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왕 - 요한복음 1:43-51절 2002-04-11 19:12:26 read : 2670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요한복음 1:43-51절
제목:이스라엘의 왕
9.11테러가 있은 직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각국으로부터 아프카니스탄과의 전쟁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했었습니다. 이때 대부분의 유럽국가들과 아시아의 나라들은 즉각적으로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 모든 나라가 다 적극적으로 지지한 것은 아닙니다. 자국의 실리측면에서 태도를 유보했던 나라도 있었고, 반대한 나라들도 있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가 선포되어졌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듣는 즉시 회개하고 주께로 나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자신의 태도를 유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아주 심하게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본문의 말씀도 구원으로의 위대한 초청 앞에서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를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43절과 44절에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뱃새다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시작은 '이튿날'이라고 합니다. 즉 세례요한의 두 제자였던 요한과 안드레가 예수님을 좇은 그 다음날을 말하는 것으로, 예수님은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 동네에 계셨는데 이제 갈릴리로 가시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날 예수님은 빌립이라는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나를 좇으라'는 아주 간단한 말씀 한마디를 하십니다.
우리는 요한의 제자 두 명이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그들에게 '와 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때에도 주님은 많은 말로 그들을 설득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와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어떤 경우에는 많은 말들을 필요로 할 때가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제가 여기서 '와 보라' 이렇게 한마디만 하고 강단에서 내려간다면 아마 여기에 계신 여러분들은 저를 이상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목사님이 오늘 설교를 준비하지 않으셨다"라고 생각하시든지 "한달 이상 심방을 하시더니 어떻게 되신 것이 아닐까?"라고 염려 하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말씀을 전할 때, 설교자는 많은 말들을 쏟아내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 앞에 여러분들이 설득 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설득되어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바꾸거나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많은 말을 해야 만이 설득 당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설득을 위해서 때로는 많은 말들이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으로의 초청은 많은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남편을 전도할 때 가장 어려운 문제가 무엇입니까? 교회에 수 십년동안 다닌 나보다 교회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남편들이 성경을 더 잘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일날 예배드리라고 교회입구까지 차를 태워다 주고 자신은 집으로 가 버리는 남편이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전도하기 위해 여러분이 여러분의 남편에게 성경에 대해 많은 말을 하게 될 때, 남편들이 오히려 여러분들에게 성경을 가지고 따지는 것을 경험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므로 믿지 않는 남편들은 성경을 몰라서 안 믿는 것이 아닙니다. 결단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많은 말로 설득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결단을 촉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런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빌립이 어디서 이렇게 불쑥 나타났느냐?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기록되어진 말씀처럼 빌립이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동네 출신이라면 적어도 주님으로부터 '나를 좇으라'는 말씀을 듣기 전에 이미 예수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물론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추측컨대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했을 때, 안드레는 베드로뿐 아니라 자기 동네 사람들에게도 말했을 것이고, 그 말을 들은 빌립이 예수를 만나기 위해 그곳에 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안드레와 베드로가 결단했던 그 날에 빌립도 함께 결단하지 못하고 그 다음날이 되어서야 결단하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빌립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매우 계산이 밝은 사람입니다. 즉 실리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 한 예로 자기 고향인 뱃새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주님께서 행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 날 예수님께 빌립에게 질문하기를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셨을 때 빌립은 즉시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200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대답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빌립은 계산에 밝은 사람입니다. 우리말로 표현한다면 '척하면 삼척'이고, '쿵하면 뒷마당에 호박이 떨어지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요즘은 업그레이드되어서 '삑'하면 문자메시지 오는 소리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예배시간에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떠는 사람을 보면 핸드폰을 진동으로 바꿔 놓은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 당시는 전자계산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하다 못해 주판이 있었던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은 들판에 모인 사람들의 숫자를 파악하면서 그들에게 떡으로 시장기를 해결해주려고 하면 얼마의 돈이 들는지 계산이 금방 나오는 사람입니다.
