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에게 오늘 구원 있으라 2002-06-07 19:11:53 read : 2533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 설교자:박 종 화 목사
■ 설교일:2001년 7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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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말씀 : 에스겔서 18:30 ~ 32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족속아, 나는 너희 각 사람이 한 일에 따라서 너희를 심판하겠다. 너희는 회개하고, 너희의 모든 범죄에서 떠나 돌이켜라. 그렇게 하면, 죄가 장애물이 되어 너희를 넘어뜨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지은 죄를 모두 너희 자신에게서 떨쳐내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왜 죽고자 하느냐?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그가 죽는 것을 나는 절대로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서신서의 말씀 : 디모데전서 1:14 ~ 17
우리 주께서 나에게 은혜를 넘치게 부어 주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믿음과 사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믿음직한 말씀이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씀입니다. 나는 죄인의 괴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먼저 나에게 끝없이 참아 주심을 보이셔서 앞으로 예수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려 하신 것입니다.
영원하신 왕, 곧 없어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복음서의 말씀 : 누가복음 19: 1 ~ 10
예수께서 여리고에 들어가서, 그 곳을 지나가고 계셨다.
그런데 마침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는데, 그는 세리장이고 부자였다.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려고 애썼으나 무리에게 가려서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가 키가 작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보려고 앞서 달려가서 뽕나무로 올라갔다. 예수께서 거기를 지나가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러서 쳐다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그러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를 모셔 들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고서 모두 수군거리며 말하기를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하였다.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탈을 했으면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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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누가복음의 말씀에 삭개오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삭개오라는 사람의 이야기는 그 동안 많이 들어서 귀에 익으실 겁니다. 삭개오라고 하면 키가 작아 볼품 없고, 불의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삭개오"라는 이름은 의로운 사람, 정결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많은 기적도 행하고 말씀도 전하시면서 선교여행을 하던 중, 여리고로 향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지도를 놓고 보면 여리고는 요단강 아래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북방의 베뢰아란 지방에서 요단강을 건너서 내려오는 길목에 여리고 성이 있는데 여리고를 지날 때 모든 사람에게 부과되는 필수적인 의무 하나가 있습니다. 강을 건너왔기 때문에 세금을 내야 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국경 통과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금 걷는 곳이 있습니다. 소위 관세청입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가지고 온 물건들에 대해서 세금을 물어야만 했습니다. 주로 무얼 가지고 왔는가 하고 당시 사정을 연구한 사전을 찾아봤더니, 베뢰아 지방에서부터 발삼나무를 짜서 만든 향료를 주로 가져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향수를 많이 들고 온 것인데, 향수는 값을 따지기 어려워서 세관원의 자의에 따라서 세금을 많이 부과하기도 하고 적게 부과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베뢰아에서 여리고로 올 때는 세리를 구워삶더라도 세금을 적게 내려고 하고, 또 세관은 가능하면 많이 세금을 부과하려고 해서 갈등이 굉장히 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세무관청의 책임자, 세리장이 바로 삭개오입니다. 원성의 대상이었던 이 삭개오의 이름 뜻이 "의로운 사람," "깨끗한 사람"이라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그런데 자기 이름과는 정반대로 살았던 이 사람이 복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에서 보는 대로 삭개오는 세리장이었고 부자였습니다.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 사람의 부는 열심히 일해서 이룬 부가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은 부당한 착취와 착복으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 나라에서는 착취하거나 부당하게 돈 버는 사람에게 "삭개오"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삭개오 같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닐 것입니다. 삭개오란 요즘의 우리말로 표현하면 허가받은 도둑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제도적으로 허가받은 도둑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우리 사회에도 많습니다.
