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2002-05-27 16:57:45 read : 3470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 5. 19 // 행 8:25~40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꼭 실천해야 하는데 잘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도일 것입니다. 100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왜 전도하지 않는가요?”라고 물었을 때, 사람들은 그 이유를 몇 가지 얘기합니다. 이 중 28명이 대답하기를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 전도는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되는가?” 자신들이 전도할 줄 모른다는 겁니다. 그 다음 약 32명 정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전도의 은사가 없다. 전도의 은사 받은 다른 사람이 하겠지. 목사님이나 전도사님들이 전도하는 거지. 하나님께서 나에게는 전도의 은사를 준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마지막 40명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전도를 하고 싶은데 괜히 쑥스럽고 두렵다.” 만약 우리 가운데 전도를 하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이 세 가지 중 하나의 이유가 우리 마음속에 숨어있을 것입니다.
요나에게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기의 적국인 니느웨에 가서 전도를 하라니요? 라는 이유를 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이유를 불식시켰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가장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주(主)문장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내 증인이 되라!’는 겁니다. 다음에 1장 9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추석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조상을 떠올리고 부모님을 생각합니다. 특별히 마지막 돌아가실 때의 유언의 말씀은 우리가 꼭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남기신 말씀은 다름 아니라 ‘내 증인이 되어다오’입니다. 성경 말씀 중에 그것이 매우 중요하여 지상명령이라는 별명을 가진 한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여기서 주(主)동사는 하나인데 ‘제자 삼으라!’입니다. 지상명령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셨던지 이 말씀을 시작하기 전 1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 여러분, 이 명령이 누구의 명령인줄 아십니까? 갈보리 십자가에서 쓸쓸하게 돌아가셨던 분의 명령이 아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이 명령을 실천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기가 막힌 약속을 한 가지 해 주셨습니다.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어떤 자에게 입니까? 증인이 되는 자에게! 제자 삼는 자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입니다.
저도 이번 추석에 나들이를 했습니다. 본집만 가고 처갓집은 집이 아니냐고 해서 올해 처음으로 처갓집을 갔습니다. 장인어른이 나오셔서 “여보게, 양로원 방문 잘 왔네! 우리 집 평균 연령이 77세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인, 장모님은 연세가 70이지만 할아버지가 90이 훨씬 넘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 분이 사시는데, 갈 때는 밤 11시에 떠나 어디가 어딘지 모르게 빗속을 뚫고 달려가다가 새벽 4시에야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올 때는 날이 개었어요. 저는 가을을 참 좋아합니다. 누른 들판, 곡식이 익어 갈 무렵 농촌 사람들에게는 근심거리가 있는데, 이 곡식을 추수해야 할 일손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곡식이란 추수의 때를 놓치게 되면 그저 땅에 떨어져서 다 썩어져버립니다. 싹이 나버리면 먹지 못하고 그대로 썩혀야 됩니다. 걱정이 많은 그들의 모습을 제가 직접 보고 왔습니다.
여러분, 추수할 곡식! 1년 내내 농사를 지어 추수할 곡식이 가득한데 일군이 없어서 자기의 곡식이 썩어 들어가고 있는 농부의 심정을 한번 상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의 심정이 이와 같으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보라! 밭이 희어 추수할 곡식이 많으나 일군이 심히 적구나! 그러므로 너희는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기도하라”
무슨 얘기입니까?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영혼들이 세상에 심히 많이 널려 있는데, 그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없어서 그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고 주님은 탄식하셨습니다. 너희가 다른 무엇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너희는 추수할 일군을 달라고,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할 자들을 보내어 달라 기도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모든 것을 수확하는 이 가을에 우리 한번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서 영혼의 추수군이 되어보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전도해 보셨습니까? “교회 나오세요!” 이런 것 말고요. 정말 한 영혼을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이대며 “내가 믿는 예수는 이런 분이요, 내가 만난 예수는 이런 분이요, 내가 예수 믿고 이렇게 달라졌소! 이 예수는 이렇게 믿는 거예요!” 그래서 그 영혼이 자신의 마음 문을 열고 여러분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한 적이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전도는 우리의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에 나오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전도는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전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람에게만 전도의 은사가 있다고 믿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아! 저 말씀은 나와 상관이 없구나’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이것 역시 사탄이 주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에 귀를 여십시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부탁하셨습니다. 곧 이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 우리가 아닌 바로 당신에게 말씀하신 지상명령인 것입니다. 이것은 순종해야 합니다. 지금 곡식이 땅에 떨어져 썩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과연 어떻게 이 전도자의 직분을 훌륭하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오늘 빌립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몇 가지 전도자, 구원의 추수군이 되기 위한 비결을 가리켜 주십니다. 영혼의 생명,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1.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26절을 보세요.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아주 자세한 말씀을 빌립은 들었는데 광야로 내려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위 말해서 영적 민감성이라고 합니다. sensitivity!
