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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 위에 선 공의의 성전
    2002-06-07 19:15:01   read : 2752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 설교자:박 종 화 목사
    ■ 설교일:2001년 8월 5일
    010805.ram (LOAD:51)



    구약의 말씀 예레미야서 7장 3~11절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너희의 모든 생활과 행실을 고쳐라. 그러면 내가 이 곳에서 너희와 함께 머물러 살겠다. 이것이 주의 성전이다, 주의 성전이다, 주의 성전이다 하고 속이는 말을, 너희는 의지하지 말아라. 너희가, 모든 생활과 행실을 참으로 바르게 고치고, 참으로 이웃끼리 서로 정직하게 살면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않고, 이 곳에서 죄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겨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으면, 내가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 하도록 준 이 땅, 바로 이 곳에서 너희가 머물러 살도록 하겠다. 그런데도 너희는 지금 전혀 무익한 거짓말을 의지하고 있다. 너희는 모두 도둑질을 하고, 사람을 죽이고, 음행을 하고, 거짓으로 맹세를 하고, 바알에게 분향을 하고,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섬긴다. 너희는 이처럼 내가 미워하는 일만 저지르고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우리는 안전하다 하고 말한다. 너희는 그런 역겨운 모든 일들을 또 되풀이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다. 그래,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으로 보이느냐? 여기에서 벌어진 온갖 악을 나도 똑똑히 다 보았다. 나 주의 말이다.

    서신서 말씀 로마서 9장 30~33절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의를 추구하지 않은 이방 사람들이 의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에서 난 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의의 율법을 추구하였지만 그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믿음으로가 아니라 행위로 의에 이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습니다. "보아라, 내가 시온에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를 둔다. 그러나 그를 믿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복음서 말씀 누가복음 19장 45~48절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 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우두머리들이 예수를 없애 버리려고 꾀하고 있었으나, 어찌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였다. 백성이 모두 그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


    2001.8.5.

    여러분께서 오늘 들으신 성서 말씀 세 군데 중에,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의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셔서, 회초리를 들고, 성전 문 앞에서 돈을 바꾸는 사람, 또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 비둘기를 파는 사람을 내쫓고, 상을 뒤집어엎고, 의자를 내치시는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성전을 깨끗이 한 이야기는 마태복음부터 요한복음까지 4복음서에 전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이야기가 다 4복음서에 똑같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복음서에 따라 다른 복음서에는 있는 것이 빠졌거나, 다른 복음서에 없는 것이 있기도 하는데, 오늘 성전 정화 이야기는 4복음서에 다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가장 오래된 복음서는 마가복음서입니다. 마태, 누가, 요한은 마가를 원본으로 삼고서, 거기에 편집자로서 약간씩 채색도 하고, 빼기도 하고, 설명도 덧붙이고, 또 각자가 따로 전수받은 자료들을 추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성전에 입성하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고 상을 둘러엎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곳은 하나님의 집,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이 집을 이렇게 도둑놈들의 소굴로 만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구약 본문을 통해 들으신 예레미야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예수께서 하십니다. 마태복음 기록도 마가와 같습니다. 그래서 성전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던 대제사장,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이, 자기들의 삶의 본거지인 성전이 예수란 사람을 통해서 여지없이 유린당하는 것을 보고서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그런데 오늘 읽어드린 누가복음서에서는,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게 된 이유가 성전을 깨끗하게 한 예수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일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성전을 정화하신 다음에 성전에 들어가서 하는 말이, 성전에 온 것이 아니라 자기 집에 왔다고 합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집, 만민이 기도하는 집, 나는 하나님의 아들! 내가 내 집에 왔는데 웬 잔소리냐? 내가 내 집에 왔으므로 이제부터는 내 말을 전하겠다. 내 집에 왔으니,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말, 곧 내 말을 전하겠다." 그게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은 비록 유대교 율법을 가르쳤으나, 장사하는 현실에 휘말려서 유대교의 가르침은 퇴색하고 변질되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는 전혀 새로운 복음을 이야기하십니다. 제사장들 생각에 예수의 가르침은 자기들의 가르침과 완전히 달랐으므로 분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밖에 있던 군중들이 이 예수의 가르침을 보고 호산나를 외치며 즐거워합니다. 그걸 오늘날의 말로 표현하자면 예수께서 한 말씀 한 말씀 하실 때마다 아멘 하고 받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가르침에 호산나라고 한번도 응하지 않던 백성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호산나 하고 응하는 걸 보고서, "우리 가르침은 끝났구나." 속된 말로 하면 "우리의 밥줄이 완전히 떨어지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누가복음 기자는 예수를 잡아 죽이기로 한 음모의 구체적인 동기는 예수께서 새로운 복음을 가르치려고 하는 데 있었다고 봅니다. 이것이 누가복음서의 편집상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게 된 것은 성전을 다 뒤집어 정화한 것과, 새로운 복음을 가르친 것이 다 그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만 옳은 것이 아닙니다. 다 옳으나 그 중에서 기자마다 우선 순위가 달랐습니다.
