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승리하자 2002-05-31 18:37:41 read : 2814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마태복음 9:27-31
(이환재 부목사)
요즘 벤처라는 말을 말이 듣고 사시지요. 벤처기업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자기 확신을 통해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열심이 있고, 집중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벤쳐 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는 사람들을 손꼽는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소경일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중간에 병이 난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소리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들은 자기를 포기하지 않는 벤처 신자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이 말씀에 눈이 확 떠지는 것입니다. 내 믿음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을 살면서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얼마나 됩니까? 참 안되요,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원대로 된다는 것이지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믿음을 가지고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내게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자신의 마음가짐이나 태도를 한번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인생의 기대를 가지고 살았는데 어느 순간에 단념하고 만 것들이 너무 많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너무 쉽게 포기하거나 체념하는 경향이 있지는 않습니까? 적어도 "내 경우는 다르다"고 자기 포기를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두 소경은 결코 자기 인생을 체념하거나 자포 자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오는 그야말로 멋진 벤처 신앙으로 자신들의 한 많은 운명을 새롭게 바꾸는 행복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집념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 두 소경이 어떤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예수님께 인정받았는가?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 가지고 승리하기를 원합니다.
1. 첫째 이들은 자신이 소경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소경이라는 것을 알아야 눈을 떠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많은 분들이 가장 큰 문제는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의 부족함을 알 때 하나님께 간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들은 저 밑바닥까지 갔다 온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모세를 아시지요! 나는 말할 줄도 모르고 입이 뻣뻣하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죄인중의 괴수라고 했고, 베드로는 주님 앞에서 나는 죄인이니까 나를 떠나소서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다 약하고 부족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많은 현대인들은 자신들을 속입니다. 소경이 아닌 척 하고 살아갑니다. 자기의 부족함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거의가 믿는 것처럼 보이는 분위기입니다. 겉으로 보면 믿는 사람들 같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들이 믿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겉으로는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자칫 우리의 믿음은 거짓 믿음일 수 있습니다. 분위기에 따라서 믿는 것처럼 행세하는 것은 다 거짓 믿음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거짓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잘 따진다는 것입니다. 잘 따지고, 잘 싸우고, 논쟁도 잘하고, 마음에 별의별 의심을 품고서 끝도 없는 질문을 늘어놓습니다. 그리고 바른 말을 하면 잘 듣지를 않고 자기 생각에 몰입이 되어 가지고 자기 소리만 합니다. 주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사명이
첫째는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요,
둘째는 승천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 주변에 있었던 청중들이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아, 예수님이 죽으신다는 이야기로구나.'하고 그 의미를 파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뜸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아, 우리가 율법 책에 보니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너는 왜 죽는다고 하느냐? 네가 죽는다고 하는 소리를 하는 것 보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가 아닌 것이 틀림없지 않느냐?"
거짓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처럼 뭐라도 꼬투리가 될 만한 게 보이면 트집을 잡고 따지려고 드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에게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의 나라는 영원토록 계승될 것이요,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토록 쇠하지 않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가 죽는다고 하시니까 "네가 무슨 메시아냐"하고 따지고 들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거짓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배우고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말만 쏙쏙 뽑아 가지고 마음에 담습니다. 나쁜 것은,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 말씀은 아예 무시해 버립니다.
이렇게 정직하게 말씀을 보지 못하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영원히 죽음을 정복하시고 영원히 다스리시는 만 왕의 왕이 되신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되고 고난받아야 된다는 이런 말씀을 다 옆으로 밀어 놓습니다. 자기 마음에 안 드니까 안보는 것입니다. 이게 다 그 믿음이 엉터리이기 때문에 하는 소리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우리 중에는 이런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마음속에 의심을 가지고 씨름하고 바른 말을 하면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조금 가까이 와서 보면 깨닫게 될 텐데 보려고도 하지 않고 늘 자기 속에 남아 있는 어떤 선입견이나 자기가 알고 있는 작은 상식을 가지고 계속 트집을 잡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행여나 이런 마음을 가진 분이 계시다면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여러분들의 믿음은 거짓 믿음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께 부탁을 드립니다. 성경을 펴십시오. 그리고 말씀 앞으로 나와서 어린아이처럼 정직하게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을 만날 줄 믿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알게 될 것이고 영광의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오해가 많이 싸여 있는 사람끼리라도 직접 만나서 자주 이야기를 하다가 보면 오해가 풀리고 서로가 마음에 정이 가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 말씀을 통해 그분을 자주 만날 생각은 않고 성경은 덮어놓은 채 마음에 있는 의심을 가지고 씨름한다면 안 믿으려는 사람과 무엇이 다릅니까? 믿으려고 한다면 그런 태도는 절대 가지면 안 될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기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앞에 나와서 조용히 성경을 펴놓고 "하나님이여, 저의 굳은 마음을 제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저에게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정직한 눈을 가지고 예수님을 보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마음은 닫아 놓고 계속 의심에 사로잡혀 질문만 던지고 시비만 걸면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문제이군요! 내가 죄인이군요, 내가 보질 못했습니다"라고 하는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자신이 소경임을 알고 고백하는 것이요. 이것이 믿음의 시작이라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둘째 이들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봄으로 믿음의 길을 걷기 시작한 두 소경은 부르짖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 예수님께 인정받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시자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두 가지 큰 특징이 있습니다.
