원인이라는 이론이 창세기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언급되는 부분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실, 인간의 학문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만드셔서 이 땅에 숨겨 놓으신 진실들을 발견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그리 놀랄 것은 없는 발견이었지만 저의 전공과 성경과의 관련성에 대해서 늘 고민해 왔던 저에게 하나의 해답을 제시해 주었기 때문에 마치 감추인 보화를 찾은 것처럼 기뻤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제 제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인지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기 위해 여러분을 에덴 동산으로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의 열매, 흔히 줄여서 선악과라고 말하는 열매를 맺는 것으로 알려진 나무는 동산의 중앙에 있었습니다. 마치 동산을 다스릴 것을 명령받은 아담이 그것을 수시로 보고 주목하기를 의도하신 듯한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 나무만큼 전도하는 사람들을 골치 아프게 하는 나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신다면 도대체 왜 이 나무를 만드셨다는 거요?' 어쩌면 당신도 바로 이런 성난 음성을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의심하는 이런 음성을 말입니다. 정말 도대체 왜 이런 나무를 하나님께서는 만드셨을까요? 저는 한 때 이런 식의 대답을 하곤 했습니다. 하나님은 로버트가 아닌 자유 의지를 가진 자신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우리를 지으셨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하나님께 응답하기를 원했다고 말입니다. 지금도 저는 이 말이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지금은 더 깊은 뜻이 있으셨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조금 후로 미루고 인류 최초의 유혹이 있었던 그 날로 우리의 초점을 잠시 옮겨 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단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아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세기 3장 1절-7절)

    눈에 띄는 구절이 몇 군데 있습니다. 첫째로 그것은 뱀이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동산 나무에 대한 명령을 받은 사람은 하와가 아니라 아담이었습니다. 하와가 지어지기도 전에 아담은 동산에 대한 통치권을 위임받았고 아울러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에 대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상적인 각본대로라면 미국의 저명한 정신분석가인 스캇펙 박사가 자신의 책에서 말했던 것처럼 하와는 아담에게 아담은 하나님에게 이 문제를 의뢰해야 했었습니다.

    두 번째로 눈에 띄는 구절은 하와가 하나님께서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죽을까하노라고 말하셨다고 하고 있는 점입니다. 죽을지도 모르겠으니까 주의하라는 식으로 말씀하신 것처럼 응답하고 있습니다. 이미 반쯤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구절보다 눈여겨 보아야할 구절은 바로 5절입니다. 5절의 말은 여러 가지 생각을 담고 있는데 그러한 생각들 중의 하나는 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거짓입니다. 5절에서 뱀은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바라시지 않고 다만 우리를 아래에 놓고 즐기시는 분인 것처럼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시킨 생각을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일이 이쯤 되고 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왜 그토록 하나님의 동기와 성품에 의심을 품으면서 '그렇다면 왜 선악과를 만드셨느냐?'는 질문을 하게되는지 알게 되셨을 것입니다. 그는 바로 뱀이 최초의 인류에게 불어넣었던 잘못된 생각을 누군가로부터 전수 받았던 것입니다. 아니 그 생각이 피를 타고 유전되어 왔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사실 뱀의 독은 사람의 피에 영향을 주며 독사에게 물렸다가 사는 길은 피 흘리는 길 밖에 없는 것입니다. 독이 온 몸에 퍼지기 전에 독에 오염된 피를 흘리는 길만이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이제 잠깐 제가 앞에서 말씀 드렸던 인지-치료라는 이론의 골자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앞서도 말씀 드렸듯이 인지-치료에서는 사실과는 다른 역기능적인 생각이 자신의 고통의 원인이라고 보고 그 생각을 수정함으로써 좀더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기본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만일 당신이 취직 시험에 떨어졌다고 합시다. 당신은 기분이 좋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기분 나쁜 것이 너무도 오래 지속되어 다음 번 취직 시험 준비를 방해할 정도가 되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렇게 오래도록 기분 나쁜 것은 시험에 떨어진 그 자체보다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점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것은 취직에 떨어진 모든 사람이 다음 준비를 못할 정도로 힘들어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인지-치료에서는 바로 그 어떤 점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역기능적인-잘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기능을 발휘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생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예에서 우리가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어쩌면 시험에 떨어진 당신은 '나는 이토록 중요한 시험에 떨어져서는 안돼'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시험에 떨어진 것을 보면 나는 정말 바보인가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비록 속으로 자신에게 말을 하듯이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더라도 말입니다.

