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모델 2002-05-03 17:39:12 read : 2313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누가복음 16:19-31
오늘은 누가복음 16장 19절에서 31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믿음의 모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믿음이 다 똑같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롯의 부부는 한 솥의 밥을 먹고 한 지붕 밑에 살아도 한 사람은 구원을 얻고 한 사람은 망하지 않았습니까? 믿음이 달라서 그런 것입니다. 부부지간에도 믿음이 다르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가하면 형제지간에도 믿음이 다릅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과 아벨을 예로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서 그의 제사와 아벨 자신을 열납하셨는데 그 형 가인과 그 제물은 하나님께서 돌아 보시지도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형 가인은 살인자가 되고 동생 아벨은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형제지간에도 이렇게 믿음이 다릅니다. 믿음은 한 날 한 시에 30년을 믿고 50년을 믿었다고 해도 믿음은 똑 같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나사로라는 사람과,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사람과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부자라고만 기록된 사람, 이렇게 세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그 사람들의 믿음이 다 다릅니다. 그 세 사람들의 믿음 하나 하나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모델이 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믿음의 모델이라고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본문이 가르쳐 주는 말씀을 따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믿음의 모델은 어떤 것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건강한 믿음 (나사로)
사람은 건강해야 합니다. 건강하면 자꾸 일하고 싶어집니다. 놀고 먹으라해도 괴로워합니다. 어디서 일 할 곳이 없나 하고 안타까워합니다. 사람이 건강하면 일하다가 나이 50여세 혹은 60세가 되면 은퇴를 하게 됩니다. 그 동안 다 벌어 놓았으므로 먹을 것이 있지만 일을 못하게 되면 사람이 빨리 늙게 됩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은 자꾸 일하고 싶어합니다. 건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봉사를 하고 싶어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습니다. 병든 사람은 남에게 피해를 줍니다. 믿음이 건강한 사람은 남에게 유익을 주면 주었지 절대로 피해를 주지 않습니다. 그러기 까닭에 우리의 믿음은 건강해야 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나사로는 첫째로 못 고치는 병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즉 문둥 병자였습니다. 여러분들이 문둥병에 걸렸다고 하면 지금처럼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면 이럴 수가 있나? 하면서 교회를 박차고 뛰쳐나갈 사람이 많을 겁니다. 이 사람 나사로는 문둥병이 들었음에도 믿은 사람입니다.
둘째 거지가 된 사람입니다. 가난은 서럽지 않습니까? 가난한 사람을 환영하는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가난만 해도 서러운데 더구나 거지였기에 멸시 천대는 혼자 맡아 놓고 받는 사람이 나사로였습니다. 여러분이 그쯤 되면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예수 믿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박차고 나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나사로는 거지가 되고도 예수님을 믿은 사람입니다.
셋째, 버림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거지라도 부모가 있거나 형제가 있으면 그래도 낫지 않습니까? 울어도 함께 울고 굶어도 함께 굶고 추위에 떨면서도 함께 잠을 자면 그래도 나을 겁니다. 살붙이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울어도 혼자 울어야 합니다. 아파도 혼자 아파야 합니다. 굶어도 혼자 굶어야 합니다. 세상에 이처럼 괴로운 경우가 어디에 있습니까? 요즘 부모가 있고 형제가 있는 학생이라도 학교에 가서 왕따를 당하면 목메어 자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외로워 못 견디겠다는 말이 아닙니까? 버림받은 나사로 이상에 외로운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지나가는 사람 즉 오고가는 사람이 하나도 거들떠보지를 않습니다. 혹시라도 만나면 재수 없다고 피해갑니다. 그런 상황에서 살맛이 있겠습니까? 그런 지경이 되더라도 여러분은 예수를 믿겠는가? 말입니다. 나사로는 그런 지경에도 예수님을 믿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의 믿음이 그런 상황에서도 지켜질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아십니까? 믿음이 건강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연약했거나 믿음이 병들었다면 하나같이 다 떨어져 나갑니다. 건강한 믿음이 이렇게 귀한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어떻게 건강해 질 수 있는지가 문제입니다. 먼 앞날의 세계를 바라다보기 때문입니다. 발등에 떨어진 불만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계시면 이럴 수가 있나? 하고 원망하며 좌절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먼 훗날의 세계, 죽음 저 건너편의 세계까지 바라다보았습니다. 나사로는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산다면 몇 일을 사느냐? 이 세상에서 우리가 출세를 하면 얼마나 하겠느냐? 이 세상의 것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는 자세입니다. 이 세상은 잠깐 뿐이요, 죽음 저 건너편에는 있는 영원한 세계가 더 귀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궁극적인 목적 또는 궁극적인 목표를 영원한 세계에 두고 살았았습니다. 그래서 불행을 극복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나사로의 믿음이 건강했던 이유입니다.