어른들은 발에 껴있는 굳은살을 벗겨본 경험이 다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 사람이 샤워를 자주 안 해서 박히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 사람은 매일 서서 샤워를 합니다. 그럼에도 미국 가게에 가보면 발 관리하는 기계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보통의 미국 사람들이 그들의 집에 기구를 넣어둔 가방이 있는데, 그 정도에 있어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됩니다. 거기에 보면 금강석, 칼 갈 때 쓰는 돌, 굳은살을 벗겨내는 칼, 가위 등 별것들이 다 있어요. 그래서 저도 한번 해 보았습니다. 매일 샤워만 하다가 하루는 대야에 발을 한 시간쯤 담근 후 그 기구를 가지고 긁으니까 저의 예쁜 발에서 굳은살이 한 주먹쯤 나왔어요. 너무 놀랐어요. 그런데 하나도 아프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기분이 좋았습니다. 왜? 굳은살이 껴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신경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누가 여러분의 귀를 한번 후벼준다고 생각해 보세요. 닿지 않아야 할 곳을 조금 살짝 스치기만 해도 온 몸이 전율할 겁니다. 왜? 귓구멍 안에는 굳은살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전도할 수 있습니까? 오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예민한 사람, 하나님의 영에 대해 예민한 영혼을 가진 사람만이 증인이 되고 생명의 복음을 전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아무나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왜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가? 왜 평생 예수 믿으면서 한번도 전도다운 전도를 해보지 못했는가? 그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하나님에 대해서 예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해본 적이 없고 내 생각만 합니다. 하나님 마음속을 조금도 읽지 못했던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보면 이러한 사람이 한 사람 등장합니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침범 당해서 많은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때 사람들의 오직 관심은 어떻게 하면 좀더 배불리 먹을까, 좀더 잘 살까, 좀더 넓은 집에서 살까였습니다. 이러한 때 그래도 성전에 나와서 기도하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이사야였습니다. '이 백성들의 죄가 심각하니까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겠구나'하고 기도하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평생에 하지 않았던 음성을 들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사야를 향하여 한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탄식소리였어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
평생 신앙생활을 해 왔습니다. 평생 백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한번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만은 하나님의 탄식 소리가 이사야의 귀에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나를 위하여 가며 내가 누구를 보낼까!' 그때 이사야가 그 음성을 듣고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6장에서는 이사야가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고 가르쳐 주십니까? 그는 그저 듣게 된 것이 아닙니다. 성전에 왔다고 들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기도하러 성전에 왔다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본 순간 백성들의 죄가 많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기는 깨끗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는 그 순간 자기의 더러움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아, 난 이제 멸망하게 되었구나! 내가 내 자신을 바라보니 이렇게 더러운가! 주여,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입니다.”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탄식소리를 들으시고 스랍 가운데 한 사람을 보내어 그의 입술을 지져 주셨습니다. 이것은 이사야의 죄를 깨끗케 해 주신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우리 안에 죄가 있을 때, 우리 안에 세상을 향한 마음이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은 굳은살이 끼어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 안에 쾌락이 잠재해 있을 때, 우리 안에 물질에 대한 욕심이 가득 차 있을 때, 회개하지 않고 고백하지 않은 죄가 그대로 남아 있어 수십 년간 그것을 품고 있을 때 우리 마음이 단단해짐으로 하나님의 영을 바라보지 못하는 겁니다. 성경은 오늘 이사야가 그 모든 굳은살을 벗겨내고 회개하고 난 이후에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모세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40년간 이 세상의 훌륭한 학문을 배웠던 사람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KS 마크가 아니라 하버드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정도였을 겁니다. 그는 40년간 애굽의 왕궁에서 왕자 후보로 이 세상의 모든 고급 학문을 다 취득하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때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이 무엇을 얘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모세는 세상의 수많은 학문을 연구한 이후에 자기 뜻대로 행하다가 살인자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는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그 이후, 모세의 40년 생활을 여러분이 잘 아실 겁니다. 