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의 복음 2002-05-21 14:36:27 read : 2572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경구절 마가복음 1:14~15
설교날짜 2002/02/17
지난주간에 저에게 이메일(E-Mail)로 상담을 해 오신 분이 계셨습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왜 교회를 건축하면 지역 주민들이 열정적으로 반대를 합니까?
둘째, 왜 교회가 화평하기보다는 분쟁과 분열 현상이 더 심화됩니까?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님들은 하나 같이 사람 보지 말고 주님보고 교
회 나오라고 하는데 교회 지도자들이 생활에서도 본을 보여야 하는 것이 옳은
것 아닙니까?
넷째, 일반 공무원이나 회사 직원으로서 생활할 때는 상식과 기본은 통하는데
왜 교회는 상식도 없는 일이 전개되고 기본도 갖추지 못한 행정 질서가 이루어집
니까?
다섯째, 예수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하시지만 예수 믿고 구원받지 못할 것 같
은 교인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에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외에 몇 가지 개인적인 질문도 있었습니다.
답을 쓰기 전에 깊은 묵상을 했습니다.
과연 이런 질문이 이 한 사람만의 질문일까?
왜 오늘 목사는 이런 문제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 이렇게 고민하고 묵상해
야 하는가?
우리 교회에는 이런 교인이 없을까?
그리고 무려 16페이지에 달하는 답을 보내면서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천근만
근이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더욱 가슴이 답답한 것은 그렇게 정성스럽게 보낸 답 메일을 받고 응답한 그분
의 메일은 대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지만 아직도 자기는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문
제 몇 가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그분을 선하게 인도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제가 그분에게 보낸 메일의 답변 내용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복음이 아닌 비복
음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요한을 통하여 하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복음이란?
복음의 헬라어는 '유앙겔리온'(eujaggevlion)인데 영어로는 Gospel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Gospel은 God에 spell을 더한 말인데 곧,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story
concerning God)를 말합니다.
eujaggevlion은 euj(좋은, good)와 jaggevlion (소식, 뉴스, tidings, news,
messages)의 합성어로서 원래는 헬라사람들이 게임에서 이겼을 때 세금이 내려갔
을 때, 그리고 장모가 방문치 않겠다는 소식을 줄 때에 즐겨 사용했습니다.
이 용어를 70인 역에서는 '아주 특별한 뉴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으
로 '유앙겔리온'을 사용했습니다.
이 복음을 성서적으로 정의하면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전한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예수께서 전한 복음인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인의 왕국도 아니고, 로마의 제
국도 아닌 그 나라는 곧 천국이요, 현재적이 아니요 종말적이며, 그 나라는 가시
적(可視的)이 아니요 불가시적(不可視的)인 내재적(內在的) 나라를 말씀하신 것
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이 복음이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멸망의 길로 달음질하는 인간을 그냥 두지 아니하시고 독생자
를 세상에 보내 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의 죄를 대속하게 하시기까지 한
것은 사랑이 아니고는 어림도 없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
님의 사랑이 곧 복음, 즉 최고의 기쁜 소식입니다.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곧 복음입니다.
요한복음 1:14절 말씀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 그리
스도"가 곧 우리 인류에게는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섭리이며 이 복음을 믿는 사람이 구원받은 하
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결혼 후 임신이 안 되던 부부에게 임신은 기쁜 소식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이 안 되던 청년에게 입사 소식은 기쁜 소식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 시험에 응시한 학생에게 합격은 기쁜 소식입니
다.
중병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환자에게 완치는 기쁜 소식입니다.
기쁜 소식이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그러나 인류에게 참된 기쁜 소식은 영원히 죽을 인간이 영원히 살게 된 소식입
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복음을 전파하신 것입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이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
대"
물론 예수께서 전파하신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그리고 '전파하여'는 헬라어 '케뤼쏜'(khruvsswn)이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는
현재 능동태 분사형을 취하고 있어 그 행위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음을 암시합
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복음은 중단되어서는 안 되는 지속적으로 전파되어
야 하는 복음입니다.
그것은 복음의 기원이 하나님이시며 이 복음은 하나님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
다.
엊그제 설 명절을 지내고 원로장로님 모임이 있었는데 세배를 드리고 점심식사
를 대접하게 되었는데 그 때 한영빈 장로님이 아주 놀라운 말씀을 해 주셨습니
다.
