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유의 하나님이 한 소망으로 부르심 2002-06-07 19:17:58 read : 2588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 설교자:박 종 화 목사
■ 설교일:2001년 9월 9일-1부
010909.ram(LOAD:40)
구약의 말씀: 이사야서 49:1 ~ 6
너희 섬들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너희 먼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께서 이미 모태에서 부르셨고, 네 어머니의 태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다.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셔서, 나를 주의 손 그늘에 숨기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로 만드셔서, 주의 화살통에 감추셨다.
주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아, 너는 내 종이다. 네가 내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내가 한 것이 모두 헛수고 같았고, 쓸모 없고 허무한 일에 내 힘을 허비한 것 같았다. 그러나 참으로 주께서 나를 올바로 심판하여 주셨으며, 내 하나님께서 나를 정당하게 보상하여 주셨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주께서는 나를 그의 종으로 삼으셨다. 야곱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불러 모으시려고, 나를 택하셨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귀한 종이 되었고, 주님은 내 힘이 되셨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신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내 종이 되어서,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고 이스라엘 가운데 살아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네게 오히려 가벼운 일이다. 땅끝까지 나의 구원이 미치게 하려고, 내가 너를 "뭇 민족의 빛"으로 삼았다."
서신서의 말씀: 에베소서 4:1 ~ 6
그러므로 주님의 일로 갇힌 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주셨으니, 그 불러 주신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언제나 겸손함과 온유함을 지니십시오.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면서 오래 참으십시오.
여러분은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한 희망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과 같이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주님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침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유의 아버지이시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십니다.
복음서의 말씀: 요한복음 9:35 ~41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 사람을 내쫓았다는 말을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만나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하고 물으셨다.
그는 대답하였다. "선생님 그분이 어느 분입니까? 내가 그분을 믿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 그는 "주님, 내가 믿습니다."하고 말하고서, 예수께 엎드려서 경배하였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나는 이 세상에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우리도 눈이 먼 사람이란 말이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
오늘 요한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 하나를 치유해 주셨더니,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예수께서 그 사람을 만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선생님, 어느 분이 인자입니까?"
"너는 지금 인자라고 하는 사람과 말하고 있지 않느냐?"
"주님, 당신이 주님이면 믿겠습니다. 당신이 어디로 가든지 내가 따라 가겠습니다. 당신을 믿겠습니다."
옆에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에게 따집니다. "이 사람은 믿겠다고 하는데, 우리는 당신이 정말 인자인지 모르겠소. 우리가 눈이 멀었단 말이요?" 예수의 말씀입니다. "인자인 나하고 이야기하면서도, 내가 인자인 줄 몰랐다고 하면 문제가 크다. 당신들이 차라리 눈이 멀었다고 하면 내가 도와줄 수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나를 몰랐기 때문에 인자로 고백 못한다면 죄가 없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몰랐기 때문에, 악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악을 행하고, 선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선을 행하지 않았다면 죄가 없다. 그런데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당신들은 분명히 눈이 있다는 것이다. 눈으로 인자와 이야기하고 있고, 인자와 눈으로 마주치고 있지 않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부호를 단다면, 나를 모른다고 한다면 그대들은 죄인이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보면,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던지는 수많은 질문 가운데 어느 질문이 정당하고 어느 질문이 부당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뻔히 알면서도 질문하는 것은 질문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질문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질문하지 말아라. 나한테 진정 질문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로 깨달아서, 그래서 나를 인자로 고백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우리는 지금 예수를 알고 믿습니까? 모르고 믿습니까? 솔직하게 "모르고 그냥 믿습니다." 하는 사람에게는 예수께서 큰 폭의 여유를 주십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믿지 못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회개가 뭡니까? 모르고 지은 죄를 회개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지은 죄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누가 그 인자입니까?" 안다고 생각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인자를 보고 묻습니다. "당신이 인자입니까? 우리가 '아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는데, 우리가 믿는 분은 야웨 하나님 그분 밖에 없는데, 어떻게 당신을 그 하나님과 똑같다고, 당신과 그분이 하나라고 믿으라고 합니까? 이런 질문을 바리새파 사람들뿐만 아니라 많은 세상 사람들이 던집니다. 에베소서를 기록한 사도 바울이 이런 질문이 너무나 많은 것을 보고, 오늘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이듯이 성령도 하나, 주님도 하나, 믿음도 하나, 세계도 하나, 그러므로 하나님도 하나입니다. 그 하나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꿰뚫어 아시고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만유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 인간의 몸을 입고 예수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만유 안에 계시는 하나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찾으려고 한다면, 지금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십시오. 그분을 못 믿겠으면, 나와 함께 골고다 언덕에 갔다가 부활의 영광까지 함께 가십시다."