그는 양치기가 되었어요. 오늘날 우리나라로 말하면 농사짓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지겨운 일이 반복되었겠습니까? 아침에 일어나 양을 데리고 나갑니다밤새 양을 치고 돌아옵니다. 1년이 갔습니다. 2년이 갔습니다. 그러나 이 왕자 후보가 40년 양치기 생활을 하면서 무엇을 배웠을까요? 그는 겸손해졌습니다. 비로소 내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생을 완전히 포기할 나이, 80 노인이 된 그날 하나님은 가시떨기 나무 속에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그는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음성을 언제 들어보셨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애타는 심정을 한번 헤아려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서 얼마나 민감하십니까? 혹 여러분의 마음에 지금 굳은살이 가득 끼여서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래서 잃어버린 영혼을 보고도, 남편이 예수 믿지 않는 것을 보고도, 내 사랑하는 가족들이 지옥으로 가는 것을 보고도 그저 무감각으로 지내오지는 않았나요?
우리가 어떻게 생명의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먼저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내 영을 민감하게 해 주옵소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민감하지 않을 부분에 너무 예민합니다. 주위의 가까운 사람이 조금만 잘 못해도 섭섭하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민감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사탄이 우리 마음에 굳은살을 끼웠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하루, 이 한 주간 하나님의 영에 깨어있어 그 예민함을 회복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어떻게 생명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 영적 민감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두 번째 본문 말씀이 가르쳐 주는 것은 순종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입니다.
2.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27절에 보면 아주 간단한 단어가 나오는데, ‘일어나 가서 보니’ 세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세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미 공부했듯이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전도자로 내려갔습니다. 가서 전도했더니 막 부흥이 일어났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갑자기 그 부흥의 도중에 이유도 설명하지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또 떠나라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사람이 안 사는 광야로 가라는 겁니다. 이것을 남의 얘기로 읽지 말고 여러분의 얘기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오늘 설교에 너무나 은혜를 받고 나도 전도사가 되어야지 하고 고향에 갔습니다. 고향에 가서 전도를 했어요. 두세 명의 집사님과 중창단이 함께 전도를 했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설교도 잘 못하는 자기를 통해서 영혼들이 떼로 몰려드는 겁니다. 중창단이 찬양을 하는데 영혼들이 울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맞아들였어요. 그래서 이제는 교회를 세울 일만 남았어요. 큰 교회를 꿈꾸며, 어느 목회자를 모시고 내가 안수집사가 되어 정말 훌륭한 교회를 세워야지 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그날 밤 나타나셔서 “얘야, 너는 내가 보기에 재능이 마산에서 썩기는 너무 아깝느니라, 서울로 가거라!”하면 “할렐루야!”하면서 당장 갈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유도 설명하지 않으신 채 “너 오늘 보따리를 싸 가지고 저 거제도 구석에 사람도 별로 안 사는 무인도로 가거라!”하면 과연 흔쾌히 우리가 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빌립에게 내려진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이유가 분명하면 그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말씀하실 때는 갈 곳을 알려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아브라함은 떠났다고요.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도 이유를 묻지 않았어요. 그저 그는 바쳤어요. 이것을 성경은 순종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나에게 명령하시는 그분이 내 머리에 이해되지 않는 것을 명령해도 내게 너무너무 좋으신 하나님, 너무너무 선하신 하나님임을 내가 믿을 때에 가능한 줄 믿습니다.
빌립은 이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광야로 내려갔더니 마침 거기에 마차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에디오피아 내시가 타고 가고 있었다고 얘기합니다. 이것을 읽으면서 내시 혼자 마차를 따각따각 타고 가는 모습을 생각하는 사람은 굉장히 상상력이 메마른 사람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우리말로 번역하여 재무장관입니다. 장관이 지금 나들이를 하는데 혼자 왔겠습니까? 마차가 동원되었는데요. 거기에는 수많은 경호원과 수행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내시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있었어요. 그때 빌립이 가서 그를 전도하게 됩니다.