    인지-치료적 접근을 취하는 심리치료자가 만일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당신을 상담한다면 부적인 감정을 유발하는 상황과 결부된 이러한 생각들을 밝혀 내고 그 생각이 정말 타당한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할 것입니다. 제가 한 번 해 보겠습니다. '나는 이토록 중요한 시험에 떨어져서는 안돼'라는 생각은 '당위적인 사고'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어떻습니까?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실제로도 반드시 이루어집니까? 당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야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욕구가 강하다고 해서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만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생각이 더 힘들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것이 사실이고 진실은 치유하고 수용하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 다음 번 시험 준비를 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기능적인' 사고인 것입니다.

    사실, 적응적인 것과 부적응적인 것을 구별하는 기준 중의 하나는 먼저 고통스러운 것을 받아들이고 인내의 열매를 따느냐 아니면 당장의 쾌락에 탐닉하여 추후의 고통을 마치 없는 것처럼 부인하다가 고통을 당하느냐라는 점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처음에 힘든 현실을 인정하고 시작하는 것이 당장에는 힘들더라도 훨씬 적응적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만 되는 세상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의 영혼을 통해 원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완전히 회복된 세상에서나 완전히 충족될 것입니다. 인지-치료를 사용하는 심리치료자가 내담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이유도 사실 그가 주장하는 합리적인 생각이 성경에서 말하는 사실에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욕구가 강하더라도 내 욕구대로만은 이루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이 세상은 완전하지가 않아서 우리가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 세상이 아니라는 성경의 속의 생각과 닿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마저도 왜곡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에 좀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든 예에서 언급했던 두 번째 역기능적인 생각 '시험에 떨어진 것을 보면 나는 정말 바보인가봐'라는 생각을 잠간 다시 살펴봅시다. 이 생각은 '과잉일반화' 혹은 '낙인찍기'라는 범주의 역기능적인 사고입니다. 하나의 원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한 행위로 인해 자기 존재에 부정적인 이름을 붙이는 일은 너무 가혹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일을 너무나 자주 하곤 합니다. 특히 똑같은 결과를 초래한 똑같은 행동이라도 남의 일이라면 위로해 주고 넘길 수 있는데 자신의 일인 경우에는 가혹하게 대하곤 합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그래, 우리는 남들에게는 관대해, 그리고 보면 사람들은 참 괜챦은 존재야'하는 식의 얘기로 저와 여러분을 속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토록 이중 기준-자신에게만 가혹한 기준-을 적용해 오는 이유는 타인에게 관대해서라기보다는 '나는 달라'라는 식의 생각이 우리 중심 속에 자리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보조 치료자로서 인지 치료 집단 상담을 이끌어 가다 보면서 제가 느낀 것은 거의 모든 집단원들이 바로 이중 기준과 이 생각 '나는 남들과 달라야해'라는 식의 생각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다시 창세기로 돌아가 봅시다. 뱀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라는 유혹을 통해 불어넣었던 하나의 생각은 사람이 무슨 행위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어떤 종류의 고난을 준 것이 아니라 네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유혹이었습니다. '너는 달라 너도 할 수 있어' 그런 얘기입니다. 어느 선까지 할 수 있다고 유혹했습니까? 하나님처럼 되기까지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행위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말을 했던 것입니다. 행위로 존재를 바꾸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유혹한 사단이 한가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 행위에 대해 존재 자체를 저주하는 사고를 가지도록 지금도 지절거리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그것이 비록 수 천년전의 동화처럼 느껴질지라도 이처럼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주신 메시지인 것입니다.

