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벌써 두달이 다 지나갑니다. 올해는 성도 여러분의 꿈을 통해 비전을 이루시는 한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의 비젼이 일신상의 문제만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실현하는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전에 어느 대학 총장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요즘 사람들의 세태를 안타까워 했습니다. 꿈이 뭐냐고 어느 젊은이에게 물었답니다. 이 젊은이가 말하길 "직장생활 한 10년 해서 작은 카페를 차릴 수 있는 돈을 모아 카페를 차린후 부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낚시하고 등산하면서 인생을 즐기겠다고 대답했답니다.
요즘 잘사는 것, 평안하게 사는 것을 꿈으로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이들에게 애 너 꿈이 뭐니 "경찰관이요," 애 너 꿈은 "예 소방관이요" "대통령이요" "발명가요" 꿈이 뭐냐고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직업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이들만이 아닙니다. 올해 꿈이 뭡니까? 소망이 무엇입니까?를 물어보면 "올해는 자식들이 잘되는게, 올해는 건강한 게, 올해는 돈 좀 벌어 보는게.....
대부분 어른들 아이들 할것없이 뭔가 소망하는 것을 이루는 것을 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사회이론에서 말하는 꿈입니다. 목표한 직업자체를 얻고 거기서 승진하는 것을 꿈을 이룬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의 꿈, 비전은 달라야 합니다.
사람들은 세 종류의 삶을 삽니다.
아름다운 꿈을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고 헛된 야망만 가지고 살다가 세상을 떠나는 사람. 꿈은 발견하였으나 그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꿈만 꾸다가 세상을 떠나는 사람. 이와 대조적으로 영적 꿈과 비전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그 꿈을 성취하고 누리며 멋지게 살다가 생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두번째 사람은 세속적인 성공주의에 물들어 인본주의적 야망을 추구하다가 그 야망을 성취하든 성취하지 못하든 그 기대하던 바벨탑이 무너져 삶의 종착지에 왔을 때 허탈감과 상실감, 고독과 슬픔, 돌이킬 수 없는 후회 가운데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나 세 번째 사람은 비록 세상의 영웅이 되지 못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성공한 삶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비전을 발견하고 기쁨과 보람을 느끼며 삶의 가치와 만족을 찾은 사람이요 작지만 신앙안에서 하나님의 비전에 참여한 사람이요 가정과 사회와 후대에 희망을 안겨다 주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이 세 번째 경우처럼 영적인 꿈 하나님의 비전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그 비전을 성취하고 누리며 멋지게 살다가 생을 아름답게 장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비전이 무엇입니까?
먼저 꿈과 비전을 정의하면 꿈은 삶 가운데서 이루길 원하는 소원이며 비전이란 그 소원을 통해서 무엇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전은 인생을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남이 볼수 없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는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보이는 대로 보지 않습니다. 보려는 대로 봅니다. 우리의 생각대로 봅니다.
열 두 정탐꾼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갔을 때 정탐꾼 열 명은 가나안 사람들을 거인으로 보고 자신은 메뚜기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은 우리 밥이라...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왜 이렇게 다르게 봅니까? 서로 다른 광경을 본 것입니까? 아닙니다. 차이는 자신의 눈으로 보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느냐의 차이입니다
1. 비전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세상이 주는 비전은 우리들의 비전이 아닙니다. 믿음의 백성들의 비전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 모세는 민족 해방의 꿈과 비젼을 가지고 출애굽하여 시내산 기슭에 도착한지 어언 1년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부푼 가슴을 지니고 애굽을 탈출하여 1년에 걸처 시내산에 도착하여 십계명을 받으러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40일 금식기도를 마치고 다시 산밑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상태가 참 가관이었습니다. 불과 40일만에 신앙을 다 잃고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기운과 의욕이 쭉- 빠졌습니다. 이제는 가나안 땅을 향한 꿈도 비전도 다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저 사람들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간들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구제받지 못할 인간들..." 실망과 분노로 가득찼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여전히 큰 꿈과 비젼을 주셨습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산에 거한 지 오래니"
모세는 호렙산에서 언제나 꿈과 비전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모세는 전에 여기에서 40년동안 잃어버린 꿈을 되찾았고, 오늘 또 다시 새 꿈을 찾게 됩니다. 먼 훗날 엘리야 선지자도 바로 이곳 호렙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꿈과 비젼을 전수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꿈과 비전을 주십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십니다.