"우리 교회 교인이 6천 명이 넘었는데 목사님, 6이라는 숫자는 기독교적으로 별
로 좋지 않은 숫자로, 혹자는 마귀의 숫자라고 하는데 우리교회가 이 숫자에 머
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올해는 전 교인이 힘을 써 성도 한 사람이 포항시민
한 사람을 전도하여 7천명을 넘기도록 합시다."
그 순간 자연 반사적으로 "아멘. 할렐루야"하면서 그렇게 하리라고 함께 다짐
을 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 자신이 대형교회를 별로 선호하지 않기 때문에 교인 수 증가에 소홀했던 것
을 뉘우치고 더욱 복음 전파에 정진(精進)하는 목회를 할 것이고 여러분도 모두
복음전파의 거룩한 사역에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복음 전파의 내용
15절 말씀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의 내용입니다.
첫째는 '때가 찼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때가 찼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구속사의 결정적인 시점을
맞았음을 시사해 줍니다.
여기의 '때'는 헬라어 '카이로스' (kairo;")인데 이 말은 단순히 과거에서 현
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변화되는 시기를 뜻하는 '크로노스' (crovno")와 구별되
는 것으로서 호기(好期, opportunity), 즉 하나님의 역사 하심이 일어날 결정적
기회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드디어 구원의 약속들을 성취하시고 그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절호의 기회를 맞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고기는 물을 탑니다.
새는 바람을 탑니다.
지혜자는 기회를 탑니다.
때는 얻기는 어려우나 잃기는 쉬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자는 기회를 잃지 않고 선용합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아름
답고 행복한 것으로 바꾸어 놓게 됩니다.
그러면서 결코 기회주의자는 되지 않습니다.
경솔한 자와 함께 있어도 경솔하지 않고, 불신자와 함께 있어도 의심치 않고,
신앙을 경멸하는 자와 함께 있어도 신앙을 비웃지 않습니다.
남을 나쁘게 평가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도 그 말에 동요되지 않으며, 남을 쉽
게 비판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도 그 사람의 말에 동화되지 않습니다.
들뜬 기분에 지배되지 않고 이런 저런 의견에 좌우되지 않으며 항상 자기 자신
의 행동의 선(線)을 지킵니다.
선을 베풀 기회, 이웃을 위해 봉사할 기회, 사명을 수행할 기회를 선용하는 자
의 삶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복음을 전파할 기회를 선용하는 자가 정말 복된 자입니다.
둘째로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실레이아 투 데우'(basileiva tou' qeou)로서 이는 단적
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와 초월적인 주권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은 지금 여기(here and now)서 그 왕권으로 주권을 통치하시고 나아
가 최후의 날 불신 세력을 완전히 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것은 마태복음 12:28절과 누가복음
11:20절 말씀을 보면 그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고 말씀하신 바 있고, 또 마태복
음 8:11절과 20:21절 말씀을 보면 그 나라가 여전히 미래적인 것임을 가르치셨는
데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 두 가지의 의미를 수용함으로 구원받은 성도로서
천국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과 관계하여 몇 가지 의미를 우리는 깊이 이해해야 합
니다.
1) 하나님의 왕권, 곧 통치권에 대한 이해로서 이는 그의 백성들의 마음 속에
서 역사 하시는 주권이라는 개념입니다.
누가복음 17:2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2) 완전한 구원, 곧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그 뜻
에 순종함으로 비롯되는 모든 영적이며 물질적인 축복의 개념입니다.
누가복음 18:30절입니다.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 교회, 곧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개념으로서 이러한 의
미로 사용될 때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거의 동일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6:18절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4) 구속받은 우주, 곧 모든 영광으로 가득찬 새 하늘과 새 땅의 개념으로서 이
것은 아직 미래의 일이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최종적인 사역이 이루어지는 나
라를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25:34절입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
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셋째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은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전파한 메시지의 내용과 동일합니
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말씀하시면서 내건 전제조건은 회개였습니
다.