도대체 에디오피아 내시, 그가 왜 예루살렘에 예배를 드리러 왔는가? 이것은 역사를 읽어보면 간단히 알 수 있습니다. 에디오피아 여왕 구스, 이 여인이 솔로몬에게 와서 그를 너무너무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후, 두 나라는 서로 무역을 교역하게 되고 인적교류를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솔로몬이 믿던 이 유대교가 에디오피아에 어느 정도 알려졌을 겁니다. 그 가운데 재무장관이 아마 이미 믿었거나, 아니면 형식적으로 그 여왕이 보내서 예루살렘에 어떤 행사가 있으니까 공식 행사 예배에 참석하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에디오피아 내시 한 사람이 전도됨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오늘 에디오피아 나라, 그 땅에 하나님의 복음이 떨어졌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여기까지 말씀해 주셨으면 빌립이 왜 안 갔겠습니까? 우리가 왜 안 가겠습니까? 하나님은 여기까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광야라고 하면 사람이 안 사는 도시입니다. 이 많은 교인들, 이렇게 부흥하는 교회를 버리고 어디로 가란 말인가? 그러나 빌립은 하나님의 그 말씀을 듣고 의문을 품지 아니하며 갔다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왜 전도자가 되지 못하는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은 핑계가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모르는데요.” “하나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시어머니만큼은 제가 전도할 수 없어요.” “목사님을 통해서라면 모를까요.” 요나가 핑계를 댔듯 우리는 너무 많은 핑계거리를 가슴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시잖아요? 목사님은 풀타임 사역자이잖아요. 제가 하루종일 바쁜 거, 아침부터 저녁까지 숨쉬는 것조차 바쁜 거 당신이 아시잖아요?” 그렇습니까?
여러분!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제자 삼으라! 내 증인이 되라! 이것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오늘 이 말씀에 우리 모두 마음 문을 열고 순종하는 영안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전도하지 않는가? 순종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내가 몰라도 좋아요. 그곳이 광야라도 좋아요. 내 머리로 도저히 이해가 안 가도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니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전도의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 제가 형편이 안 되고, 제가 아는 것 많지 않고, 저 사람과의 관계가 나쁘고, 제가 이러 이렇게 살아왔고, 제가 입술이 둔하지만 하나님이 전도하라 명령하셨으니 제가 순종하겠나이다.’ 오늘 하나님 앞에 이러한 순종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빌립과 같이 말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발을 내디딜 때, 여러분의 이성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할 때, 하나님이 그때에 기적을 일으키실 줄 믿습니다. 누가 압니까? 여러분이 전도한 주일학교 학생 하나가 21세기를 뒤바꿀 빌리 그레함과 같은 유명한 전도자가 될지... 하나님 앞에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은 재능 있는 자를 부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재물 많은 자를 쓰신 적이 없습니다. 능력 있는 자를 찾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를 찾으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이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전도할 수 있는가? 어떻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추수할 일군이 될 수 있는가? 첫 번째 하나님의 영에 대해 예민함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세 번째 본문이 가르쳐 주는 바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입니다.
3. 지혜가 있어야 한다
지혜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수행원들이 많은데, 그는 글 읽는 소리가 들려 내시 가까이 다가갔어요. 이것이 도대체 무슨 얘기인가? 시골에서 학교 다닐 때, 집에 도착하기 약 2-300미터 전에 저희 아버님의 성경 읽는 소리가 크게 들려요. 할아버님도 그렇고요. 옛날 어른들은 속으로 읽지 않았어요. 크게 읽었어요.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이런 식으로 운율을 넣어서 읽었어요. 이 당시 풍습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히브리 성경은 이것이 굉장히 뛰어났는데 아마 운율을 넣어서 크게 읽었던 것 같아요.
