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 2025년 05월 09일 (금요일)      로그인      회원가입
Home     카이캄, 51회 134명 목사안수식 / 4페이지 설교법               지구촌교회 담임목사에 김우준 목사 청빙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명성교회에서               빗속에서도 울려 퍼진 부활의 기쁨 / 지구촌교회 제4대 담임 후보에 한인 목회자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 / '무장공비→ 목사' 김신조 별세 / 이재명 지지율 1위               헌재 전원일치로 윤석열 대통령 파면 /교회 건물 명의만 소유했던 목사…법원               산불 피해 한국교회 지원 총력 / 고령 교인 10명 중 6명               기독교인 수, 감소 멈추고 안정세 /일제 침략으로 예수 믿었으니 '수고했다'고 말해야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 이마에 십자가 인터뷰 출연               사순절에 대한 흥미로운 5가지 사실/ 트럼프 2기 첫 내각 회의, 목사·장관인 터너의 기도로 시작               국회 앞 25만 인파 “3.1정신으로 체제 전쟁 승리” /인사만 잘 해도 좋은 일이 생깁니다              

  홈     강대식     강문호     계강현     고신일     곽선희     곽창대     권오선     권오진     김경진     김광일     김기석     김도완     김명혁     김병삼     김삼환     김상복     김상수     김성광     김성수     김승규     김양인     김영훈     김용혁     김원효     김은호     김의식     김재곤     김정호     김진수     김진흥     김창규     김창진     김형익     김홍도     남수연     노창영     노환영     류영모     명설교(A)     명설교(B)     명설교(C)     문기태     박병은     박봉수     박신진     박요한     박일우     박진호     박한응     박형근     배영진     배의신     배진기     배혁     서명성     서진규     손재호     송기성     스데반황     신만교     신현식     안두익     안효관     양인국     양향모     염두철     오주철     오창우     옥한흠     원영대     유기성     유민용     유은호     유장춘     유평교회     이강웅     이건기     이국진     이규현     이기복     이대성     이동원     이동희     이백민     이삼규     이상호     이성우     이성희     이양덕     이영길     이영무     이우수     이윤재     이은규     이익환     이일기     이재철.박영선     이재훈     이정원     이정익     이종철     이준원     이지원     이하준     이한배     이호준     임현수     장부완     전승문     정근두     정오영     정준모     조봉희     조상호     조성노     조영식     조용기     조학환     조향록     주준태     지성래     지용수     차용철     채수일     최동규     최인근     피영민     피종진     하용조     한경직     허창수     홍문수     홍정길.임영수     홍종일     외국목사님     .     괄사(왕)     기도문     (1)새벽     새벽.금언     인물설교     상식/주일     장례,추도.심방     가정설교     영문설교     목회자료/이단     교회규약     예화     성구자료     강해설교     절기설교     창립,전도,헌신,세례.주례사     어린이.중고등부     << 창세기>>     출     레     민     신     수     삿     룻     삼상     삼하     왕상     왕하     대상     대하     스     느     에     욥     시     잠     전도     아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     <<마태복음>>     막     눅     요     행     롬     고전     고후     갈     엡     빌     골     살전     살후     딤전     딤후     딛     몬     히     약     벧전     벧후     요일     요이     요삼     유     <<요한계시록>>     말씀별설교     제목별설교     A)행사,심방     B)행사심방     예수님행적설교     성구단어찾기     이야기성경     설교(틀)구성하기     자주사용하는본문     구약사건     신약사건     구약삽화     신약삽화  

:: 로그인 ::
 ID   
 PASS   
로그인  회원가입
Home
  설교작성법(여기누르면 다나옴)
  설교잘하는 방법(여기누르면 다나옴)
  김기홍 설교학
  동영상.간증자료(여기누르면 다나옴)
  교계 뉴스 ------- (전체보기)
  생활전도(여기누르면 다나옴)
  전도편지
  참고 설교(성구)
  장례식 설교(내부에 많이있음)
  웃음치유와 영업
  기타

설교내용검색

성경 찾기

네이버.다음.구글


검색



Daum


(방송)설교 교회

해외교회사이트

예배와 찬양


목회자 컬럼
  • 교회와신앙칼럼
  • 뉴스미션칼럼
  • 뉴스엔조이칼럼
  • 당당칼럼
  • 기독공보칼럼
  • 기독목회칼럼
  • 크리스천칼럼
  • 타임즈칼럼
  • 김명혁목사
  • 김형준목사
  • 양인순목사
  • 이동원목사
  • 조현삼목사
  • 밤중소리