이런 사람 가운데 하나인 삭개오가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뽕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를 만나려고 합니다. 뽕나무에 무화과를 접붙인 이 나무는 뽕나무에 무화과 열매가 맺히는 '짬뽕된' 나무입니다. 이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허가받은 도둑 삭개오를 쳐다보며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네 집에 머물러야겠다." 사람들이 수근거립니다. "저 도둑의 집에서 머무신다니!" 예수께서는 그 집에 가셔서 삭개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집에 구원이 임할 것이다." 이 한 말씀은 어둠을 꿰뚫는 빛입니다. 두 번째 말씀은 "너도 이제는 아브라함의 족속이 될 것이다."입니다. 오늘 이 두 말씀에 복음이 압축되어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기 전에 삭개오가 먼저 고백합니다. 제 소유의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겠습니다. "허가받은 도둑으로, 솔직히 말해서 불의하게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러니 속죄하는 마음으로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유대교 랍비들의 판단에 따르면, 부당하게 부를 축적한 사람이 회개할 때는 자기 소유의 20%만 떼어서 주면 족한 걸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50%까지 떼어서 주겠다는 것입니다. 또 누구를 강탈한 일이 있다면 4배나 갚겠다고 합니다. 레위기에 보면 부당하게 착취를 당한 사람이 고소를 하면 고소당하는 사람은 판결에 따라서 부당하게 착취한 액수의 5분의 1을 추가로 더하여 지불하면 되게끔 되어 있었습니다. 120%를 내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4배까지 자기가 보태서 갚겠다고 합니다. 삭개오의 회개는 사실은 당대 사람들에게는 놀랄 만큼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오늘 본문을 보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야웨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죄짓고 죽는 것을 도대체가 기뻐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가 죄를 회개하고 살기를 바란다. 나 야웨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죄짓고 죽는 것은 절대로 기뻐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삭개오가 죄짓고 죽는 것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차라리 재산 절반을 팔든, 4배로 갚든, 어쨌든 회개하고 구원받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설교하셨을 거고, 삭개오는 그 말씀을 깊이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회개한 오늘, "네 집에 구원이 임했다." 회개했으니 나중에 구원을 베풀어주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회개하면 즉시 그 순간에 구원이 임합니다. 오늘, 회개한 그 순간 구원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삭개오가 구원받은 것만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반드시, 이제는 홀로가 아니라, 함께 사는 공동체에 소속되어야 합니다. 삭개오가 세리장으로서, 세무서장으로서 갈취를 일삼고 있는 한, 이스라엘 백성은 삭개오를 진정한 의미의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사회적 신분은 세리장이었으나, 종교적으로는 뿌리뽑힌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구원받은 자를 반드시 하나님이 책정해주신 공동체 일원으로 회복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제는 너는 아브라함 자손의 반열에 속하게 되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종교적 복권은 동시에 사회적 복권이요 정치적 복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몸과 육이 가족과 공동체에서 뿌리뽑혀 있다면, 그건 절반의 구원일 뿐입니다. 예수께서는 구원받은 자들을 다 공동체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어떤 분은 이걸 가리켜서 "구원이란 영적 구원만이 아니다. 인권회복이다. 가족권 회복이다. 자주권 회복이다. 정통성 회복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땅에 있는 동안 복된 가정의, 교회의, 사회의 일원이 되고, 동시에 미래에 올 하나님 나라의 구원도 동시에 약속을 받습니다. 하늘의 구원과 땅의 구원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삭개오는 복권을 받고 이제 아브라함 자손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받는 구원은 반드시 회개를 전제합니다. 회개하면 지체하지 않고 즉각 용서해주시고 구원을 베푸시며, 구원받은 우리는 바로 우리가 되돌아가기를 꿈꾸던 그 공동체에 속하게 됩니다.
교회가 탄생해서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선포했습니다. 교회란 무엇이냐 물으면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으나,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보면 교회는 하나님이 택한 공동체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하늘의 공동체인 교회에 소속이 됩니다. 하지만 계속 죄를 지으면 교회 공동체에 육은 속해 있으나, 사실은 마음은 떠난 자들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나면 반드시 구원과 함께 다시금 공동체에 속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택하신 이 교회는 그분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 책임과 임무를 부여받고 있습니다. 이 말을 요즘 말로 바꾸면 교회란 하나님의 언론매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신문입니다. 하나님의 방송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미디어입니다.
중세에 교회가 엄청나게 타락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인데 교황이 주인 노릇을 했습니다. 교회는 말씀을 선포해야 되는데 말씀 선포라는 미명 하에 많은 성도들을 착취하고 불의하게 재물을 모았습니다. 면죄부가 그 증거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작은 사자 하나를 보냈습니다. 마르틴 루터라 이름하는 사자입니다. 이 사람을 보내서 외치게 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매체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면 교회는 뒤집어져야 합니다. 교회를 개혁해야 합니다." 그래서 개혁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교회개혁은 모든 사회적 개혁, 정치 개혁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때 당시 루터가 "종교개혁"을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닙니다. 루터의 관심은 한 가지였습니다. 교회 개혁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타락한 교회 때문에 감추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앉은뱅이는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선포하시면 세상은 구원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아픈 사람은 나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픈 자들은 계속 아프고, 가진 자들은 계속 갖고, 눌린 자들은 계속 눌리고, 힘있는 자들은 계속 상승합니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아닙니다. 결국 교회는 개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개혁은 한 번으로 족한 것이 아니라 계속되어야 합니다.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칼빈은 그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한 번 개혁하는 게 아니고, 항상 개혁해야 합니다. 이유는 복음 때문입니다. 그 복음은 언제나 새롭게 이 세상 만민에게 들려져야 하고, 믿지 않는 자들을 끌어와야 하고, 믿는 자들에게는 새로운 삶을 매일같이 부여하는 말씀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의, 그 복음의 주인은 교회 제도도 아니고,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도 아니고, 당회원들도 아니고, 오직 야웨 하나님입니다. 교회는 그분의 스피커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왜곡되지 않고 바르게 전해져야 합니다. 언로가 트여야 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언론 때문에 난리가 난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교회개혁과 삭개오 이야기를 예로 들어서 이렇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무슨 사건만 터지면 우리 사회는 전부 정치 논쟁만 합니다. 모든 것이 정치입니다. 모든 사건이 정치적으로 재단되고 판단됩니다. 그래서 우리 국민들을 어느 특정 정파 정치에 몰입하게 합니다. 우리는 참 시끄러운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굉장히 시끄러운 나라입니다. 시끄럽지만 그렇게 해서 우리가 많이 발전하는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도 하나 봅니다.