    네 행위로 하나님처럼 되라는 유혹에 인류가 넘어진 이후로 율법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인류는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자신의 행위로 무언가를 해보려는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되려는 시도, 그리고 하나님의 공백을 자신의 행동으로 메꾸려는 시도를 해 왔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을 하루에 일정량의 벽돌을 만들어야하는 존재로 받아들이면서 가혹한 노예 생활을 했던 것과 똑같이 우리는 지금도 '나는 달라야해'라는 유혹으로 인한 자기 욕심에 끌려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벽돌 굽는 노예나 나는 내가 무언가를 해서 하나님처럼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고통을 겪는 노예나 똑같이 고통을 겪고 있는 노예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수도께서 '자기의(義)-교만-반역'이라는 고통의 멍에를 깨뜨리시고 자기-부인의 십자가라는 가볍고 지기에 쉬운 멍에를 주신 것을 찬양합시다.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십자가를 통해서만 우리는 내가 무언인가를 해야 한다는 노예 근성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기 때문에 소중한 존재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권세를 가진 예수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칭의하셨기 때문에 존재 자체로부터 소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아담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의 수치를 가리고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가 깨어진 데에서 온 두려움을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 앞에서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율법주의는 '자기 의'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의 공백을 해결해 보려는 인간의 모든 시도에 붙여진 율법주의, 자기 의라는 표현의 껍질들을 하나하나 벗겨 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런 행위가 바로 우상숭배이고 모든 우상숭배의 배후에는 사단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율법주의적인 행동이 뱀의 유혹을 받은 이 후에 나온 행동이라는 점만 보아도 어렵지 않게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의 성경 구절을 읽어봅시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이사야 14장 12절)

    계명성(Lucifer)의 생각은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혹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어김으로써 하나님처럼 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불어 넣은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깨어진 이유로 생긴 수치심을 자신이 무화과나무 치마를 지어 입음으로써 해결하려고 했던 아담, 그의 행동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가 계명성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 생긴 수치심을 내가 치마를 지어 입음으로써 해결하리라.'

    타락한 인간의 죄의 문제의 경중은 개별적인 죄된 행위의 중다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하나님처럼 되리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보좌를 훔치려는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능력도 없고 그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 없다는 점, 즉 우리의 죄된 본성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흔히 들을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나를 믿어." 겉에서 보기에 똑같이 선한 행동을 한다해도 그 동기가 자기 의를 위한 것인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에 따라 하나는 심판 받을 죄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삶을 자신의 삶 속에 드러내는 행위인 것입니다. 죄의 본성이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는 것이라면 그 대가는 정확히 우리의 목숨을 내어 놓아야할 수준의 것입니다. 죄의 삯이 사망인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죄를 지고 죽어야할 만큼 죄인이었습니다. 죽을 죄인인 것입니다. 당신과 나나, 구원받은 강도나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주님을 영접하고 자신의 죄된 본성을 십자가의 능력을 힘입어 처리해 나간 정도의 차이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몇 개의 크고 작은 죄들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사형선고를 받은 죄인'들이기 때문에 우리 죄를 감당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피 흘려 '죽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이라고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것을 몹시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한 알의 밀알로 오신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셔야 했지만 썩음을 당치 아니하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연약함을 감당하시고 우리의 죄된 피 대신 당신의 거룩한 피를 다 흘림으로써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시고 부활하여 우리의 삶 속에 자신을 드러내시고 계신 예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지금까지의 얘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하와가 유혹을 받았을 때 인류에게 들어와서 피를 타고 전 인류에게 유전된 '역기능적인 생각'은 첫 째, '하나님은 우리가 믿을만한 분이 못된다. 우리가 자신처럼 되는 것을 질투하시고 경계하시는 분이다'라는 것이고 둘 째, '내게 문제가 생긴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무엇(벗었기)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생각입니다. 세 째는 '내가 노력하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며 네 째 '나의 수치심은 내가 가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라우신 상담자(Wonderful Counselor)되시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깨어지고 두려움과 수치심으로 숨어 있는 아담에게 하나님은 먼저 다가 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느냐의 여부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신뢰할만한 모습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마치 누군가 구름에 가리운 해를 보면서 해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더라도 해는 여전히 거기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해 입고도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다고 말하고 있는 아담에게 하나님께서는 내 명령을 어겼느냐고 되물으심으로써 수치심과 같은 고통은 벗었기 때문이 아니라 불순종의 결과임을 그리고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가 깨어짐으로써 생겨난 것임을 알려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저주는 땅과 뱀에게로 돌리시고 여인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뱀의 권세를 깨뜨리실 것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자신처럼 온전하게 되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계신 분이십니다. 사실 하나님은 사랑이셔서 이것을 증명하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셔야 했었습니다. 그것은 뱀의 유혹 이후로 당신과 나를 포함한 전 인류가 하나님의 성품을 의심하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하와에게는 남편의 다스림을 받고 남편을 사모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직접 위임받지 못한 일을 남편에게 의뢰하지 않고 자신이 감당하려다가 생긴 일임을 떠오르게 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인지-치료에서는 자신의 역기능적인 사고를 잘 다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어떤 과제를 내 주곤 하는데 하나님께서도 지금 하와에게 과제를 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점이나 성경에 나타난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도'하는 식의 표현을 받아들이기 힘든 자매님도 있을 것입니다. 한가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이 세상에서는 그렇더라도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서 저들을 심판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천국에서는 다를 것이라는 점입니다. 또,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의지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남편과 사는 것이 행복할지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아내가 되어야 하는 상황이 행복할지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뭔가를 제한하실 때에는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아담에게도 숙제를 내 주셨는데 그것은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것입니다. 그 숙제를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었을 때의 에덴을 동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기를 원하셨으리라고 이제는 믿습니다. 저도 아담의 후손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깨어진 신뢰로 인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하셔서 고통을 더하신 것으로 생각해 왔던 적이 많았지만 말입니다.