본문의 빌립도 “시끄럽다!”라고 한 것이 아닌 가서 아마 이렇게 얘기했을 것 같아요. “참 글을 잘 읽으시네요. 그 운율 소리가 참 좋으시네요. 그런데 혹시 그 읽으시는 뜻을 잘 아십니까?” 그러자 내시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지도하는 사람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면서 빌립을 청하여 마차에 올라오라는 겁니다. 이에 그 마차를 타고 광야를 가는 동안 수시간, 아니 하루 이틀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계속해서 빌립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얘기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전도자가 되는 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전도를 하기는 하는데, 굉장히 효과적이지 못한 두 가지 방법이 세상을 유행시켰어요. 이로 인하여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습니다. 하나는 신학자들이 이름하기를 ‘융단폭격식 전도’라고 합니다. 사정없이 갖다가 내려칩니다.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길거리 어디, 누구에 상관없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무나 붙잡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지금 화장실 가려는 사람 붙잡아 놓고 “잠깐만, 더 들어!” 하면 그 마음속에 복음이 들어가겠어요?
어떤 한 사람이 저를 방문했어요. 차를 타고 가는데 큰 보따리 하나를 꺼내더군요. 십자가였습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이것을 영어로 썼는데, 스펠링은 하나 틀려 가지고 뻘건 색으로 적어서 차를 타고 가는 거기에다가 들고 있는 거예요. 제가 교통순경에게 걸린다고 내리라고 했으니, 저도 같이 융단폭격(?)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어요. 한국에도 이런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식의 전도가 본인의 신앙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요. ‘내가 전도했다! 내 의무를 다했다!’ 그러나 전도의 효과는 거의 없습니다. 없을 뿐 아니라 전도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야, 예수 믿으면 저렇게 헤까닥 가는구나! 나는 안 믿겠다!’ 이러한 결심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는 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영국신사형 접근법’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굉장히 예의가 있어요. 아주 예의가 바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평생가도 자신의 입을 열어서 복음을 안 전해요. 그저 잘 대해주기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행사가 있는데 한번 나와 볼래요?” 성경을 열고 “하나님이 이르시기를 당신은 죄인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얘기를 꺼내보지 못한단 말입니다. 너무 나이스(nice)한 겁니다. 오늘 전도를 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 속에 사탄은 파고들어 이 두 가지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게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빌립을 보십시오. 얼마나 지혜롭게 접근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영혼의 추수군이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마다 접근 방법이 틀린 것입니다. 때로 융단폭격식이 필요한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가서 치십시오. 그러나 아무나 대놓고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아주 소심한 사람, 말만 크게 해도 심장이 뛰는 사람에게 가서 “예수천당! 불신지옥!” 해보세요. 그 다음부터 그는 교회에 절대 안 나옵니다. 절(?)로 가버립니다. 지혜롭게 하셔야 됩니다.
특별히 가족을 전도할 때 지혜가 필요합니다. 남편이 믿지 않으십니까?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랜 지혜가 필요해요. 먼저 복음을 전하기에 앞서 그의 마음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야, 우리 마누라가 교회에 나가더니 뭔가 달라졌다. 바뀌었어!” “우리 남편이 교회에 가더니 걸레를 다 잡네. 설거지를 해주네.” 여러분, 설거지 해주고 걸레질 해주고 사랑해 줘 가지고 교회에 안 나오는 여자 있으면 나와보세요. 다 나옵니다. 우리에게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대한 명령, 지상명령을 주셨습니다. 내 영혼, 저 영혼들을 추수해 다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영에 대해 예민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는 진리는 성경과 복음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4. 성경과 복음을 알아야 한다
35절을 보십시오.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어디에서 시작했나요? ‘이 글에서’입니다. 여기서 이 글이 무엇입니까? 이사야 53장은 누가 읽은 말씀입니까? 내시입니다. 빌립이 마차에 올라탔을 때 내시가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전혀 몰랐어요. 그가 그냥 가보니까 내시가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었습니다. 이때 빌립은 내시가 읽고 있는 그 구절에서 시작하여 예수와 복음을 전했다고 얘기합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빌립이 얼마나 성경을 훤히 알았는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 내시가 창세기 3장을 읽고 있었다고 하면 빌립은 아마 창세기 3장에서 시작하여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오늘 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복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복음을 알긴 아는데 어렴풋하게 알아요. 자신만 알아요. 사람은 자기가 확실히 아는 것은 쉽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이 누구에게든지 상관없이 말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공부할 때, 어떤 교수님은 강의를 어렵게 하시더라고요. 말도 어렵고... 그래서 저는 늘 그 강의를 들을 때마다 ‘내가 왜 이렇게 무식할까, 저 교수님은 너무너무 학자시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미국 가서 공부하면서 수많은 학자들의 강의를 들었는데 특징이 하나 있더라고요. 그 사람들의 강의는 다 알아들을 수가 있었어요. 그때 깨달은 것이 “아, 진짜 학자는 알아듣게 가르치는구나!”였습니다. 제가 옛날 한국에서 학자라고 생각했던 분들은 학자가 아니고 자기도 잘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100% 아는 것은 전달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전달이 안 될 때는 왜 그렇습니까? 내가 약 40-50% 정도 알면 알듯 말듯 가르치는 겁니다. 교회에 이런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 목회자들 중에도 많습니다.
