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자 2002-04-24 14:26:44 read : 3077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 04. 21 // 요 21 :1-14
<목회기도>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오늘 숨쉬며 교회에 나와 예배드릴 수 있음에 감사 드립니다.
지난주 비행기 사고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번 사고로 우리 기둥교회에도
사랑하는 가족이 목숨을 잃어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슬픔을 당한 가족들에게 평안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매 주 맞는 주일이지만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은혜를 깨닫는 오늘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귀한 시간 군대에, 외국에 나가 있는 성도들을 기억하여 주시고
특별히 병상에 누운 환자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루 속히 우리와 함께 복된 자리에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악한 마귀 틈타지 않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여 주실 줄로 믿사옵고
존귀하신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날씨가 따뜻해지고 경치가 좋아지면 예배실의 자리가 조금씩 비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가 오면 자리가 꽉 찹니다. 날씨와 신앙이 무슨 상관이 있는 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예배 드리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람들이 보통 일반적으로 하는 두 가지 인사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안녕하세요?"라는 인사이고 또 하나는 "식사하셨어요?"입니다.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는 감정이나 문화, 사회적인 조건에 따라 개념이 다릅니다. 그래서 "안녕하세요"라는 말은 같은 문화, 같은 풍습, 같은 조건에 있는 사람들간에만 할 수 있는 인사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안녕"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안녕"이라는 개념이 다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기들의 평안을 지키기 위해 폭탄 테러를 하는 것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평안을 지키기 위해 보복을 하는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과 이라크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안"과 미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안이 다르고 우리가 생각하는 평안과 북한에서 생각하는 "평안"의 개념이 다릅니다. "평안"이라는 것은 어떤 점에서 보면 힘의 논리에 의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힘이 센 사람이 "너 잔소리 말고 내 말 들어. 그게 편해"라고 약자에게 복종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인사가 "식사하셨습니까?"입니다. 이것은 일용할 양식이 있었는지를 묻는 인간적인 인사라고 생각됩니다. 여러분! 옆의 분들에게 "아침 드셨습니까? 식사하셨습니까?"라고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늦게 일어나서 못 먹은 사람은 배고파도 자기가 늦게 일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고, 다이어트 하는 사람은 목적이 있어 먹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배고프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못 드신 분은 예배 후에 2층 식당에 가서 식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전도사님들이나 목사님들께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양식을 나누어 먹는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살던 곳으로
예수님이 처음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예수님의 부름에 따른 제자들은 자신의 삶을 모두 바꾸었습니다. <삶의 현장>도, <인생 살아가는 방법>까지도 예수님 때문에 바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의 인생을 맡았던 예수님, 제자들의 모든 꿈을 이루어 주셔야 할 예수님께서 붙잡히고, 감옥에 갇히고, 재판을 받고,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3년이나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께 희망을 걸고 있었던 그들의 소망은 산산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모든 것이 끝난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속에 떨고 있었습니다. 예수, 처형당한 중죄인, 사형수 예수와 어울려 다녔다는 이유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는 염려로 제자들은 벌벌 떨었습니다.
이같이, 무서워 벌벌 떨던 제자들 앞에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셨던 그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제자들과 함께 계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심란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은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다시 한번 주님을 따라 다녀야 할 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천국에 대한 소식을 전하고 예수님께서 무엇인가 이루실 것을 기대해야 하는 지, 아니면 모두 접어 두고 옛 생활로 돌아가야 하는 지에 대한 갈등을 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분명히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을 보았습니다요 20: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불안과 공포의 사건이 있었던 예루살렘을 등지고 갈릴리 호수로, 그들이 살던 곳으로, 그들이 성장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고기가 있느냐?
언제나 그랬듯이 성질이 급한 베드로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3절에 보면 베드로는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말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에이, 고기나 잡으러 가자!'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따라 나섰습니다.
