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열매 2002-05-03 21:34:13 read : 2723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열왕기상 17:1-9
오늘은 열왕기상 17장 1절에서 9절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생활의 열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가 행한 행동은 반드시 결과가 나타납니다. 행동을 했는데 결과가 없을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생활을 하게 되면 반드시 그 생활에 걸 맞는 열매가 맺어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를 못된 열매를 맺는다'고 하시면서 '그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즉 나무는 반드시 좋든 나쁘든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농부가 씨를 뿌렸는데 30배를 거두기도 하고, 60배를 거두기도 하고, 100배를 거두기도 했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여하간 씨를 뿌리면 30배를 거두는 사람도 있고, 60배를 거두는 사람도 있고, 100배를 거두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열매의 수량이 똑같지 않은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만 열매가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생활을 하면 이런 열매를 맺고, 저런 생활을 하면 저런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생활의 열매가 무엇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믿음의 생활 (1-)
믿음은 반드시 열매를 맺기 때문에 믿음의 생활에는 그 믿음에 걸 맞는 결실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 상반절을 보면 믿음에 대해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고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바라고 믿었더니 그 믿은 바가 실상으로 나타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반드시 그 믿는 대로 나타납니다. 즉 열매를 맺습니다.
1절 하반절을 보면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였습니다. 전혀 보이지 않지만 믿었더니 얼마 안되어서 그 믿는 바가 증거로 나타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은 실상으로 혹은 증거로 열매를 맺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까닭에 대해서는 민수기 23장 19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23장을 19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믿는 대로 되는 까닭이 바로 이 까닭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라는 말씀은 먼저 인생은 곧 잘 식언을 한다는 뜻입니다. 식언이라는 말은 내가 말을 해 놓고 내게 손해가 되거나 위험이 닥쳐오면 내가 했던 말을 집어먹듯이 먹어 버리고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경우를 너무 많이 보지 않습니까? 그 다음으로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기 까닭에 한번 하신 말씀은 '그렇게 말한 일이 없다'라고 말씀하시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즉 사람이 아니기 까닭에 말 해 놓고 후회하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의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말 해 놓고는 후회가 되기에 식언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집어먹듯이 먹어 버리고는 그런 말을 한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을 식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후회가 없고 후회가 없기 까닭에 한번 하신 말씀은 영원히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57장 19절 상반절을 보면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 하신 말씀, 자신이 언약한 말씀에 대해서는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내가 '믿습니다'하게 되면 내 생활 속에 하나님의 언약인 축복의 말씀이 다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까닭에 믿는 대로 되고 믿는 만큼 받는다는 것입니다. 크게 믿으면 크게 받고, 작게 믿으면 작게 받고, 안 믿으면 못 받고, 되는 것이 없게 믿으면 평생을 믿어도 되는 것이 없고, 망하게 믿으면 예수를 믿고도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성경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절을 보면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이라는 말씀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디셉 사람이란 디셉이라는 곳에서 출생한 자라는 말인데 현재 살고 있는 곳은 길르앗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산 사람이 서울에 살고 있다는 말과 똑 같습니다. 그 때에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선지자로 세움을 받습니다.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엘리야의 아버지 어머니가 그렇게 독실한 신앙인이었답니다. 그는 아버지 어머니의 믿음을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왕은 아합입니다. 아합 왕이 왕후 이세벨과 앞장서서 바알 종교를 전파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부분이 바알 종교로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엘리야만은 바알 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꼴을 못 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알 신에 대항해서 목을 내 놓고 싸우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비가 오지 아니한다"라고 말하면 그 날부터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비가 온다"라고 말하면 "그 날에는 해가 넘어가지 전에 비가 온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믿고 그대로 선포했더니 그대로 이루어지더라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래서 그 날부터 흉년이 들었습니다. 3년 6개월이 지난 다음에 갈멜산에서 하나님께서 비를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 갈멜산에 함께 있던 아합 왕이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왕에게 "빨리 가십시오. 지금 비가 몰려오고 있어서 길이 막힙니다"라고 했더니 그 날 해가 넘어가기 전에 큰비가 쏟아졌습니다. 믿은 대로 되었고, 믿고 선포하는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옛날 엘리야만의 사건입니까? 엘리야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엘리야가 믿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믿는 대로 이루어지고 믿는 만큼 우리가 받는다는 교훈입니다.