1) 왜 이들은 하필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였을까요?
먼저 소경들은 예수님이 정확히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 이지요. 두 소경은 그분이 바로 메시야임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눈만 고치는 것 뿐 만 아니라 영혼의 눈을 뜨게 하시는 분임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객이 전도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문제가 급합니다. 그러나 건강 하려고, 요사이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사업 때문에 등등 이런 저런 이유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선 주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구주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어떤 난제든지 먼저 성전으로 가지고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 해답이 있는 곳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권장합니다(히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이 시간 우리 자신에게 진솔하게 물어 보십시다. 나는 인생의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보려고 얼마나 자주 주님께 가지고 나와 봅니까? 죠지 워싱턴은 대통령으로서 국사의 어려운 문제들을 풀기 위해 수시로 예배당에 나와 의자에 엎드려 기도하였기에 의자가 움푹 파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문제를 성전에서 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무도 간단한 해결의 원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아멘! (마 11:28).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절대적 확신을 심어주십니다(막 10:27).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어떤 한계에 부딪히든지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 같이 모두 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가르쳐주십니다(마 6:9).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마 7:11).
오늘 우리도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고, 두 손을 높이 들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 또 하나는 예수님을 소리 질러 불렀습니다.
사자는 배부르면 주위에 동물이 지나가도 절대로 죽이거나 잡아먹지 않는답니다. 그러나 정작 사냥을 하려면 토끼 한 마리라도 전력질주를 한다고 합니다. 왜냐면 최대 노력을 하지 않으면 잡아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적당하게 살아가는 믿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화가 없습니다. 토끼도 잡지 못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적극적인 신앙이 중요합니다.
렘33:3을 보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의 틀이 있습니다. 사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악에 빠집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지 않은 것처럼 활동합니다. 그러다가 바로에게 어려움을 겪어요, 그리고 하나님에게 부르짖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 간섭을 하십니다.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움직이십니다. 믿음은 부르짖는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 지방에 예수님께서 지날 때에도 가나안 여인이 나와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부르짖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적극적으로 주님을 찾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합심하여 기도할 때 성령님께서 강한 역사를 이루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의 위기를 당면할 때마다 맨 먼저 사용하는 무기는 기도여야 합니다. 기도는 마지막 무기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을 하다가 안되면 '마지막으로 기도나 해볼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맨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기도할 만큼 그렇게 심각한 상태는 아직 아닙니다.' 그래서 자기 힘으로 해 볼만큼 해보다가 실컷 고생하고, 탈진하고, 다 망하게 되어서야 드디어 뒤늦게 기도의 필요성을 깨닫습니다. 그러기에 헛고생만 합니다.
여러분!
기도는 맨 마지막 수단이 아니라, 맨 처음부터 우선해야할 일입니다. 기도를 안 하면 기운이 빠지고, 기도를 하면 할수록 기운이 솟아납니다. 그래서 래리 리(Larry Lea)라는 분은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를 철저히 생각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 문제를 놓고 철저히 기도하라"고 충고합니다.
당신은 어떤 불길한 생각으로 불안을 느끼고 계신가요?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사 58: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불가항력을 기도로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유다 왕국은 얼마나 작은 나라입니까? 단순히 두 개 지방으로 이루어진 소국입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더욱더 처절하게 기도로 하소연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해 주십니까?
역대하 20장 17절을 함께 읽으십시다. 특히 강조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인생의 문제 때문에 하나님께 초점을 맞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신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하나님의 권능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무능력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볼수록 심리적으로 눌리고 우울해지며, 자신만을 쳐다볼수록 침체되고 맘니다. 오히려 기도 없는 하루는 축복 없는 하루이며, 기도 없는 일생은 능력 없는 일생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역대하 20장 12절).