그가 뱃새다 출신이라면 그의 직업도 고기잡이 어부였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같은 고기잡이 어부 출신의 안드레나 베드로에 비한다면 그는 정확한 계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날 안드레와 베드로는 주를 따르기로 결심을 했지만 빌립은 결심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확신이 서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손익계산을 해 볼 때 뭔가 남는 게 있어야 하는데 그런 확신이 서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확신을 갖지 못한 것일까요?
그도 분명 세례요한이 외쳤던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는 요한의 외침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었을 때, 한편으로는 따르고 싶은 충동이 마음속에 일고 있었지만 예수의 외모를 보면 도저히 자신의 직업을 버리고 따를 만큼 확신이 서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런 모습을 한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인가?"하는 생각 때문에 아마도 그날 밤 무척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민은 했지만 그 어떤 결정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으로는 따르고 싶은데 그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면 도저히 따를 수 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민만 하다가 그 밤을 보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시고자 했을 때, 빌립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빌립이 그 밤에 고민을 하다가 예수님을 직접 찾아갔는지 아니면 길을 가던 중에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뭏튼 빌립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빌립을 향해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말로 그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단지 '나를 좇으라'고 결단만을 촉구하셨습니다. 왜 주님께서 그렇게 한마디만 하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전날 밤에 빌립이 많은 고민한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빌립에게 있어서 문제는 예수님에 대해 몰라서가 아닙니다. 결단이 문제입니다. 따르고자 하는 결단, 이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주위를 한번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전도하고자 하는 대상 중에 예수님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예수님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여러분의 남편이나 가족이 예수에 대해 몰라서 안 믿는 것이 아닙니다. 결단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단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계산 때문입니다. 예수 믿으면 불편한 것이 많아집니다.
첫째는 좋아하는 술, 담배끊어야 합니다. 특히 예수를 처음 믿게 되는 남자들의 경우 이 문제가 가장 고민되는 문제입니다. 그런가하면 둘째는 주일이면 꼬박 꼬박 교회에 출석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낚시도 못 가고, 등산도 가기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행사가 주일과 겹쳐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열심히 벌어서 교회에 다 갖다 바치는 것 같습니다. 십일조다, 감사헌금이다, 거기다가 학교 건립헌금이다. 회사에서도 이리저리 떼고 나면 월급이라고 쥐꼬리만큼 받는데, 거기에다가 교회에 헌금한다고 이리저리 떼고 나면 생활에 여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각자의 심령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진리에 대한 갈망이 모두에게 있습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처해있는 현실에서 계산을 해보면 도저히 손익계산이 되지 않습니다.
아직까지는 내가 젊기 때문에 죽음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여깁니다. 진리도 좋지만 먹고 사는게 더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자신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만약 지금의 상태에서 예수를 좇게 된다면 남는 게 없을 것 같습니다. 손해만 보지 이윤을 남기는 장사는 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결단을 하지 못하거나 그것을 미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결심을 촉구하는 예수님의 음성 앞에 빌립은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빌립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자신의 계산으로는 도저히 앞으로 있게 될 일에 대한 결과에 대해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그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좇으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날은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빌립도 그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똑같이 같은 길을 가고 있는데 빌립은 혼자였습니다. 어쩌면 이곳에 올 땐 같은 고향출신인 안드레와 베드로와 함께 왔는지 모릅니다.
물론 성경은 안드레가 그의 형제 베드로에게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한 것으로만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추측은 섣부른 추측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같은 고향출신의 빌립이 이곳에 오게 되었다면 적어도 이들이 예수를 만나러 갈 때 함께 가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곳에 올 땐 함께 왔는데 갈릴리로 갈 땐 혼자 그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자신을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이제 그 혼자 가는 길에 내가 동반자가 되어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나에게 맡기고 내 뒤를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고민을 했을 터이니 그 고민을 접어두고 나를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빌립은 이 말씀이 단순히 자신의 고기잡이 인생을 책임져 주시겠다는 뜻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요한으로부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생의 문제 앞에서 우리의 노력이나 힘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죄의 문제입니다.
