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하나님 2002-06-07 19:05:29 read : 2481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 설교자:박 종 화 목사
■ 설교일:2001년 5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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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말씀 : 잠언 1:1,5, 29~22
이것은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이 가르침을 듣고 학식을 더할 것이요, 명철한 사람은 지혜를 더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은 너희가 깨닫기를 싫어하며, 주님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않으며, 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내 모든 책망을 업신여긴 탓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제가 한 일의 열매를 먹으며, 제 꾀에 배부를 것이다. 어수룩한 사람은 내게 등을 돌리고 살다가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사람은 안일하게 살다가 자기를 멸망시키지만, 오직 내 말을 듣는 사람은 안심하며 살겠고,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히 살 것이다."
서신서의 말씀 : 에베소서 6:1~4
자녀이신 여러분, 주 안에?여러분의 부모에게 복종하십시오. 이것이 옳은 일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한 계명은 약속이 딸려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한 약속입니다. 또 아버지이신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
복음서의 말씀 : 마가복음 10:13~16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랐는데,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노하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서 축복하여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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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린이날과 어머니날, 아버지날 함께 지키는 주일이 되겠습니다. 오늘 마가복음 말씀에 보면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노하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사람들을 모아서 설교를 자주 하셨습니다. 할 때마다 예수님의 설교제목은 단 한가지였습니다. 하나님나라, 하나님나라를 어디 가서든지 설교하셨지만 설교에 모여든 청중들에 따라서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해의 대상과 소제는 항상 다양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나라를 이야기하면서 어린이와 관련된 하나님나라를 이야기합니다. 당시 사회에서 귀중한 사람이 와서 설교를 할 때 많은 청중이 모였습니다만 그중에서 특히 어린이들이 모이는 것은 계산에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생각에 어린이들은 성년이 되지 않으면 독립적 인격체가 아니므로, 어린이들은 율법을 지킬 수가 없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생각할 능력이 없으므로 하나님나라에 대한 복음을 들을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부모님이 듣고 가서 대신 전달하는 것만으로 족합니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당연한 사회의 상식적 판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께 와서 예수께서 쓰다듬어 주시고 축복만 내려주기를 바랐는데 당시의 사회상을 알던 제자들은 어린이가 오는 것이 못마땅해서 꾸짖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인지상정으로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예수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예수의 반응은 노하셔서,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이유는 하나님나라는 바로 이런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어린이들을 축복하신 말씀이 지금 마가복음에 있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똑같은 상황설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예수께서 노하셔서" 하는 구절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노하셨다는 말은 마가복음에만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와 누가, 마가의 사고방식의 차이입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인간의 심성을 가지고 분노하셨다는 말을 추가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고 판단합니다. 누가 역시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노할 수 있습니까, 인간이나 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도 분노할중세 로마교회는 돈을 주고 구원을 사려고 하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면죄부가 성행했었습니다. 인간의 공적으로 미래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를 살 수 없습니다.
예수는 그점을 철저히 차단시킵니다. 그것은 오로지 하늘이 주시는 축복으로 갖는 것이고, 그 축복에 대한 답은 믿음으로 상응하는 것이지, 인간의 공적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미래에 주시는 약속이 불확실할 때 인간은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불안은 인간의 언어일 뿐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주십니다. 주시지 않을 약속을 하나님은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약속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에게는,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미래의 나라를 여러분에게 반드시 줍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에 지성인들은, 성인들은 믿을까 말까의 의문부호를 답니다. 어린이는 전혀 의문부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습니다. 하나님나라에 관한한 믿음으로 응답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어린이를 안고 축복을 주신 것처럼 하나님나라를 기업으로 받으실 분들은 어린이처럼 순박해지십시오. 어린이한테 한번 배우십시오. 그리고 어린이처럼 의문부호 달지말고 믿는 결단을 하십시오; "믿음만". 오늘 예수의 첫 말씀입니다.
