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진수 2002-06-07 19:10:30 read : 2598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 설교자:박 종 화 목사
■ 설교일:2001년 6월 24일
010624.ram(LOAD:63)
구약의 말씀 : 미가서 4: 1,3,5
그 날이 오면 주의 성전이 서 있는 주의 산이 산들 가운데서 가장 높이 솟아서, 모든 언덕을 아래로 내려다 보며, 우뚝 설 것이다. 민족들이 구름처럼 그리로 몰려올 것이다.(1) 주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원근 각처에 있는 열강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3) 다른 모든 민족은 각기 자기 신들을 섬기고 순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까지나 주 우리의 하나님만을 섬기고, 그분에게만 순종할 것이다.(5)
서신서의 말씀 : 에베소서 2: 14 ~ 17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려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에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된 것을 없애셔서,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드셔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오셔서,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 이방인 여러분에게 평화를 전하시고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복음서의 말씀 : 14: 25 ~ 28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나는 너희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은 것이 아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너희는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다시 온다고 한 내 말을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서는 나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이다.
................................................................................ ..............................
과거는 아마도 똑같은 모습으로는 반복되지 않을 겁니다. 과거를 직접 경험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간 비극의 역사나 기쁨의 역사를 회상해볼 수는 있습니다. 단순히 과거를 기억한다는 의미의 회상이 아니라,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오늘 우리 앞에 갖다 놓고 오늘의 현실인 것처럼 살려내어 짚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가정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6월 24일 예배를 잘 드리고 함께 식사를 하고 집에 돌아가서 오늘밤 편안히 잘 주무신다고 합시다. 그런데 내일 새벽에 이 나라의 모든 신문과 라디오와 TV가 전부 긴급 뉴스를 방영한다고 합시다. 전쟁이 터졌다고 말입니다. 피난 가야 한답니다. 온 도시가 아수라장입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황이 51년 전 내일 새벽, 이 땅에서 벌어졌습니다. 무수한 사람의 생명이 땅바닥에 쓰러졌고 수백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겼고, 그 분노와 좌절로 점철된 이 땅의 피눈물나는 역사는 오늘 이 순간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무얼 기억하고 싶습니까? 6. 25전쟁에서 무얼 기억하고 싶고, 무얼 끊고 싶고, 무엇을 배우고 싶습니까?
육군본부가 있던 자리에 지금 6. 25전쟁 기념관이 섰습니다. 저도 한번 가봤습니다. 한바퀴를 돌고 나서 가진 격한 감정을 분노, 좌절이라는 두 마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6. 25를 해마다 기념할 수 있습니까? 무얼 기념할 수 있습니까? 제가 유럽에 있을 때 세계대전 당시의 포로수용소를 방문했습니다. 역사를 뒤흔들던 많은 사건의 흔적이 그곳에 남아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스실에서 죽어간 일, 처형당한 일, 피 흘린 일 이 모든 것들이 그림과 영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무엇을 회상하고 무얼 배울 겁니까?
만약 지금 그 비참하고 기억하기도 싫은 6. 25전쟁의 참상이 오늘 우리 앞에 와 있다면 여러분은 오늘 무어라고 기도하겠습니까? 미가서가 그 기도를 대신 해줍니다. "하나님, 저 흉악한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게 해주십시오. 저 사람을 찌른 칼을 쳐서 낫을 만들어서 농사짓게 해주십시오." 신앙의 눈이 없다면, 수 천년 전에 드렸던 미가의 기도는 꿈같은 허망한 것입니다. 도대체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바보가 어디 있으며,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바보 같은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이런 이야기는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가졌던 비전입니다. 믿음으로만 가질 수 있는 비전입니다. 이 비전이 우리한테 은혜가 되게 하려면, 6. 25가 일어났던 당시 상황을 우리 앞에 놓으십시오. 옛날의 비극이 우리에게 절실해지면, "하나님이 저 총부리를 녹여서 낫이 되게, 보습이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미가서의 예언은 과거의 보고가 아닙니다. 이 말씀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6. 25는 지나간 과거지만 그 과거는 엄청난 영적, 정신적, 육체적 상처가 되어서 지금도 우리를 괴롭히는 하나의 살아있는 역사로 남아 있습니다. 그 피눈물나는 수백만 명의 죽음 속에, 천만 명에 이르는 이산 가족의 아픔 속에 6. 25전쟁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전쟁의 원인인 칼을 없애 주십시오. 창도 없애 주십시오. 화해케 하시고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평화가 뭐냐고 물으시면 이론적으로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과거의 비극을 절실하게 회상하시면서, 과거를 현재화하면서, 지금으로부터 시작되는 미래가 칼 대신 보습을, 창 대신 낫을 만드는 날이 되기를 기도하고 그렇게 살기를 결단하면 그것이 바로 평화의 시작입니다. 평화를 이론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화를 몸으로 사는 것이 더욱더 중요합니다. 거기에 무슨 논란이 필요합니까?