여러분들도 발등에 떨어진 불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작은 고난일지라도 이겨내지를 못합니다. 먼 앞날의 세계를 바라다보십시오.
일년 앞을 바라다보는 사람은 농사를 짓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일년 앞을 바라보기 까닭에 일년 동안의 농사가 잘 되면 웃고 잘 못되면 통곡을 합니다. 일년 이상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년 앞을 바라다보는 사람은 나무를 심습니다. 일년동안에 결과를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십년 앞을 내다보기 때문입니다.
백년 앞을 내다보는 사람은 사람을 키운다고 합니다. 십년 이십에 사람을 키우는 동안 울고 웃지 않습니다. 백년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천년 만년이 아닌 영원한 세계를 바라본다면 이 세상의 것을 가지고 울고 웃지 않습니다. 어떤 고난과 불행이 겹겹이 닥쳐온다고 해도 다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믿음은 건강한 믿음이었습니다.
1888년에 첩의 아들로 태어난 일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아버지는 큰 벼슬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벼슬을 해서 자기 아내와 가족을 거느리면서도 기생집을 출입했습니다. 나중에는 기생과 정이 들어서 살림을 차렸습니다. 거기서 낳은 아들이 가가와도요히꼬라는 사람입니다. 가가와가 네 살 때 그의 아버지가 죽습니다. 그리고 다섯 살 때는 어머니가 죽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합니까? 할머니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할머니는 자기 아버지의 본처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호랑이 굴과 같은 거기에 들어가서 살수밖에 없었습니다. 본처의 입장에서 보면 첩의 자식이 들어온 것입니다. 얼마나 얄밉겠습니까? 상상을 해 보십시오. 온갖 멸시천대와 핍박은 다 받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따뜻한 사랑이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16살에 선교사를 만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19살에 그가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를 받고 얼마 안되어서 명치대학 신학부에 들어갑니다. 21살 되던 해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습니다. 폐병 중에서도 중증이었습니다. 얼마 동안 치료하던 병원에서도 이제는 고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에서 누워만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내가 죽는 날이 얼마 안 남았다면 내가 이렇게 누워 앓다가 죽을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다리 밑으로 찾아갔습니다. 거기에는 양아치들과 거지들이 모여 사는 곳이 아닙니까? 그곳에 가서 그네들과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생활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무엇인가 수입이 생기면 나누었고 복음을 전합니다. 일년이 지나니까 기운이 좀 납니다. 또 일년이 지나니까 이제는 괜찮아 집니다. 삼년이 지나고 나니까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 동안에 약 한 첩을 쓴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같이 나은 것입니다. 그렇게 병이 다 나은 후 미국 장로교단에서 운영하는 프린스톤 신학교에 입학을 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일본으로 돌아와서 가르치기도 하고 자선 사업을 많이 했습니다. 21살에 폐병에 걸려 쓰러져 죽는다고 하던 사람이 73살까지 살았습니다. 일본에서는 성자를 내세우라고 하면 가가와도요히꼬를 내세웁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손양원 목사님을 내세우지 않습니까? 모두 성자입니다. 그가 그렇게 고난과 불행을 가지고 태어났고 또 불행이 겹쳤으나 그의 믿음이 건강했기 까닭에 그것을 다 이겨내고 성자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발등에 떨어진 불만 본 것이 아니라 먼 앞날의 세계, 죽음 저 건너편의 세계까지 바라다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총동원 전도주일에 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들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제 나이 69세입니다. 내일이면 70이 됩니다. 굉장히 지루하겠다, 70년을 살았으니? 라고 생각하실 분도 있을 겁니다. 저에게 한번 물어 보십시오. 얼마나 지루하냐? 고 말입니다. 제가 눈을 감고 누워서 생각하면 아직도 이팔청춘입니다. 그런데 제가 살면 이제 몇 년을 더 살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은 이렇게 짧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정을 붙이고 여기에서 우리가 울고 웃곤 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죽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죽음 저 건너편의 영원한 세계를 바라다보시면서 믿으시면 이 세상의 것은 있으면 좋습니다. 없어도 괜찮습니다. 나사로처럼 건강한 믿음을 가지면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더라도 건강한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경외하는 믿음 (아브라함)