    한 가지 더 살펴본다면, 요한복음에는 세 복음서에 없는 예수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것이 장로들과 유대교인과 제사장들을 아주 곤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이 성전은 도둑의 소굴이므로 이 성전을 허물어 버려라. 아예 허물고 새로 짓자. 내 집이므로 내가 짓겠다. 그것도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 유대인들이 보기에 예수께서는 황당무계한 말을 하셨습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을 훼파하는 사람"이라는 죄목이 예수에게 하나 더 추가됩니다. 자, 이 모든 것이 성전 정화의 다양한 이야기이고, 복음서마다의 편집적 특색입니다.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라 일컫는 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합니다. 기도할 때는 돈을 주고 기도하는 건 아닙니다. 기도를 사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를 팔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보신 기도하는 집의 모습은 기도를 팔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제국에서 만들어 놓은 공용화폐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그 돈을 쓰지 못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성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누구나 최소한 1년에 한번씩 성전에 예배보러 왔는데, 그때에는 로마 화폐가 아니라 성전에서만 통용되는 성전용 화폐를 사용해야 했습니다. 여러분이 중국 가시면 인민화폐로 바꿔 쓰시죠? 북쪽에 가면 북한화폐로 바꿔 쓰시죠? 나라마다 그 나라에서 쓰는 화폐가 따로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로마화폐를 성전화폐로 바꿀 때 환차익이 너무나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차액을 일부러 크게 만들어 놓은 이유는 성전세 징수 때문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성전을 방문하면 성전 세금을 내야 하는데, 화폐 교환시에 성전세금을 부과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돈을 내고 성전 화폐로 바꿨습니다. 두 번째는 환전 차익금으로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파 사람들, 소위 율법을 가르치거나 성전에 속한 사람들의 생활비와 선교헌금을 충당했습니다.
    거기다가 제사 때 바치는 동물은 성전 입구에서 파는 동물로 한정했습니다. 유대교 규례에 따라서.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비둘기 파는 사람의 의자를 다 뒤집어엎으셨다고 하는데, 당시 가장 많이 사용된 동물은 비둘기였습니다. 비둘기 첫배를 가져다가 비싼 값으로 팔고, 그렇게 비싼 비둘기를 산 사람은 그 피를 내서 다시 속죄의 제물로 바칩니다. 예수께서 보기에 이 모든 것은 기도하라는 집, 의를 행하라고 하는 집, 하나님이 영광 받아야 할 집을 완전히 돈 주고 사고 파는 집으로 변질시켜 버린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회개도 돈으로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용서도 돈 주고 살 수 있지 않습니까? 제사도 돈으로 떼울 수 있지 않습니까? 언제부터 만민이 기도하는 야웨 하나님의 집이 이 따위로 변해 버렸습니까? 이것이 예수의 분노의 핵심입니다. 사고 파는 것이 나쁜 게 아닙니다. 다만 그것은 시장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사고 파는 시장 경제 원리가 어떻게 성전에서 적용될 수 있습니까? 예수의 말씀은 "아니올시다."입니다.
    오늘의 구약 본문 예레미야서를 보십시오. "주의 성전이다. 주의 성전이다. 주의 성전이다." 세 번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나도 믿지 말라고 합니다. "너희들은 모든 행실과 생활을 바르게 고치고, 거룩한 곳에서 장사하지 말아라. 참으로 정직하게 살고 이웃을 속박하지 말아라. 나그네와 과부와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지 말고, 죄 없는 자를 살해하지도 말고, 다른 신들을 섬겨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도 말아라."