그러기에 17세기 영국교회의 개혁운동가 Hall 감독은 이렇게 간증합니다. "무능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기도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호사밧은 인생의 큰 위기를 맞이하자마자 우선 성전에 달려나와 하나님께 기도부터 드립니다. 여호사밧의 기도의 클라이맥스는 얼마나 호소력이 있습니까? (역대하 20장 12절)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할렐루야!
특별히 우리가 합심하여 전 교회적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하늘의 하나님께서 땅의 문제를 풀어주실 줄 믿습니다"(마 18:19).
기도하는 사람은 결코 흔들리거나 요동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절대로 풀이 꺾이거나 침체되지 않습니다. 다윗은 기도하는 사람답게 이렇게 간증합니다 (히 13:6).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할렐루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신 것입니다.우리가 우리 손에 하나님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손으로 우리를 붙잡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제를 하나님이 풀어주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문제가 클수록 축복도 크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련이 클수록 보상도 크고, 아픔이 클수록 위로도 크고, 상처가 클수록 기쁨도 크고, 고난이 클수록 영광도 큽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기독교의 능력이요, 하나님 나라의 기적적 축복입니다. 할렐루야!
인생의 어떤 숙제와 난제라도 여호와 하나님께 가지고 와서 하늘의 하나님께 맡기고, 그 어떤 불안과 불가항력적인 문제도 오직 기도로 매달리고,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오직 기도로 매달리면 모든 불가항력적 문제를 다 풀어 주시고, 그처럼 크게 느껴졌던 문제보다 더 큰 기적을 일으켜주실 줄 믿습니다.
☆ 두 소경이 어떻게 예수님께 인정받습니까?
3. 셋째, 이들은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28절을 보면 "예수님이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이들은 믿음을 통해 만나게 된 것입니다. 믿음의 꽃은 만남입니다. 이런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이 있다. 바리새인, 레위인은 그냥 지나갔다. 사마리아 사람을 만났다. 그는 치유받고 살았습니다. 제대로 사람을 만났을 때 살 수 있습니다. 저들은 참으로 찾을 자를 바로 찾았습니다. 만나야 할 자를 만났습니다. 구해야 할 자에게 구했습니다. 바로 예수께 나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야말로 믿음의 주님이십니다. 또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히12:2). 예수야말로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입니다(요 14:6). 천하만민에게 유일한 구원의 이름이었습니다(행 4:12).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그 이름 예수였던 것입니다(마 1:21). 그분을 만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러 다니고 있나요? 예수님만 만나면 된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어떤 문제라도 예수님을 만났을 때 해결된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왜요? 예수님께서 질문을 합니다. "내가 능히 이일을 할 줄을 믿느냐?" 그러자 소경은 대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오이다" 이 대답이 소경을 믿음있는 자로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고백입니다.
여기에 대단히 중요한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새로운 것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에게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미 나에게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이 왜 자라지 못할까요? 욕심 때문입니다. 한 낚시꾼이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고기를 잘 잡습니다. 그런데 한 바구니만 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기를 잡고 놓아주는 것입니다. 곁에 있던 사람이 이야기 합니다. "아니 이 사람아! 한 바구니 더 잡지 그래?" "그러면 뭐해?" "잘하면 부자가 될 수 있어! 냉동창고 하나 만들어 고기를 잡아 냉동시켜?" "그러서 어떻하지?" "하나 더 만들지? 멋지게" ---- "그러면?" "그리고 나서 이 사람아! 낚시 다니면서 즐기고 살아!" 아니! 이 사람은 지금 한참 잘 즐기고 있는데 무슨 말입니까? 실컷 고생한 후에야 즐기라니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분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참으로 이 세상 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믿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되지요. 잘못 믿고 있는 거예요.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어려운 줄 아십니까? 환경을 바꾸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를 바꾸는 것이 그나마 쉽기 때문입니다. 요새 내가 은혜를 못 받고 있습니까? 목사님 핑계 대고 싶지요, 다른 권사님, 집사님, 교회 핑계 대고 싶지요?
그것은 세상적인 잣대입니다. 이렇게 하면 오히려 신앙생활이 힘들어집니다. 예수님만이 해결책입니다. 모든 문제는 주님과 우리 사이에서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먼저 주님과 나 사이에 무슨 문제점이 없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잣대는 예수님과 나와의 거리를 재어보는 거예요. '아, 내가 예수님을 좀 벗어났구나. 예수를 요사이 좀 멀리했구나. 예수님 없는 삶을 살았구나.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구나.' 문제는 여기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인색하신 분이 아닙니다. 병 고쳐주시는 것을 아까워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여러 가지 고민과 갈등을 해결하는 것을 아까워하는 분이 아닙니다. 문제는 내가 병든 것입니다. 내 마음이 교만하고, 내 마음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변덕을 부리고, 내 마음이 순수하지 않고, 내 마음이 의심에 가득차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역사할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능력은 인간의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이 나의 믿음이라고 하는 통로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실 수 있도록 우리는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이 나에게 오시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통로를 예비해 두십시오. 그것이 믿음입니다.