Rolph Waldo Emerson이라는 사람은 "이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이길 수 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나는 이 난관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다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겨낸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믿음과 하나님을 빼고 '나는 이긴다. 나는 할 수 있다'라고만 하면 안됩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사고임에는 틀림없으나 믿음이 아닙니다. 이 말은 박정희 전대통령이 혼자 청부를 맡아 놓고 하던 말입니다. 그것은 신념이지 신앙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이라는 말이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게 하시니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으니 이길 수 있다'라고 할 때 이것은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이길 수 있다고 믿으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총체적인 난국을 당하고 있는 이 때에 먼저 낙심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나는 그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므로 이길 수 있다'라고 하면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믿음의 생활은 그 믿음 까닭에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는 열매가 있습니다.
둘째, 준법의 생활 (2-7)
준법의 생활은 법을 지키는 생활을 말합니다.
장로교에서 펴낸 장로교 헌법이 있습니다. 그 헌법에는 교회 정치도 있고, 예배 모범도 있고, 권징조례도 있고, 요리문답도 있습니다. 장로교 헌법의 첫 장을 보면 장로교의 12신조가 나옵니다. 12신조는 '우리는 12가지를 이렇게 믿습니다'라는 내용들입니다. 12신조 중의 첫째는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니라'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에 기록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믿음의 법이요, 또는 생활의 법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한마디로 줄이면 하나님의 말씀이 곧 법이라는 것입니다.
"권면"은 들으면 좋고 안 들어도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법은 지키지 않으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잘 되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죄의 댓가를 받게 되어 있기 까닭에 잘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법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킬 때 그 사람은 잘 되고 행복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예외적으로 악법도 있지만 우리 사람을 위해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안녕과 질서와 행복을 위해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법은 지키면 지킬수록 좋은 것입니다. 안 지키면 죄가 되고 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교통법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다 승용차를 타고 다니기 까닭에 잘 아실 것입니다. 교통법을 보면 첫째로 신호를 잘 지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가라고 하면 가고 서라고 하면 서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차선을 따라 가라는 것입니다. 차선을 변경할 때는 반드시 신호를 켜 놓고 바꾸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속도도 몇Km로 가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고가 납니까? 사고가 나면 병신이 되기도 하고 죽지 않습니까? 사고가 나는 까닭은 교통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정지 신호가 나왔는데 무시하고 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차선을 지키라고 하는데 마음대로 차선을 넘나들기 때문입니다. 속도가 제한이 되어 있는데 무제한의 속도로 달립니다. 그래서 사고가 나는 것이 아닙니까? 법을 지키지 않으므로 사고가 나고, 병신이 되고 죽고,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통법이라고 하는 것은 지킬수록 서로에게 좋은 것입니다. 지킬수록 사회가 잘 되고 행복하고 질서가 확립되는 것입니다. 안녕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세상 법도 그렇다면 하나님의 법은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겨서 잘 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켜 안 되는 일도 없습니다. '내가 10년을 교회에 나오면서 말씀을 지킨다고 지켰는데 별로 되는 것이 없다'라고 하실 분들이 계실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들은 끝까지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법을 끝까지 지키면 된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절에서 7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저가 시냇물을 마셨더니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흉년이 계속되는 때에 엘리야는 위기에 몰려 있습니다. 아합 왕의 왕후 이세벨이 엘리야를 기어이 찾아내어 죽이려고 합니다. 자기가 전파한 바알 종교에 대항하여 목숨을 걸고 싸우기 때문에 잡아 죽여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너는 여기서 떠나라" "그럼 어디로 갈까요?" "동쪽으로 가라" "동쪽으로 가는데 어디까지 갈까요?" "그릿 시냇가에까지 가라" "그릿 시냇가에까지 가서 어떻게 할까요?" "거기에 숨어 있어라. 그 시냇물이 아직도 마르지 않았으니 그 시냇물을 마셔라" 분명히 하나님이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요, 법입니다. 본문을 보면 '곧 가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곧 달려갔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다른 곳에는 시냇물이 다 말랐어도 그릿 시냇물은 아직도 흐릅니다. 그 물을 마셨습니다. 물만 마시고 삽니까?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대로 까마귀가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물어다 먹이더라는 것입니다. 이 때 만약에 엘리야가 '택도 없는 소리하지 마십시오'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살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법으로 여겨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순종했더니 되는 것이 아닙니까? 즉 그 때 흉년이 들어서 죽느니 사느니 할 때 생활의 안정이라고 하는 축복을 열매를 받은 것입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은 우리들의 하나님이신 줄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법으로 여겨 순종하되 즉시 순종하고 끝까지 순종하면 우리들에게도 생활의 안정이라고 하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하라하면 하고, 말라하면 말고, 앉으라하면 앉고, 서라하면 서고 끝까지 하나님의 법을 순종해 놓고 보십시오. 되고 안 되고는 그 다음에 말해도 늦지 않습니다. 해 보기도 전에 원망 불평을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법을 지키면 반드시 생활 안정의 축복이 열매로 맺어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사명의 생활 (8-9)