호렙산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교회는 꿈의 언덕이요 비전의 산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도 교회에 올때마다 말씀을 접할 때 마다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얻고 비전이 발견하는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모세가 의욕을 상실하고 꿈을 포기하고 싶은 좌절의 충동을 느끼고 있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거대한 비전을 심어주십니다.
본문 7절 말씀입니다. "방향을 돌려 진행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 그 근지 곳곳으로 가고 아라바와 산지와 평지와 남방과 해변과 가나안 족속의 땅과 레바논과 큰 강 유브라데까지 가라 하셨나니"
즉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앞으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얻게 될 가나안 땅의 목록을 아주 상세히 지목하여 주십니다. 7절 지형을 잘 살펴보면 동서남북의 경계선임을 알게 됩니다. 동쪽으로는 지중해 연안이요, 서쪽으로는 요르단을 훨씬 지나 유브라데 강변까지요, 남쪽으로는 네게브 사막지대가 시작되는 시나이 반도, 그리고 북쪽으로는 레바논 산맥까지 팔레스틴 전 지역이 모두 다 이스라엘의 것이 되리라는 벅찬 약속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아무리 힘들어도 만약 미래에 되어질 일을 안다면 힘들다고 포기하시겠습니까? 힘들어도 참을 수 있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미래를 알기 때문이 아닙니까? 될 것을 안다면 힘들어도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비젼이란? 후에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확신하고 용기를 가지고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좌절하더라도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잃었던 비전을 다시 찾는 일
우리가 다시 비젼을 찾는 길은 주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아니 우리를 만나시려 오시는 주님이심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주님을 만남으로 힘을 얻었습니다. 허락하실 땅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지쳤던 육신, 약해지고 실망되었던 마음에 새 힘이 솟았습니다.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지만 일어나서 가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과거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하고 떠나갔던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실패자였습니다. 그러나 실패보다 더 불행한 것은 꿈을 잃어버린 것, 비젼을 상실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갈릴리 바다에서 처음 베드로를 만나주셨을 때 그리고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셨을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라고 그러면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좆았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 -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도록 해야겠다.' 이것이 베드로가 처음에 가졌던 비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배신하고 떠나갔던 제자 베드로는 요한 복음 21장 3절에서 이렇게 푸념하는 독백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옛날처럼 물고기나 잡고 살겠다" 베드로의 인생이 과거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베드로의 끝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의 마지막장인 21장은 베드로의 좌절과 절망만을 그리고 있지 않습니다.
이어서 베드로의 제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베드로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까? 베드로는 스스로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포기한 베드로를 포기하지 못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베드로의 주님이였던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제기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다시 비젼을 붙잡고 일어섭니다. 베드로는 다시 믿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보았고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비전이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미래를 봅니다. 한 사람을 보아도 하나님의 시각으로 봅니다. 작은 한 사건을 보아도 하나님의 시각, 믿음의 각도에서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주시기 전에 먼저 보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의 배반과 배신으로 잠깐 꿈을 잃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 땅을 주시기 전에 창 13장 15절-16절에서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부족해도, 지금 보기에 어려워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지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것은 비전을 품는 것입니다. 우
리는 보는 것을 얻게 되고 보는 것을 성취하게 됩니다. 뭔가를 성취하고 이루는 속도보다는/ 바라보는 대상이 중요하고 바라보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이 꿈을 갖게 된 것은 스스로의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꿈이었습니다. 자신이 꾸고 싶어 꾼 꿈이었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자신이 비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 생각과 결단에 의해 꿈을 꾼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요셉에게만 꿈을 주십니까? 요셉에게만 큰 비전을 갖고 살도록 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에게 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얼마나 끝까지 인내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는가가 다릅니다. 하나님은 꿈을 주셨고 요셉은 그 꿈을 붙들고 역경중에서도 인내하며 하나님을 신뢰하였기에 그 꿈을 통해 비전을 이룬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이 함께 할때 아름답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큰 꿈과 비전을 선물로 받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저 잘사는 것이 인생의 꿈이 되어선 안됩니다. 오늘 하루 즐겁고 내일 즐거울 것을 기대하는 삶이 꿈이 되어선 안됩니다. 삶의 수단이 목적으로 둔갑하도록 두어선 안됩니다. 삶의 수단들을 이용하여 주님이 주신 삶의 목적, 비전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목적을 주님께 두고 주님의 엄청난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는 삶으로 사는 비전을 품어야 합니다. 그러러면 우리에게 주신 삶의 수단들, 건강, 물질, 시간, 재능을 통해 주의 사랑을 전하며 주의 구원을 위해 섬김의 도구로 써야 합니다.