그 문제를 책임져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은 혼자 가는 그 길에 대한 외로움을 이 한마디로 떨쳐 버릴 수 있었습니다. 아니 지금까지 계산상 맞지 않았던 부분이 이 한마디로 다 해결되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하고도 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노력이나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 죄의 문제에 대해 더 이상 머뭇거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나를 좇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고민하지 말고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술이나 담배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낚시나 등산정도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드린 얼마간의 헌금으로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빌립이 구원의 초청에 응답한 후, 제일 먼저 무엇을 했습니까? 그도 안드레와 똑같이 한 사람을 발견하고 그를 예수님께로 데려가게 됩니다. 45절에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했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먼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확신없이 전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빌립은 즉시 나다나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예수님을 소개하려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확신이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빌립의 말 중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확신에 차 있었다면 예수님을 나다나엘에게 소개할 때, 왜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에 예언되어진 그분이 바로 자신들의 곁에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다나엘에게는 빌미를 제공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을 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생각 나는대로 하면 안됩니다. 자신의 말이 상대방에게 어떤 생각을 갖게 만들 것인지 다시 한번 곱씹을 필요가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4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 대해 별로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 못한 듯 합니다. 왜냐하면 나사렛이라는 동네가 사람들에게 평판이 별로 좋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빌립이 모세가 율법에 기록한 사람은 만났는데 그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말했으니 그 말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리가 없습니다. 저도 안산으로 오기 전 안산과 인접해 있는 '화성시'에 대해 좋지 않는 선입견이 있었습니다. 어디 저뿐이겠습니까? '화성시'를 생각하면 떠 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연쇄살인사건'입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 아직도 이 연쇄살인 사건은 해결되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처음 그곳을 지나는 분들에게 이곳이 '화성'이라고 하면 뒤 따라 나오는 말씀이 '연쇄살인사건'이 있었던 곳이냐?고 묻습니다.
우리교회도 '화성시'에서 나오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죄송한 얘기지만 화성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나사렛을 생각할 때 그랬습니다. 물론 우리가 '화성시'에 대해 좋지 않은 느낌을 갖고 있는 것보다 나다나엘이 나사렛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것이 더 심할 것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빌립이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가 모세의 율법에 기록되어진 그분이라고 했으니 좋게 받아들일 리 없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나사렛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은 도저히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기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교회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로마 카톨릭에 대해서는 상당히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반면 개신교에 대해서만큼은 상당히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심지어 카톨릭으로 개종을 하겠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된데 대해서는 한국교회의 반성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가진 선입견 때문에 모든 것을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마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말했던 나다나엘처럼 그런 편견이나 선입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태도는 분명 잘못된 태도입니다.
그럴 때 빌립은 어떻게 행동을 합니까? 46절 하반절에 보면 '와 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누가 누구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요한의 두 제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빌립은 그 말을 그대로 인용해서 나다나엘에게 말했습니다. 결국 나다나엘은 예수를 만난 적이 없으면서 예수에 대해 판단을 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정확한 정보를 얻기 전까지 남을 판단하거나 비판하는 일을 하면 안됩니다. 물론 정확한 정보를 얻었다해도 판단하는 일은 하나님께만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 있는 떠도는 소문이나 부풀려진 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있는지 모릅니다. 눈으로 보고 확인하기 전까지는 상대방에 대해 함부로 말하거나 떠도는 소문과 들리는 얘기만 가지고 판단하는 일을 하면 안됩니다. 특히 교회라는 곳이 소문이나 유언비어가 꼬리에 꼬리를 물어 한도, 끝도 없이 부풀려지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적어도 성숙된 그리스도인들은 근거 없는 말을 함부로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나다나엘의 반응을 지켜보시던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47절에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가리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셨을 뿐 아니라 그에게는 간사함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칭찬입니까? 책망입니까? 당연히 칭찬의 말입니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말했지만 주님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며 간사함이 없는 자'라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그를 향해 참 이스라엘 사람이며 간사함이 없는 자라고 하신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간사한 것이 없다는 말은 교활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비록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말했지만 그는 교활하거나 속임수를 쓰는 사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동안 가장 많이 책망했던 사람이 누굽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책망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거짓되었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척, 거룩한 척, 그렇게 사람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경건의 모양은 있었는지 몰라도 결코 경건하지 않았습니다. 거룩한 모양은 있었는지 모르지만 거룩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포장된 모습이었을 뿐, 본 내용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나다나엘은 그렇게 자신을 포장하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조금도 자신을 감추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그 모습을 주님께서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참 이스라엘사람이며 간사함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주님 앞에 나올 때 꾸밈이 없이 나와야 합니다. 특히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정직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에 대해서만큼은 얼마나 관대한지 모릅니다. 같은 죄를 다른 사람이 지으면 '죽일 놈'이 되지만, 내가 지으면 아무것도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다른 사람이 속도를 위반하면 '과속'이고 내가 위반하면 '운전솜씨'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행위는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간사한 행위입니다.