  • Home

    믿음의 정병 고넬뇨
    2002-05-03 17:34:00   read : 2181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사도행전 10:1-8



    오늘은 사도행전 10장 1절에서 8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믿음의 정병 고넬뇨"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고넬뇨는 로마군 장교입니다. 가이사랴라고 하는 곳에 로마군이 주둔을 했을 때 부하 100명을 거느리고 있던 장교로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모릅니다. 그의 믿음은 로마군인 이전에 믿음의 정병이라 생각이 되어져서 '믿음의 정병 고넬뇨'라고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군인이라고 다 똑같은 군인이 아니지 않습니까? 군인 중에는 훈련이 힘들고 군인의 규칙생활이 지겹다고 도망가는 도망병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믿음의 군인들 즉 신자들도 이리 저리 도망을 다니는 도망병과 같은 신자가 있습니다. 또한 싸우다가 본 부대에서 뒤쳐져 적진을 헤매고 다니는 낙오병이나 패잔병도 있습니다. 이런 군인도 군인입니다. 그러나 적진 가운데를 헤매고 다니면서 군인 노릇은 전혀 못합니다. 믿는 사람 중에도 이처럼 세상을 헤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포로로 잡힌 군인이 있습니다. 포로로 잡힌 포로병도 분명히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그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지금 누구 좋은 일을 하고 있습니까? 믿는 사람에게도 포로병과 같은 그런 교인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부상병이 있습니다. 용감히 싸우다가 부상을 당했는데 부상병이 수용되어 치료받는 곳에 가 보십시오. 얼마나 시끄러운지 모릅니다. 그냥 욕지거리를 하고 불평하고 원망을 합니다. 그렇지만 대한민국 국군입니다. 오늘날 교인들 가운데도 부상병과 같은 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런 교인들은 얼마나 욕지거리를 잘 하고, 원망을 잘하고 불평을 잘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가하면 계급도 달지 못하고 훈련을 받는 훈련병도 있습니다. 교인 중에는 세례를 받지도 못하고 있는 훈련병과 같은 교인도 있습니다. 그리고 정병이 있습니다. 정병들은 베레모를 쓰고 비행기에서 뛰어 내리라고 하면 뛰어 내리고 담벽을 차고 나가라고 하면 차고 나가고 앞장서서 죽든지 살든지 달려가라 하면 앞장서서 달려갑니다. 이런 사람이 진짜 군인입니다. 정병입니다. 정예부대 특수부대입니다. 고넬뇨가 바로 그런 정병이었습니다. 그의 믿음이 어떠했기에 그랬는지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는 말씀을 따라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경건한 믿음 (1-2)
    경건이란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제가 처음에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공부를 한 두어 서너 시간하고 경건회가 모인다고 그러면 학생들이 강단으로 모두 모입니다. 처음에 저는 경건회가 뭐야? 그랬습니다. '경건'이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보니 '좋다'라는 단어와 '예배'라는 단어를 합해서 만든 단어가 경건입니다.
    예를 들어서 '오늘 참 예배가 좋았다'라고 하면 은혜도 받고 문제도 해결 받고 보람도 느낀다는 의미입니다. 예배가 잘 되면 그 사람의 믿음이 잘 됩니다. 예배가 엉망이면 그 사람의 믿음도 엉망이 되어 버립니다. 예배와 믿음이 다릅니까? 예배는 드리지도 않는데 믿음이 잘 되고 예배는 엉터리인데 믿음은 제대로 됩니까? 예배가 바로 될 때 믿음이 바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좋은 예배를 드릴 때 그 사람은 경건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하였습니다. 연습은 한번 두 번하고 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반복하다보면 선수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예배를 드리고 또 드리다 보면 그 사람 자체가 경건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고넬뇨의 믿음은 경건한 믿음인데 그런 믿음은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절에서 2절을 보면 '가이사랴에 고넬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고넬뇨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경외하였고, 경건하여 백성을 많이 구제하였고, 경건하여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첫째 경건은 반드시 경외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경외라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경외라는 말은 '무서워하다, 두려워하다'라는 말입니다.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라는 말씀을 '하나님을 무서워하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했다'는 말은 우리가 도둑놈을 무서워하듯이 무서워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무서운 것이 많이 있습니다. 병들까봐 무섭고, 사업이 망할까봐 무섭고, 죽을까봐 무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그런 것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무서워합니다. 이런 사람은 목에 총칼 가져다 대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일을 '하라'고 해도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지 말라'고 그래도 '하나님이 하라'고 하셨을 경우는 그 일을 해버립니다. 다른 것은 무섭지 않고 하나님 밖에 무서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누가 당합니까? 하나님 앞에 목숨을 내 놓고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제일 무서운 사람이 목숨을 내 놓은 사람이 아닙니까? 그래서 루터는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못 봐도 하나님은 보지 않습니까? 사람은 못 들어도 하나님은 다 듣지 않습니까? 사람은 몰라도 사람은 다 알지 않습니까? 