한때 의약분업이 우리 사회를 어지럽게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우리 사회가 한 가지 인식을 공유했습니다. 의사나 약사가 무엇을 위해 일하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 의사나 약사는 환자를 고치기 위해 일한다는 인식이었습니다. 의(醫)나 약(藥)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의사나 약사는 모두 환자에게 봉사하는 봉사직입니다. 환자를 돌보지 못한다면 의사나 약사는 무의미해집니다. 의사와 약사가 환자를 중심으로 서로 보완해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뤄야 합니다. 복지 공동체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하나의 교훈이었습니다.
오늘날 언론사와 그 사주들의 탈세 문제를 놓고 당연한 법집행이냐, 언론 탄압이냐로 당과 당이 떠들고 여와 야가 떠듭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모든 논쟁에서 중요한 것 한 가지가 빠져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매체라고 한다면, 오늘의 언론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국민들의 매체입니다. 매체는 매체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누군가를 위해 있습니다. 그 "누구"는 바로 국민입니다.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정부 역시 마찬가지로 국민을 위해 존재합니다. 이 물고 물리는 탈세탄압 논쟁에서 신문을 보고 방송을 듣는 우리, 주인인 국민, 독자들의 자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 논쟁에서 수많은 독자들의 위상은 어디쯤입니까?
죄는 회개하고 인간은 살린 삭개오의 이야기를 빗댄다면, 탈법은 회개하고 정론은 살아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개혁하여야 하고, 정론이라 이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야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갈등이 생기고 시끄럽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함께 판단하고 공감대를 형성하십시다. 주인은 누굽니까? 교회에서 말씀하시는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왜곡될 수 없습니다. 언론은 언론의 진정한 주인인 국민들에게 왜곡되지 않은 사실들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정론은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봉건적 지배 구조와 탈법은 개혁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삭개오는 누굽니까? 오늘의 국세청장입니까? 언론사 사주입니까? 언론사입니까? 정당입니까? 독자들입니까? 누가 되었든지 간에 자기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그는 구원받은 삭개오가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회개와 하나님의 말씀, 진실의 드러남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쿼바디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로마를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제자들이 베드로에게 이렇게 간청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네로 황제가 많은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고 있으니, 잠시만 피해 계시지요." 그래서 베드로가 로마를 벗어나 '알바니'라는 언덕으로 피신합니다. 그때 기도 중에 갑자기 찬란한 광채가 비치면서 홀연히 사람 모습을 한 그리스도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놀란 베드로가 그리스도께 라틴말로 이렇게 묻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 도미네는 주님이라는 말이고, 쿼바디스는 어디로 가느냐는 말입니다.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니 내가 너 대신 로마에 가는 중이다. 내가 다시 십자가를 져야겠다." 베드로가 그 말씀 앞에 꼬꾸라집니다. 그리고서 로마를 향해서 발길을 돌립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집니다. 베드로는 목숨이 위협당하는 중에 로마로 가야 하느냐, 로마를 벗어나야 하느냐를 놓고 고민하였으나, 자신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따랐습니다. 주인을 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옛날 동족의 증오의 대상이었고 "죄인"이었던 삭개오도 어느날 자기의 삶, 자기 생명의 주인을 자기 집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구원받았고, 다시금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언론도, 정당도, 정부도, 우리 교회도, 믿는 우리도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잊었다면 뉘우치고 돌아서야 합니다. 그럴 때에라야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우리 삶은 누구를, 무엇을 중심으로 엮여지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오시는 우리의 주님을 함께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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