두 번째 말씀이 있습니다. 믿으면 미래에 약속된 하나님나라를 기업으로 받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말씀에 보면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지금 설교하는 이순간에 찾아온 어린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지금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상당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미래에 약속된 하나님나라를 믿는 사람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의 한 구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나라가 지금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현실에 와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믿지 못하면서 어떻게 미래의 나라를 약속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까? 예수의 말씀입니다. 내가, 예수 내가, 바로 하나님나라이므로 나를 믿는 사람은 미래에 약속된 하나님나라도 믿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나라를 소원하십니까? 지금 하나님나라를 찾으십시오. 우리한테 나와서 현실 속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 예수 안에 나타났다고 하는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를 믿으십시오. 예수께서 병자를 고친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병자를 고쳤습니다. 예수가 물 위를 걸은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기적을 행사했습니다. 그렇듯 미래의 나라가 이렇게 임합니다 하는 표적입니다. 우리는 지금 경동교회에 모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왔습니다. 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기도로, 찬양으로, 말씀으로. 여기서 하나님나라가 발견이 안되면 미래의 하나님나라는 애매한 공상에 불과합니다. 우리한테 주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인 우리에게 지금 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믿을 수 있도록 밝히 보여 주십시다.
부모되신 여러분! 우리가 자식들에게 할 일은 뭐냐 하면 부모의 사랑이 아닙니다.
부모에게 이미 나타난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지 못하는데 자녀가 어떻게 하나님나라를 믿을 수 있습니까? 부모의 가슴, 어버이의 가슴은 하늘의 가슴입니다.
그걸 우리 자식들이 볼 수 있습니까? 자식들이 경험할 수 있습니까? 자식들이 지금 마져볼 수 있습니까? 부모에게 주신 하늘나라의 축복을 여러분은 현실화할 수 있습니까? 부모의 삶은 하나님이 하나님나라의 현실적 공간으로 만들어주신 것이 부모의 축복입니다.
부모의 의무는 자식들에게, 자기들이 난 자식들에게, 자기들이 낳지는 않았으나 함께 있는 우리 세대들에게,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줌으로 인해서 자식들이 믿고 따르도록 하는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의 가슴 속에 하나님나라를 묻고 그 나라에 동참하도록 설교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어린이들을 향해서 주신 복음의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모든 제자들이 다 도망도 갔고 또 따르지 않았지만 배반까지는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따를 때 배반한 제자는 유다입니다. 유다라는 말은 부모가 유다를 낳고 하나님께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 찬양", 이뜻을 히브리말로 찾아봤더니 유다스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유다의 부모님은 너무 고맙고 하나님께 찬양하기 위해서 "하나님찬양"이라 이름지었습니다. 유다가 태어난 곳은 이름하는 우리말로 '가롯', 가롯이라는 말은 유대 땅 고을 이름입니다. 유다의 고향입니다. 출생지입니다. 가롯이라고 이름하는 지역에서 태어난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 아들, 가롯 유다. 이 아들이 자기가 믿고 의지한 예수를 배반합니다. 예수의 반응입니다: " 가롯 유다는 하나님 찬양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걸". 가롯 유다보고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유다를 낳은 아버지, 어머니께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찬양이 차라리 없었던들, 이름이 유다가 아니고, 하나님찬양이 아니고, 하나님저주라고 태어났으면 더 좋았을 걸. 가롯 유다의 어머니의 가슴과 아버지의 심장은 갈기갈기 찢어졌을 것입니다. 가롯유다의 문제가 아니라 가롯 유다의 부모가 문제였습니다. 차라리 낳지 말았을 걸. 오늘 우리 사회에 수많은 문제아들이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많이 있습니다. 차라리 우리가 낳지 말을 걸. 났으면 제대로 기를 걸. 어떻게 문제아가 세상을 활보하고 다닙니까? 그 부모님들은 무얼 하고 계십니까? 왜 났습니까? 차라리 그만 두시지. 그리고 왜 세상을 탓합니까? 예수를 탓합니까? 하나님을 탓합니까? 왜 낳았습니까?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을 걸. 가롯 유다가 한사람 뿐입니까? 우리 스스로는 가롯 유다가 아닙니까?
