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감이 되는 믿음의 가정 2002-05-03 17:43:58 read : 2294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사도행전 10:1-5
오늘은 사도행전 10장 1절에서 5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귀감이 되는 믿음의 가정"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귀감이라는 말은 일상생활에서 그리 많이 쓰는 말이 아닙니다. 귀감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니까 '본보기가 될 만함'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었습니다. 본보기가 될 만한 것을 귀감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되는 가정이 고넬료의 가정입니다. 고넬료의 가정은 우리 모든 믿는 사람의 가정에 본보기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경우에 영어로는 model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가정주일로 지킵니다.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 우리 장로교단이 형성되면서 5월 첫째 주일은 어린이 주일로 지켜 왔고 지금도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5월 둘째 주일은 어머니 주일이라고 하여 오랫동안 지켜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뭐냐?'고 하면서 아버지들의 항의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덧붙여 주자 하여 아버지의 날을 따로 하지 않고 어버이라고 하여 어버이 주일로 지금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로서는 첫째 주일 어린이 주일, 둘째 주일은 어버이 주일인데 그럴 것이 뭐가 있느냐 어버이와 어린이가 합하여 가정이 되는 것처럼 한 주일만 지켜 가정주일로 하자 하여 지금껏 지켜오고 있습니다. 오늘 가정 주일을 맞이해서 본문이 가르쳐 주는 말씀을 따라 고넬료의 가정을 생각하면서 무엇이 본보기가 되고 있는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경건한 가정 (1-2)
경건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유세베이아'라고 합니다. '유'라고 하는 말은 좋다 혹은 잘한다는 말입니다. '세베이아'라고 하는 말은 예배라는 말입니다. 즉 좋은 예배를 뜻합니다. 동사로 이야기하면 예배를 좋아한다는 뜻이 됩니다.
제가 신학교에 입학했더니 예배 시간을 경건회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경건이 무엇인가 했더니 예배였습니다. 여러분은 예배를 얼마나 좋아하십니까?
제가 연속극 중에 다른 것은 하나도 안 보는데 '우리가 남인가요?'라는 연속극은 꼭 봅니다. 그 시간이 저녁 먹는 시간이 되어 보기 시작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계속 시청하다 보니 뭔가 조금 재미있다 싶으면 끝날 시간이 됩니다. 그래서 시계를 보면 끝나기 5분전입니다. 그러면 참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속극이 끝나면 아쉽고 그 다음날 그 시간이 되기를 기다립니다. 그 시간이 돌아오면 그 시간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것이 아깝습니다. 그 연속극을 기다렸다가 보면서 아내와 둘이서 '우리의 예배도 그래야 되지 않겠나'라고 대화를 했습니다. 시간 가는 것이 아쉽고 끝나면 다음 시간이 기다려지고 이것이 좋은 예배 즉 예배를 좋아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좋은 예배란 어떤 것을 말하는지 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예배에 대해서 요한복음 4장 23절을 통하여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령이라는 말은 영적이라는 말입니다. 육신적이거나 세속적이어서는 안됩니다. 무당을 불러다가 푸닥거리를 하고 굿하고 음식을 차려 놓고 손이 발이 되게 빌면서 무엇인가를 달라고 요구하는 무속종교는 전부 세상의 것을 달라고 하는 세속 종교가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의 예배는 이런 세속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신령이라는 말은 영적인 예배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말은 진리라는 말을 진정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드리는 예배,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빠지면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의 주를 이루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신령한 예배, 말씀으로 드리는 예배가 좋은 예배요, 그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람을 하나님이 찾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과 결부 시켜서 말씀드리면 경건한 가정 혹은 경건한 자라는 말이 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절에서 2절을 보면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고넬료의 가정이 그렇게 예배를 좋아해서 예배를 드리는데 세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향해서는 경외함으로 나타났습니다. 경외라는 말은 무서워한다는 말입니다. 