중요한 원리 두 번째는 그러므로 지금 있는 세상에서 빨리 하나님의 세계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세상 방식대로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미군 부대를 가보았는데 미국과 똑같이 만들었더라구요, 그 안에는 모든 것이 미국 법입니다. 차가 30키로 이상 달리면 적발됩니다. 이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넌 크리스챤은 세상에서 보이는 것을 쫓아가죠. 당연하죠.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보이는 것을 믿으면 안돼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다른 거예요!!!
그러므로 여러분! 이제 세상에서의 고민 내려놓고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오시길 바랍니다.
4. 넷째 오직 주님만을 바라봄으로 변화되어지는 사람.... 이 소경은 주님과 대화를 합니다.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가 능히 이일을 할 줄을 믿느냐?"
"주여 그러하오이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마라"
여기서 대화는 무엇입니까? 기도를 뜻합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회복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대화 밖에 없습니다. 기도 외에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도 기도요. 내 영혼이 잘 되는 것도 기도요, 마귀를 멸하는 것도 기도인 줄로 믿습니다. "사람에게 비는 하나님"이라는 기도에 관한 책이 있습니다.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인데, 그 책의 제목은 사람에게 비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정을 합니다. "나는 이렇게 축복을 준비하였다. 십자가도 준비하였다. 구원도 준비하였다. 너희는 내 자식이다. 나는 너희에게 축복 주기를 원하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왜 받지 않느냐? 제발 빈다. 문을 열어라. 나에게 기도하라. 나를 신뢰하라. 나를 의지하라. 내가 너희에게 주고 싶은 이 모든 축복을 가져가라." 하나님이 더 안타까워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성령 충만 받기는 나보다도 하나님이 더 원하십니다. 내가 예수 잘 믿는 사람되길 하나님이 더 원하십니다. 사람들은 별로 원하는 것 같지 않아요. 입으로는 원하나 실제로는 하나님이 더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내가 정말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네가 그 사실을 믿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제 소경은 눈이 밝아졌습니다. 제 2의 탄생, 새로운 삶이 왔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영적으로 소경 된 삶을 살아왔습니다. 세상적인 것을 잘 보고 살아왔으나 영적인 것은 볼 수 없었고, 죄는 열심히 보았으나 거룩은 보지 못하였고, 사람들은 많이 만나고 보았으나 예수님은 보지 못하였던 소경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 소경처럼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게 되었고, 나 같은 사람에게서 찬송가도 흘러나오게 되었고, 이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우리 안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소경이 눈뜬 것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우리들 자신이 기적입니다.
일 년 전과 비교해보십시오. 우리 안에 기적이 있습니다. 이 기적을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진정 불쌍한 사람은 영적인 소경이요 영적인 벙어리들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다는 게 뭡니까? 손해 보는 것 아닙니까?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환란을 당하는 것이 정상 아닙니까? 예수 믿으면서 믿음을 바로 가져 보려다가 두들겨 맞는 수도 있는 것이고, 어떤 면에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당신도 예수 믿으십시오."하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이 참 믿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렇게 살지 못했던 우리 자신의 지난날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속으로는 믿는데 겁이 나가지고 말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믿음은 믿는다고 말할 수는 있으되 약한 믿음이요, 어린 믿음인 것입니다.
어린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믿음 때문에 환란을 당하라고 하면 겁이나 도망도 갈 수 있습니다. 우리들만 그런 것이 아니예요!!! 베드로를 보십시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막판에 생명이 위험하니까 세 번씩이나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난 예수란 사람을 모른다"하고 부인해 버리지 않습니까? 누구에게나 믿음이 약하면 이런 어려움이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은행에 저금했다가 찾아 쓰는 돈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라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믿음이 약하고 어리면 우리의 삶은 모순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직장에 가서든, 가정에서든 겁이 나서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하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고, 조금만 불리하다 싶으면 아예 안 믿는 것처럼 행세하려고 합니다. 믿음이 아직 어리고 약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은 빨리빨리 키워서 잘못된 것을 씻어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주신 목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춘천 중앙 교회를 우리 모두에게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회는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양육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자녀들을 키우기 위해 젖을 먹이고 밥을 먹이고 입혀주고 사랑으로 돌보아 주는 것이 어머니 아닙니까?