즉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듣고, 알고, 깨달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
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과의 단절되었던 관계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오늘날 교회에서 '회개하라'고 하면 이 단어가 주는 의미는 부정적
인 면만을 강조하는 것 같지만 헬라어 '메타노에이테'(metanoei'te)는 2인칭 복
수 현재 명령형으로서 과거에 저지른 모든 악한 일에 대하여는 슬퍼하는 한편,
다른 한 면으로는 앞을 바라볼 것도 의미하고 있는 용어입니다.
그것은 '변하여 새 사람이 될 것', '마음과 생활의 근본적 변화' 그리고 '완전
한 생활로의 전환'까지를 모두 내포한 포괄적 의미로서 참으로 귀하고 중한 말입
니다.
넷째는 '복음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성자 예수와의 긴밀한 신뢰 관계를 이루는 것
으로서 이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온전한 신앙 인격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믿으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피스토메테'(pisteuvete)는 앞에 나온 '메타노에
이테'와 동시적으로 작용을 하며 함께 역사 하는 단어입니다.
즉 진정한 회개에는 신앙이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이 두 동사는 미완료 동사로서 계속적인 현재를 의미하며, 전자가 계속될 때
후자도 계속됨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이 갖는 의미이며 내용입니다.
복음의 삶을 사는 사람
지난주간 박태준 전 국무총리의 고향 임랑에서 입택(入宅) 감사 예배를 드렸습
니다.
그 어려운 물혹 제거수술을 잘 끝내고 건강한 모습으로 잠깐 귀국해서 한 주간
을 보내고 요양차 다시 출국하셨습니다만 예배를 인도하면서 저는 가슴이 찡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박태준 총리의 성경을 제가 살펴보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성경
을 읽었는지 밑줄 그어진 것이 대부분이었고, 깨닫고 은혜 받은 내용을 성경 여
백에 썼는데 어느 한 페이지에도 빈 공간 없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순간 제 눈에 저절로 눈물이 고였습니다.
포철 신화의 주인공, 포항 지역 불교도들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로 반 기독교인
이었던 그분이 하나님을 믿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오늘을 살아가시는 모습에서
복음의 위대함을 다시금 생각했습니다.
저를 만나자 첫 말씀이 "목사님 제가 살아 돌아왔습니다. 목사님과 성도들의
기도의 힘으로 하나님이 저를 살려 주셨습니다."라고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
신 것 또한 제게는 잊을 수 없는 감동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과 멀리했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것
이 복음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 삶에 향기가 있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시던 때처럼, 율법이 있고, 교리가 있고, 신
조가 있고, 교회 법도 있지만 복음이 없는 시대와 같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창도 있고 칼도 있고 가해도 있고 지배와 정복이 있어도 복음
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싸움도 있고 투쟁도 있고 다툼도 있지만 복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제도가 있고, 조직이 있고, 경영이 있고, 행정이 있고, 숫자 놀
음이 있어도 복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있고 하나님 사랑이 있는 곳에는 독선과 독존과 미움과 시기
와 죽임과 불평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있고 하나님 사랑이 있는 곳에는 화해와 이해와 공존과 공생
과 공영과 용서가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원수 사랑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입니
다.
그러기에 다툼이 없고 분쟁이 없고 하나님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하면서 멸망
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에 살아가는 사람을 산 위의 동네라 했습니다.
세상의 빛이라 했습니다.
세상의 소금이라 했습니다.
등경 위의 등불이라 했습니다.
복음에 살아가는 사람은 신념의 사람입니다.
정도(正道)를 걷습니다.
순리(順理)를 따릅니다.
소신(所信)을 행합니다.
절개를 지키고 지조를 지키며 의지를 굽히지 않습니다.
변질되지 않고 타협과 협상을 하지 않습니다.
복음에 살아가는 사람은 광야에 화초를 피게 합니다.
말랐던 시냇물을 흐르게 합니다.
낮은 골짜기를 높게 합니다.
높은 산을 낮게 합니다.
이 산과 저 산이 마주쳐 울려 주 예수 은총을 찬송하게 합니다.
복음에 살아가는 사람은 나의 사람과 너의 사람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햇볕처럼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빛을 비췹니다.
가난한 자를 돌아보고 연약한 자를 살핍니다.
내가 손해를 보아도 네가 유익하면 그것을 행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그렇습니다.
그 복음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셨습니다. 우리도 그 복음을 전파
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오늘을 살아가야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