우리는 자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묻습니다. 가시는 길 다 압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가신 길,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가신 길,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그 길을 다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로 가지 않으면서, "어디로 가십니까? 당신이 인자입니까?" 이렇게 질문하는 것은 이미 질문이 아닙니다. 이제는 믿고 의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한 하나님, 한 성령, 한 주님, 한 몸이라는 믿음과 신념은 사실 기독교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에서 굉장히 큰 하나의 이념, 체제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로마제국을 건설했던 사람들은 한 하나님, 한 성령, 한 주님의 사상을 본 따 가지고 뭘 발전시켰느냐 하면, 소위 말하는 군주제도를 발전시켰습니다. 로마제국은 한 신(神), 한 왕, 한 민족을 내걸었습니다. 좋은 말 같습니다만, 이 하나라는 말에 로마제국을 대입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하나이듯이 왕도 한 분, 왕과 함께 사는 민족도 하나라는 말입니다. 로마제국에 한 분이신 하나님, 로마제국에 한 분이신 왕, 로마제국에 하나뿐인 한 로마 시민들! 그 외에는 한 하나님, 한 왕, 한 민족에 소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제국은 유일무이한,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권력, 신권을 부여받은 왕권이 통치하는 나라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말할 때 "하나님은 전지(全知)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무소부재하십니다."라고 합니다. 이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한 분 하나님이 오늘 한 왕과 한 민족 위에만 있습니다. 이것이 로마 제국의 역사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염두에 둘 게 있습니다. 만유의 아버지인 하나님이 하나이신 건 분명한데, 그 하나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뜻이지, 창조주를 믿는 피조물이 "유일하다, 하나다"라는 뜻은 아닙니다.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가장 큰 잘못이 뭡니까? 한 분이신 하나님과 연결된 우리도 하나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한 하나님과 수많은 민족, 한 하나님과 수많은 왕들입니다. 하나님만이 "하나"이십니다. 하나이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민족과 나라와 왕과 사람들 각각은 여럿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복수인 것을 하나님과 연관시켜서 단수로 만드는 것이 죄악의 시작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사람들이 말하던 이데올로기를 알았고, 체제도 알았고, 그들의 사고방식도 알았습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는 뜻이고, 그 하나이신 하나님께 속한 모든 사람들은, 위에 있는 사람이나 밑에 있는 사람이나 남자나 여자나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말인데, 그것을 민족도 하나고 체제도 하나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9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하나이시라는 것을 어디에서 알았느냐 하면, 십자가에서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이신 것을 압니다. 고린도후서 5장 19절에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가장 무력하고 가장 험상궂은 십자가라는 형틀 위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 형틀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 인자가 세상 죄를 대신 지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십자가에서 성자와 하나가 되신 성부는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을 가능케 합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핵심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한 하나님―한 왕―한 민족"의 등식에는 십자가가 빠져 있습니다. 진실로 인간의 죄를 지고 죽어 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 하나이신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로마제국의 황제가 십자가와 함께 할 수 있습니까? 로마제국의 황제는 십자가 없는 부활을 추구하는 인간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한 하나님―한 왕―한 민족"은 신학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신앙적으로도 채택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십자가 없는 부활의 능력, 그것이 체제화되고, 구조화되고, 우리 사고를 점령하는 것 같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 그 하나님은 우리의 구세주로 임재하십니다. 인자는 인생의 모든 절망과 좌절을 모른 채하고, 하늘의 영광만을 취하는 분이 아닙니다. 인생 절망의 깊은 곳에 오셔서 함께 절망을 겪으십니다. 인간의 아픔 속에 오셔서 함께 아파하십니다. 그리고 그 아픔과 절망을 있는 그대로 두시지 않고, 성령을 통해서 아픈 사람을 건강한 사람으로, 죽어 가는 사람을 생명의 세계로, 절망에 빠진 사람을 희망의 세계로 옮겨놓으십니다. 