예루살렘에 가면 아직도 그 가운데 벽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때가 되면, 절기가 되면 그 벽으로 몰려와서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주신 율법을 낭독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합니다. 그 벽은 이름하여 통곡의 벽! 이스라엘 사람들이 통곡의 벽 앞에서 통곡하는 그 순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벽 뒤쪽에서 알라 신에게 기도합니다. "우리 땅을 빼앗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 주십시오. 우리가 이 땅의 주인입니다. 알라 신이여." 이렇게 또 다른 통곡이 있는 것입니다. 한쪽에는 야웨 하나님을 부르면서 통곡하고, 다른 쪽에서는 알라 신을 부르면서 통곡합니다.
통곡의 벽이 예루살렘을 동서로 나누고 있는 한 그 땅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이유는 통곡 때문이 아닙니다. 벽 때문입니다. 예수의 평화는 이렇습니다. "벽을 허물어라." 벽이 있는데 어떻게 평화가 있습니까?. 벽이 있는 한 통곡과 웃음을 불문하고 평화는 없습니다. 칼이 벽입니다. 창이 벽입니다. 보습은 허물어진 벽입니다. 낫도 허물어진 벽입니다.
남과 북 사이에 얼마나 많은 벽이, 얼마나 튼튼한 벽이 철조망이라는 이름으로,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으로, 안보라는 이름으로, 평화라는 거짓된 이름으로 우리를 가두어 놓았습니까? 6. 25를 회상합시다. 6. 25의 벽 앞에 가서 통곡하려고 회상하는 것 아닙니다. 벽을 무너뜨리려고 회상합니다. 다시는 이 땅에 6. 25와 같은 전쟁의 참화는 없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황당해 보이는 그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야웨 하나님만이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꿈 같은 이야기는 상황이 없을 때 꿈입니다. 그러나 그 상황을 경험한 우리에게는, 50년 동안 경험한 우리에게는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평화의 동산 가꾸기가 꿈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꿈으로 생각하시면, 그 사람은 하나님나라를 객관화하는 사람입니다. 내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지긋지긋한 우리의 고생스런 현실 가운데에서 하나님나라를 꿈꾸는 사람은 미가서와 똑 같은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고통과 눈물이 없는 기쁨을 지금 주옵소서!" 남들이 들을 때는 꿈 같은 이야기이지만, 우리한테는 현실입니다. 갈급한 현실입니다. 성서에 쓰여진 모든 말씀이 바로 꿈 같은, 환상 같은 이야기이지만, 믿는 자에게, 현실을 경험한 자에게, 십자가의 현실에 있는 자에게, 부활은 꿈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이렇게 선언을 했습니다. 우리가 6. 25를 51년 동안 회상해 왔는데, 우리에게 남은 것은 분노와 좌절뿐입니다. 어떻게 이 현실을 극복해갈 수 있습니까? 완전히 사고를 바꿔야 합니다. 인식과 발상을 전환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6. 25를 화해의 날로 선포합시다."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6. 25전쟁의 상흔을 없앨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그 날을 없애고 기억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지금부터는 화해를 만들어 가자는 말입니다. 전쟁이 없는 미래를 위하여 이제부터는 화해를 통해서 평화를 만들어 가자는 말입니다. 전쟁의 과거와 단절하자는 것입니다.
