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2002-05-15 11:58:28 read : 2989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빌립보서 3:1-9 // 2002.05.05
할례가 무엇입니까? 창 17:9-13에 보면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히 언약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돌에 새겼다면 하나님의 언약은 살에다 새겼습니다. 할례의 의미는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할례는 Egypt, 고대 바벨로니아, 앗시리아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셈족이 다 받았습니다. 고대 히브리 인근 국가 가운데서는 블레셋을 제외하고는 모두 할례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몽고리안 계통, 인도 게르만족이나 우리 조상들은 할례의식이 없었지만 Muslim(회교도)들은 지금도 할례를 행합니다. 심지어 여자에게도 행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할례가 이스라엘 고유의 것이라고 할 수 없지만 이스라엘의 할례는 그 의미가 매우 독특합니다.
할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계약공동체를 이루는 수단으로써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관계를 의미하였습니다. 생후 8일만에 부싯돌로써 포경을 베어낼 때 얼마나 고통스럽고 피를 많이 흘렸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경을 자를 때 피를 흘리는 것을 거저 피를 흘리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피가운데 생명이 있다"(레 17:11)고 이해하기 때문에 생명을 바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할례 행위는 생명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요 할례받지 못했다는 것은 생명이 하나님께 바쳐지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생명은 분할할 수 없는 전체요 오직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아기에게 할례를 행할 때 자기 어린아이의 생명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께 바칠 때 부분을 바친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예컨대 십일조를 봅시다. 헬라 사람들에게 십일조는 분명히 열 개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에게는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전부가 하나님의 것인데 그것을 1/10로 표현한 것이지요. 이스라엘 민족은 언제나 자기 것이라는 소유의 개념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전부가 하나님의 것인데 그 전부가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10분의 1을 바침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히브리 사람들의 1/10개념은 전체개념이지 수학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어린아이의 포경을 자르고 피를 흘리는 것은 전체를 바치는 것입니다. 할례는 한번 있는 한 때의 사건이 아니라 전 생애를 바친다는 뜻입니다. 할례가 신약에 오면 세례로 바뀝니다. 세례는 한번 있는 의식일 뿐 아니라 우리의 전 생애를 주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또 생명은 두 사람이 똑같을 수가 없지요. 각자의 생명은 모두 독특합니다. 따라서 모두 각자의 생명을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그래서 각각 할례를 받았고 그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통일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신자의 세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상징입니다. 신자의 죽음이 종말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시작인 것같이 세례는 한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사건의 시작인 것입니다. 오늘 유아세례를 받는 아이들의 부모님들, 세상에 생명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생명의 구속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 생명의 하나님께서 이 아이의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리고 이 아이를 바로 그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 오직 하나님의 소유를 하나님의 법대로 키우겠다는 것을 서원하는 것, 이것이 유아세례의 성경적인 의미입니다. 마음에 꼭 되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손할례당과 진정한 할례당을 예리하게 비교합니다. 손이란 자르다, 절단하다는 뜻입니다. 육체의 할례를 자랑하고, 구원을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의식을 행하는 것이 절대 조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손할례당입니다. 바울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복음을 전하고 있으면 손할례당 유대인들이 개처럼 달려와서 짖어댑니다. "아니다! 예수믿는 것만으로 안된다. 우리처럼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 할례의 후예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비꼬아서 개라고 부르고, 악을 행하는 일꾼이라고 부릅니다. 베고 절단하는 것을 자랑하는 주의 주장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손할례당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삼가고, 삼가고, 삼가라고 강경하게 경고했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할례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이 롬 2:28-29에서 말씀합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진정한 할례는 마음의 할례입니다. 거듭난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이 참 할례입니다. 새 사람은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입니다. 성령과 진리를 따라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섬기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미 세례받으신 여러분! 여러분은 언제나 성령으로 시작하시고, 성령으로 진행하시고, 성령으로 끝내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 예레미야 6:10에 보면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란 말이 나오고 행 7:5에는 스데반이 "마음과 귀에 할례받지 못한 자"라고 설교하였습니다. 진정한 할례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사랑과 헌신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귀에 할례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복음진리를 듣고 순종하는 삶을 삽니다. 그런가 하면 출 6:12, 30에는 또 입술에 할례란 말이 나옵니다. 입에 할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를 전파하고 복음을 자랑합니다. 대중 설교가 Billy Graham 목사님은 자기의 사역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소수로 구성된 그룹을 만들어서 그들로 하여금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도록 훈련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제가 볼 때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귀에는 할례를 받았는데 입술에 할례를 받지 못한 분이 많은 것 같아요. 모세가 "나는 입이 둔한 자라"고 했을 때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멋진 약속입니까?