저는 이것 때문에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릅니다. 복음을 알기 위해 수백 권의 책을 읽고 수많은 강의를 들었어요. 여러분은 복음을 아십니까? 우리가 다른 것은 몰라도 복음은 알아야 된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이 복음을 모르기에, 내가 하나님의 복음을 100% 소화하지 못하기에 이것을 전할 마음이 없고 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저 전도하라고 하면 “교회 나오세요!” 이 한마디만 툭 던집니다. 그리고는 목사님하고 1:1로 중매시켜주고, 자기는 빠지는 것입니다. 이 목사가 몸이 백 개입니까? 여러분이 하셔야 합니다.
성경은 오늘 이 빌립이 목회자가 아니고 집사라고 얘기합니다. 평신도가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 해가 가기 전에 목표를 세우십시오. 우리 교회는 얼마나 좋습니까? 복음을 알고 성경을 알기 원하는 자들에게 문이 열려 있는 교회가 아닙니까? 안수집사가 되어도 복음이 확실치 않으면 다시 들으십시오. 한 번, 두 번, 열 번이고 들으십시오. 우리 교회 부목사님들도 다 들었어요. 수많은 성경공부반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시간이 없다고 하시는 분은 개인 성경공부를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교회에서 출장 레슨도 해줍니다. 무료로, 밤 12시도 좋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면 가서 가르쳐 드립니다. 그런데 왜 배우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왜 복음을 모릅니까? 누구의 책임입니까?
우리가 즐겁게 보내는 동안 이웃나라 대만에는 큰 비극이 있었습니다. 3천명 가까운 사망자가 이미 발생했고, 앞으로 더 나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나라 119구조대가 달려가서 거기에 묻힌 한 작은 소녀를 87시간만에 구출하는 장면을 TV에 방영했습니다. 그 나라 주민들과 부모의 표정을 보셨나요? 얼마나 기쁠까요? 이제는 많은 시간이 지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 가망이 없다고 하는데도 자기의 자식, 부모가 묻혀있는 그 가족들은 손에 피가 나도록 벽돌을 파는 모습이 TV에 비춰졌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여러분 같으면 구조를 중단할 수 있겠습니까? 저 같으면 중단하겠습니까? 내 목숨을 주고서라도, 내 다리 한쪽이 부러지더라도 그 벽돌을 들어낼 것입니다. 사고 후, 5일만에 구출된 사람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 건물 더미에 갇혀있는 5일은 생지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옥과는 비교도 안 될 괴로운 곳이 있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그 건물더미에 깔려있던 지옥은 5일이고 7일이고 내가 죽으면 끝이 납니다. 그러나 이 장소는 끝이 없습니다. 이 사고와는 비교도 안 될 큰 고통이 여기에 있습니다. 죄와 괴로움이 가득하고 영원히 살아야 되는 너무나 처절한 장소, 성경은 이것을 ‘지옥’이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전도하지 않은 당신의 가족들, 당신의 사랑하는 친구, 당신의 이웃들... 우리가 전도하지 않으면 그들은 이 괴로운 장소로 가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치십니다.
오늘 벽산 아파트가 무너졌습니다. 우리 성도 가운데 많은 사람이 깔려있어요. 우리가 예배드리고 다 집으로 갈까요?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압니다. 직장을 그만두고서라도 그 벽돌을 나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주위에 이것보다 더 많은 영혼들이, 이것보다 더 위험한 순간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들이 지옥의 문전 앞에 있는데 우리는 팔짱을 끼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무감각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에게 영적 예민성을 회복시켜 주소서! 제 눈에 죽어 가는 영혼들을 보여 주옵소서! 그들의 미래를 보게 하시고, 그들을 위해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도와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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