6. 25는 더 이상 우리를 갈라놓는 벽이 아니어야 합니다. 벽이 있는 한 우리한테는 괴로움만 있습니다. 통곡만 있습니다. 좌절만 있습니다. 분노만 있습니다. 어떻게 벽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와 내가 주는 평화는 다르다." 어떻게 다릅니까? 이 세상이 주는 평화는 항상 벽을 만드는 평화입니다. 미국이 MD라는 미사일 방어체제를 만들기 위해서 이라크를, 북한을, 중국을 적으로 몰아갑니다. 적이 있어야 안보의 필요성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안보의 논리를 펴는 것은 미국만이 아닙니다. 모든 강대국들의 논리는 유사합니다. 적이 있어야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고, 군사력을 강화해야 평화를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적이 무너지면 이런 모든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고 하십니다. 그분의 평화를 누리는 사람은 벽을 헐어야 합니다. 사용자와 노동장의 갈등, 벽이 있습니다. 벽이 있는 한 노사간의 평화는 없습니다. 남과 북 사이에 증오와 좌절과 분노라는 벽이 있는 한 평화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지도층과 국민 사이에 속이고 불신하는 벽이 무너지지 않으면 그 나라에 평화는 없습니다. 이 사회 속에는, 우리 개인의 삶 속에는, 가정 속에는 벽이 있습니다. 이 예배에 참석한 일본교회의 무라까마 목사님께서 일본과 한반도 사이에 있는 벽을 무너뜨리고 싶다고 말한 것을 저는 이해합니다. 벽이 있는 한 한일 간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6. 25주일로부터 시작해서 벽을 무너뜨리는 일을 하십시다. 이 벽은 국가적인 차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개개인 속에 벽이 없으십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벽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심연 속에 찾아드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자기 자신, 그러면서도 분노하고 싸우는 위협적인 자신, 그 둘 사이에 벽이 있습니다. 그 벽을 가지고 어떻게 여러분 마음이 평안할 수 있습니까? 마음이 평안치 않는데 어떻게 평화의 나라를 만듭니까? 어떻게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어 갑니까? 다 거짓말입니다. 먼저 마음의 평화를 찾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 속에 있는 분열과 벽을 없애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가슴속에 서 있는 벽, 사랑해야 한다는 바람과 그러나 미워할 수밖에 없는 현실 사이의 벽을 허무시기 바랍니다. 부부 사이에, 자식과 부모 사이에 벽이 있으면 평화는 없습니다.
각 개인 속에 마음의 평안이 있어야 사회의 평화도 있듯이, 거꾸로 사회의 평화가 있어야 개인의 평화도 가능하게 됩니다. 두 영역은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이 너무 벽이 크고, 또 힘있는 자들이 만드는 자기들을 위한 평화의 거짓이 너무 깊기 때문에, 밟히는 힘없는 자들의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부유한 사람만 누리는 부의 벽이 너무 높기 때문에 스스로는 가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힘있는 자의 힘을 빼앗아서 힘없는 자에게 줌으로써 힘의 소유를 바꾸자는 뜻이 아닙니다. 부유한 사람의 재산을 빼앗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줌으로써 재산의 소유권을 바꾸자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힘과 소유의 평면적인 자리바꿈에 불과할 뿐, 벽은 그대로 있습니다.
예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힘없는 자에게 힘주시고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함으로써 모두가 함께 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사건, 모든 담이 헐리는 사건, 그 사건을 예수가 원했다고 확신합니다. 그 허물어지는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가는 다른 게 아닙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 이웃과 이웃 사이에 막힌 담,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막힌 담, 이 담을 다 헐어버리고 전체에 피가 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서로 이해가 통하게 하는 겁니다. 그것을 화해라 이름합니다. 화해는 다름 아니라 벽을 허무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은 단순히 개인이 아니고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인간 세계의 축소판입니다. 여러분이 괴로우면 세계가 괴롭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국민이 괴로우면 이 나라 전체가 괴롭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하찮은 개인, 힘없는 개인, 가난한 개인을 수없이 밟아 버립니다. 그러면 나라 전체가 어둡습니다. 세계 전체가 불행을 당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세계의 축소판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이고 뭉쳐야 건실한 가정, 사회, 나라가 됩니다.
이 모든 개인과 사회 속에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역사하십니다. 벽을 허물라고 하십니다. 벽이 허물어지면 통곡이 사라지고 기쁨이 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한테 부활의 능력이 옵니다.
6. 25를 우리 민족이 져야 할 십자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십자가 다음에 올 부활, 죄를 극복하고 죽음의 세계를 극복한 부활의 영광을 바랄 수 있습니다. 그 영광 속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세상의 평화, 담벼락 쌓는 그 평화가 아닙니다. 담을 무너뜨리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는 그런 평화, 꿈같은 평화가 오늘 우리에게서 현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