앞으로 태어날 우리 자손들이 혹시 가롯 유다를 닮지 않겠습니까? 예수의 말씀입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게 했을 걸". 태어난 이상 예수를 배반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를 배반한 사람이 부모를 배반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다시 사도 바울 선생님은 예수의 이 말씀을 받아서 말씀하십니다:" 어버이 되신 여러분,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가르치십시오." 이 말씀은 반드시 예수의 말씀만은 아닐 겁니다. 자고로 우리가 태어나고 세상 살아가면서 익히 듣던 교훈입니다. 도덕적 교훈은 어디를 가나 "어버이 되신 여러분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훈련시키고 훈계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예수의 말씀에는 추가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냥 훈련시키고 훈계하라가 아닙니다. "주님의" 훈련과 "주님의" 훈계로 하십시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의 특징입니다.
주님의 훈계는 뭐고 주님의 훈련은 뭡니까? 주님의 훈계는 "나는 사랑합니다. 자식이 사랑해 주어야 부모인 나도 덩달아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식이 사랑하는 만큼, 공경하는 만큼 나도 부모에 대해서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라는 이런 상호주의가 아닙니다. 자식이 썩어들어가든, 자식이 망하든, 자식이 부모에 대해 손가락질 하든, 어떻게 자식이 부모한테 하든지간에, 부모는 조건없이 자식을 끌어 안아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풉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실 때 우리 응답 여하에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조건없이, 상대적 반응없이 하나님은 그냥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 사랑은 희생적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앉으신 부모님 여러분은 아마 조건부로 자식을 사랑하시는 분은 안계실 것입니다. 자식의 아픔에 부모님은 동참할 수 있고 자식의 기쁨에 부모님은 동참할 수 있습니다. 조건부가 아니라 무조건 자식의 일에 동참합니다.
그러나 잘못하는 것을 노하지 않고 적당하게 하지 마시고, 예수님도 노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노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단, 주님의 순진한 사랑과 조건부가 아닌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적 사랑을 자녀에게 보이십시오. 그것이 주의 훈계와 주의 훈련으로 여러분 자녀를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여러분에게 무조건 신뢰를 보내는 어린 아이의 심정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서로 공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자식으로 있을 때 부모님께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그런데 제 가슴 속에 부모님께 고맙지 않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같은 말씀을 하셔도 잔소리처럼 하시는 말씀, 전 지금도 별로 안좋더라구요. 제가 부모가 되었습니다. 우리 자식들에게 훈계도 많이 합니다. 부모가 훈계하는데 자식들이 제일 반발하는 것이 뭐냐하면 "엄마! 아빠! 잔소리 좀 그만 해요!"입니다. 예수께서는 아마 오늘 말로 말하면 잔소리쟁이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잔소리없는 사랑을 베푸십시다. 왜? 무조건적인 사랑 속에는 잔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상호주의도 아닙니다. 계약도 아닙니다. 그냥 베푸는 사랑,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서 두번째 말씀하십니다. "어버이, 아버지되신 여러분", 이 말을 오늘 말로 어버이라고 바꾸십시다. "어버이되신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 다시 사도바울이 이 말을 거꾸로 돌아서 자녀들로 갑니다. "자녀가 되신 여러분! 주 안에서 여러분의 부모에게 복종하십시오. 이것은 옳은 일입니다. 땅에서 잘 되고 오래 살 수 있는 축복입니다". 단, 풀어서 말하면 부모를 공경하되 주 안에서 하십시오.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모를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예수께서 주신 명령입니다. 부모는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자녀들은 닮은 부모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조건부가 아닌 사랑을 자녀들이 배울 수 있으면 자녀도 다시 부모님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십자가에 달려서 희생적 제물이 되신 부모의 마음을 닮듯,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례라고 하는 기쁨을 닮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녀 여러분, 순종하고 복종하십시오. 부모가 자녀를 기르는 것도 주님 안에서,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도 주님 안에서 말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희생적 사랑인 그리스도를 연결체로 하여 사랑을 교환하십시다. 이것이 첫째되는 율법의 교훈입니다. 자식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창조주이십니다. 우리에게 주는 온갖 고초는 다 창조주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 위한 방법입니다. 길입니다. 이것이 오늘 부모님이 자식들에게 주어야할 교훈이라 생각합니다. 자식들은 이 교훈을 길이길이 받아서 후손에 넘겨주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그분이 바로 창조주, 그분의 이름을 담고 그분의 나라를 가지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 주 안에서 이분이 오늘 어버이날, 어린이날 함께 우리가 누릴 공동의 광장이라 생각됩니다. 예수님을 모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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