3년 동안이나 방치해 두었던 배를 갈릴리 호수에 띄우고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 고기가 마른 것도 아니고, 고기가 어디에 있는 지, 어떻게 잡는 것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3년 동안 쉬었다고 해도 고기 잡는 것을 생업으로 하던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주 이른 아침(Early in the morning, ~)이라 사람도 쉽게 분간키 어려운 그때(요21:4) 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보슈 친구들, 고기 좀 잡았소?" 라고 묻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문과 영문 성경에는 "친구들 고기 좀 잡았소"라고 되어 있습니다.
("Friends, haven't you any fish?" - NIV)
"아니오, 못 잡았습니다. 헛탕이요.",
"그렇다면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려보시오. 고기를 잡을 것이요".
낯모르는 사람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내리라고 하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제자들은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때, 주께서 사랑하셨던 제자 한 사람이 "주시다, 저 분이 예수님이시다."라고 했습니다. 너무나도 깜짝 놀란 베드로(눅5:1~14)는 '주시라'는 말에 배에서 뛰어 내렸습니다. 몇 년 전 비슷한 경험을 했던 베드로는 비로소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실감이 났고 물로 뛰어 내려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새벽에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놀라기도 했을 것이고, 반갑기도 했을 것이고, 부끄럽기도 했을 것이고, 감사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9절, 12절, 13절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이 고기를 못잡고 헛탕치고 있을 때 벌써 제 자들을 위해 식사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숯불을 피우셨고(a fire of burning coals) 생선과 빵을 구우셨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떡을 구웠다고 했는데 유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떡을 먹지 않습니다. <빵>을 <떡>이라고 번역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원조"<元祖: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한 사람>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속초에 가면 순두부 가게가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 저기 모두 <원조 순두부집, 원조 할머니집, 진짜 원조, 원조의 원조…>라는 간판이 걸려 있는데 도대체 어디를 가야 할 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숯불구이>의 원조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숯불구이의 원조는 "예수님"이신 것 같습니다.
저는 숯불이라는 표현이 정확히 맞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여러 번역성경과 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영어로 "coals"라는 단어 외에는 특별한 설명이 없었고, 우리말로 "숯불"이라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숯불인지는 모르겠으나 쉽게 불을 피울 수 있는 숯같은 것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나시려고 미리 빵과 생선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막 제자들이 잡은 153마리 싱싱한 생선 중에서 몇 마리 가져오라고 하셔서(10절) 넉넉한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찾아가신 예수님
본문의 내용을 다시 살펴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 가셨습니다.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 처럼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간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 편에서 먼저 모든 사람들을 부르시고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되신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셨고, 하나님이 내신 길이신 예수 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택함 받은 사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말을 "소명(召命, calling)"이라고 합니다.
소명은 두 가지로 설명됩니다.
≫ 하나는 <일반적인 소명>입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요3:16), 다 내게로 오라(마11:28)"고 부르셨습니다. 그 부름에 응한 사람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입니다(마22:14). 그리고 택함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요6:28~29).
≫ 또 하나는 <특별한 소명>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목회자로의 부르심입니다. 성직자로 부르신 것을 말합니다. 여기 신학생, 전도사, 목사님들, 목회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성직자로 부르신 것을 드러내는 증거 몇 가지가 있습니다.
• 첫째로, <부르심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 둘째로, <영혼 구원에 대한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이유는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받게 하기 위해 부르신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쓰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 목회자들 가운데 "에이, 교인이 많아 뭘해, 30~40명, 100명 정도 모이면 되지, 우리끼리 재미있게 잘 하면 되지. 귀찮게 전도는 왜 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목회자는 소명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치 않기를 원하시고, 하루가 천년 같이, 천년이 하루 같이 기다리며 다 회개하고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전도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소명 받은 사람은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이 있어 전도에 힘을 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 셋째로, <부르심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나 같은 사람을 부르셨으니 감사하지, 나 같은 사람을 목회자로 세우시니 감사하지."라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롬11:13).