도둑놈을 무서워하듯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요, 심판의 하나님이기 까닭에 하나님을 좀 무서워 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게 되면 못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해서는 경외함으로 나타나야 하고, 둘째는 너를 향해서 구제하는 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셋째로 나를 위해서는 항상 기도하는 일로 나타났습니다. 경건은 이렇게 세 가지 방면으로 꼭 나타나는데 이것을 한마디로 결론을 지어서 말씀드리면 경건은 즉 좋은 예배는 생활로 이어지고 생활로 타나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활과 예배가 떨어지면 그것은 좋은 예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일주일 중에 오늘 나와 한시간 예배드리고 '한 주일 동안 할 일 다 했다'하고 끝내버리면 그것은 좋은 예배가 아닙니다. 이 예배를 가지고 가정으로 돌아가서 가정에서 '주여, 주여'하고 찬송도 부르고 말씀도 읽고 사모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마누라에게 폭력을 행사하라 해도 하지 않게 됩니다. '주여'그리고 쥐어박겠습니까? 가정생활이 곧 예배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직장으로 가지고 가서 직장 생활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예배라고 하는 것은 예배가 생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윌리엄 바클레이라는 유명한 주경신학자인데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께 자신의 매일 매일의 삶을 드리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는 매일 매일 즉 오늘 하루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고, 또 내일이 오늘로 다가오면 또 오늘의 생활을 하나님께 예배로 드리는 것이 진정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삶이 빠진 일주일 중에 한시간의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삶을 드려야 합니다. 경건한 가정, 고넬료의 가정처럼 여러분의 가정도 예배를 좋아하는, 즉 좋은 예배를 하는 경건한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열려진 가정 (3-4상)
열려진 가정에서 한 글자를 줄이면 열린 가정이 됩니다. 열린 가정의 반대는 닫힌 가정입니다. 사람도 가만히 보면 열린 사람과 닫힌 사람이 있습니다. 열린 사람과 닫힌 사람은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납니다. 마음이 꽉 닫힌 사람은 남의 말은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내 말만 말이라고 하기 때문에 절대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어울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디에 가서나 외톨이가 됩니다. 그러다 보니 가정 생활도 엉망이 되고, 직장에 나가서도 직장 생활을 못합니다. 그런가하면 마음이 활짝 열린 사람은 너를 존경해서 네 인격을 존중히 여기고, 네 말을 들어줄 줄을 압니다. 그러다 보니 통하는 바가 있어 잘 어울립니다. 결국은 가정 생활도 잘하고, 직장 생활도 잘하게 됩니다. 열린 사람과 닫힌 사람은 이렇게 다릅니다.
예를 들어 요나라고 하는 선지자는 선지자이면서도 완전히 닫힌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는데도 '그 말은 내가 들을 바가 아니라'하여 다시스로 가 버립니다. 하나님이 풍랑을 일으켜서 바닷 속에 던져 버리니까 큰 물고기가 삼켜버렸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지라 하나님이 살려 주니까 할 수 없이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께서 외치라고 하신대로 외쳤습니다. 절대 자신이 기뻐 외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니느웨 백성들이 요나의 말을 듣고 전부 회개하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구원을 얻었으면 좋아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나는 니느웨 백성들의 구원을 죽기 보다 더 싫어했습니다. 완전히 닫혀진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바울은 열려진 사람입니다. 바울도 처음에는 닫혀진 사람이었지만 예수를 만나고 난 후에는 열려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 아닌 이방인들을 절대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짐승이나 벌레 같이 여겨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합니다. 절대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바울사도가 복음을 들고 바로 이방 세계에 뛰어 들어갔습니다. 복음을 전했고 교회가 세워지고 자꾸 복음을 전하다 보니 오늘날 우리에게 까지 그 복음이 오지 않았습니까? 열려진 바울, 닫혀진 요나 이 두 사람은 다 같이 하나님의 종이지만 밤과 낮만큼 차이가 났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열려진 사람,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열려진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바로 그 본보기가 고넬료의 가정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절에서 4절 상반절을 보면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을 보면 '제 구시쯤 되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구시라고 하면 우리 시간으로는 몇 시가 됩니까? 오후 3시가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시간에 여섯 시간을 더하면 우리 시간이 됩니다. 