우리의 믿음은 처음부터 강한 믿음, 좋은 믿음이 아닙니다. 어린 믿음인 줄 아시기 때문에 우리 믿음을 키워주라고 지상에 교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교회에 들어와서 이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잘 순종해야 합니다. 춘천중앙교회와 같은 교회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글쎄 또 있는지는 모르지만, 얼마나 좋은 교회입니까? 이 교회에 와 가지고 이 교회가 지도하고 이끄는 대로 부지런히 배우고 열심을 내서 예수님을 알기를 원하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믿음이 이 교회 올 때는 아무리 어린 믿음이고 작은 믿음이었다 할지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좋은 믿음, 큰 믿음으로 바꾸어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남의 눈이 두려워 예수 믿는다는 말을 하지 못하던 사람이 예수 믿노라고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앞세우는 이와 같은 잘못된 것들이 완전히 뿌리가 뽑히고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일에 마음이 집중되는 참 믿음의 사람, 강한 믿음의 사람,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 교회를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축복 주시기를 저는 날마다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비록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그 믿음이 살아있기만 하면 세상이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편에서는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요, 세상 편에서는 우리를 감당할 수 없는 것이 곧 기독교 신앙입니다. 할렐루야!
사실 우리의 믿음의 연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속에 생명력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겨자씨만큼 작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태산 같은 문제를 쉽게 풀어 나갈 수 있고, 세상의 그 어떤 세력도 능히 이겨낼 수가 있는 줄 믿습니다. 직장이 안정되고, 지위가 있고, 지식이 있고,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다고 여러분은 행복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베푸신 대속의 사랑에 감격이 있고,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격이 있고, 천국 소유의 설레임이 있어서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고, 주님의 말씀에 기쁨으로 순종하고 있습니까? 신앙생활의 기쁨이 있냐 이 말입니다. 신령한 것을 보는 눈이 뜨여 있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보고 있느냐? 이 말입니다. 당신은 맹인이 아닙니까? 그러니 주님께 소리 한 번 질러 보시지 않겠습니까? 그 분이 여러분의 외침을 듣고 눈을 열어 주실줄 믿습니다. 왜 가만히 있으세요. 자기가 불쌍하지 않아서요, 자존심이 있어서요, 체면이 있어서요! 그것은 신앙생활에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리>
오늘의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우리가 변화되어져야 한다고 선포하십니다. 그러기 위해 자신을 좀더 알고, 죄인되고 부족한 모습을 주님께 부르짖으며 주님만을 바라봄으로 우리의 눈이 치유 받게 됩니다. 지금까지 정말 볼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아왔던 내가 눈을 떠서 영원을 보게 되었습니다. 듣지 못하고 세상의 혼잡한 소리만 듣고 살아왔던 내가 이제 진정한 신령한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과거에는 두려워서 전도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도하기 시작합니다. 찬양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언어가 터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눈을 뜨고 말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현실에 나타나는 구원의 표징들인 것입니다.
결론) 이제 믿음으로 눈을 뜨면 무엇을 소중하게 바라볼까요.
눈뜨니 전도대장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분명히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의 소문을 온 땅에 두루 다니며 전파하였습니다. 우리가 전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보지 못한데 원인이 있습니다. 죽어 가는 영혼에게 지옥을 향해 가는 자를 위해 전도해야 하는 것을 다 알지만 왜 주저할까요? 우리도 아직 못 보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믿기는 하지만 아직 확신이 없기 때문 아닙니까? 전도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불쌍한 그리스도인 이지요. 우리는 주님께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쳐야 합니다. "주여! 보지 못하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용기 있게 외치고 주님은 능히 우리의 눈을 열어주실 줄 믿고 그의 응답을 바랍시다.
우리 모두 신령한 눈을 뜨고 진리를 보고 그의 능력을 확실히 보고 전도대장이 됩시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어립니다. 나는 능력이 없습니다. 나는 무지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추하고 약한 자입니다. 은혜주세요. 고쳐주세요.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 드릴 때 우리의 믿음으로 승리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은 요즘 어떤 어려움을 겪고 계신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은 당신을 어떤 악의 세력으로부터도 보호해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큰 능력을 체험하고자 하는 당신의 벤처 신앙이 당신을 위대하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생사를 초월하고자 하는 당신의 담대한 믿음 때문에 세상은 당신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요, 하나님은 그런 당신을 위해 최상의 축복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우리의 태도와 반응은 간단합니다(요일 5:4).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