    예레미야서에 있던 말씀을 예수님께서 똑같이 반복합니다. 예수의 말씀입니다. "이 집이 도둑놈들의 소굴이냐? 이 집을 차라리 헐자! 다시 짓자!" 당연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이렇게 타락의 소굴로 만들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런 일은 이천 년 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마르틴 루터의 외침에서도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국교로 인정되어서 천년 동안 유지된 그리스도교회, 지금의 천주교입니다만, 우리의 뿌리가 되는 과거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인가, 아니면 도둑놈의 소굴로 되어 버렸는가?"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 회개하는 집인데,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면죄부를 사야 하지 않았습니까? 그 중세 교회와 예수 당시의 성전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하루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의 기록에 이렇게 씌여 있습니다. 꿈을 꾸었더니 사탄이 자기 휘하에 군사를 모아놓고, 이전에 내린 명령, 곧 예수 믿는 사람들을 전멸하는 작전명령이 어떻게 수행되고 있는지를 듣는 소위 작전 회의를 열었습니다. 부하 하나가 사탄에게 보고합니다. "수령님, 저는 사막을 횡단하는 예수쟁이들한테 사자들을 보냈습니다. 다 잡아먹으라고! 그랬더니 사자가 그들을 잡아먹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평화의 기도를 드립디다." 이게 사탄 휘하의 장수의 보고입니다. 두 번째가 말합니다. "저는 바다를 항해하는 일단의 예수꾼들한테 폭풍우를 보내서 배를 좌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좌초된 배 위에, 그리고 암초에 매달린 교인들이 하나님께 찬송을 부릅디다." 세 번째 부하가 보고합니다. "수령님, 저는 시골의 한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10년 동안 내내 교회에 아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서로 친근하게 살도록 교회를 아주 평화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랬더니 10년만에 이놈의 교회 교인들은 영과 육이 아주 썩어 문드러져서 마침내 끝장이 났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꿈에서 깨어나면서 "아하" 했습니다. 차라리 도전을 받고 핍박을 받는 교회는 살아납니다. 폭풍이 불어서 인생에 어려움이 생겨나면 다시 인생을 가다듬습니다. 외부의 도전이 오면 사람은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외부의 도전도 없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편하게 살다보니 인생이 멍들어 갑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이 모양입니다. 그래서 루터가 딱 일어나 가지고 "교회는 이제 영과 육이 완전히 썩어버렸으니, 이 교회에 개혁의 횃불을 당기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이 꿈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꿈이라고 생각하고, 종교개혁의 불을 붙였습니다.
    이천 년이 지난 오늘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예수께서 지금 보시면 우리 교회들을 보고 도둑놈의 소굴이라고 할 것 같습니까? 아니면 평화의 동산이라고 할 것 같습니까? 우리의 교회에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른다고 할 것 같습니까? 불의의 흙탕물이 소용돌이치고 있다고 말할 것 같습니까? 여러분 한번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누가복음의 기록대로 장사꾼들을 완전히 쫓아낸 다음에 그곳에 좌정하셔서 "내 집에 와서 내가 가르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유대교 율법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유대교 율법을 숭상했던 바리새파 사람, 제사장, 서기관들의 잘못은 하나님의 올바른 의를 몰랐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자기 스스로의 판단과 가치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을 재단한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상화해 놓고, 자기가 생각하는 이익과 이해관계에 따른 판단으로, 자기 편의에 따라 하나님을 재단하고 하나님을 다시 만든 그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서에서 보듯이, 스스로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지 않으면서, 끝내 우상들을 섬기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자기 방식대로 재단하고 이론화해서 믿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이 만들어 내고 창조해 낸 하나님입니다. 이름하여 우상, 그렇습니다. 우상이 다른 게 아닙니다. 금송아지가 우상이 아니고 내가 만들어낸 상, 그것이 우상입니다. 성서 말씀의 가장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사람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야웨 하나님의 율법을 숭상한다 했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보기에는 유대교식, 바리새파식 하나님을 숭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만든 것, 곧 우상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을 유지하기 위해서 성전세도 받았습니다.
    로마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전파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당신들이 찾는 의는 미안하지만 당신들 스스로 결정한 행위와 가치관으로 만든 의입니다. 그 의는 하나님 눈에는 결코 올바른 의로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되려면, 당신들의 이성을 믿을 것이 아니라, 당신들을 창조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십시오. 믿음으로가 아니라 행위로 만드는 의, 그 의는 당신들의 결점입니다. 이제 바꿔야만 합니다. 자기가 만든 의가 아니고, 자기 이데올로기가 아니고, 자기 사상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인이 된다고 하는 하나님 의존, 믿음, 그 믿음 위에다가 여러분의 올바른 행위를 쌓으십시오."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이자, 사도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위에 의, 정의, 공의가 쌓여져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사랑이신 하나님 없이 생겨난 공의는 사람을 무자비하게 짓밟습니다.
    여러분, {레미제라블}이라는 소설 아시죠? 성직자의 은촛대 하나를 훔친 사람의 죄값에 관한 소설입니다. 최근에도 그 소설과 비슷한 얘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여러분, 뉴욕에 가시면 존 F. 케네디 공항이 있습니다. 그 공항 말고, 주로 국내선으로 이용하는 "라구아르디"(Laguardie)라는 공항도 있죠. 그 공항의 이름은 제가 알기로는 뉴욕의 유명한 시장 한 분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합니다. 라구아르디아 시장입니다.