인생의 미래에 대한 거대한 비전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 한 사람의 작은 믿음이 우리 가정이 믿음의 위대한 가문이 되는 희망찬 비전입니다. 나의 사업과 나의 재능이 영혼구원과 교회 부흥에 이바지하리라는 웅대한 비전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내 인생의 앞날에 대한 거시적 비전과 청사진을 설계하며 살아가라는 격려의 말씀을 주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큰 비전을 품고 살라고 포부와 용기를 주십니다.
"너희가 나를 믿으면 결국 나보다 더 크고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이라"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믿고 큰 비젼을 품는 만큼 큰 일을 이룰 것이요 거대한 역사를 만들어갈 것입니다.
2. 비전은 기도할 때 발견합니다.
비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입니다.
조나단 스위프트는 "비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기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도는 많은 것을 보게 해줍니다.
무디 목사는 "발돋움을 하고 선 철학자보다 무릎을 꿇은 크리스천이 더 많이 본다"고 했습니다.
과학자 아이작 뉴턴은 "나는 망원경을 돌고 수백만 마일 떨어진 우주 공간을 볼수 있지만 망원경을 내려 놓고 무릎꿇고 간절히 기도하면 온갖 망원경과 장비를 사용할때보다 하늘을 더 볼 수 있으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스테반은 하늘을 보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하늘의 비전을 보았기에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고 고백하며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시련과 고난에 막혀, 때로는 무력감 때문에 인생의 어려운 고개를 넘고 있습니까? 기도하며 비전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어려움속에서 시련과 고난속에서 반드시 이기게 하시는 주님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에베소서 1장 18절-19절에서 '너희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고 권면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은 인생의 큰 비극입니다. 헬렌켈러의 말처럼 시력은 있지만 비전은 없는 사람이 불행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아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네 살구나무를 봅니다. 예레미아는 겨울에도 살구나무를 보았습니다. 살구나무 꽃이 피는 봄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전을 가지고 기도하는 자는 인생의 겨울속에서도 희망찬 봄을 보는 사람이 됩니다. 추운 겨울에 봄을 노래할 줄 압니다.
비전을 품고 싶은 분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인생의 바른 지도를 보여주십니다. 지도는 전체를 보여주고 방향을 보여줍니다. 틀린 지도를 가진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대하시는 비전을 발견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주시는 꿈, 주님의 세미한 음성보다 인간의 출세를 위한 목표에만 귀를 기울이고 힘을 쏟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서 진정으로 더 원하시고 더 기대하시는 꿈과 비전을 기도를 통해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나를 어떤 방향으로 사용하실 것인지 깨닫게됩니다. 우리는 간혹 실수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기 때문에 무조건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꿈으로 삼는 것은 때로 위험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기 전에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기꺼이 원하시며 허락하시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때로 우리는 적극적인 신념, 인간 스스로가 가지고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에 깊이 사로 잡혀 있기에 하나님의 뜻과 대립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 없이 내 의지 내 생각 내 임의로 비전을 품고 꿈을 가지는 것은 진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참된 믿음의 길과 대립되는 신념이며 욕심이며 야망입니다. 인간의 내면에 흐르는 욕망에 근거한 꿈은 진정한 꿈을 실현하는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참 많은 장애를 안겨줍니다. 우리는 비전을 품고 기도하면서 이러한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잡아야 합니다.
3. 비젼은 믿음으로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신과 불 신앙 때문에 인생의 꿈을 잃고 자포자기하려고 했던 모세를 향해 7-8절에서 계속 반복하는 말씀이 있습니다.가라는 말씀입니다. 한 두가지 실망스런 사건 때문에 삶의 의욕과 기운이 빠진 채로 너무 오랫동안 주저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서 앞으로 가라"고 거듭 당부합니다. 하나님은 "가라"는 말씀을 다섯 번이나 반복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어떤 실망과 좌절과 체념의 자리에 앉아 계십니까? 한가지 작은 실망 때문에 너무 오래 동안 침체의 자리에 머무르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오늘 아침 그 모든 낙담과 퇴보의 자리에서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은 일어나는 신앙입니다. 가장 큰 절망인 죽음속에서도 일어나셨던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누구를 향해서든지 그 절망과 패배의 자리에서 비전을 보고 일어나라고 명령하십니다.