성경에 구시라고 했으니까 구시에 6시간을 더하면 오후 3시가 되는 것입니다. 오후 3시면 뭐하는 시간입니까? 참을 먹는 시간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침 6시부터 일을 시작해서 저녁 6시에 일을 끝냅니다. 그리고는 12시에 점심을 먹고 12시와 마지막 시간인 6시 사이가 되는 오후 3시에 참을 먹습니다. 고넬료는 그 참을 먹는 시간도 아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했기에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고넬료의 가정은 하늘을 향해 열린 가정이요, 고넬료의 가정을 향해서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천사가 나타나야지 마귀가 나타났다 하면 그 가정은 풍지박산이 됩니다. 욥의 가정을 보십시오. 마귀가 나타나서 어떻게 됐습니까? 에덴동산에 마귀가 나타나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낙원을 잃고 말지 않았습니까? 천사가 나타나서 '욥바에 있는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빨리 청해 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를 모셔다가 가정 집회, 가정 부흥회를 하라는 말입니다. 즉 심방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 사이에 이 고넬료는 일가 즉 우리말로 말하면 사돈의 팔촌까지 그리고 모든 친구들, 인사하는 정도의 사람일지라도 전부 청했습니다. 집안이 전부 꽉 찼습니다. 그러는 사이 베드로가 와서 "웬 일로 나를 청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하나님 앞에 모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말씀을 증거할 때에 성령을 충만히 받고 굉장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고넬료의 가정은 하늘을 향해 열린 가정, 이웃을 향해 열린 가정이었습니다. 그렇게 열린 가정이기에 엄청난 은혜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닫혀진 가정은 곤란합니다. 예수 믿는 가정은 반드시 열린 가정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슈바이처라고 하는 사람은 아프리카에 가서 흑인들과 함께 평생동안 고락을 함께 한 성자라면 성자가 아닙니까? 그가 훌륭한 명성을 얻고도 아프리카에 가서 희생 봉사를 한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초등학교에 다닐 적에 자기 보다 두 학년이나 윗반인 학생하고 씨름을 했습니다. 누가 이겨야 하겠습니까? 두 학년 윗반인 학생이 이겨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슈바이처가 보기 좋게 넘어뜨리고 이겼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보다 나이도 적고 키도 작은 그 슈바이처한테 보기 좋게 나가떨어지고 씨름에 진 그 학생이 툭툭 털고 일어나면서 "나도 너처럼 고기 먹고 잘 먹으면 얼마든지 너를 이길 수 있어, 좋아하지 말어"라고 합니다. 울면서 갔습니다. 그 학생은 가난한 이웃집 가정의 학생인데 일년 가야 고기 한 점 구경을 못하는 집안의 아이였던 것입니다. 그 학생을 이긴 슈바이처가 처음에는 기뻐하다가 그 학생의 말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슈바이처는 평생 고기를 잘 먹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공부를 많이 하고 이름을 얻고 명성을 많이 많이 얻은 다음에 한번은 공원에 산책을 갔습니다. 공원에 갔더니 백인은 발을 내 놓고 있고 흑인을 무릎 꿇고 그 발을 씻겨 주고 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슈바이처는 두 번째로 충격을 받습니다. '얼굴 색깔만 다를 뿐이요, 똑 같이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는데 왜 흑인들은 저렇게 해야만 하는가? 백인들은 왜 저렇게 대접만 받아야 하는가? 지금까지 이렇게 되었지만 이제는 백인인 내가 아프리카로 가서 흑인의 발을 씻겨 주리라'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아프리카 콩고, 람바네네 오고웨이 강가에 병원을 크게 짓고 평생동안 흑인들을 돌보며 생사고락을 함께 합니다. 그리고 1952년에 노벨 평화상을 탑니다. 평화상을 타면 돈이 적지 않습니다. 그 상금을 전혀 자기를 위해서 한푼도 쓰지 않고 전부 병원을 위해서 투자해서 그것이 전부 흑인에게 돌아가게 했습니다. 이렇듯 슈바이처는 완전히 흑인을 위해서 마음이 열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같은 해에 노벨 문학상을 탄 까뮈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그 문학상에서 받은 상금을 가지고 굉장히 큰 집과 굉장히 큰 차를 삽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 즐기며 몰고 다니다가 몇 일이 안되어 자동차 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까뮈는 완전히 닫혀진 사람이었습니다. 너를 위해서 열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열려진 사람과 닫혀진 사람은 밤과 낮만큼의 차이가 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열려진 사람이요,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은 반드시 열려진 가정이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이 열려진 가정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셋째, 열납된 가정 (4하-5)
열납이라고 하는 것은 기쁠 悅자에 들일 納자 즉 우리가 살고 있는 풍납동이라고 할 때 쓰는 들일 納자입니다. 열납은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아들이신다는 말입니다. 고넬료의 가정은 열납된 가정입니다.