만약 나다나엘이 빌립과 같이 계산이 빠르고 덜 순진한 사람이었다면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정도의 칭찬을 들었을 때 감사의 말을 남기고 자신의 진짜 생각은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다나엘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말했습니다. 48절에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그는 예수께서 이것을 어떻게 하셨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적어도 자신은 자기 마음속에 뭔가를 숨겨놓고 가식되게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임을 이 사람이 알고 있으니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더욱 놀라운 말씀을 그에게 들려주십니다. 48절 하반절에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무엇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자신만이 알고 있는 일을 예수께서 다 알고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때 그의 입에서 터져나온 고백이 무엇입니까? 49절에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무화과 나무아래 있었다 할지라도 그의 행동이 가리워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사람들에게는 가려지고, 사람들은 몰라도 예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내가 한 주간 동안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행동을 했는지 어떤 생각 속에서 살아왔는지 오늘 이 자리에 함께 앉아 있는 다른 분들은 모릅니다. 심지어 여기에 있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은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우리의 행동을 가릴 수 없습니다. 오랜 옛날 아담이 죄를 짓고 무화과나무 뒤에 숨었을 때도 하나님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무슨 잘못을 하고 그곳에 숨어 있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죄를 지었을 때 뿐만은 아닙니다. 내가 괴롭고 방황할 때도 나의 삶에 대해 무관심하게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임금이시기 때문입니다. 왕은 백성들의 삶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 없다면 그는 이미 왕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사람입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행한 모든 일을 알고 계신다는 예수님 앞에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이 누굽니까? 저와 여러분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왕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계십니까? 나다나엘이 이렇게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50절과 51절에 "내가 너를 무화과 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물론 이 말씀은 야곱의 벧엘 꿈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서 도망을 치던 중 벧엘 광야에서 잠을 자다가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 꿈에 하늘이 열리고 큰 사닥다리가 하늘에 닿았는데 그 위를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꿈을 꾸었는데 예수님은 지금 그 야곱의 꿈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하늘과 땅 사이 즉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케 하는 그 영광스러운 일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고 화목하게 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우리가 하나님과 사귈만한 아무런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가 선합니까? 아니면 우리가 착합니까? 아니면 우리가 위대한 일을 했습니까? 우리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중간다리역할을 하셨습니다. 인자는 하늘과 땅 사이를 연결하는 교리이며 하나님과 사람사이를 연합하는 띠였습니다. 그분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어지게 된 것입니다. 아니 그분 때문에 우리가 궁극적으로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먹고사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취미생활을 하지 못하게 될까봐 주저할 만큼 값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가 즐기는 것을 못하게 될까봐 걱정하게 될 만큼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계산에 밝았던 빌립도 메시야를 만났을 때 계산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의 인생에 이보다 더 큰 수익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나다나엘도 주께로 나아가는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을 주님께로 나아오게 하는데 있어서 주저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습니까?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 그 사실을 믿고 인정한다면 빌립과 같이 나다나엘과 같이 그분께 나오기를 주저하지 않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