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2002-05-21 10:46:16 read : 3797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마태복음 15 :21-28 // 2002년5월12일
결혼해서 두 자녀를 낳아 행복하게 살던 자매님이 있습니다. 아이 둘을 낳아 잘 기르며 살고 있는데 원치 않는 세 번째 아이가 생겼습니다. 병원에 가서 아이를 검사를 해보니까 신체구조에 이상이 발견되었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그 때부터 이 자매님은 어머니로서 걱정이 됩니다. 이 아이를 지울까? 아니면 그대로 낳을까? 낳는다면 평생 이 아이가 나에게 짐이 될 것이고 그것 때문에 나의 행복은 빼앗겨지는 것은 아닌가? 고민하다가 자기를 말씀으로 양육해 준 교회의 사모님하고 상담을 했더니 사모님이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이든지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당장은 그 아이로 인하여 힘이 들 수 있지만 그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뜻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 이 자매님이 세 번째 아이를 낳았습니다. 역시 낳고 보니까 한쪽 귀가 없습니다. 한쪽 귀가 없는 아이를 낳은 것입니다. 비정상적인 이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어머니는 더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축복해줍니다. 더 많은 애정과 관심을 갖습니다. 그리고 친정 부모님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 자매님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처음에는 원망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나에게 그런 자녀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사랑으로 기르고 보니 거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세 가지의 축복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본인이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도 그저 교회만 왔다갔다하던 믿음에서 산 믿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위해서 기도하다 보니까 그 기도가 간절해졌고, 그런가운데 믿음이 확실해졌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녀란 내 소유가 아니라 주님의 선물임을 알고 주님의 심정으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친정 부모님, 항상 불협화음이 많고,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부모님이 아이를 위해서 기도하는 동안에 관계가 너무 좋아져서 기쁘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위대성
여러분! 어머니의 어머니 됨이 어디에 있습니까? 누가 뭐래도 자녀를 최고로 사랑하고, 자녀를 믿어주고, 포기하지 않는 사랑 속에 어머니 됨이 있고 어머니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다 그런 어머니의 위대함 때문에 이렇게 복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좀 오래 전의 기억입니다만,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을 해서 공부하고 있을 때 저의 진로를 어떻게 결정할까 고민하면서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저의 삶의 전부를 주님 앞에 헌신하며 살아가는 길이 무엇일까요?" 그 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종이 되어 너의 전 생애를 드려라."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들려온 확실한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저희 어머니에게 말씀을 드리고 허락을 받아내는 것이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생하시면서, 온갖 행상을 비롯해서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고생하시면서 겨우 자식 하나 대학 가르쳤는데 졸업할 때쯤 되니까 취직을 해서 돈을 벌어야지, 신학 한다고 하면 얼마나 마음이 불편 하실까?
그렇지만 조용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머니 제가 졸업을 하고 신학대학원에 가야 되겠습니다. 거기서 공부를 하고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목사가 되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별로 믿음이 깊지 않으셨던 어머니, 그러나 예상밖에 반대하지 않으시고 "그래 그것이 너의 결심이라면 내가 고생이 되더라도 그 길을 가야지" 아들의 말을 그대로 믿어주고, 용기를 주시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못났지만, 부족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부족한 점이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머니는 절대로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가장 자랑스럽고, 가장 귀한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녀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믿어줍니다.
오늘 본문에 흉악히 귀신들린 딸 하나를 둔 가나안 여인, 이방여인이 예수님께 찾아와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간절히 요청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귀신들린 딸입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합니다. 비웃기도 합니다. 귀신들린 이 딸은 어디가서 무슨 활동을 하겠습니까? 철저하게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고립되어 살아갑니다. 어디를 보아도 자기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사랑에 굶주리고, 인정에 굶주려 있습니다. 하늘을 보아도, 땅을 보아도 나아갈 창이 없습니다. 완전히 절망의 포로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어느 곳 하나에 나갈 곳이 없었지만 그러나 귀신들린 이 딸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유일한 안식이고, 소망의 닻이고, 사랑의 샘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포기해 버린 딸이었으나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사랑하시고, 끝까지 믿어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위대함입니다.
자녀의 아픔을 대신하는 어머니
귀신들린 딸의 어머니, 가나안 이방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아옵니다. 귀신들린 딸을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이렇게 흉악히 귀신이 들렸습니다."
딸이 귀신들려 있는데 어머니는 딸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구하지 않고 대신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구하는 어머니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자식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자식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자식의 실패를 나의 실패로, 자식의 잘못을 나의 잘못으로 간주하고, 그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면서 주님의 긍휼을 구하는 어머니의 숭고한 모습을 봅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자식이 잘못했습니다. 자식이 실수했습니다. 자식이 나쁜 놈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아요. 모두다 나의 잘못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입니다.