예수님이 한번은 재림해서 심판을 베푸는데 그 앞에 많은 사람이 오더니 "주님, 주님" "왜?"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습니다. 나는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나는 능력도 많이 행했습니다. 이만하면 됐지요?"했더니 주님이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르겠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떠나가라고 하셨습니다. 즉 지옥에 가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내리신 결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더러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치 아니하는 자가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선지자 노릇을 했고, 귀신을 쫓아냈고, 능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교회에 나와서 제법 이런 봉사 저런 봉사를 다 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나를 모른다니 말이 됩니까?'라는 뜻입니다. 교회에 나와 한시간 예배드리는 동안에는 무슨 봉사이든지 다 내가 해야 되는 것처럼 했는데 예배 마치고 집에 돌아가고 직장에 돌아가서는 하나님의 뜻은 나의 알바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렇게 산다면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뭐가 다르겠습니까? 예배당에 한시간 앉아서 '주여, 주여' 한 것으로 천국 갈 줄 아느냐?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들의 예배가 반드시 생활로 연결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하는 우리의 신앙고백이 생활 속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어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4절 하반절에서 5절을 보면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고넬료의 기도가 열납이 되었고 구제하는 삶이 열납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응답 받는 기도에 대해서 또는 하나님이 열납 하는 구제에 대해서 뭐라고 설명하셨는지 아십니까?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들이 기도를 하면서 네거리에서 손을 들고 얼마나 거룩 거룩하면서 기도를 했는지 모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무개가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할 정도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를 합니다. 주님은 그런 기도는 꼴도 보기 싫다는 겁니다. 기도하고 싶으면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통하는 은밀한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 보이려고 하는 기도는 내 알바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고넬료의 기도가 상달이 되었다는 것은 벌써 은밀한 기도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때 당시 구제할 때는 나팔을 붑니다. 그러면 온갖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다 모여듭니다. 그러면 자기의 이름을 나타내고 구제해 줍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아무개가 구제를 많이 한다'고 할 정도로 보이게 구제를 합니다. 전부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의 빛을 냅니다. 그 때 예수님은 '네가 영광을 다 받았는데 내가 받을 것이 무엇이 있느냐' 그런 구제는 내 알바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구제할 때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은밀한 구제입니다. 고넬료의 구제가 바로 그런 구제였으며, 고넬료의 가정은 하나님 앞에 상달이 되어 전부 기억이 되는 열납 되는 가정이었습니다. 기도해도 열납이 안되고 여러분들의 믿음 생활이 열납이 안 된다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Harvey jellie라고 하는 사람이 '예배가 열납 될 수 있느냐의 여부는 예배를 드리는 자의 마음가짐에 달렸다'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에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 열납이 되느냐? 안 되느냐? 또는 여러분들의 삶이 하나님께 열납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여부는 여러분들의 마음가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나와 앉아 있으면서 마음은 동대문 시장에 갔다가 남대문 시장에도 갔다가 대천 해수욕장에도 갔다가 설악산에도 갔다가 금강산에도 갔다가 하면서 한시간 앉아 있다가 돌아가면 그 예배가 하나님 앞에 열납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얼마나 마음을 바쳐 중심을 드리느냐? 문제는 마음가짐에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구제를 해도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은밀한 기도, 은밀한 구제'이런 마음가짐으로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열납 된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립니다. 고넬료의 가정은 첫째로 경건한 가정입니다. 예배를 참 좋아하는 가정이요, 좋은 예배를 드리는 가정입니다. 둘째로 열려진 가정입니다. 닫혀진 가정은 하나님과 통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열려진 가정, 이웃을 향해 열려진 가정이 고넬료의 가정입니다. 셋째로 그의 기도와 그의 구제가 즉 생활이 하나님께 열납 된 가정이 고넬료의 가정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이 이런 가정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