그 하나님을 무서워하게 되면 사람이 무섭지 않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알기 전에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고, 사람이 보기 전에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시고, 사람이 듣기 전에 하나님은 다 듣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무서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을 무서워 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이 말을 뒤집어 이야기하면 누가 사람이 들을까봐, 사람이 볼까봐, 사람이 알까봐 벌벌 떨고 무서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무섭지 않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사람이 볼까봐만 무서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안보는 데서는 별별 짓을 다하곤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못 봐도 하나님은 보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사람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절대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여호와를 경외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경외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모르는 것을 다 알고 계신 하나님을 표준으로 하게 되면 사람이 보든 안 보든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경건한 사람은 이렇게 경외로 나타납니다.
    둘째 경건한 사람은 백성을 많이 구제합니다. 우리가 구제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너희가 구제할 때 나팔 불면서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나팔을 분다는 것은 떠든다는 것입니다. 구제할 때 아무개가 굶는 것을 보고 쌀 한 가마니를 도왔다는 식으로 나팔불며 구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도 모르게 하라는 뜻입니다. 나팔을 불면서 하는 구제를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한들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영광 다 받고 네 이름을 다 나타내었으니 나는 그 구제와는 상관없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구제를 많이 하고 교회 봉사를 많이 하는데도 하나님께서 '내 몰라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네가 영광을 다 받아 버렸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돌아올 영광이 어디에 있느냐? 나는 네 봉사 네 구제를 모르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고넬뇨는 백성을 많이 구제한 것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구제를 했으면 그랬겠습니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외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사랑 아닙니까? 가난한 사람에게 쌀 한가마니 사준 다음 쌀 한가마니 사 줬다고 나팔 불고 돌아다녀 보십시오. 내 이름은 날는지 모르지만 그 한가마니 받은 사람은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그것도 사랑이라고 하겠습니까? 진정 사랑한다면 오른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 다 기억하신 바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참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피부에 와 닿는 사랑이요, 가슴에 닿는 사랑이요, 피가 통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진정한 구제입니다. 경건은 이렇게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셋째 경건한 사람은 늘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기도를 뭔가 아쉬워서 자꾸 달라고만 하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아쉬운 것이 없을 때 나는 기도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쉬운 것을 달라고 하는 것은 기도의 여러 부분중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입니다. 그렇기 까닭에 기도는 항상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끊어지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아쉬울 때 달라는 소리만 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하나님을 찾는 일이 없으면 되겠습니까? 부부지간에도 항상 대화가 활발해야 되지 않습니까? 아쉬울 때만 남편을 찾고 아쉽지 않을 때는 밥상을 가져다 바치고 먹겠으면 먹고 말겠으면 말라고 내버려두고, 나는 여기서 자고 당신은 저기서 자고, 아쉬울 때는 찾아가서 돈 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고넬뇨는 항상 그렇게 기도 생활로 그의 경건이 나타냈습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먼저 나 자신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성전에 기도하러 바리새인과 세리가 함께 올라갔습니다.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하나님! 제가 저런 서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저 세리와 같이 간음하거나 불의 하거나 토색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기도 하고 십일조도 받칩니다. 저런 세리들과 같지 않습니다"라고 기도를 합니다. 여러분 이 소리가 기도입니까? 하나님 앞에 제 자랑만 늘어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놈의 세리라고 하면서 자꾸 남의 가슴을 칩니까? 하나님은 그 기도를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런가하면 세리는 멀리 서서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렇듯 기도는 제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왜 남의 가슴을 칩니까? 시어머니는 '하나님! 이번 주일에 교회 가서 우리 며느리 은혜 받고 녹아지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하고, 며느리는 '오늘 교회에 나가면 우리 시어머니 은혜 받고 꼬꾸라지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하면서 시어머니는 며느리 가슴을 치고 며느리는 시어머니 가슴을 칩니다. "목사님 시어머니는 며느리 구박 좀 하지 말라고 설교 좀 해 주십시오"그런 것을 부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의 가슴을 치며 밤새워 기도한들 그것이 기도입니까? 그것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겠습니까?
    하나님은 바리새인의 기도는 상대를 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가슴을 치고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는 기도를 드린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이것이 기도 아닙니까? 경건은 이렇게 기도로 나타납니다. 고넬뇨는 이렇듯 경건한 믿음의 정병이었습니다.