경외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야레라고 합니다. 야레는 무서워하다 두려워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무서워 할 줄 알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하나만 알면 안됩니다.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즉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무섭다는 사실을 도외시하는 사람은 교회에서도 못되게 놀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폭군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안수집사가 제 정신에 아내를 때립니까? 술 먹고 와서 집안에서 난리를 일으키고 나중에는 창피해서 교회에도 못 나오고 이사가고 말지 않았습니까? 우리 교회 안수집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런 사람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무서운 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내 아내는 내 아내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딸입니다. 어디서 하나님의 딸에게 손을 댑니까?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만 생각하기 까닭에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좀 무서운 줄 아십시오. 죄가 얼마나 무섭고 죄가 얼마나 더럽고 죄가 얼마나 부끄럽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경외하는 믿음의 모델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이 100살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웠겠습니까? 눈에 통째로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했습니다. 아들이 자라고 자라서 열 살 쯤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너무 사랑하는지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브라함의 집에서 하나님이 내가 하나님인가?, 저 아들 이삭이 하나님인가?"라고 생각할 만큼 분간 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 이삭을 치워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집안에서 하나님 만큼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치우라고 하십니다. 치우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치워 버리십니다. 여러분들의 집안에서 여러분이 그렇게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저는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반드시 없애 버리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 아들 이삭을 내가 지시하는 산으로 데리고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번제란 양을 죽이고 잡아서 몽땅 태우고 재는 묻어 버리고 손을 툭툭 털고 오는 제사입니다. 이것이 없애버리라 또는 바치라는 뜻 아닙니까? 그 때 아브라함은 "예"하고 순종하였습니다. 하루를 가고 이틀을 하고 삼일을 갑니다. 춤을 추면서 갔겠습니까? 밥을 먹으며 잠인들 제대로 잘 수가 있었겠습니까? 얼마나 울면서 갔겠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마지막에는 제단을 쌓아놓고 장작을 벌려 놓고 아들을 결박하여 번제로 드리기 위해서 죽이려고 할 때 뒤에서 지켜보던 천사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하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이 뒤를 돌아다봅니다. "네가 이제야 여호와를 경외하는 줄을 내가 알았노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것은 '내가 사업이 망할까봐 두려워하지 않고, 암에 걸리는 것도 무섭지 않고, 죽는 것도 두렵지 않고 무섭다면 하나님 밖에 무서운 바가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총칼을 가져다 대고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면 아브라함이 번제로 드리겠습니까?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총칼을 가져다 대고 하라고 해도 하지 않을 일입니다. 또 금덩어리를 가져다 주면서 네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면 금덩어리를 끌어안고 아들을 번제로 드리겠습니까? 네가 다 가지라고 할겁니다. 금덩어리를 가져다 주어도 하지 못할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니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된 것이 바로 경외하는 믿음 때문입니다. 얼마나 복을 부어 주시고 그 받은 복이 전 세계에 전해지고 오늘날 우리까지 구원을 얻게 되지 않았습니까?(창22:12). 여러분, 복의 근원이 된 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경외하는 믿음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경외하는 믿음의 모델처럼 되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지금 45살 난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죽기 바로 전에 펴낸 글이 하나의 수기로 나왔습니다. 45살이면 한창 살아갈 나이입니다. 가정 생활도 재미있고 사업도 한창 할 나이요, 인생을 정말 즐겁게 살아갈 나이인데 병들어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 가지를 후회하는 내용을 그 글에 썼습니다.