• 넷째로, <진정한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감사와 기쁨이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소명 받지 못한 것입니다(행16:19~34).
• 다섯째로, <갚으시는 하나님>을 믿고 소망으로 일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계22:12).
사람에게 인정 받고 칭찬 받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일한 대로 갚으신다는 것을 믿고 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 소명은 단지 개인적인 생각이나 체험, 또는 "난 하나님이 부르셨어"라는 자기 확신만으로 입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 소명은 "저 사람이 목회를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목회자의 목양적인 확인이 필요합니다.
- 소명은 "저 사람은 틀림없이 목회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교회적인 인정과 확인이 필요합니다.
화란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라는 사람이 말한 것처럼 "소명은 재능에 의하여 확인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으면 그 사람이 일할 수 있는 재능과 달란트를 하나님이 주십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소명 받은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목사는 이것 저것 해 보다 마지막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에는 정당한 교회적인 절차를 밟지 않고 바른 신학교육과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목사라고 하는 사람이 있고, 또한 그런 엉터리 목사를 만들어 내는 집단이 많아져서 걱정입니다.
우리가 속한 교단의 경우에는 대학 4년, 대학원 2년(신학대학 졸업자), 3년(일반대학 졸업자) 그리고 목회 3년을 하고 3년 동안 시험보고 논문 쓰고 과정 심사 및 자격 심사를 거쳐야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목회자이든지 아니든지 오늘 예배 드리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먼저 베푸신 은혜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방송 설교를 들었던지, 전도지를 받았던지, 친구를 통해서든지, 부모를 통해서든지 우리의 가슴속의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신 줄로 믿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사람은 마음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시간 인터넷에 연결하여 예배에 동참하시는 분이나, 비디오 테이프로, 카셋테잎으로 이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마음에 모셔 들일 때 천국 백성이 되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용서하시고 받아 주시는 예수님
- 예수님은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분이십니다.
밥을 같이 먹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덮어 준다는 것이며 관계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아이가 속 썩이면 엄마가 하는 말이 "아이구 저걸~, 내가 미쳤지~"라고 하다가도 밥을 해 놓고 "밥 먹어!"라고 소리 지릅니다. 그 말은 자식으로 받아 들인다는 뜻입니다. 밥 먹으라고 하면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싸워서 "아유, 내가 눈이 잘못됐지. 저 인간하고 사니... 속았지, 속았지"하다가도 밥 먹을 때가 되어 밥해 놓고 "밥 먹어요"라고 한다면 그 말로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밥은 꼭 드시기 바랍니다. 자식이나 남편이 미워도 밥은 먹여야 합니다. 그래야 해결됩니다. "밥 먹자'는 소리가 없으면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저도 누가 밥먹자고 하면 좋습니다. 지난 번에 어떤 권사님이 부목사님들과 식사하라고 봉투를 주셨는데 목사님들이 바빠서 시간을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밥 먹은 것으로 하자"하고 봉투는 제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골에서 목회하는 전도사님이 오셔서 우리는 밥 먹은 것으로 하고 그 봉투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밥먹자고 하는 사이는 괜찮은 사이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시고 "밥 먹자"고 하셨습니다(12절). "Come and have breakfast."(NIV)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밥 먹자"고 할 수 있는 때입니까? 예수님이 붙잡히셨을 때 제자들이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모두 도망갔고, 예수님 가까이에서 따라 다녔던 베드로 조차도 예수님을 3번씩이나 모른다고 했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보고도 전부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그런데도 모든 것을 덮어 주시고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고 "밥 먹자"고 하셨습니다. 밤새 고기를 잡던 제자들이 헛탕치고 있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숯불을 피우시고 생선을 굽고 빵을 구워 식사준비를 하시고 "밥 먹자"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인간적인 요청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 왜 도망갔냐? 왜 나를 모른다고 했느냐, 왜 여기 와서 고기를 잡느냐?"라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와서 조반을 먹어라"고 했지만, 쉽게 번역하면 "밥 먹자"고 하신 것입니다. 다 덮어 주신 것입니다. 묻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 이사야 43장 25절에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용서하시고 덮으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서로 용서하고 덮어야 합니다. 그런데 용서한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모른 척 해주는 것, 속 썩이고 가슴 아프게 한 사람을 용서하고 덮어 주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쉬운 것이라면 성경에 용서하라고 하셨겠습니까?