    이 사람이 시장이 되기 전에 판사로 있었는데, 그가 즉결재판을 하는 곳에 근무할 때였습니다. 한 사람이 붙잡혀 왔습니다. 그 사람은 흑인 노인인데, 너무 배가 고파서 옆집의 가게에서 빵 하나를 훔쳐서 먹다가, 주인의 신고로 잡혀 왔습니다. 이 라구아르디 재판관이 판결을 내렸습니다. 즉결심판입니다. "아무리 사정이 그렇다 하더라도 도둑질은 도둑질이기 때문에 벌금형 10달러에 처한다. 10달러를 지불하라." 그래놓고 나서, 자기 지갑을 열어서 10달러를 꺼내면서 말합니다. "훔친 죄는 벌금 10달러에 해당하지만, 당신이 그토록 배고파서 훔칠 정도가 되었는데도, 판사인 나는 그 배고픔을 모른 채 배불리 먹고 지냈다. 이렇게 나 혼자 배불리 먹은 것에 대한 도덕적 자책감으로 내가 10불을 냅니다. 당신 벌금은 내가 갚겠소." 그리고 나서 자기가 쓰고 다니던 유명한 중절모를 벗어서 그 재판소 서기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모자를 헌금통 삼아 돌리시오." "재판정에 계신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이 흑인 노인이 빵을 하나 훔칠 때, 여러분은 그의 가난을 의식하지 못한 채 배부르게만 살았다고 생각하시거든, 여러분도 헌금 좀 하십시오." 그렇게 모자를 돌린 결과 얼마가 모아졌느냐 하면 47달러! 그 47달러를 흑인 노인에게 주었습니다. 노인이 47달러를 받아들고 울면서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합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재판관이 판결하였던 10달러 벌금형은 철저한 공의의 소산입니다. 무슨 죄를 지었든지 지은 죄에 대해서는 형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라구아르디 재판관에게는 지은 죄만큼의 벌을 부과하는 냉철한 의가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정의 아래에 뜨거운 사랑이 있었습니다. 정의가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정의는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그 재판관의 사랑에 기초한 정의, 이것이 재판정을 새로운 분위기로 변화시켰고, 이 흑인 노인을 변화시켰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에는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정의 속에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용솟음쳐 올라야 합니다. 메마른 뼈다귀 같은 정의가 아니라, 동정과 자비심이 충만하고, 죄인도 용서할 줄 아는, 사랑이 용솟음치는 정의가 가득해야 합니다. 죄를 엄히 질책하면서도 십자가의 고난으로 죄를 용서하셔서 새사람으로 만드시는 예수의 사랑 있는 정의, 이 정의가 교회에 넘쳐나면 그 교회에는 복이 임합니다. 예레미야 말처럼 그곳에 영원무궁하도록 하나님께서 약속한 복이 임합니다. 이런 교회를 만드십시오. 그렇지 않은 교회는 지금 허뭅시다. 다 허물고 새로 지읍시다. 유대교의 잘못된 성전, 우리의 오염된 교회, 지금 예수의 십자가로 허뭅시다.
    오늘 성만찬에 참여하게 됩니다. 참여하면서 우리의 잘못된 불의의 성전, 사랑이 메마른 교회는 헐어버립시다. 그러면 예수께서, 3일만에 부활하셔서 새 생명이 되신 것처럼, 새로운 의의 성전을 다시 지어 주실 겁니다. "헐라! 다시 지으마."
    오늘 우리 경동교회는 사실은 다시 지음 받은 부활의 생명으로 태어난 주님의 성전입니다. 사랑이 용솟음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 위에 하나님의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와서 큰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고 세우고 가꾸어야 할 우리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마지막으로 생각해야 할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위에 세워진 의의 성전, 그 주님의 성전을 장충동에서만 찾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대로 그 성전은 건물만이 아닙니다. 그 성전은 건물에 있는 시설만이 아닙니다. 그 성전은 바로 여러분 하나 하나입니다. 오늘 여기 참석한 여러분 각자가 믿음만 있다면 바로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머무시는 성전입니다. 여러분의 성전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성전이 사랑과 정의로 넘쳐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냥 덮어두시렵니까, 썩어 문드러지도록! 아니면 헐고 다시 지으시렵니까?
    여러분의 성전이 영원무궁토록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평화의 동산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그럼 정화하십시오. 정화하고 예수의 명을 따라서 새로운 성전으로 거듭나십시오. 주님이 오늘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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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용할 양식
    항존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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