"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이렇게 흉악히 귀신 들렸습니다."
딸의 귀신들린 것을 자기의 탓으로 돌리고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서 내 딸을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1997년 8월 31일자에 중앙 일보에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미화원을 하고 있는 아버지인데, 청소부란 말입니다. 어떤 날에 보니까 그 아들이 아주 높은, 고급 브랜드 청바지를 입었어요. 자기가 돈 준 일이 없는데... 그래서 "너 어디서 나서 이것을 옷을 입었느냐?"
호되게 나무라니까 사실대로 불었습니다.
"전철역에서 남의 돈을 훔쳤습니다."
아버지는 "그래, 아무리 가난하고 어렵기로서니 남의 돈을 훔쳐 서야 되느냐? 이놈아!"
붙들고, 울고 "그래선 안 된다." 이걸 끌고 파출소에 갔어요. 자수했습니다. 자술서를 쓰면서 보니까 이게 처음이 아니에요. 그전에 또 한 일이 또 있었어요. 이걸 아버지가 알게 되어 너무 기가 막혔어요.
"그래, 내가 가난하고 어려워서 옷을 못 사준 죄다. 그걸 입고 싶어서 했겠지만 어째 이럴 수가 있느냐? 이놈아 그래서야 되느냐?"
하면서 그냥 죽어버렸어요. 어머니는 이 사실을 알고 재판정에서 얘기했습니다.
"이놈에게 중죄를 내려주세요. 이놈은 나쁜 놈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중죄를 내려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재판정은 판사는
"무죄"
그랬습니다. 무죄선언을 했습니다.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판사의 말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훌륭한 아버지의 아들이 절대로 잘못될 수 없음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죄를 내 못난 탓으로 돌리는 아버지, 어머니의 그 숭고한 모습을 보며 재판정은 무죄를 선언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가나안 여인 그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우리는 참으로 훌륭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식을 소중히 여기고, 자식의 연약함 때문에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그 자식의 약함을 자기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있으면서 예수님에게 다가와 긍휼을 구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어머니가 어디 있겠습니까?
거절을 당하는 어머니의 간구
그런데 주님 앞에 엎드려 이처럼 간절히 간구 하는데 주님의 반응을 보면 너무 냉정합니다. 오늘 본문 15장23절을 보면 "예수께서 한 말씀도 안하시니--"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침묵하십니다. 침묵하실 뿐만 아니라 완강하게 거부하십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도다."
가나안 여인은 두 번째 간구에도 거절을 당합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그렇게 거절을 당하였는데도 그러나 이 가나안여인은 거절을 당하면 당할수록 더 주님 앞에 다가와 엎드려 간구합니다. "주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주님 옳습니다. 저는 주님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 아닌 것을 압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님의 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자녀를 믿었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계속해서 주님 앞에 나아가 기도를 드립니다. 그래도 응답이 없습니다. 주님은 여전히 침묵하십니다. 그렇게 간절히 구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였지만 여전히 침묵하실 뿐만 아니라 거절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거절할 뿐만 아니라 이 여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합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 아니기 때문에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 말입니까?
그래도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거절을 당하고 수모를 당해도 자녀를 포기하지 않고 주님 앞에 점점 다가갑니다. 그리고 또 간구 합니다.
여러분! 왜 어머니가 그토록 수모를 당하고, 거절을 당하면서도 그렇게 주님 앞에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가 있다면 오직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자식을 기르면서 부모된 여러분들이 그런 경험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식 문제가지고 주님 앞에 나와 기도하지 않은 어머니들이 없을 것입니다. 공부는 자식이 하는데 고통은 어머니가 당합니다. 사업은 자식이 하는데 아픔은 어머니가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교회에 와서 보니까 어느 집사님이 홀로 기도하시다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습니다. "왜 저 집사님이 그렇게 울고 계실까?" 나중에 알고 보니까 자식을 위해서 빠짐없이 기도했는데 자식의 합격을 위해서 그가 공부를 시작한 그 때부터 기도했는데 합격이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또 일년을 함께 새로 기도했는데 역시 합격이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와 하염없이 울고있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한 원망도 없고, 자식에 대한 원망도 없고, 그저 내 기도가 부족한 탓으로 알고 울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제가 축복을 빌었습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저 집사님, 절망의 이 상황에서도 원망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자식을 위해서 포기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이 나의 부족으로 알고 눈물을 흘리며 주님 앞에 울부짖는 저 집사님을 축복해주셔야 합니다. 축복하여 주옵소서."