주기도문 가운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기회를 주시는 예수님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다시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요21:1~14) 뒤를 이어 계속해서 15절부터 17절까지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랑을 묻고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그대로 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실현되는 일을 위해 우리를 쓰시고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골로새서 3장 17절에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골3:17)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말을 해도, 일을 해도 예수님 이름으로 한다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비록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쓰십니다. 나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습니다."
말에나 일에나 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을 할 만한 능력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필요한 은혜를 때를 따라 허락하십니다. 스스로 "나는 안돼. 나는 틀렸어"라고 자기 무덤을 파서는 안됩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 속에 남편을 향한, 아내를 향한, 이웃을 향한 미움의 마음이 있습니까? 여러분 가슴 속에 담고 있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저는 오래 전에 책에서 읽은 내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Veterans' Day(미국 현충일)에 뉴욕에서 월남 참전군인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월남 사람이 참석하여 전쟁의 비극을 얘기하는 중에 한 실화를 소개하였습니다.
한 젊은 남자가 비행기 폭격 이후에 집에 가 봤더니 자기 아내는 이미 폭격에 죽었습니다. 죽은 아내를 확인한 남자는 어린 아들을 찾아 헤매는데 아들이 죽었다는 흔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방 한쪽에 보니 작은 해골이 놓여 있었는데 그 뼈를 자기 아들이라고 생각한 남자는 그 뼈를 싸서 품에 안고 다녔습니다. 행상을 하는 이 사람은 가끔 정신병자처럼 뼈를 펼쳐 놓고 울었습니다. 그러다 이 남자는 정신이상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 잠이 들었는데 누가 문을 두들겼습니다. "아버지, 저입니다. 당신의 아들입니다."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나쁜 놈이 나를 놀려… 죽은 내 아들까지 들먹이다니!" 화가 난 그는 술병이니 잔이니 닥치는 대로 문을 향하여 던지며 소리질렀습니다. 찾아온 청년은 자기가 오랫동안 아버지를 찾아다닌 것을 설명하려고 애썼지만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아버지의 상태를 설명하고 청년에게 아버지를 떠나기를 요청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그는 자기의 진짜 아들이 돌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폭격 맞아 죽지 않았는데도 남의 뼈를 끌어안고 자기의 아들로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후에 그 남자는 뼈를 끌어 안은 채 병들어 거리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는 과거라는 뼈다귀를 품에 안고 다녔습니다. 그는 잘못된 뼈다귀를 안고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는 살아 있는 아들을 만났으나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무덤을 자기가 파고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를 죽여가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가슴 속에 지금 담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끌어안고 살아야 합니까? 여러분이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감정, 증오를 그대로 끌어안고 사시렵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찬양하는 중에, 기도하는 중에 찾아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지난날의 허물과 죄를 다 용서하시고 "밥 먹자, 내가 너희들의 죄를 묻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오늘도 또 한번의 기회를 주십니다. 지금 끌어안고, 가슴 속에 담아두고 머리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 하나님께 맡기고 말에나 일에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승리의 삶이 되십시오. 승리자가 되십시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허물많은 제자들에게 가셔서 "밥 먹자"고 부르시고
그들의 모든 허물을 덮어 주셨던 주님,
오늘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지금 끌어안고 있는 잘못된 것들을 다 내던지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붙잡고
말에나 일에나 예수 이름으로 하며
범사에 승리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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