그래서 오늘 에베소서의 말씀을 다시 강조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절대로 십자가를 우회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가서야 비로소 새로운 생명의 소망이 움터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성공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주 실패를 경험합니다. 개개인도 실패를 경험하고, 사회도 경험하고, 국가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보면,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고 반드시 짓습니다. 집단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 중에서 실패라고 하는 것을 내 삶의 피할 수 없는, 반드시 거쳐야 할 진지한 과정이라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 그 사람에게는 실패를 뛰어넘는 성공의 역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운명론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실패를 자기 삶의 적극적인 요소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기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실패는 영원히 실패입니다. 벗어날 수 없는 자기의 역사가 되고 맙니다. 그걸 가리켜서 운명이라고, 숙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데 빠진 사람은 현실을 떠나서 탈세인이 되거나, 또는 인간의 삶을 적극적으로 살지 못하고 수동적으로만 살아갑니다.
실패했을 때 괴로움, 얼마나 큽니까? 그러나 그 실패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보십시다. 인생은 실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 중에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가 가만히 있어도 성공의 어머니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를 내 인생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면, 실패를 뛰어넘는 또 다른 힘이 생깁니다. 그때에만 비로소 성공의 어머니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인간의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아픔을 아픔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러면 십자가를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내 인생의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면, 그 속에 성령이 임재하셔서 십자가를 넘어선 부활의 영광을 주십니다.
저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 잘못을, 실패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도의 잘못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체제의 실패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체면도 있고 자의식도 있을 겁니다. 오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개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성공이 담보되지 않습니다.
인자는 인간과 함께, 인간의 죄악 때문에, 실패한 역사의 최고봉인 십자가에 달려 죽습니다. 하나님은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역사는 십자가에서 보면 실패했습니다. 이 실패의 역사에, 잘못을 저지른 여러분은 함께 동참하십시다. 실패를 인정하십시다. 유대사람들은 그 실패를 무능하신 하나님의 실패라고 생각했습니다. 헬라사람들은 지혜가 없는 하나님의 실패라고 생각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함께하신 하나님은 실패자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부활의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십자가는 부활의 어머니입니다. 이걸 믿을 수 있습니까? 십자가가 부활의 어머니임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입니다. 그 믿음 속에서 우리는 다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믿어야 합니다.
제가 어저께 사무실에 앉아 있다가 창가를 내다봤더니, 동대문 시장이 잘 보였습니다. 가을 의류 선전하는 커다란 포스터 같은 게 붙어 있더라구요! 그런데 거기에는 예쁜 옷을 입은 미녀 하나를 그려놓고, 그 옆에다 "넌 너무 추해" 하고 써놓았습니다. 옷 선전에 왜 "추하다"는 말이 나오나 했더니, 그 "추"자가 가을 추(秋)자더라구요. 언어의 유희입니다만, 인간이 너무나 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보면 인간은 가을처럼 영글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추한 것을 십자가의 정신으로 인정할 수 있으면, 그 추함은 모태에서 태어난 부활처럼 새로운 생명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너희 섬들아, 내 말 좀 들어보아라. 너의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 보아라. 내가 어떻게 심판했는지를. 그리고 내가 너희를 어떻게 용서하여 땅 끝까지 이르러 내 구원을 미치게 하고, 내 빛 된 민족으로 삼았는지를 기억하여라."
이스라엘 역사를 기억하십시오! 믿음 안에서 좌절을 받아들이는 곳에 희망이 용솟음칩니다. 미워하며 질투하는 곳에 사랑과 용서가 다시 움터납니다. 아픔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그곳에서 건강함이 생겨납니다.
창조의 계절,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역사가 여러분의 역사가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