    둘째, 꿈을 가진 믿음 (3-4)
    우리에게는 꿈이 있어야 합니다. 이번 청년회 동계수련회 때 '이번 수련회 때 오셔서 목사님의 청년 시절을 이야기 해 주십시오'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나의 젊음의 때를 청년들에게 이야기 한 것은 36년 만에 처음이었습니다. 저의 결론은 젊음의 때는 고난과 고생을 빼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중학교 3학년 때 장질부사에 걸려서 죽을 뻔했습니다. 지금은 장질부사가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 때는 집안을 쓸어 내리고 동네를 쓸어 내리는 큰 역병이었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저만 앓고 살아났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나를 살려 주셨구나. 분명코 죽는 건데 살려 주셨으니 뜻이 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병을 통해서 제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나 이제는 죽으나 사나 목사가 되어 하나님의 일만 하는 주의 종이 된다"이것이 저의 목표였고 하나님의 부르심이었고 이것이 저의 꿈이었습니다. 제가 피난 생활을 하면서 목사가 되겠다는 꿈이 없었다면 그렇게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밥이나 벌어먹고 살면 되는데 무슨 고생을 하겠습니까? 꿈을 갖고 그 꿈을 목표로 하고 공부하려다 보니 돈이 생기면 등록금을 마련하고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하면 휴학하고 울어야 되었습니다. 꿈이 있으니까 고생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꿈이 있으니까 그 고난을 이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잠언을 보면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꿈이 있으면 고난을 이겨내지만 꿈이 없으면 그 고난 속에 묻혀 버립니다. 그렇기 까닭에 꿈을 가진 믿음이어야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절에서 4절을 보면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뇨야 하니 고넬뇨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기도 생활만 열심히 하던 경건한 고넬뇨가 제 9시에도 기도를 했습니다. 제 9시면 우리나라 시간으로 9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6시간을 더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시간이 됩니다. 제 9시는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를 가리킵니다. 오후 3시면 참을 먹는 시간이요, 6시가 되면 모든 일을 다 끝내는 시간입니다. 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점심 먹고 일하다가 잠깐 쉬면서 참을 먹고 일하다가 6시 되면 일을 끝내는 것입니다. 유대나라는 6시부터 오후 6시까지가 한 낮이라고 계산합니다.
    고넬뇨는 오후 3시 참 먹는 시간에 기도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먹느라고 야단이요, 노느라고 야단하는데 고넬뇨는 그 시간에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환상이 보였습니다. 이것은 개꿈이 아닙니다. 잠자다 꾸는 꿈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중에 천사가 나타나더니 "네 구제와 네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이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기도와 구제가 다 하나님 앞에 상달이 되어 하나님께 기억하신 바 되었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리고는 "'빨리 베드로를 청하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를 청할 때는 엄청난 은혜를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닙니까? 환상 중에 그것을 본 것입니다.
    환상 즉 비전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못할 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창 배고플 때는 눈을 감고 정신 없이 별것을 다 차려 먹습니다. 그런 배고픔 당해 보지 않았습니까? 눈을 감고 다 차려먹어 보는 것은 공상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눈을 감고 '내가 결혼하여 아흔 아홉칸 짜리 집을 짓고 살겠다' 생각합니다. 장가를 가게 되면 아가씨한테 가락지 하나 사줄 돈도 없으면서 그런 공상을 합니다. 모두 이루어지지 못할 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여 주신 환상은 이루어질 꿈입니다. 그러므로 비전과 꿈은 가진 믿음이어야만 합니다. 꿈을 가진 까닭에 고난이 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꿈 까닭에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한다는 사실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국 뉴욕에 유명한 웨스트사이드 침례교회 목사님이 한 분이 계십니다. 그 목사님의 가계 즉 가정을 조사해 보았더니 형은 말할 수 없는 주정뱅이로 완전히 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은 그렇게 유명한 교회에 유명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심리학자들이 '이것은 연구해 볼 문제다, 어떻게 형제가 그렇게 달라질 수 있나?'하여 그 가계를 조사했더니 아버지가 유명한 술 주정꾼 이었습니다. 그래서 맏아들에게 가서 "당신은 어떻게 아버지가 하듯이 술 중독자가 되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맏아들이 하는 이야기가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본 것이 그것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 않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 즉 훌륭한 목사에게 가서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목사가 되었습니다"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둘째 아들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라고 똑같이 대답합니다. 그러나 내용은 달랐습니다. "아버지가 저렇게 술 먹고 망하고 인생 망치는 것을 보고 내가 어떻게 술을 먹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나는 죽어도 술을 입에 안 대려고 금주 운동에 앞장섰다가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첫째 아들은 그런 환경에 빠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꿈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그 환경을 극복하고 이겨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꿈이 있었기때문입니다. 형은 꿈이 없었으나 동생은 꿈이 있었기 까닭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꿈을 가진 믿음은 반드시 승리하고 성공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생활이 된 믿음 (5-8)