    다음으로 내 힘으로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생각에 대해서 하나님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찌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나를 위해 무언가 해야한다는 고통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사실, 내가 흙과 같은 존재라는 것은 '나는 대단하다, 나는 달라'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생각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본질이고 이점을 수용하여 그리스도께 우리의 보좌를 내어드릴 때에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 '십자가 능력이 내 영광되었네'라는 찬양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승리케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바꾸실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이점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지 못한 수치를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주심으로써 친히 해결해 주신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순종하면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지키지 않으면 정녕 죽으리라던 말씀이 어겨졌고 그 대신 가죽이 벗겨져 피 흘려 죽어간 동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물의 희생을 통해 만들어진 옷을 입고서야 벗었으므로 두렵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인 아담의 생명을 동물의 죽음으로 대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담의 수치심과 부끄러움도 우리의 고통과 마찬가지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완성될 것이었습니다.

    계속해서 다음 사람들의 행동과 그것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생각들을 살펴봅시다. 자신의 동족을 괴롭히는 애굽인을 죽인 모세의 행동을 통해 우리는 그가 '내가 우리 동족을 애굽인의 손에서 구해내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형들에게 꿈을 말하는 요셉의 행동을 통해 '내가 우리 형제와 부모보다 높은 지위를 취하리라'는 생각을 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의 언행에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모습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으리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사단의 생각부터 이들의 생각의 공통점은 바로 '내가....하리라'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의 본질은 자기 숭배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생각이었고 사단의 생각에 따라 행동했던 우리는 사단의 종이었던 것입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열매를 따먹었지만 하와는 그리고 우리는 열매를 숭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 그 열매를 먹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에게 영향을 받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로 제가 예를 든 사람들의 이름을 잠간 살펴봅시다. 모세와 요셉입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성경의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아담의 후예로 선악과를 따먹은 인류에게 피로 유전된 생각 '내가 하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 받은 위대한 인물들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시점은 언제입니까?

    모세의 경우를 먼저 살펴 봅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여화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모세가 하나니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출애굽기 3장 5절-12절)

    애굽에서 실패하고 목자 생활을 40년간 한 모세에게 하나님이 임하셨습니다. 그 때는 바로 모세가 다음과 같이 말을 하게 되었을 때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군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출 3:11)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처방인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찌니라는 말씀을 철저히 깨달은 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모세의 꿈대로 말입니다. 이제 요셉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 있던 중에 함께 있던 두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이 때 요셉의 반응을 살펴보시길 바랍니다(출애굽기 40장 8절과 14절). 아직은 때가 아니었습니다. '내게 고하소서'라고 말한 요셉은 하나님이 아닌 술맡은 자를 의뢰하였습니다. 계속해서 41장을 더 보시면 이번에는 바로가 꿈을 꾸는 내용이 나옵니다. 꿈을 꾸었는데 아무도 해석할 자가 없었습니다. 이 때 요셉에게 바로가 말합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더라.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창세기 41장 15-16절)