·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
· 네 병상을 들고 일어나라
· 네 불행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 너를 묶어놓고 있는 결박을 풀고 일어나라 , 너를 막아놓고 있는 돌문을 열고 일어나라
여러분 모두 힘차게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전을 가진 자는 일어설 수 있습니다.
다 함께 해보십시오. 믿음으로 고백할 때 하나님이 힘을 주십니다.
· 내 병상을 들고 일어나라 (내 병상을 들고 일어나라)
· 내 불행의 자리에서 일어나라(내 불행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 나를 막아놓고 있는 돌문을 열고 일어나라 (나를 막아놓고 있는 돌문을 열고 일어나라)
절망속에 있는 분들은 다시 일어나십시오. 힘없이 걸어가는 분들은 다시 힘을 내서 뛰십시오. 뛰시는 분들은 날개를 활짝펴고 하늘을 향해 나십시오. 성공의 날개를 달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까? 성공의 날개로 날고 계시는 분들은 주님이 주시는 비전을 다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분명한 목적을 향해 가는지를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추락할 수 있습니다. 엉뚱한 곳으로 갈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8절 말씀: "여호와께서 너희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사 그들과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하신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가서, 얻을지니라"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조상 대대로 약속해온 그 축복의 땅이 앞에 있으니 일어나 들어가서 얻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복을 주시어 이루게 하십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비전이 있는 사람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비전을 품은 자가 자포자기만 하지 않으면 기적은 일어납니다. 그래서 주님은 더 큰 비전을 품고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미래는 현재보다 천 배나 더 나아지는 축복의 기적이 펼쳐질 것입니다. 인생을 망치는 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꿈을 잃어버리는 것, 비전을 상실한 것입니다.
미국 기독교의 지도자 죤 멕스웰은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차이를 이렇게 간단히 대비시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삶의 목적이 있고 비젼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꿈에 자극을 받아 그꿈을 달성하기 위해 계속 앞으로 나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현재만 보고 지금만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실패하는 사람은 오늘에 의해서만 자극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현실에 급급한 사람들입니다. 직장이나 직업상의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삶의 깊이가 부족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비젼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일을 이룰 수 없고 쓰임받을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급하면 문제중심으로 우리의 시각을 바꿉니다. 오 내 딸이, 오 내 아들이, 내 사업이, 내 집안이 큰일났어 큰일났어. 문제 중심일 때 우리는 언제나 제거하려 하고 문제중심일 때 우리는 언제나 비판과 판단을 하려하고 분석을 하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이 문제 중심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새로운 기회와 비전이 중심이 될 때 뭔가 창조하려 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문제를 다 덮어버리고 가나안을 보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아야 합니다. 사막의 온도가 어떻다는둥, 왜 덥냐는둥, 왜 물이 없냐는 둥, 여리고가 막혔다는 둥 이런 생각만 가지고 싸우다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판단과 비판앞에 무너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기 자신의 불평과 원망 앞에 무너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의 분노나 빈정거림 앞에 무너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만과 자존심앞에 무너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맞서 싸우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이름을 힘입고 싸우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빈정거림앞에 싸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꿈과 비전을 볼수 있다면 올해 우리의 삶이 가정이 일터가 우리교회, 우리 민족의 미래를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이 위대한 도전의 공간의 우리를 기다릴줄 믿습니다. 날개를 펴십시오, 여러분의 삶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힘차게 오르십시오. 비젼의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믿고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열심히 뛰십시오. 땀흘리십시오.
그렇다고 자신의 육신적 목표를 세우는 일을 무시해선 안됩니다. 사업가 의사 과학자 법관 경찰 군인 건축가등은 비전을 이루기 위한 인생의 중간 목표입니다. 비전을 이루기 위한 중간 목표인 이 작은 꿈들을 성취하는 즐거움도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큰 것만이 아니라 우리 삶속에 작은 것들도 바꿀 수 있는 것도 위대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 경건의 모양만 있던 성도가 경건의 가치를 깨닫고 경건의 생활에 몰두하여 자신의 삶에서 경건의 능력이 드러나기 시작한다면 그는 대단한 꿈을 이룬 사람들입니다.