    우리의 믿음은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생활은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과 생활이 떨어져 있으면 안됩니다. 떨어져 있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합니다. 부모 형제와 함께 가정을 가지고 살면 가정 생활, 학교 다니면서 공부하는 학교 생활, 군대 가서 복무하는 군대 생활, 장가를 가서 새살림하는 결혼 생활, 직장에 나가면서 사회 생활을 합니다. 이런 생활은 예수를 믿으나 안 믿으나 대한민국 남자라면 다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생활에 덧붙인 더 가짐의 생활입니다. 생활은 따로 있고 또 신앙은 따로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떼어버리면 이 다섯 생활은 전혀 믿음의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나와서 거룩 거룩은 혼자 다 합니다. 그리고는 시장에 나가서 바가지는 혼자 씌우는 사람입니다. 신앙은 교회에 놓고 가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주소와 생활의 주소가 다르기 때문에 전혀 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신앙이 생활화 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화를 보면 등장하는 배우의 집에서는 반드시 자기 아내와 아들 딸이 있는데 영화 장면에 나타날 때에는 남의 본처를 끌어안고 내 아내라고 하고 남의 아들을 보고 내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는 다른 여자를 내 아내라고 하고 내 아들이라고 합니다. 무대에서와 완전히 다릅니다. 여러분 이것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이런 믿음이 믿음입니까?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믿음으로 집으로 가지고 가십시오. 집에 가서 '아멘 아멘'하십시오. 학교에도 가지고 가서 시험 칠 때 '아멘 아멘'하십시오. 왜 자꾸 컨닝을 합니까? 그리고 교회학교에 나와서는 학생회 회장이라고 합니다. 회장이 컨닝을 하다니요? 믿음과 생활의 주소가 다르고 전혀 따로 떨어져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데 모아져서 믿음이 생활이 되고 생활이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고넬뇨는 생활이 된 믿음의 정병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5절에서 8절을 보면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뇨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고 하였습니다.
    천사가 '지금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청해 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보냈습니까? 다음에 보냈습니까? 지금 보냈습니다. 즉시 순종했습니다. 순종을 생활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믿음에 순종이 빠지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순종을 생활이라고 바꾸어도 좋습니다. 믿음에서 우리의 생활이 빠져나가면 겉껍데기가 되는 것입니다. 생활에서 믿음이 빠지면 믿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까닭에 우리의 믿음은 즉시 순종하는 믿음, 즉 생활이 된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생활이 된 믿음이 '네 믿는 대로 되라'하면 믿는 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는 대로 되고 믿는 만큼 받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생활이 된 믿음입니다. 이런 생활이 된 믿음이 여러분들에게 정말 신앙의 정병으로서의 믿음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넬뇨 백부장의 믿음은 첫째 경건한 믿음입니다. 그 경건한 믿음은 경외로 나타났고 사랑으로 나타났고 기도로 나타났습니다. 둘째 꿈을 가진 믿음입니다. 꿈을 가질 때에는 반드시 고난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꿈 까닭에 고난을 이기고 승리합니다. 셋째 생활이 된 믿음입니다. 이것이 고넬뇨의 정병이 된 믿음입니다. 생활과 믿음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생활 신앙이 여러분들의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독자 설교

    설교작성하기 (3년 후에는 자동삭제됩니다.)
    이 름 E-mail
    제 목



    프린트하기 기사메일보내기 독자설교


    이전으로
    승리하는 자는?
    생활의 열매
    경배하며 고백하기까지
    서머나 교회의 실상
    그 백성에게 베푸신 은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
    복 중의 복
    보다 더 귀한 한 사람
    믿음다운 믿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께서 헤아리스는 바
    빌립보에서 예루살렘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둥지에 깃들이는 믿음
    예수를 믿는 자마다
     | Home | 사이트맵 | 설교검색 | 설교전체보기 | 설교쓰기 |___ |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 김효자 /사업자번호831-29-0156/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 /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4394-4414 /E-mail:v919@naver.com   Contact Web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