첫째 가정을 너무 소홀히 여겼기 때문에 후회스럽다는 겁니다. 즉 너무 사업에 열중하다 보니 가정을 소홀히 여겼다는 겁니다. 가정은 하나의 하숙집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의 여관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니 가정이 뭐가 됩니까? 이제 내가 죽게 되었는데 그것이 잘 한 일인가? 사업을 위해서 가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가정을 위한 사업이라고 하게 되면 내가 잘 못 살아도 한참 잘 못 살지 않았는가? 그것이 자기에게는 후회스럽다고 했습니다.
둘째, 내가 이렇게 죽을 줄 알았으면 교회에서 이런 봉사를 하라, 저런 봉사를 하라 할 때 한번도 '아니요'라는 말 없이 다 순종했을 텐데! 내가 백년이나 이 백년을 살 것처럼 생각하고 지금은 너무 바빠서 죽을 짬도 없습니다 라고 핑계만 하였답니다. 봉사를 하나도 하지 않은 것이 지금 자기로서는 그렇게 후회스럽다고 했습니다. 죽을 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막 죽어 오는데 무엇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제는 내일 모레면 나는 죽을텐데! 내가 하나님께 봉사를 하나도 못하고 가는 것이 이렇게 후회스럽다고 했습니다.
셋째, 내가 이렇게 바쁘다고 날뛰면서도 '나는 무엇인가 해 놓았다'라고 할 정도로 나의 작품을 남기지 못한 것이 그렇게 한스럽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후회스러운 일을 쓰라고 하면 이 세 가지 일을 후회하지 않을 사람이 있습니까? 아마 아브라함에게 쓰라고 하면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참으로 아름다운 인생의 작품을 남겨 놓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여러분들은 현대판 경외하는 믿음의 모델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형식적인 믿음 (부자)
저는 농사꾼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농사짓는 것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농사를 지어서 곡식을 다 떨면 거기에 낟알들이 수북히 쌓입니다. 그것을 바람개비로 바람을 일으키면 맨 앞에 날아가서 쌓이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쭉정이입니다. 농사를 지을 때 쭉정이가 없으면 좋겠는데 쭉정이가 적지 않습니다. 쭉정이가 무엇입니까? 겉은 멀쩡히 갖추었는데 속이 텅텅 비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못쓰지 않습니까? 태워서 거름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농사꾼이 괴로운 일입니까? 교회 안에서도 믿음의 농사를 지어보면 쭉정이 교인이 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교회에 등록이 되어있습니다. 누가 물어 보면 '나는 광성교회 교인'이라고 합니다. 속이 텅텅 빈 쭉정이입니다. 형식만 교인이라는 말입니다.