▶ 늘 빚을 지던 사람이 그리스도안에서 주님과 더불어 꿈을 가지고 계획을 세우며 절제하는 미덕을 갖추고 정직과 성실을 바탕으로 빚을 줄일수 있었다면 꿈을 이룬 것입니다.
▶ 또 성격이 급한 사람이 주님의 성품을 본받기 위해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급한 성격이 어느정도 변화되는 자리에 이르렀다면 그는 작은 꿈을 달성한 셈입니다.
▶ 인간관계에서 늘 부딪히던 사람이 원만한 인간관계의 개선을 위해 자신의 모난 성격을 고치려고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정한후 날마다 인간관계와 관련된 성경구절을 묵상하고 고쳐야 할 부분을 파악하며 기도하며 노력하는 가운데 성령의 도우심으로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면 그것은 작은 꿈을 달성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일만 아니라 가정일, 회사일, 자신의 영적 정신적 전문적 발전을 위해 계획하고 노력하는 일도 꿈을 실현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일상 생활속에서 작은 봉우리의 꿈들을 성취하는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우리 일상생활의 꿈들을 이루는 것으로 우리의 짧은 인생이 끝나지 말았으면 합니다.
요즘 광고에 "여러분---- 부-우자 되세요 (BC카드 광고 카피)" 처럼 부자가 우리 꿈과 비전으로 끝나지 말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이룬 꿈을 가지고 주님의 영화로움을 위해, 영혼구원을 위해, 어려운 처지에 놓인 자들을 위해 사는 비전을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꿈은 무엇이며 그리스도인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우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럭저럭 하루 하루 살다가 세상을 떠날 때 주님앞에 가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을찌도 모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위대한 꿈 고상한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말했습니다. 잠언 29장 18절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박국 2장 2절에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이 없으면 어리석은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꿈이 없으면 방자해집니다. 비전이 없는 인생은 휘청거립니다.
인생의 작은 꿈을 이룬다고 우리의 육적인 꿈이 거룩한 비전을 이끌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영적 비전이 육신적인 생활의 야망, 꿈을 이끌고 지배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믿음과 기도로 가능합니다. 우리의 힘은 육신적인 생활의 야망, 욕심의 꿈을 이길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힘으로만 가능합니다.
올 한해 비전으로 승부합시다. 열심히 꿈을 통해 비전을 품고 달려갑시다. 수고하며 땀흘립시다.
이시간 결단합시다.
신앙의 결단은 위대합니다. 결단은 꿈을 비젼을 행동으로 연결시켜 주는 통로입니다. 결단이 없으면 행동은 우리의 비젼의 지배를 받지 못합니다. 상황의 지배를 받고 맙니다. 결단과 용기는 인간의 모든 자질에 불을 붙입니다. 비젼을 이루게 합니다.
찬양합시다.
주님뜻대로 살기로 했네
우리 눈감고 결단합시다.
결단할 때 우리의 의지에 주님의 능력이 임합니다.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 이제 주님이 원하시는 꿈, 비전이 있는 삶을 살겠습니다. 작은 것, 눈앞에 이익만 보지 않고 우리 삶을 인도하시는 주님의 계획을 보고 그 계획을 이루며 살게 하소서.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겠습니다. 세상의 허무한 것에 인생을 걸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신 비젼으로 우리의 생각과 가치를 주님께 맞추며 살겠습니다.
우리 이시간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기도>
하나님! 주님을 향해 우리의 손을 들었습니다. 이 손을 붙잡아 주시옵소서. 우리 연약한 손 때로는 힘겨워 하는 이 손길들을 붙잡아 주시고 우리가 사는 동안 사랑하는 주님이 인도해 주시옵소서. 주님의 사랑을 믿고 주님의 능력을 믿고 겸손히 진지하게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하나님, 내 욕심이 아니라 주님이 계획하시고 원하시는 모습으로 내 인생을 만들어 가게 주님께 맡기게 하소서. 우리가 살기에 급급하고 힘겨워, 마음으로 퇴색되고 생활속에서 부서졌든 꿈, 흔들려야 했던 우리의 꿈, 비전들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가정의 꿈을, 교회의 꿈을, 이 민족의 꿈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 때문에 우리의 비젼이 회복되고 우리의 비젼이 실현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