    그렇습니다.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고백을 하였을 때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되어 하나님께서 그의 꿈을 이루시는 것을 목도하게 됩니다. 요셉의 다음 고백을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철저히 자신이 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는지를 보게 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찌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창세기 45장 4-8절)

    위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여 하나님을 주체로 표현한 부분이 몇 곳인지 살펴 보십시오. 이 표현에서 자기 자신은 모두 대상을 나타내는 목적어로만 쓰여 있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도 '행위로 신과 같이 되려는' 생각과 행동의 노예였으며 보암직도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한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아담의 후예로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야 말로 앞서 언급했던 대로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자기-숭배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킨 능력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시험을 생각해 보기 전에 다음 두 구절을 잠시 살펴봅시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창 3: 6)

    여기서 보면 하와는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한 것에 미혹되어 그러한 것을 취하여 자신이 신이 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다음 구절을 살펴봅시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요일 2: 16)

    사도 요한은 인류의 먹음직도하고 보암직도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유혹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유혹에 대해 살펴봅시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누가복음4:1-12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떡을 만들라는 유혹, 자신에게 '보여준' 영광을 얻기 위해 마귀에게 절하라는 유혹,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뛰어 내리라는 유혹, 이 것은 차례로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의 열매의 유혹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것은 또한 아담에게 또 지금의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유혹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부터 처음부터 자유한 사람은 오직 여인의 후손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서만이 이러한 유혹들로부터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붙드는 것을 놓친다면 우리의 신앙생활도 바리새인들의 것처럼 자신의 행위로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보이려고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다가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함에 빠지고 말 수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쓰는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골로새서 2:18-23)

    세상의 초등학문은 곧 worldly principle, 세상 사람들이 흔히 행복하기 위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가리킵니다. 돈이 많으면 행복하다. 예쁜 여자와 사는 것은 행복하다. 능력 있는 남자와 살아야 행복하다. 등등. 이 모든 것들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의 세 범주에 들어가며 목표는 자기를 섬기는 것 즉 자기-숭배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것들을 추구하지만 자신을 '섬기는 데' 사용하지도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며 다른 모든 것을 이런 목표에 복종시킵니다.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가 장가가고 소를 사는 등의 이유로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이 심판을 받은 이유는 장가가고 소를 사는 일에 분주했기 때문이 아니고 그 분주함으로 인해 왕의 초청을 거절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또 천사 숭배,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것 등은 예수님을 붙들지 않는 은사주의나 율법주의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천사의 능력을 숭배하면서 예수님을 놓치는 행위, 자신을 따르게 하려고 어떤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바로 이단의 영을 가진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성령님의 능력'을 구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성령님'을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하여 혹은 자기를 숭배하고 남들도 그렇게 하도록 하기 위하여 무언가를 스스로 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영원을 사모하고 하나님처럼 온전하게 되고자 하는 욕구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 힘으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우리의 자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부활의 능력을 힘입는 길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고 자기를 부인하는 길 외에는 우리가 하나님처럼, 예수님처럼 되는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신처럼 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우리가 흙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뿐입니다. 언 뜻 보기에 지독한 역설처럼 보이는 이 진리-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인간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숭배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결국 내가 그것을 취하여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자기 숭배의 길이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기를 바라지 않으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끊임없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시니 너희도 완전하라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기를 원하고 계심을 밝혀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계명을 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우리를 소생시킬 계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흙이라는 점을 상기시키시며 '내가 하리라'는 꿈이 헛됨을 알리시고 또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셔서 우리를 자기 숭배에서 해방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조차도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행위를 의지하는 것은 또 다시 자기-숭배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아니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 길이 없으며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먼저 충분히 사랑 받기 전에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격 없음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를 그저 받아들이면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그 모든 유혹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이듯이 하나님의 아들은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들입니다. 신이 되고자 하는 우리의 소원은 하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며 우리가 그것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은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한 일서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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