그 쭉정이 교인이요, 형식적인 신앙의 모델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입니다. 이 사람은 어떤 주경신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제사장은 홍포라고 하는 붉은 자색 옷을 입고 속에는 세마포 옷을 입습니다. 본문을 보면 '자색옷을 입고 베옷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이 해석이 사실이라면 그 부자를 제사장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그 대문 앞에는 왜 문둥 병자 나사로가 누워 있습니까? 그 당시 문둥병이다 혹은 아니다라고 하는 진찰은 병원에서 하지 않고 제사장이 합니다. 제사장이 볼 때 문둥병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면 일주일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일주일을 기다려서 다시 봅니다. 그 때도 문둥병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면 일주일을 또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문둥병이 아니라고 판정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고 문둥병이라고 진단이 나면 쫓겨나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그래서 그 집 대문 앞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사장이 나중에 천국에 갑니까? 지옥에 갑니까? 지옥에 갔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라는 직분이 나를 천국에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라는 직분이 구원의 조건은 절대로 아닙니다. 장로라는 직분을 가지면 천국에 간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직분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도 지옥에 가지 않았습니까? 그러기에 직분을 가졌다고 구원을 얻는다 장담하지 마십시오. 직분은 구원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장은 그 백성들이 바치는 십일조를 가지고 큰 소리 치면서 호의호식하고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를 벌이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절대로 남에게 베풀거나 하나님께 받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것이 인생을 바르게 사는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잘 살기 보다는 바로 살아야 합니다. 잘 사는 것과 바로 사는 것은 다릅니다. 잘 사는 것은 돈을 많이 벌어서 물 쓰듯이 흥청거리면서 살면 잘산다고 합니다. 아흔 아홉칸 짜리 집을 짓고, 식구마다 자가용 한대씩 가지고 살면 역시 잘산다고 그럽니다. 그렇게 살면 잘 산다고 할 일이지 못산다고 할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인생을 바르게 사는 것은 다릅니다. 그렇게 잘 살면서 인생을 바르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하게 살면서도 인생을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르게 사는 사람이 귀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는 인생을 잘 살기는 했지만 바로 살지는 못했습니다. 그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바로 살았습니까? 자기 밖에 모르지 않았습니까? 너는 내 알 바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 받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잘 살았지만 인생을 바로 산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 까닭에 이 사람은 믿는다는 명분은 가졌어도 속은 텅텅빈 형식적인 교인입니다. 이런 사람은 갈 곳이 지옥 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집 대문 밖에 문둥이가 와서 가마니를 깔고 누워서 아침저녁으로 먹을 것을 구걸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따뜻한 밥상은 차려 주지는 못하더라도 먹다 남은 밥이라도 달라고 그러면 때마다 먹여 주시겠습니까? 하루는 어떻게 꼴을 볼는지 모르지만 열흘 스무날을 두고 부스러기라도 먹이겠느냐는 말입니다. 그 꼴을 못 보겠다고 돈을 주어서 보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부자는 나사로가 대문 밖에서 죽을 때까지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주어먹게 하였습니다. 얼마나 착합니까? 심성이 참 착했는데 천국에 갔습니까? 지옥에 갑니까? 지옥에 가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착한 것으로 인해서 절대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무 장로, 아무 권사가 "나만큼만 착해 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착함으로 하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착하면 얼마나 착합니까? 그러기 까닭에 내가 착하다는 나의 소극적인 선이 결단코 천국에 가는 조건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오직 구원 얻는 조건은 믿음뿐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믿고 나사로처럼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는 착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 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직분은 가졌어도 그의 믿음은 형식적인 것이기 까닭에 갈 곳은 지옥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하루를 믿어도 바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이 부자처럼 형식적인 믿음의 소유자 혹은 형식적인 믿음의 모델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서 말씀드립니다. 첫째는 나사로처럼 건강한 믿음의 소유자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환난이나 역경과 불행이 닥쳐와도 건강한 믿음만이 모든 불행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아브라함처럼 경외하는 믿음의 모델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하라 하시면 곧 죽어도 순종하였고 하지 말라고 하면 금덩어리를 준다고 해도 안 했습니다. 하나님만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이 순교할 수 있고 이런 믿음이 나아가서 일당 백, 일당 천을 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형식적인 믿음, 허울좋은 믿음, 쭉정이 믿음의 모델도 있습니다. 겉은 그럴 듯 합니다. 직분도 가졌고, 사람이 선해 보이기도 하나 그것이 천국에 가는 조건은 아닙니다. 형식적인 쭉정이 믿음 그런 믿음의 소유자는 한 사람도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