공부는 누가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책임을 어머니가 다 짊어지고 주님 앞에 나와 우는 것입니다. 얼마 후에 들었더니 1차는 안되었지만 그 아들이 더 좋은 대학에 합격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제 마음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 이후 유명한 성자 어거스틴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그는 17세에 결혼하지 않고 아들을 낳았고 방탕하고 타락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새벽마다 그를 위하여 기도를 합니다. 그래도 아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포기하려고 결심하고 유명한 목사님 암부로시우스 목사님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 목사님 제가 제 아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를 해왔습니다. 그런데도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아이제는 더 이상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그 때 암부로시우스 목사님이 하신 말씀, 유명한 말씀을 아시지요." 아들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의 아들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그 말이 모니카에게 얼마나 용기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아들은 돌아왔고 훌륭한 성자가 되었습니다.
가나안여인이 주님 앞에 나와 간구를 해도 주님은 그것에 대해 침묵하시고, 긍휼을 구해도 거절하시고, 오히려 여인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포기하지 않고 구하는 이 여인의 위대한 믿음을 보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 여자야 내 믿음이 크 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내 믿음이 크도다.
어머니의 위대한 믿음을 보시고 주님은 귀신들린 딸을 고쳐주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내가 실패했던 그 때, 내가 인생의 곁길로 방황하였을 그 때, 나를 포기해버렸다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존재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어쩌면 포기해 버릴 수밖에 없는 그 상황에서 우리는 본성적으로 어머니를 필요로 합니다. 아버지를 필요로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머니는 한번도 나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의 이 절박한 상황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돈도 친구도 애인도 다 사라지지만 마지막까지 남아 있으면서 나를 안아 주시는 그분은 어머니 당신뿐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부르는 소리가 있습니다. 어머니를 부릅니다. 아버지를 부릅니다.
루카스라는 분은 어머니에 대한 이런 아름다운 비유를 했습니다.
어느 어머니가 전쟁에서 아들을 잃었습니다. 전사 통지를 받은 어머니를 누구도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부터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아 아 다시 한번 아들을 만나 보았으면, 5분만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원이 없겠다.' 그녀는 날마다 아들을 다시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사가 그 기도에 화답해서 말을 합니다.
"그러면 5분동안만 아들과 만나도록 해주마"
"예 어서 빨리." 어머니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환희 웃으며 서둘렀습니다.
천사가 말했습니다. "너의 아들의 생애는 30년이었다. 몇 살 때의 그와 만나고 싶은가?"
어머니는 잠깐 생각하였으나 당장에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습니다. 천사는 망설이는 어머니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군인으로서 훌륭하게 전사하였을 때인가? 당신과 이별을 할 때인가? 아니면 학교에서 단상에 올라가 최 우등상을 탓을 때의 그와 만나기를 바라는가? 그렇지도 않다면 당신의 품에 안겨 있던 갓난아이 적의 아들인가?"
그러자 어머니는 조용히 대답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언제던가. 그 애가 무언가 잘못하고서 나한테 사과하려고 뜰에서 달려온, 그 때의 그 아이와 5분만 만나게 해주세요. 그 애는 어렸고 사뭇 슬픈 표정이었어요. 얼룩진 얼굴에 눈물이 자국을 내며 흐르고 있었지요. 내 품안으로 온 힘을 다해 뛰어 들어왔기에 무척 아팠던 것을 기억하고 있답니다."
어머니 당신은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가장 수치스러움을 당했을 때, 절망의 터널을 지나고 있을 때, 시련의 강가에서 헤멜 때 어머니는 가장 위대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 울며 자식을 위해 간구합니다. 기도에 응답이 없을 때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존심에 상처를 당해도 자식을 위한 기도하며 포기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믿음, 어머니의 포기하지 않는 위대한 믿음을 하늘의 우리 주님은 보시고 그 믿음대로 되게 하십니다. "여자여! 내 믿음이 크도다 내 소원대로 될지어다." 우리는 어머니의 이 위대한 믿음 때문에 이렇게 건강의 복을 받았고, 가정의 복을 받았고, 믿음의 복을 받았습니다.
19세기 보스톤의 성공회 감독으로 유명했던 설교의 황태자 필립스 부룩스라는 유명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비석을 세우면서 망설임 없이 오늘 본문 마태복음 15장 28절을 새겨놓았습니다. "여자여! 내 믿음이 크도다 내 소원대로 될지어다." 귀신들린 딸을 둔 가나안 여인에게 하신 그 말씀, 그 말씀을 부룩스 목사는 어머니의 비석에 새겼던 것입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똑똑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공부 잘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투박하고, 고생 많이 하신 어머니, 배우지 못하고, 가난하고, 무명하지만 자식을 향한 사랑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구한 어머니의 위대한 믿음 때문에 오늘의 나가 있었습니다.
어머니 당신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리 앞에 서 있는 하나님의 화신이십니다. 어머니의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 다같이 어머니의 노래를 불러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