우리에게 목숨이 있지 않습니까? 즉 생명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으로 사명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명이 없는 사람은 모태에서 죽어 태어납니다. 사명이 없기 때문에 태어나기도 전에 죽고 마는 것입니다. 반드시 산 사람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이 귀합니까? 사명이 귀합니까? 흔히 생명이 귀하다고 생각하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을 보면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사명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사명보다는 생명이 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사명을 위해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사명이 먼저 주어지고 그 다음에 생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고 사명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논리일 뿐입니다.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컵 하나를 만든다고 합시다. 만드는 사람이 컵을 만들 적에 그냥 주물럭 주물럭 하다보니 컵이 되어서 '물을 떠먹어야 되겠다' 해서 물을 떠먹는 사명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물 떠먹는 그릇을 만들겠다'라고 생각하고 즉 사명이 주어진 다음에 컵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말한 '사명을 위해서 생명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생명을 내 놓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때로는 사명을 위해서 목숨을 받쳐야 할 때가 되면 생명을 내 놓겠다는 뜻입니다. 그 만큼 사명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에 충실한 사람은 반드시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사명을 망각하고 내 몰라라 하고 사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명의 생활에는 반드시 그 사명에 따르는 승리와 성공이라고 하는 열매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8절에서 9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켜 가라고 명하시는 곳에 갔을지라도 시냇물이 말라 버렸습니다. 까마귀가 물을 물어 올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순종해도 이런 위기는 올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경우 하나님은 그 사람을 내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그 위기를 정면돌파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시더라는 것이 본문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너는 다시 떠나야겠다" "어디로 갈까요?" "이스라엘과 접해 있는 시돈이라는 나라가 있고 그 시돈에 사르밧이라고 하는 작은 동네가 있는데 그리로 가라. 네가 그리로 가면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네가 오거든 잘 모시고 공궤를 하라고 내가 사명을 주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그런 사명을 받았습니다. 시돈의 사르밧은 이스라엘 땅과 인접해 있는 작은 나라의 작은 마을인 까닭에 거기에도 역시 흉년이 들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오늘 저녁을 먹은 후에는 외아들과 함께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 엘리야가 찾아 온 것입니다. 과부가 엘리야를 숨겨 놓고 받은 사명을 따라 계속 대접했더니 가루 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기름병에 기름이 그치지 아니하였고 무난히 그 흉년을 넘기고 그 아들과 함께 평생을 먹고도 남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엘리야를 그 사르밧 과부의 집으로 보내셨는지 아십니까? 이세벨이라고 하는 왕후가 전국을 뒤져 엘리야를 죽이려고 할 때에 이세벨 왕후의 친정 나라가 어디며 친정 동네가 어디입니까? 이세벨은 시돈 왕 엣 바알의 딸로 이스라엘 왕에게 시집을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돈이라는 나라가 그렇게 바알신을 섬기기로 유명한 나라입니다. 이세벨이 생각 할 때 엘리야가 자기 친정 이웃 동네로 피난 갈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거기에 숨이 있을 줄 상상도 못하는 겁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볼 때는 가장 위험한 곳 같지만 가장 안전한 곳이기에 하나님께서 그리로 보낸 것입니다. 그러나 이세벨이 죽이려고 하는 선지자를 숨기고 흉년이 지나기까지 공궤를 한다는 것은 과부로서는 엄청난 위험입니다. 만약에 그 사실이 들통나는 날에는 자기의 생명이라도 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부는 사명을 위해서 생명을 내 놓을 각오를 하고 사명에 충실했더니 흉년도 무난히 넘기고 평생 먹고 남는 축복이 있었습니다. 사명이 맺어준 열매입니다. 사명을 위해서는 생명을 무릅쓸 때 위기를 극복하고 승리하고 성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사명을 저버리고 성공하고 승리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명의 생활에는 그 사명에 걸맞은 승리의 열매가 있습니다.
결론을 지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믿음의 생활은 열매를 맺습니다. 믿는 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준법의 생활은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법이기 까닭에 그 법을 지키어 망하는 사람이 없고, 그 법을 지킬수록 흥하고 복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사명의 생활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 과부는 어려운 상황이요, 위기를 만날지 모르지만 생명을 걸고 사명에 충실했더니 나중에는 성공하고 승리하고 평생을 먹고 남는 축복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생활이 평생에 좋은 열매를 맺어 승리하고 성공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