저는 여러분께서 특별히 전도사랑방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회중을 대할 때 이 말씀의 약속을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모세의 입에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제게도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당신의 입으로 만족하겠습니다. 내 마음이 준비되었사오니 내 음성을 통하여 말씀 하옵소서" 셀 수도 없이 하나님이 여러분의 입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이쯤에서 오늘 본문 3절로 돌아갑시다. 바울 사도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저는 이 당이란 말이 대단히 인상적으로 들립니다. 당은 주의, 주장이 같은 사람들의 모임이란 것 외에 강력한 소속감을 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할례의 외적 의식의 전통과 형식을 강조한데서 똘똘 뭉쳐 하나가 된 것처럼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중생한 인격으로 성령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 21세기 생활지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다. 내가 좋아지면 이웃이 편해진다(롬 15:2). 모두는 하나를 사랑하고 하나는 모두를 섬기자(고전 10:24). 교회와 함께 세계로 미래로 나아가자(막 16:15)" 얼마나 멋진 하나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할례를 받을 때 개인적으로 받았지만 개인적인 의미는 별로 없고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공동체적인 의미로 받았습니다. 내가 할례를 받는 것은 민족공동체의 하나이기 때문에 받는 것이지, 개인이 받아서 선민이 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스라엘 민족의 일원이므로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할례는 개인적인 행위라기 보다는 공동체적인 행위입니다. 오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례받는다는 것은 개인적 의미보다는 공동체적 의미가 강합니다. 세례받으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몸의 한 부분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와 그리스도의 몸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세례를 통해서 공동체의 일원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에 있어서 한 지체의 고통은 전체의 고통이고 한 지체의 기쁨은 전체의 기쁨입니다. 이것이 히브리 사람들의 가족공동체의 개념이고 거기서 신약의 교회공동체의 개념이 나온 것입니다.
인간이 참 기쁨을 느낄 때는 공동체적인 선을 행할 때입니다. 혼자서는 암만해도 보람을 느끼지 못하지만 어디에 소속감을 가지고 뭔가를 할 때 보람이 있습니다. 세례는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통일시키는 표징입니다. 오늘 우리는 유아세례와 입교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교제의 문을 열고 들어섭니다. 주님은 지상대명으로 부탁하셨지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 세례의 축복은 온 천하 만민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인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통일시키는 하나님과의 언약이요 축복의 근원입니다.
진정한 할례당 곧 참된 세례교인은 소극적으로 말하면 육체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육체란 인간의 의식이나 공적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것, 다시 말하면 사람이 그의 구원에 대한 소망의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를 떠난 것은 무엇이나 다 육체입니다. 세례교인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의 힘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세례교인은 우리가 지금까지 이루어온 것이나 이룰 것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가 선언합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9절). 또한 세례교인은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합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구원의 열매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능력으로 역사한 결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세례교인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하신 일들을 자랑합니다. 구원을 위해 그분의 인격과 사역만을 의지합니다. 내게는 죄책감과 수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만을 온전히 받아들입니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가장 선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 6:11-16에서 마지막으로 경고합니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우리의 모든 소망과 만족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저주받은 죽음입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내십니다. 또한 그분의 죽음은 화해의 죽음입니다. 그분만이 하나님과의 화해와 모든 믿는 자와의 화해를 성취하십니다. 오직 예수 십자가만 자랑하고 성령으로 행하는 세례교인, 마음과 귀와 입술에 할례를 받은 입교인, 우리가 곧 할례당이요 하나님의 나라요 왕같은 제사장인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